이유종

이유종 기자

동아일보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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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지면과 온라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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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100%
  • [이유종의 오비추어리]자연으로 은퇴한 아웃도어 창업주

    세계적인 아웃도어 의류 및 장비 브랜드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의 공동 창업주 더글라스 톰킨스가 2015년 12월 8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톰킨스는 칠레 남부 파타고니아의 헤네랄카레라호에서 카약(에스키모인의 소형 배)을 타다 강풍을 맞아 배가 뒤집혔고 물에 빠진 뒤 구조됐으나 저체온증으로 끝내 숨졌다. 톰킨스는 첫 번째 아내인 수지와 함께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노스페이스와 의류 브랜드 에스프리(Esprit)를 세워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여생을 자연보호에 헌신한 자선사업가다. 두 번째 아내 크리스틴 맥디비트 톰킨스(67)는 15일 톰킨스 부부의 소유인 파타고니아 지역 땅(4080㎢, 약 12억3420평)을 칠레 정부에 기증했다. 기증 면적만 서울의 6.7배.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은 기증 받은 땅에 국립공원 3곳을 신설하고 기존 국립공원 3곳의 면적도 더 늘리기로 했다.● 산악인 출신 아웃도어 용품 사업가 톰킨스는 1943년 오하이오 주 코니어트에서 골동품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스키, 등산을 즐겼다. 청소년기에 와이오밍, 콜로라도 등의 등산을 즐겼고 17세 무렵에는 스위스 알프스산맥에서 스키를 타겠다며 돈을 모으기도 했다. 반면 학업에는 별 뜻이 없었다. 학칙 위반으로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결국 고교 졸업장조차 받지 못했다. 이후 남미 안데스산맥 등을 등반했고 돈이 떨어지자 1962년 캘리포니아 주 타호호(湖) 인근 스키 산장에 머물렀다. 그는 1963년 산악서비스 회사인 캘리포니아등산서비스를 세우며 산악 관련 일을 시작했다. 같은 해 여름 히치하이킹을 하다 첫 아내인 수지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수지는 아웃도어 의류 및 장비 관련 사업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톰킨스 부부는 1964년 은행에서 5000달러를 빌려 샌프란시스코 인근 노스비치에 우편으로 주문을 받고 스키, 등산 장비 등을 판매하는 ‘노스페이스’라는 가게를 열었다. 노스페이스는 당시 시장에는 별로 없었던 좋은 품질의 침낭, 등산가방, 텐트를 내놓았다. 노스페이스는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였다. 톰킨스는 기존 텐트의 단점을 모두 상쇄하는 새로운 형태의 텐트를 고안했다. 당시 제작된 텐트 중앙에는 막대가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공간 활용이 별로 좋지 않았다. 톰킨스는 휘는 막대를 활용해 중앙에 따로 막대를 설치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돔과 비슷한 반구형의 텐트를 만들어 바람이 쉽게 비껴 갈 수 있도록 했다. 텐트는 악조건의 기상상황에서도 튼튼히 버틸 수 있었다. 노스페이스의 텐트는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경쟁기업들이 짝퉁을 제작할 정도였다. 노스페이스는 1966년 첫 오프라인 매장을 열며 성장을 이어갔지만 톰킨스는 1968년 지분 대부분을 5만 달러에 케네스 합 클롭에게 넘기고 회사 경영에서 사실상 손을 뗐다. 대신 같은 해 아내 수지가 친구와 시작한 여성 의류사업(에스프리)에 뛰어들었다. 에스프리는 1971년 법인을 만들었고 1978년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톰킨스는 자신이 창업주인 노스페이스, 에스프리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면서 1980년대 말까지 막대한 재산을 손에 쥐었다. ● 서울의 13배 면적을 매입해 생태지역 조성 1980년대 말 톰킨스는 가정, 사업 모두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1989년 아내 수지와 이혼하고 남은 노스페이스, 에스프리 주식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대신 20대 시절에 찾았던 남미 파타고니아의 원시림에 주목했다. 파타고니아는 남위 38도 이남 지역으로 안데스산지, 파타고니아고원 등을 포괄하는 칠레, 아르헨티나에 걸친 방대한 지역이다. 인구는 희박하나 빙하 지형이 많아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관광객이 몰린다. 톰킨스는 여생을 파타고니아의 자연보존에 모두 걸기로 했다. 그는 1993년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크리스틴 맥디비트와 재혼하면서 생활 거점을 미국에서 칠레, 아르헨티나로 옮겼다. 톰킨스와 크리스틴은 생태계 보호에 관심이 많았다. 톰킨스는 생물다양성 보존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발디비아 일대를 여러 차례에 걸쳐 71만5000에이커(약 2893㎢)를 매입하고 푸말린공원(Pumalin Park)을 세웠다. 이후 남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환경보전기금 중 하나인 ‘컨저베이션 랜드 트러스트(Conservation Land Trust)’를 출범시키며 미국의 자선가 피터 버클리와 함께 푸말린 남부 원시림 20만8000에이커(약 841㎢)를 추가로 매입했다. 이후 칠레 정부의 도움 등으로 칠레에서 여섯 번째로 큰 자연공원인 면적 72만6000에이커(약 2938㎢)의 코르코바도국립공원을 출범시켰다. 톰킨스가 사들인 지역은 빽빽한 숲과 풍부한 수자원, 비옥한 토질 때문에 목재기업, 전력회사, 농업인이 탐내는 곳이다. 그는 ‘투자 가치가 높은 땅’을 확보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만들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원시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했으나 경작, 개발은 단호하게 불허했다. 2000년 아내 크리스틴이 만든 ‘파타고니아보호재단(Conservacion Patagonica)’은 아르헨티나 남부 이베라 습지의 16만5000에이커(약 667㎢)를 매입해 아르헨티나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기증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지역을 ‘몽 레옹 국립공원(Monte Leon National Park)’으로 출범시켰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인근 지역을 더해 173만에이커(eir 7000㎢)에 이르는 거대한 국립공원(그레이트이베라공원)을 추진 중이다. 이와 별도로 파타고니아보호재단은 칠레 아이센 지역의 차카부코계곡 일대 17만4500에이커(약 706㎢)를 매입해 65만에이커(약 2630㎢) 규모의 파타고니아국립공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쉽지 않았던 오해 극복 톰킨스 부부는 현재까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산림 약 200만 에이커(약 8093㎢)를 매입했다. 서울면적의 13배가 족히 넘는 규모다. 그리고 대부분을 해당 국가에 기증했다. 활동 초창기 칠레,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톰킨스 부부를 환영하지 않았다. 미국인 갑부의 자연보호 활동에 어떤 꼼수가 있을 것이라고 예단했다. 톰킨스가 원시림의 보존가치를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보존만을 조건으로 해당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톰킨스는 생전에 “우리는 좋은 일을 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석지는 않다”며 “정치적 논란을 피하고 싶었다면 자연보호사업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톰킨스의 거대한 유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유무형 자산은 더 커지고 있다.이유종기자 pen@donga.com}

    • 201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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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희정 “‘정권교체 카드’ 입증해 대선 후보 되겠다”

    대선 주자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더불어)민주당 당원들은 새로운 민주당을 원한다. 확실한 정권 교체 카드를 원한다. 저의 도전이 가장 강한 정권 교체 카드라는 확신만 드릴 수 있다면 (후보 선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안 지사는 21일 방송된 채널A ‘외부자들’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선출 전략을 묻는 질문에 이 같이 밝혔다. 그는 “저는 ‘우클릭’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민주당을 향해 도전한다”며 “그렇게 해야 오랫동안 민주당이 지지를 받고 책임 있는 집권 주도세력이 될 것이다. 이런 확실한 미래비전을 보여 드린다면 제가 이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안 지사는 자유한국당을 포함하는 여야의 대연정 구상과 관련 “자유한국당과 대연정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국회선진화법을 뛰어넘을, 234명의 국회의원들이 국가 개혁 과제를 위해 다수의 힘을 모을 수 있다면 대연정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이유종기자 pen@donga.com}

