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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은 몇 살인가’에도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1919년 건국설과 1948년 건국설 모두 각자 근거가 있다. 개천절이나 대한제국-대한민국의 연속성에 방점을 찍는 의견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9년 건국 100주년을 맞는다”(15일 광복절 경축사)는 말 한마디로 정리될 문제는 아니다. 동아일보는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63)와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54)의 대담을 마련했다. 한 교수는 임시정부 연구에서 업적을 낸 독립운동사 연구자로 최근에도 ‘역사농단’(역사공간) 등을 출간하며 ‘1919년 건국론’을 꾸준히 주장해왔다. 김 교수는 2018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취임 예정인 역사정치학 연구자다. 김 교수는 1980년대 386세대의 역사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해방전후사의 인식’(공저)의 필자로 지난해에는 국정 역사교과서의 현대사 분야 필진으로 참여했다. 》 지난해 말 관련 학술대회에서도 격렬히 대립했던 두 학자에게 “합의의 폭을 넓혀 달라”고 주문했다. 두 학자는 “1919년이든 1948년이든 ‘건국’이라고 표현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데 의견을 함께했다.―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발언을 평가해 달라. ▽한시준=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 시점 문제가 표면화할 때 역사학계는 1948년 건국이 사실이 아님과 부당성을 제기했다. 이번 발언은 1919년 대한민국 건국을 공식 천명했다는 의미가 크다. ▽김명섭=특히 대한민국의 주요 기원인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대통령이 직접 강조해 기대된다. 그러나 ‘1919년 건국’이라고 못 박으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광복 뒤 여운형 조만식 선생 등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든 것도 당시 건국이 안 됐다고 본 거다. 임정이 국민주권을 천명했지만 권력을 위임받는 합법적 선거가 이뤄진 건 1948년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에 시작돼 1948년 수립된 것이다. ―‘건국 시점이 뭐가 중요하냐’는 의견도 있다. ▽한=국가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밝히는 일이다. 민족사로서도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두 번에 걸쳐 수립됐다.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 박사는 자주독립정부 수립에 대해 누구보다 생각이 깊었다. 건국이라고 하면 미국이 나라를 세워주는 꼴이 되니, 그렇게 안 하고 1919년 세운 대한민국을 계승하고 재건한다고 했다. 당시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 관철한 게 이 박사다. 1948년 건국 주장은 일제강점기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고, 민족사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김=만약 그에 동의한다고 해도 1910∼1919년의 공백이 생기지 않나. 한일 강제병합조약의 효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한제국이 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만국우편연합은 ‘대한국(대한제국)’이 가입한 1900년을 오늘날 대한민국의 가입연도로 본다. 대한국을 1919년에 국민주권적으로 계승한 게 임정이고, 1948년 선거를 통해 국제적 승인을 받은 것이다. 1948년 당시 대한민국 ‘재건’이라고 주장한 주요 인물은 이승만 박사밖에 없다. ‘민국 30년’(1948년)이라는 연호도 컨센서스를 도출하지 못해 1949년부터 단기로 썼다. 임정이 독립운동의 구심이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문창범(1870∼1938) 같은 분은 러시아 연해주가 독립운동 기지로 적합하다고 보고 임정에서 이탈해 활동했다. 1919년에 건국됐다고 마침표를 찍으면 이런 활동은 마치 ‘반국가단체’처럼 돼 버린다. ▽한=좌파인 김원봉을 비롯해 다양한 세력이 1944년이 되면 다 임정으로 들어온다. 이처럼 독립운동세력이 통합을 이루고 광복을 맞은 것은 세계적으로도 한민족이 유일하다. ▽김=광복 직후 아직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를 봉대하는 대신 건준-인민공화국을 지지했던 이들을 무조건 비난할 수 없다. 그런데 1919년 이미 건국이 됐다고 보면 이들은 ‘반역자’가 된다. ▽한=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건국하는 예는 드물다. 쑨원(孫文)이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우지만 나중에 다시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건국대강’을 발표한다. 아름드리나무도 처음에는 새싹이지만 나이는 새싹부터 센다. 