    • 201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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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X세대’부터 ‘흙수저’까지…신어로 본 한국사회

    #1.‘신어(新語)’로 본 한국사회-사회 불만 표현 수위 높아졌다#2.“방학이 되면 국내파와 해외파 오렌지족이 어울려 사치 퇴폐 행각을 일삼는다. (중략) 종전엔 식당이나 록카페에서 파트너를 물색했는데, 요즘엔 그랜저 승용차 등을 몰고 가다 길가는 여학생 옆에 세워놓고 ‘야, 타라’ 하며….”(동아일보 1994년 1월 22일자)“1990년대 초반 오렌지족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던 이유는 당시 급격한 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비추는 ‘사회적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부 교수#3.사람·세대를 지칭하는 신어(新語)가 한 해 수백 개씩 쏟아집니다. 동아일보가 당대 혹은 지금까지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말을 중심으로 최근 25년(1992~2016년) 동안 시대를 따라 흐른 신어 211개를 정리했습니다. 오렌지족 이후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거울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4.1994년 국내에 ‘X세대’가 등장했습니다. 한 화려한 TV 광고에서 세련된 이미지로 포장된 X세대는 통통 튀는 ‘신세대’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정착했죠. 정치적 신인류라 할 ‘386세대’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죠.“가난 탈출이나 군사독재가 시대적 화두였던 이전과 달리 1990년대는 경제적 안정과 민주화가 함께 발흥한 시기다. 본격적으로 소비문화가 발흥한 시점에 두 신어(오렌지족, X세대)가 유행한 건 우연이 아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5. 신어들을 보면 1990년대는 낙관과 비관이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던 시기였습니다.긍정 혹은 가치중립적 신어(15개)와 부정적 신어(16개)의 비율이 거의 동일했죠.하지만 1997년경 한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신어 ‘왕따’도 탄생했습니다. 왕따는 점차 과열돼 가던 경쟁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죠.#6.21세기 초반 신어 역시 동전의 양면처럼 빛과 그림자가 공존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세대’가 확산됐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추구하는 ‘웰빙족’이 인기를 끌었죠. 반면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6세에 회사 다니면 도둑) ‘이태백’(20세 태반이 백수) 등 우울한 세태를 반영한 신어도 많았습니다. ‘얼짱’ ‘몸짱’ ‘꿀벅지’ ‘베이글녀’ 등은 한국적 외모지상주의를 그대로 반영했죠.#7.최근 신어들은 파괴적인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라도 ‘성형미녀’가 아닌 ‘성괴’(성형괴물)로 더 파괴적이죠. 부모 신세를 지는 젊은이들을 부른 ‘캥거루족’(1990년대 후반) ‘연어족’도 ‘빨대족’ ‘등쳐족’(부모 등쳐먹는 족속) 등 공격적으로 변모했습니다.계층·계급적 불만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태백’ ‘88만원 세대’ ‘n포세대’ ‘헬조선 세대’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으로 신어의 의미는 갈수록 더 과격해지죠.#8.“신어는 당대의 사회 구성원이 말하고자 하는 가치와 방식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국 사회에서 부정의 가치가 점점 노골적으로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길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입니다.앞으로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신어가 쏟아지는 시대가 도래 할 수 있을까요?원본: 정양환·유원모·이지훈 기자기획·제작: 이유종 기자·신슬기 인턴}

    • 201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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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 clip] ‘외부자들’ 전여옥, ‘황교안의 대선 불출마’ 예언 적중

    전여옥 전 새누리당 의원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전 전 의원은 14일 방송된 채널A ‘외부자들’에서 황 권한대행의 대선출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이 같이 밝혔다. 전 전 의원은 “(황 권한대행은) 지지율이 매우 낮아졌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서) ‘8대 0’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황 권한대행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예상했다. 이어 “(만일) 선거 관리자 역할도 하지 않고 출마하면 격렬한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전 의원의 예언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황 권한대행은 15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대선 불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전 전 의원은 홍준표 경남 도지사의 대선 출마 가능성과 관련해 “홍 지사는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슈를 선점할 능력을 가졌다. 황 권한대행 보다 홍 지사가 (대선 후보로) 나오면 야권에서 긴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20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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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종의 오비추어리] ‘재난 관측소’ 역할 하는 와플하우스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와플하우스’의 공동 창업주 조지프 로저스가 3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와플하우스는 조지아 주 등 25개 주, 2100개 매장 중 80%를 본사가 직접 운영한다. 직원만 3만 명이 넘는다. 연 매출은 약 10억 달러(약 1조1500억 원)에 미국에서 47번째로 규모가 큰 체인이다. 친소비자 성향의 지역 밀착형 경영으로 허리케인, 토네이도 등 대형 재해가 발생하면 관측소 역할마저 담당한다.● 부동산 거래로 맺은 ‘인연’ 로저스는 1919년 테네시 주 잭슨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공항 시절 일자리를 잃었다. 로저스는 고교를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 육군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종전 이후 그는 1947년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토들하우스’에서 요리사로 변신했다. 토들하우스는 멤피스에 거점을 둔 프랜차이즈 식당이었다. 그는 1949년 지역 매니저로 승진했다. 로저스는 같은 해 조지아 주 애틀란타의 외곽인 애번데일 에스테이츠에서 주택을 변호사인 톰 포크너에게 구입했다. 당시에는 단순한 집 구매자와 매도자의 만남은 운명을 결정했다. 로저스는 맥도날드 등과 달리 테이블서비스를 제공하는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을 구상했다. 포크너에게 사업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동업을 제안했다. 로저스가 주방을 책임지고 포크너가 경영을 맡았다. 1955년 노동절 애번데일 에스테이츠에 와플하우스의 첫 매장이 문을 열었다. 포크너는 초기 16가지 메뉴 중 가장 수익이 큰 와플의 이름을 따 상호를 와플하우스로 정했다. 와플은 특성상 쉽게 부서지기 때문에 테이크아웃 보다는 식당에서 먹는 게 더 편했다. 로저스와 포크너는 첫 매장을 연 뒤에도 각자의 일에 매달렸다. 로저스는 토들하우스에서 계속 일했고 포크너는 부동산중개인을 했다. 하지만 1960년 토들하우스의 경영이 어려워졌고 이들의 4호 매장까지 문을 열자 프랜차이즈 사업에도 진출하며 와플파우스에만 매달리기 시작했다. 1970년대까지 매장은 400개로 늘었고 1990년대 1000호 점을 냈다. 와플하우스는 미국 외식업계의 계란 소비량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한살 차이의 로저스와 포크너는 2010년대 초반까지도 매장에 종종 나와 사업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이들은 반세기 이상 동업자의 관계를 이어오며 우애를 다졌다.● 재난관측소 역할까지 담당 와플하우스의 경쟁 기업인 ‘아이홉’은 세월을 거치며 고객 취향에 따라 메뉴를 크게 바꿨다. 그러나 와플하우스는 첫 메뉴를 현재까지 고수하며 브랜드 관리에 충실하고 있다. 주로 미국 남부지역의 도로변에 자리잡은 와플하우스 매장들은 한결같이 커다란 노랑색 간판을 내걸고 옛 향수를 자극한다. 매장에는 흘러간 팝을 들을 수 있는 주크박스(동전을 넣으면 유행하는 노래를 들려주는 기계)까지 설치돼 있다. 1996년 개봉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틴컵’에서는 배우들이 와플하우스를 ‘와플을 주 메뉴로 취급하는 임대료가 저렴한 길가에 세워진 카페’라고 입을 모을 정도다. 와플하우스는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365일 문을 닫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1960년대 남부에서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사망하는 등 흑인의 인권운동이 활발해지며 폭동도 빈번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와플하우스는 절대 문을 닫지 않았다.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들은 이런 와플하우스 한결같은 정책에 감사했다. 미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허리케인, 토네이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와플하우스 매장의 영업 여부에 따라 특정 지역의 피해 정도를 가늠하는 ‘와플하우스 지표(Wafflehouse Index)’까지 만들었다. 특히 와플하우스는 플로리다, 미시시피 등 자연재해가 잦은 남동부에 매장이 집중돼 있다. FEMA 직원들은 재해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의 와플하우스 매장에 전화를 걸어 영업 여부, 판매 메뉴 등을 확인하고 인근 지역의 피해 상황을 파악한다. 이후 피해 정도에 따라 지표를 색깔별로 구분한다. 식당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면 전기, 물이 공급되기 때문에 피해 정도가 크지 않다고 판단해 녹색 지표로 표시한다. 식당이 문을 열었지만 일부 메뉴만 판매한다면 황색 지표, 심각한 피해로 식당이 문을 닫으면 적색 지표로 설정한다. 애플하우스는 재난 대비 역할까지 맡으면서 사회공헌활동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20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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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민주주의 새 역사 쓰다

    #1.탄핵, 민주주의 새 역사 쓰다.#2.11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이정미 헌법재판소장 대행은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을 선고했습니다.#3.최순실 등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에 분노한 평범한 시민들이부패한 대통령을 단죄한 셈이죠.국민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통령을 해임했습니다.#4.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으로 임기 중 자리에서 물러난 첫 대통령의 불명예를 안았습니다.부모가 모두 총탄에 맞아 숨지는 등 불운한 생활을 했었죠.하지만 ‘보수의 아이콘’으로 화려하게 복귀했고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미르·K스포츠재단의 강제 모금 등 각종 의혹이 불거지면서 결국 탄핵을 맞았습니다.#5.박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미르재단의 모금 등과 관련해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검찰은 곧 박 전 대통령에게 소환을 통보할 것으로 보입니다.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도 강행할 수 있죠.#6.탄핵으로 정치권의 발걸음은 바빠졌습니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탄핵 인용으로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합니다.5월 초 대통령 선거가 유력합니다.각 정당들은 이전에 대통령 후보를 뽑아야 합니다.#7.그동안 광장에는 시민들이 몰렸습니다.탄핵을 주장했던 촛불 시위대와 탄핵을 반대했던 태극기 시위대가격렬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했습니다.#8.그러나 이제 우리는 탄핵 이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저성장, 북핵(北核) 등 안팎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내홍(內訌)은 우리에게 해(害)를 끼칠 뿐입니다. 본연의 업무에 더 충실해야 하는 게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신슬기 인턴}

    • 20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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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탄핵, 10일 오전 11시 선고만 남았다

    #1.탄핵, 10일 오전 11시 선고만 남았다.#2.지난해 12월 9일.국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했죠.이후 헌법재판소에 탄핵소추의결서를 접수했습니다.헌재는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를최순실 등 비선 조직의 국정 농단 등 5가지로 조정했습니다.#3.최순실, 정윤회 부부의 비선조직과 관련해선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개입 등 뒷말이 많았습니다.#4.지난해 9월 20일.한 언론은 재벌들이 출연해 만들어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최순실이 관여했다고 보도했습니다.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직접 고친다는 증언과 물증이 나왔습니다.다급해진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습니다.#5.그러나 성난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죠.지난해 10월 29일.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광화문 등에서 촛불집회를 열었습니다.매주 토요일 열린 촛불 집회는 참가자가 늘면서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죠.#6.정치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추진에 들어갔고일부 유력 정치인들은 하야를 촉구했습니다.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 하야에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습니다.지난해 11월 20일.검찰은 최순실 등을 기소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공범이라고 밝혔습니다.검사 출신 박영수 변호사는 11월 30일 특별검사로 임명돼 ‘최순실 게이트’ 수사에 착수했습니다.#7.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3개월 동안 참고인 소환 등을 통해 선고에 필요한자료를 모았습니다.참고인 신분으로 변론에 나선 최순실 측근들은 폭로를 이어갔죠.박영수 특별검사는 3월 6일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과 공모해 삼성으로부터 433억 원의 뇌물을 받았고‘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직권남용을 한 혐의를 확인했다.”#8.헌법재판소는 10일 오전 11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선고합니다.어떤 결과가 나오든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탄핵 찬반 양측 모두 판결 결과에 승복해야 할 것입니다. 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김한솔 인턴}

    • 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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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안철수 “中企 취업 청년에 2년간 月 50만 원 지원”

    #1.안철수 “中企 취업 청년에 2년간 月 50만 원 지원”#2.8일 방송된 채널A 특집 ‘청년, 대선주자에게 길을 묻다’.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는 ‘밤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거리’를 묻는 질문에주저 없이 청년실업 문제를 꼽았습니다.“국가적으로 가장 큰 위기 상황이 청년 실업 문제이고,특히 올해부터 앞으로 5년간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3.안 전 대표는 정부가 5년간 한시적으로 중소기업에 취업한 청년들에게2년간 월 50만 원씩 총 1200만 원을 지원해대기업 취업자와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공약을 제시했습니다.직업훈련을 받는 청년들에게는 6개월간 월 30만 원씩,5년간 총 3조600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는 공약도 내놓았죠.#4.그러자 공약을 검증하는 날카로운 질문이 쏟아졌습니다.‘실현 가능성’을 묻는 한 청년의 질문에안 전 대표는 “지금 국가적으로 매년 일자리 정책에 17조 원이 소요되고,청년 실업 문제에도 매년 2조4000억 원 정도를 쓰고 있다”며“이런 예산들을 재조정하면 5년 동안 9조 원 정도는 충분히 조달이 가능하다”고 답했죠.‘월 50만 원이 회사를 통해 간접 지원되면 월급이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선“청년이 국가로부터 직접 지원받는 것을 보고그만큼 깎아서 중소기업에서 월급을 준다면 그것은 일벌백계해야 된다”며징벌적 배상제 도입을 시사했습니다.#5.안 전 대표는 공공부문 일자리 81만 개 창출 공약을 내세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도 겨냥했습니다.“어떤 분은 그러신다. 정부가 또는 자기가 일자리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일자리를 만드는 주체는 민간과 기업이다.”안 전 대표는 △교육개혁을 통한 창의적 인재 양성 △과학기술 투자를 통한 기술력 확보 △공정한 경제구조 확립 등 세 가지를 정부의 중장기 과제로 꼽았습니다.#6.한국의 벤처기업이 활성화되지 않는 이유.안 전 대표는 “우리나라 창업자들이 아직 실력과 경험이 부족하다”며“제대로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라든지 또는 선배 경영인으로부터 조언을 받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국책 연구소가 중소기업을 도와주는 연구개발(R&D)센터로 거듭나야 한다며 불공정한 산업구조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죠.#7.안 전 대표는 일자리 미스매치 문제 해소와 창의적 인재 양성 등을 위해‘5년(초등학교)-5년(중학교)-2년(진로탐색학교 또는 직업학교)’ 학제 개편안과교육부 폐지 및 국가교육위원회 신설 공약도 내놨습니다.“교육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는 게 문제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 조직 자체가 장기적인 교육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간 교육개혁이 좌절된 이유가 대통령이 권력을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이다.”#8.안 전 대표는 지난해 말 최순실 사태가 불거진 뒤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지만 국회 탄핵안 통과 이후엔 불참하며 다른 야권 주자들과 차별화하고 있죠.“정치인들은 광장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소신이다.(국회 탄핵안 통과) 이후에는 광장은 시민의 것이고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갖고 제도권 안에서 문제를 푸는 것이 옳다.” 원본 : 황형준 기자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김유정 인턴}

    • 201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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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인, ‘대선주자 중 외모도 1등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에…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이 기각될 가능성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다면 국민들은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더 거센 분노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문 전 대표는 7일 방송된 채널A ‘외부자들’에서 ‘만일 탄핵이 기각되면 승복하겠냐’는 패널의 질문에 이 같이 밝혔다. 문 전 대표는 이어 “반드시 탄핵 절차를 이용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법과 제도를 통해 국민들의 분노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국민과 함께 해야 한다”며 “법이 우선이지만 정권 교체를 통해 탄핵 정부가 하지 못한 것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유종기자 pen@donga.com}