임정을 세운 분들도 건국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919년에 건국했다고 하면 열강들이 반만년 역사의 우리 민족이 마치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잘못 알지 않겠느냐는 우려 탓이었다. 그래서 단군이 나라를 세운 개천절을 건국기원절로 지정하고 기념행사를 했다. ‘건국절 제정’ 주장으로 논란이 시작된 탓에 이를 비판하는 측에서도 ‘건국’이라고 표현한 면이 있다. 대한민국 ‘건립’이라고 써야 합당하겠다. ▽김=좋은 말씀이다.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국가로 공인받은 1897년의 대한국 선포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1919년이나 1948년만 강조하면 그런 기억이 사라진다. ―2019년은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가. ▽한=논란을 종식시키고 대한민국 역사는 1919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정립해야 한다. ▽김=당대인들이 사용한 용어를 존중해 ‘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정 수립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 정부 수립이든 대한민국 수립이든, 내년에 맞는 70주년의 의미도 크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맹인은 사농공상에 끼지 못해 생계를 꾸릴 방법이 없으나, 주역을 배워 점을 치고 겸해서 경문을 외워 살아간다. … 저잣거리를 다니며 노래하듯 ‘문수(問數·운수 물어보오)’라 외친다.”(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별다른 직업이 없던 ‘심청전’ 속 심학규와 달리, 조선시대 맹인은 전문직에 종사했다. 조정은 맹인에게 악공과 점술가를 장려했다. 청각·촉각이 뛰어난 맹인은 관현맹(管絃盲)이 되었다. 관현맹은 나라에 소속된 전문 악공이다. 유명한 관현맹으로 세종 때 이반, 성종 때 정범, 김복산 등이 있다. 점술에 뛰어난 맹인은 관상감(觀象監·천문 지리를 담당한 기관) 소속 관원인 명과맹(命課盲)으로 선발했다. 선발되지 못한 맹인은 ‘판수’로 생업을 삼았다. 판수는 민가에서 활동한 독경(讀經)과 점술 전문가였다. 판수는 초하루와 보름이면 명통시(明通寺·맹인 교육 및 집회소)에 모였다. 명통시에서 독경 기술을 전수했고, 정기적으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서 거행하는 전례를 정리한 ‘태상제안’에 판수를 동원한 의례가 나온다. 판수는 기우제나 임금이 거처를 옮길 때 동원됐다. 동원된 판수는 ‘옥추경’이라는 도교 경전을 외웠다. 이로써 비를 불렀고 임금이 거처할 곳에 있을지 모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쳤다. 중국에서 도교 도사가 하던 일을 조선에서 판수가 담당했던 셈이다. 판수는 무당처럼 현란한 몸짓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그 대신 듣는 이가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전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히 외웠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일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추재기이’에 판수 유운태의 삶을 정리했다. 유운태는 100번 점을 쳐 단 한 번도 실수가 없던 당대 최고 판수였다. 점 풀이로 하는 말도 범상한 판수와는 달랐다. 운수를 묻는 이에게 효의, 공손, 충성, 신의를 말해 사람 된 도리를 일깨웠다. 조선후기 문신 성대중은 유운태를 만나 운수를 물었던 일을 ‘청성잡기’에 쓰면서 “죽을죄를 저지른 죄인이라도 처벌할라치면 유운태의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맹인의 삶은 지금처럼 고단했지만 비장애인이 맹인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조선 사람은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맹인이 보고 느낀다고 여겼다. 이러한 믿음 아래 관현맹의 연주에 감탄했고, 판수의 목소리를 신뢰했다.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1947년 8월 20일 오전 1시. 황해도 해주의 바닷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가 27세의 김형석과 아내, 돌도 안 된 아들의 몸을 숨겨주었다. 월남을 막는 감시원들이 100m 간격을 두고 갈대밭을 왔다 갔다 했다. 감시원의 시야에서 벗어난 틈을 타 김형석이 아내와 함께 조각배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런 얘기를 나도 별로 안 하는데…. 솔직히 일제강점기 같으면 내가 북한의 고향에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활동을 안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를 못해요. ‘대학까지 나온 저놈이 산속에서 조용히 사는데 수상하다’, 그러면 다 잡아다 (사상) 교육을 시키든지 해요. (공산주의를) 겪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최근 서울 서대문구의 한 교회에서 만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는 1시간 반 동안 70년 전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며 일제강점기와 광복,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을 몸으로 겪은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이다. 동아일보는 20, 30대 청년으로 당대를 겪은 그로부터 ‘시대의 증언’을 들었다.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 광복 뒤 북한에서 그가 잠시 맡았던 직함이다. “내가 대학 나왔으니 나가보라고 해서 면 위원이 됐다가 군 위원으로 뽑힌 게지요.” 그는 ‘공산당 정책을 반대하고 쫓겨나느냐, 먼저 그만두느냐’를 두고 고민하다가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사업가로 부친의 친구인 김모 장로가 재정을 뒷받침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북한, 반공 성향 교회장로 제거” “한 1년 반 정도 운영을 했지요. 그런데 내가 기독교(개신교) 신자이고 반공 성향이라 자꾸 감시가 들어와요. 공산당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중심인물을 빼버리는 겁니다. 반공 장로를 어디로 납치해서 없애버려요. 이사장인 장로님이 하루는 저를 찾아와 ‘조만식 선생도 오래전 연금됐고, 나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나도 떠날 것이니, 김 선생님도 학교를 포기하고 38선을 넘어. 늦으면 안 돼’라고 하더군요.” ‘민청’ 조직에서 일하던 김 교수의 제자도 ‘선생님을 오래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귀띔했다. “김 장로님이 마지막으로 고향의 팔순 넘은 어머니에게 큰절을 드리고 나오다가 잠복하던 보안서(경찰서)원들에게 잡혔지요. 그 집에서 쭉 올라오면 산에 우리 집이 있었거든요. 내려다보니 장로님을 태운 트럭이 우물쭈물해요. 막냇동생이 헐떡거리며 뛰어오더니 ‘형님, 도망가세요’ 했어요. 얼마 뒤 저는 38선을 넘었습니다.” 월남하는 길, 사리원을 거쳐 해주로 가는 기차에서는 맞은편 승객이 기차가 멎기만 하면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두 놈 잡았어’ ‘한 놈은 끌어내렸어’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월남하는 이들을 잡는 사복 형사였다. 급기야 김 교수는 해주에서 붙잡혔다. 파출소는 38선을 넘다가 붙잡힌 사람들로 가득 찼다. “계장이 전화를 받는데 ‘잡힌 사람 많죠? 평양서 지시가 왔는데, 지금부터 잡히는 사람들은 전부 평양으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어요. 우리는 친척집에 가는 길이라고 둘러댔더니, 다행히 형사가 버스 타는 데까지만 따라오고 보내주더군요. 그 전화가 조금만 일렀으면 아마 조사받고 평양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빨간 스포츠카를 탄 김일성”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계열의 공산주의자가 세를 확대하는 걸 지켜봤다. “조만식 선생이 조선민주당을 만들었잖아요. 정당사회단체 연합회 차원에서 회의를 열고 결정을 하는데, 정당은 노동당과 조선민주당 둘이고, 사회단체는 공산당이 만들어 놓은 조직이 10개가 넘어요. 이쪽은 정직하게 가니 고작 두셋이고, 저쪽은 많으니 조만식 선생이 발언권도 못 가지고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티코프 장군이 남쪽에서 올라간 남로당원, 연안에서 온 김두봉 계열까지 다 견제하더군요. 김일성을 위한 거지요. 김두봉 계열인 제 대학 친구가 노동당 평양선전부장까지 올랐지만 나중에 끝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 자살했습니다.” 우스운 일도 있었다. “소련군이 자꾸 소를 먹겠다고 내놓으라고 그래요. 소가 없으면 농사를 못 짓잖아요. 못 준다고 그랬더니, 강제로 빼앗아가겠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 쪽을 통해 소하고 아기를 위한 가루우유는 못 준다고 했더니 소 한 마리당 닭 몇 마리씩 계산해 이번에는 닭을 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찾아온 소련군 대위가 소가 몇 마리면 닭을 모두 몇 마리 받아가야 하는지 곱하기를 못 해요.” 사실 김 교수의 고향인 대동군 고평면은 김일성의 고향이기도 하다. 광복 뒤 한두 달쯤 지났을까. 김 교수의 초등학교 선배인 김성주(김일성의 본명)가 운전수가 모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났다. “교회 장로님들이 ‘만경대 성주가 오랜만에 왔다고 환영 잔치를 하니 가자’고 했어요. 원래 김일성 집안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지요.” 얼마 뒤 김성주는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의 주인공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냈다. “당시 ‘앞으로 우리나라를 맡아서 이끌 사람’ 등의 문구가 있는 벽보가 많이 붙었습니다. 서재필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일성 같은 이름이 나왔지만 대부분 서울로 돌아올 분들이었죠. 평양으로 올 사람은 김일성밖에 없기에 모두 그를 기다렸죠. 나이는 쉰쯤 됐을 것이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런데 김성주더군요.”○ “인촌, 하지 미군정청장에게 쓴소리” 김 교수는 월남해 1947년 8월 22일 서울에 도착한 뒤 10월부터 중앙중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그가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스승으로 꼽는 인촌 김성수 선생을 만났다. 