    •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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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종의 오비추어리]4400억 상당 명화 기증한 美 ‘세일즈맨의 신화’

    미국 ‘세일즈맨의 신화’인 출판기업 사우스웨스턴컴퍼니의 대주주 스펜서 헤이즈가 1일 뉴욕장로교병원에서 뇌동맥류 파열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헤이즈는 대학생 시절 생계를 위해 말단 외판원에 뛰어들었다가 출판 및 의류기업 경영인, 대주주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아내와 함께 미술품 수집에도 관심을 보여 미술계에서 손꼽히는 ‘아트 컬렉터’로 불렸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모은 미술품의 대부분을 프랑스 파리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미술품은 야수파(포비슴) 운동을 주도한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 등의 작품 600점이다. 기증 미술품의 가격을 합치면 3억1500만 파운드(약 4400억 원)에 달한다.● 가난한 ‘흙 수저’의 아들 헤이즈는 1936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시골마을인 아드모어에서 태어나 텍사스 주 게이네스빌로 이주해 성장했다.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키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매우 잘했고 고교생 시절 ‘농구 스타’로 불렸다. 대학(텍사스크리스천대)도 농구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헤이즈는 만 19세에 아내 마를린과 결혼했다. 당장 생활비가 필요했고 대학생이던 1956년 출판기업 사우스웨스턴에 성경 외판원으로 나섰다. 사우스웨스턴은 방학 동안 ‘가가호호’ 방문해 책을 팔고 수수료를 받을 대학생을 모집했다. 그는 탁월한 세일즈맨이었다. 1959년 대학 졸업 후 정식으로 사우스웨스턴에 입사해 판매하는 책의 종류를 성경에서 참고도서, 요리책, 아동도서로 대폭 늘렸다. 입사 7년만인 1966년 만 30세 때 판매담당 부사장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임원에 오른 그는 책뿐만 아니라 병원 바닥재, 암 보험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헤이즈는 1855년 테네시 주 내슈빌에 설립된 전통의 출판기업 사우스웨스턴에게 ‘꼭 필요한 인재’였다. 사우스웨스턴의 사주는 그를 영원히 붙잡고 싶었다. 사주는 1960년대 회사 주식의 12%를 5만 달러에 헤이즈에게 넘겼다. 사우스웨스턴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69년 사우스웨스턴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미 서부 유력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를 소유한 타임스미러에 1700만 달러에 인수됐다. 헤이즈는 주식 매매로 200만 달러를 받았고 이후에도 경영진으로 남아 1973년 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곧 기업공개를 후회했다. 기업공개로 많은 주주들이 회사 경영에 간섭했고 회사 운영에 오히려 방해가 됐다. 그는 기업공개를 통해 큰 돈을 벌고 개인의 재무 위험부담까지 줄이는 일반적인 기업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1982년 헤이즈는 타임스미러에 주식을 자신에게 매각하라고 요청했다. 당시 사우스웨스턴은 매년 30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 헤이즈는 은행 등에서 2700만 달러를 빌려 사우스웨스턴을 인수했다. 1983년부터는 이사회 의장도 맡았다. 그는 빌린 돈을 4년 만에 모두 갚았고 사우스웨스턴의 매출액은 1억5000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사우스웨스턴은 1996년 매출액 6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고속 성장을 구가했고 당시 헤이즈의 개인 재산은 4억 달러(약 4600억 원)에 달했다.● “세일즈의 본질은 인간관계” 전통의 출판기업인 사우스웨스턴은 독특한 기업 문화를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제품을 중간 도매상 등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영업사원을 통해 팔았다. 세일즈맨 교육은 매우 중요했다. 신입 영업사원들은 1주 동안 군대의 신병훈련에 준하는 교육 과정을 마쳐야 했다. 회사는 판매 노하우를 알려준다. ‘자신의 제품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도록 한. 항상 몸을 움직이고 주 6일 동안 근무해야 한다’ 등 ‘시대 불문’ 외판원의 원칙을 교육했다. 대학생 외판원부터 출발한 헤이즈는 다양한 소비자를 만나며 그들의 심리 등 요구사항을 꿰뚫었다. 숱한 현장 판매 경험을 통해 영업의 본질은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소비자의 마음을 얻어야 제품도 팔 수 있다는 거였다. 헤이즈의 오랜 친구인 윌리엄 터커 텍사스크리스천대 전 명예총장은 “스펜서가 파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판매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소비자들과의 소통, 연락 방법 등을 세세하게 알려줬다. 직원들에게 “비즈니스는 기술과 사람들의 태도의 반영이다. 인간관계만 만들 수 있다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부하직원 관리에도 탁월했다. 그는 ‘사람들은 관리를 받기 보다는 이끌리는 것을 더 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함께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랠프 모슬리 사우스웨스턴 전 회장은 “1970년대에도 헤이즈는 부활절 주말에 가족을 내슈빌에 놔두고 인디애나까지 인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헤이즈는 직원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평사원들도 주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물러나면 아내와 두 딸 대신 직원들이 회사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퇴직한 직원까지 챙겼다. 옛 영업직 직원들을 위해 부자들에게 부동산컨설팅을 해주는 회사를 세웠다. 그는 이 회사가 성장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회사의 지분은 적게 가졌다. 이 회사는 1990년대 이미 4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수익성도 매우 좋게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탁월한 영업력을 바탕으로 계열사 확장 그는 탁월한 영업력을 바탕으로 사우스웨스턴과 별도로 1966년 남성 정장 판매회사인 ‘톰제임스’를 세웠다. 그는 영업할 때 옷차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늘 바빴던 헤이즈는 ‘왜 직장에서 바쁜 남성들이 꼭 매장에서만 옷을 구입해야만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사무실, 집에서도 남성 정장을 구매할 수 있도록 방문판매를 고안했다. 그는 방문 판매에는 도가 튼 상태였다. 1967년에는 출판업에서 확대해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잡지 출판사인 애슬론스포츠커뮤니케이션을 세웠다. 1994년 남성 정장을 제작하는 옥스퍼드의류(Oxxford Clothes Inc.)를 인수해 톰제임스에 힘을 실어줬다. 1916년 설립된 옥스퍼드 의류는 기성복 정장의 가격이 2000달러부터 시작되는 고급 정장제작회사다. 그는 양복은 잘 만들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양복점도 인수했다. 재단사들의 일자리를 살린 셈이다. 헤이즈는 “우리는 직업의 안정성을 사회에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헤이즈의 회사들은 연평균 3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사우스웨스턴은 출판뿐만 아니라 교육 여행 등을 아우르는 10여개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4400억 원의 통 큰 기증 지난해 10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실이 위치한 엘리제궁. 헤이즈 부부는 마티스 등 명화 600점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며 “우리는 이 작품들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헤이즈 부부의 기증품은 지난 반세기 가까이 모은 그림들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국인이 가장 큰 규모로 미술품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헤이즈 부부는 1971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했고 이후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우리는 미술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723년에 건립된 파리의 누아르무티에저택(1996년부터 프랑스 문화부 청사로 사용)을 본 떠 지은 내슈빌 자택에 수백 점의 미술품들을 전시했다. 헤이즈 부부는 지난해 4월 오드레 아줄래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만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작품들이 절대 팔리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또 수장고에 처박혀 있지 않아야 하며 항상 벽에 걸려 있기를 바란다”며 기증을 약속했다. 이들 부부는 미국의 대형 미술관들도 자신들의 작품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수집한 작품들이 대부분 프랑스 화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오르세미술관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오르세미술관 방문객(연 400만 명) 중 3분의 1은 미국인이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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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이유종]핀란드의 디자인 독립

    핀란드 수도 헬싱키 중앙역에서 트램 3번을 타고 남쪽으로 5분 정도 가면 빌스쿨라마 정거장이 나온다. 이 일대는 200개 이상의 공방, 화랑, 카페 등이 모인 ‘디자인 디스트릭트’. 의자, 조명, 침구 등 최고의 핀란드 디자인 제품들을 구입하려면 이곳을 찾으면 된다. 매년 가을 혁신적인 디자인 제품을 선보이는 행사인 ‘디자인 위크’도 열린다. 관광 비수기에 열리는 디자인 위크엔 사람들이 몰려 헬싱키의 숙박비가 껑충 뛴다. 올해 독립 100주년을 맞는 핀란드는 일찌감치 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닫고 식민지 시절인 1875년 핀란드공예디자인협회를 세워 디자인 발전에 힘썼다. 그러나 당시 핀란드의 디자인은 식민 종주국이었던 러시아, 스웨덴의 영향을 크게 받아 별다른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독립을 선언한 핀란드는 디자인 독립도 필요했다. 건축 및 디자인 거장인 알바르 알토(1898∼1976)는 절제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으로 1930년대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덴마크, 스웨덴과 함께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을 형성하며 1950∼1970년대 인지도를 높이고 황금기를 구가했다. 핀란드는 새로운 소재가 개발되면 항상 디자인을 고려했다. 1970년대 플라스틱, 합성섬유 등 새로운 물질이 등장하자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색과 형태로 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80년대 인체공학, 환경 등의 이슈가 떠오르면서 인간 중심의 디자인이 더 중요해졌다.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핀란드 디자인의 정체성은 확고해졌다. 1980년대 말 핀란드공예디자인협회는 디자인 경쟁력 강화 및 해외 홍보를 위한 별도의 조직인 ‘디자인 포럼’을 만들었다. 위기에서 돌파구로 선택한 것도 디자인이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무너지자 인접국인 핀란드의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주요 금융기관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률, 국가채무, 인플레이션이 높아졌다. 핀란드는 긴 안목으로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자하며 지식기반의 국가를 만들기로 했다. 디자인은 당연히 지식기반 중 하나였다. 1996년 핀란드연구개발펀드는 전문가들을 모아 경제성장 방안을 토론했고 디자인 혁신이 핵심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2005년 디자인 포럼은 고용 및 제품 경쟁력 향상을 위한 디자인 사용 확대 등 핀란드 디자인의 전략을 세웠다. 100년 전 핀란드 디자인은 별다른 정체성이 없었다.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디자인도 차용했다. 하지만 100년 이상 ‘축적의 시간’을 가지며 단순하지만 실용적인 ‘핀란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핀란드 디자인은 천연자원 중심의 산업구조를 지식기반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디자인 서울, 디자인 코리아 등 국내에도 디자인 관련 구호는 넘친다. 하지만 아직도 디자인 독립에는 축적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핀란드가 100년 이상 민간 주도로 꾸준히 디자인 혁신을 일궈낸 걸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이유종 디지털통합뉴스센터 기자 pen@donga.com}

    •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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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유승민, ‘복지와 성장 중 하나를 꼽으라’는 질문에…

    #1.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복지보다 성장이 우선”#2.5일 방송된 채널A 특집 ‘청년, 대선주자에게 길을 묻다’.유 의원은 ‘복지와 성장 중 하나를 꼽으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성장’을 택했습니다.“10년째 110조 원 이상 퍼부어도 출산율이 꼼짝하지 않고 있다. 저출산 해소를 위한 ‘육아휴직 3년’이나 ‘칼퇴근’ 공약은 성장과 관련이 있다.”#3.한 패널이 유 의원의 ‘혁신성장’이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와 비슷하다고 지적하자,유 의원은 “취지는 거의 다를 바가 없다”면서도 “창업과 중소기업이 잘되려면 재벌의 횡포를 막아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재벌에 ‘창조경제혁신센터’ 운영을 맡겨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재벌·대기업이 중소기업, 벤처 창업 기술을 뺏어가는 횡포를 막고, 창업에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국가가 안전망을 구축할 것”이라고 했죠.#4.유 의원은 구체적인 해법으로 “대기업의 경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게 중요하고, 중소기업의 경우 임금 수준을 올려 (청년 구직자가) 더 올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연 15%씩 인상해 1만 원까지 올리겠다’는 공약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여건이) 열악한 소사업장의 경우 최저임금을 올리고 그 대신 국가가 4대 보험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5.2015년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 발언 이후 원내대표직에서 쫓겨나고 공천에서 배제되는 등 ‘핍박’을 받은 게 오히려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된 것 아니냐는 시각에는 반박했죠.“저를 보고 박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키워준 게 아니냐고 하는데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6.유 의원은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 탄핵심판에 기각 결정을 내리면 약속한 대로 의원직을 사퇴하고, 대선(출마)에 대해서도 원점에서 생각해 보겠다고 했죠.‘승복 못 하겠다는 뜻이냐’는 질문에는 “제가 촛불집회 (참가) 인원수를 보고 탄핵을 결심한 게 아니라 박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과 검찰 수뇌부가 30장 넘게 적은 공소장을 보니까 탄핵이 옳다고 믿은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7.유 의원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이) 재협상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협상을 파기하겠다”고도 했습니다.“(합의로 받은) 10억 엔(약 103억 원)을 돌려주고 독일처럼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라고 할 것이다. 과거사나 주권의 문제는 아예 합의를 안 하는 게 낫지 잘못된 합의를 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8.유 의원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대해서도 “중국이 경제보복을 한다고 우리가 굴복하면 과거 명나라, 청나라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사드 배치 입장과 관련해서는 “정책이 왔다 갔다 해서 메시지를 컨트롤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과 뭐가 다르냐”며 날을 세웠습니다. 이유종기자 pen@donga.com}

    •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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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 이재명 “기본소득 1인당 月50만원이 최종 목표”

    #1.이재명 “기본소득 月50만원이 최종 목표”#2.1일 방송된 채널A 특집 ‘청년, 대선주자에게 길을 묻다’.첫 대선주자로 출연한 이재명 성남시장은 특유의 ‘사이다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 청년을 대면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계층 이동의 가능성도,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매우 적기 때문이다.”#3.이 시장은 “국가가 연 2조 원을 일자리 창출에 투입하고 있지만 청년 여러분이 개선되는 걸 느끼냐”며 획기적인 청년 일자리 정책을 강조했습니다.그는 “주 52시간 법정근로시간을 지키면 새 일자리가 최소 33만 개 생긴다”며 근무시간 준수를 자신의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노동경찰 1만 명 배치’를 통한 근로감독관 확대를 주문했죠. #4.이 시장의 목표는 기본소득을 1인당 월 50만 원까지 지급하는 것. 그는 “월 2만5000원부터 시작해서 5만 원, 10만 원으로 국민의 공감을 얻어가며 실현 가능한 파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5.‘고소득층에게는 고맙기는 한데 꼭 받아야 하나’라는 패널의 질문에는 “복지의 역설이 있는데, 어려운 사람만 지원한다고 하면 잘될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못하다. (복지비용은) 국민 모두의 세금으로 부담하는데, 어려운 사람만 지원하면 아까워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습니다. #6.이 시장은 복지 재원 마련을 자신했습니다.올해 예산 400조 원 중 국가 재량으로 쓸 수 있는 돈이 142조 원인데, 토목사업 지원금과 대기업 연구개발(R&D) 지원금 등에서 예산을 감축하면 가능하다는 것.토지세와 법인세 인상도 추진할 뜻도 밝혔습니다.“국민은 시세의 2%가량 자동차세를 내는데 토지는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으면서도 세금은 0.1%에 불과하다. 토지에 자동차세의 5분의 1만 보유세를 부과하면 약 15조 원을 거둘 수 있다.” #7.“대기업에 왜 면세점 (사업권을) 주는가. 중소기업연합체에 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대기업 증세를 통해 국민 전체에 이익을 늘리게 하는 게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성장 방침이다.”대기업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이어갔던 이 시장.‘대기업 주식에 많이 투자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대기업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경쟁력으로 이익을 얻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더 이익을 보지 않겠냐”고 해명했죠.#8.‘대통령 당선과 북핵 포기 중 어떤 것이 더 좋나’란 질문에는 주저 없이 “김정은의 핵 포기”라고 답했습니다. “내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다. 단 하나의 꿈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합리적인 세상을 만드는 도구로써 시장보다 대통령직이 유용한 도구라 생각해 출마한 것이다.”#9.이 시장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사면, 2선 후퇴 등 어떤 타협안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라면 탄핵 결정 전에 단 하루라도 빨리 퇴진하는 것이 국민 열망에 부합한다. 탄핵이 인용된다면 (태극기집회 측의 대통령) 복권 운동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채널A의 ‘청년, 대선주자에게 길을 묻다’는5일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9일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 편 등으로 이어집니다.원본|유근형·황형준 기자기획·제작|이유종 기자·김유정 인턴}