김 교수는 “독립은 저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만약 국내에 인촌 선생 같은 분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의 독립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어느 날 인촌으로부터 존 하지 미 군정청장을 찾아가 직언했던 얘기를 들었다. 인촌은 하지에게 “내 얘기가 거슬리더라도 고깝게 듣지 말라”며 말을 꺼냈다고 한다. “우리 둘은 친분은 없었지만 한국의 장래를 위해 한두 가지 얘기하고 살자. 당신을 만나고 온 이들이 말이 달라 혼란과 분쟁이 생긴다. 말을 달리하는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다.”(인촌) 설산 장덕수가 통역을 했다. 하지 장군은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인촌이 다시 추궁했다. “며칠 전에도 모 씨에게는 이렇게 약속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달리 말하지 않았나. 이렇다면 당신의 인격과 지도력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제야 하지 장군은 알겠다며 고치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당시 정치인들이 하지 장군의 비위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걱정을 하면서도 침묵하던 차였다”며 “아마 인촌 말고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이 같은 후일담을 들을 정도로 인촌을 가까이 접한 건 6·25전쟁이 계기가 됐다. 중앙중 교사로 일하던 김 교수는 1950년 6월 25일 직감했다. ‘이건 전쟁이다.’ 그는 학교장을 찾아갔다. “전쟁입니다. 교사들 봉급을 석 달 치만 선불해 주시지요.” 교장이 인촌 선생을 찾아가 바로 허락을 받았다. 김 교수는 피란지에서 교사 대표로 인촌을 찾아갔다. “어려운 교사들 사정을 말씀드리니 옆 사람에게 ‘은행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얼마만 남겨놓고 다 찾아오라’고 하시더군요. 돈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주시며 ‘김 선생님이 맡아서 교사들과 나누라’고 해요. 영수증을 써 드리겠다고 하니 ‘됐다’고만 하셨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부인이 월남 뒤 인촌을 만났던 얘기도 김 교수는 전했다. “사모님이 제게 그러셔요. ‘인촌을 만났더니, 38선 넘어 오면 제일 힘든 게 머물 곳인데 만약 거처를 장만 못했으면 도와드리겠다고 했다’고요. 헌데 조만식 선생이 폐 끼치지 말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그냥 나오셨답니다.”○ 독립만세로 맞은 광복의 기쁨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기독교 계열인 평양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교장이 원래 미국 선교사인데, 신사참배를 거부하니 총독부가 학교 문을 닫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500명이나 되는 학생을 차마 황국신민 교육하는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정모 선생님이 대신 나섰습니다. 신사참배가 90도 경례하는 겁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앞줄에 섰거든요. 교장이 되신 정 선생님이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주름잡힌 얼굴에 눈물이 죽 흘러요. 그걸 보고 저도 눈물이 났지요.” 80여 년 전 일을 떠올리는 김 교수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 어른이 우리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하시는구나. 그 모습을 보고 가슴에서 민족의식이 커졌습니다. 만약 그런 행동을 두고 친일이라고 비난한다면 친일파 아닌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정치가 사람의 명예를 함부로 취급하는 건 그 시대를 산 사람은 상상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김 교수는 태평양전쟁 말기 간신히 학병 징집을 피하고 시골인 고향에서 광복을 맞았다. “평양 거리에 있는데 가게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이 나옵니다. 아주 짤막해요. 꿈만 같았지요. 동네로 돌아가니 어데 숨겨놨던 태극기도 나오고, 대한독립 만세도 나오고…. 가까운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이제 나라를 찾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였습니다.” :: 김형석 명예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1943년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 졸업△1947년 중앙중 교사△연세대 철학과 교수(1954∼1985년)△김태길(2009년 별세) 안병욱(2013년 별세)과 함께 3대 철학자로 꼽힘△주요 저서 ‘고독이라는 병’ ‘현대인의 철학’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백년을 살아보니’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나’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집트 스핑크스의 수염 부분은 왜 대영박물관에 있을까? 이탈리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그림 ‘가나의 혼인 잔치’는 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을까? 약탈당한 세계 유명 문화재 10점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그리스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는 1962년 영국에서 영화를 찍다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 있어야 할 조각품을 대영박물관에서 발견하고 이 조각품들을 돌려받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로제타석, 둔황석굴의 고문서, 트로이 왕국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일본인이 약탈한 둔황의 문화재가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사연도 소개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제부터 영원토록 평화와 우정이 함께할 것이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오늘날 시리아와 터키 국경 인근 카데시에서 오리엔트의 패권을 놓고 격돌한 뒤 맺은 평화조약이다. 제3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서로 돕기로 하는 쌍무적 방위 동맹 원칙까지 명시됐다. 자료로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인 이 조약의 효과는 어땠을까. 히타이트가 멸망하기까지 오리엔트 지역은 비교적 오랜 평화를 누렸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이면서, 보복의 연쇄에서 벗어나 생존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얻기 위해 적과 타협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책은 세계사를 뒤흔든 주요 조약 68건의 이야기를 담았다. 강제력 없는 조약은 평화의 가장 큰 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에 충격을 받은 50여 개 국가가 맺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그 예다. “모든 전쟁을 끝내자”는 취지로 맺었지만 막상 전쟁을 막는 수단은 전혀 갖추지 않았고, 체결 10년도 안 돼 2차 대전이 벌어졌다. 책에는 남북한 경제협력 합의서, 한중어업협정,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등 우리나라가 맺은 주요 조약뿐 아니라 북-중 간의 조중변계조약, 핵확산금지조약 등 한반도의 운명과 관련된 조약 이야기도 여럿 담겼다. 2년 만에 깨진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처럼 조약은 힘의 논리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파기되는 것이라는 인식도 있다.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조약은 힘과 이익의 논리를 초월하지 못할지라도 이미 많은 것을 이뤄냈다”며 “세계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으로서 국제 협상과 조약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오늘날의 역사 인식과는 별개로 미래의 역사 서술을 위해 묵묵히 사료를 수집하고 편찬하는 데 힘써야 할 곳이 ‘국사편찬위원회(국편)’다. 14일 동아일보와 만난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무엇보다 국편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편위원장으로 72주년 광복절을 맞는 소감은…. “‘신아구방(新我舊邦·묵은 나라를 새롭게 한다)’이라는 다산 정약용의 말이 생각난다. 해방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진정한 계기였다. 지금이라도 각종 사료에 대한 철저한 정리가 요청된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전국적인 시위정보를 총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계 구축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우해 왔는가, 그 자체도 역사다. 후손들의 증언을 듣는 구술사 작업을 내년부터 착수할 것이다. 제목은 ‘독립운동가 후손 고생담 사료집’ 정도 될까?” 그에게 해방둥이로서 광복절 소감을 다시 묻자 흥미로운 사연이 이어졌다. “사실 제 생일이 1945년 8월 15일이지만 호적에는 큰아버님이 10일로 잘못 올렸다. 해방 전날 이웃집에 일본군에 징집될 이가 있어 사람들이 모여 슬퍼하고 떠드는 통에 어머니는 진통이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저를 낳은 뒤 끌려갈 뻔한 사람들이 다 집에 돌아왔다며 기뻐했다는 말도 들었다. 허허.” ―일본군 ‘위안부’ 정본 사료집 편찬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유엔이나 중국에서 사료집이 나온다 해도 우리의 시각으로 모으고 비판을 거친 사료집이 필요하다. 