    • 2017-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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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종의 오비추어리] 명품 핸드백 ‘코치’의 아버지 마일스 칸

    고급 여성 핸드백 ‘코치(coach)’의 창업주 마일스 칸이 10일 미국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5세. 귀족들이 타던 ‘사륜마차’를 뜻하는 코치는 핸드백 의류 신발 등을 만드는 미국의 대표적인 브랜드다. 칸은 가죽 공방을 인수한 뒤 유명 디자이너 보니 캐신을 영입해 독특한 디자인의 여성용 핸드백을 출시하며 명품 브랜드로 성장했다. 코치는 현재 전 세계 1000개 이상의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액 45억 달러(약 5조 850억 원)를 올렸다. 임직원만 1만 7000명이다.● 맨해튼 가죽 공방에서 출발 코치는 1941년 가죽 장인들이 뉴욕 맨해튼 34번가에서 운영하던 공방이 모태다. 직원 6명이 남성용 가죽지갑과 작은 가죽 제품을 손으로 만들었다. 칸과 아내 릴리안은 1946년 이 공방에 합류했다. 부동산 업자였던 칸의 아버지가 이 공방의 투자자 4명 중 한 명이었다. 칸 부부는 이전에도 가죽제품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고 1950년 이 공방을 완전히 인수했다. 칸 부부의 공방은 1961년까지도 남성용 지갑을 만들었다.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다. 칸은 2008년 발간된 자서전 ‘마이 스토리’에서 “몇 명의 고객이 전부였다”고 회고했다. 아내 릴리안은 1960년 칸에게 여성 핸드백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칸은 2013년 아내 릴리안이 사망했을 때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처음에 비웃었다. 당시 뉴욕에는 엄청난 숫자의 핸드백 회사들이 있었다. 모든 가게들은 유럽에서 유행하는 디자인을 베낀 짝퉁 제품을 팔았다. 그러나 내 아내가 곧 이들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에선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고 있었다. 여성용 가방 수요도 덩달아 증가했다. 당시 여성용 핸드백은 대체로 얇은 가죽으로 만들었다. 칸 부부는 차별화를 추구했다. 두툼하고 견고하나 부드러운 가죽을 원했다. 릴리안은 가죽이 부드럽게 마모되는 ‘낡은 야구 글러브’에서 착안해 무두질(Tanning)을 거쳐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글러브 탠드 카우하이드(Glove Tanned Cowhide)’을 만들어냈다. 글러브 탠드 카우하이드는 코치만의 고유한 가죽 재질로 자리를 잡아 다른 브랜드들과는 차별화를 꾀할 수 있었다. 칸 부부는 1961년 공방을 확대해 ‘코치가죽의류회사(Coach Leatherwear Company)’를 출범시키고 ‘코치’ 로고가 부착된 여성용 핸드백을 출시했다. 같은 해 할리우드에서 배우들의 의류를 제작했던 디자이너 보니 캐신(Bonnie Cashin)을 영입했다. 캐신은 코치 컬렉션의 1세대를 이끈 인물이다. 1950년 화장품 및 향수 회사인 코티사가 패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미국코티패션비평상(1942년 제정)을 받았으며 뉴욕타임스에 195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소개된 베테랑이었다.● 유명 디자이너 영입으로 도약 캐신은 코치 제품을 업그레이드했다. 1962년 코치는 캐신이 디자인한 가죽 가방, 액세서리 컬렉션 ‘캐신 캐리’를 출시했다. 캐신은 강아지 목줄의 클립을 보고 가방과 가방끈의 연결장치를 고안해 ‘도그 리시 클립’을 만들었다. 자신이 타고 다니던 컨버터블 자동차의 지붕 고정장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턴록 클로저(잠금 장치)’로 핸드백에 적용했다. 당시 이런 디자인을 선보이는 브랜드는 흔하지 않았다. 캐신의 노력으로 다양한 가방 액세서리는 코치의 아이콘이 됐다. 코치는 1970년대 초 글러브 탠드 카우하이드 가죽으로 만든 클래식한 모양의 더플백(실린더 모양의 큰 가방)을 내놓아 큰 인기를 얻었다. 1974년 코치 마크가 새겨진 가죽 조각인 행태그를 달았다. 코치는 1970년대 후반 카탈로그 마케팅, 우편발송 시스템 등으로 경영 부문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하며 매출을 크게 늘렸다. 백화점에 크게 의존하는 경쟁자들과는 달리 일반 가게들과 새로운 유통망을 만들어 경쟁력을 키웠다. 1981년 뉴욕 메디슨가에 첫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특정 상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브랜드의 성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한 매장)를 열었다. 코치는 1980년대 초까지 매년 2000만 달러 이상의 핸드백을 팔았다.● 염소치즈에 매달린 말년 칸 부부는 1985년 3000만 달러를 받고 식음료 기업 새러리(Sara Lee)에 코치를 넘겼다. 당시 칸은 64세였다. 칸 부부는 1985년 뉴욕 주 컬럼비아 카운티에 600에이커(약 73만 평) 규모의 염소농장 ‘코치팜’을 운영하고 있었다. 코치팜은 초창기 염소 200마리를 키웠다. 하지만 염소가 1500마리로 늘자 칸 부부는 아예 농장에 전념하기로 했다. 코치팜은 친환경 유기농 제품의 붐과 맞물려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칸 부부는 20년 이상 농장을 운영하다 칸이 85세이던 2006년 농장을 팔고 생업에서 은퇴했다. 칸은 러시아 출신 유대계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칸은 뉴욕시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육군에서 복무했다. 헝가리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아내 릴리안과는 1947년 결혼했다. 칸은 좀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을 겨냥해 전쟁 반대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기도 했다. 코치의 경영을 맡았을 때는 노조가 제시하는 액수 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직원들에게 지급했다. 코치의 아버지는 이제 세상을 떴지만 차별화를 추구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코치의 혁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20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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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수학의 붕괴…초등생 ‘수포자’ 속출

    #1수학의 붕괴: 초등생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 속출#2‘교육의 신화’ 대한민국.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 교육 시스템이 주목을 받았고,한때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1위를 차지해 선진국들의 탐구 대상이었죠. #3그러나 PISA 2015(지난해 12월 발표)는 역대 최악.특히 수학은 심각한 상황. 지난 3년간 30점이나 급락했죠.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평균 4점 하락에 그쳤습니다.#4교육현장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도 ‘수포자’가 속출하고 있죠.#5교육 당국은 지난 10년간 사교육을 잡고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겠다며 수학 교육수준을 하향화했습니다. 그러나 학교 시험과 대학수학능력시험 등 ‘평가’는 바뀌지 않았죠. 그 결과 사교육 없이 학교 교육만 받은 학생은 오히려 점수 얻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마치 농구할 때 평소에는 1m앞에서 슈팅연습 하라고 하고 시험 볼 때는 10m밖에서 하라고 하는 격이다.”- 강옥기 경희대 수학교육과 명예교수#6학생들은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풀이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오직 정답만 필요합니다.학교들은 ‘변별력’을 이유로 교과과정 밖에서 시험 문제를 출제합니다.‘요령’, ‘유형 파악’이 필요하지만 학교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고득점을 얻으려면 학원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7고득점 학생도 원리 이해나 응용력이 좋아 높은 점수를 받는 게 아닙니다.평소 문제 유형 파악과 빠른 계산 연습을 숱하게 많이 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죠. 결국 고득점 학생도 수학 교육의 근본 목표인 사고력, 창의력 향상과는 상당히 벗어난 ‘문제 풀이 기술’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8“한국의 수학 평가는 계산과 속도가 핵심이다. 이건 엄밀히 말해 수학이 아니다.”- 이용훈 부산대 수학과 교수수학 교육은 왜 하는가.교육 목표부터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2017.02.27 (월)원본 | 임우선·노지원 기자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김한솔 인턴}

    • 2017-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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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최순실이 변호사 200명 먹여 살린다?

    #1최순실이 변호사 200명먹여 살린다고?#2“서초동이 확실히 특수(特需)는 특수죠.최순실 씨(61·구속 기소)가 변호사 일자리는 많이 만들었습니다.서초동 법조타운이 요즘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박영수 특검 기소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 A 씨#3매년 2월. 법원, 검찰의 정기 인사로 변호사들은보릿고개를 맞이합니다.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다르죠.지난해 10월부터 지속된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한 검찰과 특검 수사, 형사재판,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이어지면서 변호사 수요가 오히려 늘어났습니다.#423일 현재 변호사 209명(사임 변호사 제외)이 국정 농단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이는 전국의 개업 변호사 100명 중 1명꼴입니다. “구치소 접견만 담당하는 이른바 ‘집사 변호사’와 선임계를 내지 않고 ‘그림자 변호’를 하는 거물급 변호사까지 포함하면 전체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한 법조계 인사 #5국정 농단 사건 참여 변호사 중에는 중소 로펌 소속이나 개인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변호사가 많습니다. “대형 로펌은 주로 특검 수사 대상인 대기업을 대리하거나 자문에 응하고 있기 때문에 담당 변호사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판사 출신 변호사#6평소 법정이나 검찰청에서 모습을 보기 힘든 원로 법조인들이 직접 사건을 맡은 것도 특징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대리인단에 최근 합류한 정기승 전 대법관(89)은 그중에서도 최고령이죠. #7국정 농단 사건 전체 피고인 34명 중 31명은 판검사 출신인 전관 변호사(73명)를 선임했습니다.피의자와 참고인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정·관·재계 고위직 출신인 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8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서초동 법조타운에 때 아닌 ‘특수’를 가져온 상황.어떻게 봐야 할까요?2017.02.24 (금)원본 | 신나리·조윤경 기자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김한솔 인턴}

    • 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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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 턱 밑으로 다가온 탄핵심판 선고 ‘숨 가빠지는 대선 일정’

    #1.턱 밑으로 다가온 탄핵심판 선고‘숨 가빠지는 대선 일정’#2.헌법재판소는 22일 16차 변론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관련된 증인신문을 모두 마쳤습니다.남은 절차는 최종 변론.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은 이날“(최종 변론기일을) 27일 오후 2시로 지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3.관심은 박 대통령의 최종 변론 출석 여부.이 권한대행은 대통령 측에 “26일까지 출석 여부를 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측 이중환 변호사는 “(대통령이) 결정을 못하고 있다. 대통령을 만나 상의해 보겠다”고만 답했습니다.#4.현재 박 대통령이 헌재에 출석할 지는 미지수입니다. 박 대통령은 필요하면 출석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지만,신문하는 것에는 부담을 느끼고 있죠.반면 헌재는 ‘출석하면 신문은 반드시 한다’는 입장이어서 갈등이 예상됩니다.#5.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상황을 고려하면최종변론 후 헌재 재판관의 탄핵 심판 결정까지 약 2주가 걸립니다. 탄핵심판 선고일은 3월 10일, 13일이 유력하죠.노 전 대통령 탄핵심판 당시선고일은 사흘 전 공개됐습니다.#6.대선 시계도 바빠졌습니다. 만일 3월 탄핵이 인용되면 조기 대선은 불가피합니다.현행 헌법은 탄핵 결정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차기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7. 결국 대선일은 5월 2~12일 실시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대선 후보로 나설 지방자치단체장은 선거일 30일 전까지 사퇴해야 합니다.탄핵이 인용되면 정치권은 대선 정국에 본격 돌입합니다.#8.여야 대선 주자들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문재인 전 더불어 민주당 대표는 만 35세에 인텔 수석매니저에 오른 유웅환 박사를 영입했습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22일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토론회에 참석했습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같은 날 토크쇼 형식의 생방송 토론회에 출연해 ‘사실상 대선행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는 23일 각계 전문가들로 이뤄진 ‘전문가광장’을 출범시켰습니다. 조기대선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분위기입니다.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김유정 인턴}

    • 20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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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 회사 몰래 가죽 바느질 배우는 ‘넥타이 부대’

    #1회사 몰래 가죽 바느질 배우는 ‘넥타이 부대’#2.“김 대리, 또 반차 냈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신 거야?” 21일 오후 2시 서울의 한 제약회사 영업부. 박모 팀장은 걱정 반, 의심 반의 목소리로 김모 대리를 불러 세웠습니다. 김 대리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서둘러 가방에 서류를 챙겨 사무실을 나섭니다.#3.“어머니가 편찮다”는 반차 사유는 거짓말. 제약사 영업사원 1년 차인 그가 반차를 내고 찾아간 곳은 회사 부근 가죽 공방(工房). 공방엔 멀쑥한 양복 차림의 남성 10여 명이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를 두른 채 느리고 서툰 솜씨로 가죽에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모두 취업 1¤3년 차인 새내기 직장인. #4.‘회사 몰래’ 6개월째 공방 수업을 듣는 김 대리는 1년 전 100곳이 넘는 기업에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희망하던 회사에서는 모두 낙방. 유일하게 합격한 곳이 중소 규모 제약사 영업부. #5.그러나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상사와 업체의 비상식적인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취업보다 어려운 것이 재취업.“퇴사를 생각하다가 공방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도 만들어 팔면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열심히 배우고 있다.”- 중소 제약사 영업부 김 대리#6.지난해 청년(만 15~29세) 실업률은 9.8%로 역대 최고치. 힘겹게 들어간 직장 상황도 좋지 못합니다. 지난해 전국 306개 기업에서 1년 이내 퇴사한 대졸 신입사원의 비율은 27.7%. 퇴사 이유는 상당수가 ‘조직과 직무 적응 실패’. 취업난에 적성이나 근로조건과 상관없이 ‘무작정’ 들어간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장인이 속출하는 셈이죠. #7.하지만 당장 퇴사를 하고 싶어도 재취업을 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과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 공방에 손기술을 배우러 온 직장인들, 이른바 ‘생존형 공방족’이 늘고 있습니다. #8.20, 30대 직장인들이 생존형 공방족이 되는 건 취업난이 불러온 일종의 후유증이라는 분석.“취업문이 워낙 좁다 보니 적성과 근로조건을 고려하지 않는 ‘묻지 마’ 취업이 늘고 이는 결국 사회 초년생의 퇴사 문제로 이어진다. 자신이 꿈꾸던 직장생활과 너무 다른 현실에 재취업보다는 심적 스트레스가 덜한 창업을 택하려는 것도 공방으로 몰리는 원인 중 하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원본 | 김단비 기자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김한솔 인턴}

    • 2017-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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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 짚어보기]‘외부자들’, 朴대통령 대리인과 극강 ‘설전’

    채널A의 본격 시사 토크프로그램 ‘외부자들(화요일 오후 11시)’에서 박근혜 대통령 법률대리인단의 한 명인 서석구 변호사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21일 방영된 ‘내부자 전화 연결 <보이스피싱>’ 코너에서 출연진들은 서 변호사와 전화 통화를 했다. 서 변호사는 헌법재판소에서 태극기를 꺼내든 것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지만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고 해명했다. 서 변호사는 ‘박 대통령의 탄핵 기각을 바라는가’라는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질문에 “현재 헌법재판소가 갖고 있는 증거는 (부족하다). 검찰은 대통령, 변호인 조사도 하지 않고 대통령을 공범자로 발표했다. 적법 절차를 위반한 사례다. 전 세계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 교수는 “특검법은 박 대통령이 사인한 부분이다. 검찰이나 특검의 소환을 거부한 것도 대통령”이라고 반박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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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유종의 오비추어리]메이저리그 야구단 인수한 ‘마이너리거’

    ‘피자헛’ ‘도미노 피자’와 함께 미국 3대 피자 기업으로 꼽히는 ‘리틀시저스(Little Caesars)’의 창업주이자 프로야구단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구단주 마이크 일리치(Mike Ilitch)가 3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일리치는 동네 피자가게를 세계 19개국의 글로벌 피자체인, 식자재 유통기업, 스포츠구단, 카지노, 호텔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으로 키워낸 대표적인 미국 경영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테이크아웃 피자 체인인 리틀시저스는 미국에만 40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2015년 매출액 34억 달러(약 3조 9100억 원)를 기록했다. 현재 일리치 가족들이 운영하는 기업들의 직원만 2만3000명에 이른다. ● 동네 피자가게 주인으로 변신한 야구선수 일리치는 1929년 미시간 주의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동유럽 마케도니아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구 제작자였다. 일리치는 디트로이트 쿨리고교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교 졸업 이후 해병대에 입대해 4년 동안 복무했다. 전역한 뒤 1952년 계약금 3000달러를 받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메이저리거’를 꿈꾸며 유격수, 2루수로 뛰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만 머무르다 결국 무릎 부상으로 1955년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일리치는 같은 마케도니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아내 마리안(84)과 함께 1959년 디트로이트 인근 소도시 가든시티에 작은 피자가게를 열었다. ‘리틀시저’라는 이름은 마리안이 남편 마이크를 그렇게 생각해 붙였단다. 마리안의 아버지는 음식점을 운영했다. 마리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냅킨, 소금, 후추 등을 용기에 채우는 등 음식점의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어릴 때부터 장사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던 셈이다. 마리안은 고교를 졸업한 뒤 전문대학에 해당되는 데어본커뮤니티칼리지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다. 그의 경험은 일리치 부부의 피자 가게에 큰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리틀시저스 첫 매장은 장사가 잘 됐다. 일리치 부부는 프랜차이즈를 통해 매장을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1950~60년대는 대형 피자 프랜차이즈 기업들이 속속 창업하던 시기였다. 피자헛은 1958년 캔사스 주 위치타, 도미노는 1960년 미시간 주 입실랜티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일리치는 1962년 미시건 주 워런에 첫 프랜차이즈 매장을 열었다. 1967년 디트로이트 시내에도 진출했고 1969년 50호점과 해외 첫 매장인 캐나다 매장을 개점할 수 있었다. 미국 3대 피자기업은 국내 피자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세 기업은 저마다 다른 독특한 판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피자헛은 ‘다양한 메뉴’, 도미노는 ‘빠른 배달’, 리틀 시저스는 ‘싼 가격’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일리치는 식자재 구매부터 피자 판매까지 최대한 비용을 줄였다. 1971년 피자에 많이 사용되는 버섯의 품질과 원가 절감을 위해 버섯농장을 인수했다. 다른 식자재 공급까지 직접 맡아서 원가 비중을 최대한 낮췄다. 1979년 피자 2개를 하나의 가격으로 파는 반값 할인 정책을 내놓으며 소비자를 모았다. 미국 내에선 꽤나 알려진 ‘PIZZA! PIZZA!’ 광고문구도 만들었다. 1988년 ‘Pan! Pan!’으로 불리는 정사각형의 두꺼운 피자를 출시했고 소비자들이 여러 가지 크기, 모양의 피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메뉴도 만들었다. TV 광고에도 나섰다. 리틀시저스는 저가 마케팅 전략 등에 힘입어 사세를 키웠고 1987년까지 미국 50개주 전역에 매장을 늘렸다. 1990년대부터는 종합소매점 체인 K마트 매장에도 매장을 입점시켰다. 2008~2015년에는 매장이 가장 많이 늘어나는 피자 체인으로 꼽혔다. 승승장구하는 사업으로 여윳돈이 생긴 리틀시저스는 1989년 디트로이트 시내의 10층짜리 옛 폭스극장을 인수해 본사가 입주했다. ● “침체된 디트로이트를 스포츠로 살리자.” 일리치는 사업이 순항하자 고향 디트로이트에 뭔가 기여하고 싶었다.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 후반 GM(제너럴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기업들이 다른 도시에도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일리치는 스포츠 사업으로 디트로이트 시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싶었다. 1982년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프로아이스하키구단 디트로이트 레드윙스를 인수했다. 당시 레드윙스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아 ‘데드윙스’로 불릴 정도였다. 시민들도 아이스하키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미국 프로스포츠 구단들을 기업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수익을 따진다. 하지만 일리치는 애초부터 수익과는 무관한 구단주였다. 그는 승리만을 추구하는 진정한 스포츠맨이었다. 1983년 드래프트에서 캐나다 출신의 스티브 아이저맨을 뽑아 20년 이상 주장을 맡기고 팀의 리더로 성장시켰다. 아이저맨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사상 최고의 리더라는 찬사를 받았다. 동구권, 북유럽권 선수들도 대거 영입했고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감독을 지낸 명장 스카티 바우만을 영입해 1997, 1998년 스탠리컵(NHL의 플레이오프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4년 1600만 달러(약 184억 원)의 운영적자에도 불구하고 레드윙스는 ‘가장 가치가 높은 팀’으로 꼽혔다. 스탠리컵은 2002, 2008년에도 받았다. 일리치는 2003년 NHL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도시가 ‘하키타운’으로 불릴 정도로 아이스하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92년에는 자신이 마이너리그 선수로 뛰었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피자 업계 라이벌인 도미노피자의 창업주 톰 모나한에게 8500만 달러(약 978억 원)를 주고 인수했다. 1901년 창단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8개 구단 중 하나 월드시리즈 4번, 리그 11번의 우승을 한 명문 구단이다. 일리치에게 야구는 필생의 꿈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부분의 돈을 들여 1912년부터 사용하던 낡은 주경기장을 대신 2000년 코메리카파크에 새 경기장을 열었다. 일리치는 개인재산을 털어가며 유명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는 단장, 감독에게 “돈은 신경쓰지 말라. 최고의 선수만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일리치의 적극적인 투자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2011~2014년 4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타이거스는 2006년, 2012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도 올랐지만 끝내 월드시리즈 우승은 해내지 못했다. 일리치는 “죽기 전 월드시리즈 우승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 선수, 시민, 팬 모두에게 존경받는 구단주 일리치의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성명을 내고 “그는 스포츠와 비즈니스, 지역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디트로이트에 대한 열정, 타인에 대한 관용,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헌신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리치는 스포츠계는 물론 지역사회, 스포츠팬 등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흔치 않는 구단주 중 하나였다. 2009년 디트로이트에 본사를 둔 GM이 파산 위기에 직면해 타이거스의 홈 구장인 코메리카파크애 광고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일리치는 다른 기업들의 광고 제안을 뿌리치고 광고료가 가장 비싼 구단 외야 중앙에 GM의 광고판을 무료로 세워줬다. GM은 디트로이트의 경제를 지탱하는 대표적인 지역 기업이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돈을 많이 번 만큼 사회공헌에도 힘쓰며 ‘노블리스 오블리제(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디트로이트 레드윙스를 인수한 뒤 아이스하키 청소년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리틀시저스아마추어하키리그를 출범시켰다. 이 리그는 현재 가장 존경 받는 청소년하키리그로 성장했다. 1985년에는 푸드트럭 ‘리틀시저스 러브 키친’을 만들어 노숙자, 저소득층, 재난피해자 등 사회적약자들에게 무료로 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공고로 리틀시저스는 1991년 당시 조지 H.W. 부시 대통령에게 자원봉사상을 받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봉사상을 수상했다. 메이저리그 구단주로 변신한 ‘마이너리거’ 일리치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유종기자 pen@donga.com}

    • 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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