사료 수집이 부실하면 역사 서술은 사상누각이다. 국편이 꽤 오래전부터 이 작업에 관심을 뒀고, 지난 위원장님 때부터 착수한 사업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맛에 맞는 역사 서술을 시도하는데…. “권력이 역사를 함부로 갖고 놀지 못하게 하려면 국편부터 독립해야 한다. 이 기사 보고 ‘너무 나갔는데…’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다.” ―국편은 앞으로 교과서 검정 업무도 맡지 않나. “국편이 교과서와 무관할 때 설립 목적에 비로소 충실할 수 있다. 2011년 국편이 검정 업무를 맡은 건 교육부 내 국편 담당 부서가 초중등 교육을 관리하는 학교정책실이었다는 단순한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제가 취임 직후 담당 부서를 대학정책실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국사편찬위원회라는 명칭도 바꿀 생각인가. “오래된 과제다. 내부적으로 새 명칭 후보를 추려 공청회 등 합의 과정을 거치고 학계의 동의를 받을 예정이다. 과거에는 국립역사원이나 국립한국사료원 등의 명칭이 대안으로 거론됐다고 한다.” ―국가기록원과의 통합에 찬성한다고 했지만 소속 부처가 달라 쉽지 않을 수 있다. “현대사 사료가 중요한데 해방 이후 사료집이 제대로 편찬되지 못했다. 중요 사료는 비공개로 분류돼 접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상당하다. 많은 국가가 기록 생산 20∼30년만 지나면 사료로 공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과 긴밀하게 협력해 정부 기록을 사료집으로 간행하겠다.” ―취임 후 두 달 동안 일하며 느낀 점은…. “직원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심적 고통이 컸다. 교과서 편찬이 국편의 일이라고 생각한 연구원은 사실 거의 없다. 국정화를 반대하던 단체들이 교과서 편찬에 관여했던 국편 직원의 ‘인적 청산’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직원들은 자진해서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을 받고 공무원으로서 일을 한 것뿐이다. ‘국편 명의의 대국민 사과’도 일부에서 권유받았지만, 이것이 다른 국정화 추진 주체들을 면책하는 일로 인식될 수 있다고 판단해 일단 보류하고 있다. 또 국편 연구직이 현재 40여 명인데 태부족이다. 기존 업무 부담이 적지 않아 새 사업 착수가 쉽지 않아 증원이 필요하다.” ―임기 중 ‘이것만은 꼭 이뤄내겠다’는 것은 무엇인가. “북한까지 포함해 해방 이후 남북한 사료 총서를 내는 것이다. 북한 사료를 평양에 가서 달라고 하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등 해외에서 수집할 수 있다. 북한 역사 연구를 위한 사료도 적극 수집해야 한다.” ○ 조광 국사편찬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가톨릭사 연구의 권위자이자 조선후기 실학과 사상사 연구, 안중근 의사 연구 등에서 업적을 낸 한국사학계 원로다. 원래 신부가 될 생각으로 가톨릭대 신학과를 졸업했으나 역사 연구로 진로를 틀어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와 문과대학장, 한국사상사학회·조선시대사학회·한국사연구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앞으로 교과서 편찬은 물론이고 검정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를 편찬하는 곳이라는 오해를 낳은 ‘국사편찬위원회’라는 이름부터 바꾸겠다. 국편이 정권의 입김에 휘둘려서는 절대 안 된다.” 72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조광 국사편찬위원장(72·고려대 명예교수·사진)의 말에는 학자다운 단정함과 단호함이 함께 느껴졌다. 올 6월 취임한 뒤 두 달이 지난 그를 경기 과천시 국편에서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일 태어나 ‘해방둥이 중의 해방둥이’다. 그는 향후 국편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처럼 정권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그 가운데 사료 편찬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뚜벅뚜벅’ 수행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편은 지난 정부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 편찬 업무를 맡아 논란의 중심에 섰고 2011년부터는 역사 교과서의 검정 업무를 맡기도 했다. 해방둥이로 국편의 수장이 된 그는 광복절을 맞아 짙은 아쉬움도 토로했다. “광복 72주년이 됐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위안부 정본(正本) 사료집 하나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위안부 연구조차도 일본 측이 만든 자료집에 상당 부분 의존해야 하나? 해외에 산재한 일본군 전쟁 범죄 등 자료를 전량 수집, 편찬하는 사업에 최선을 다하겠다.” 조 위원장은 새 정부 들어 정치권 등에서 흘러나온 국편과 국가기록원의 통합설에 관해 “두 기관의 기능이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고, 최고의 협력은 통합”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의 언론인들이 각각 오늘날 일본 우경화의 배경에 있는 조직과 과거 일제의 아시아 침략 실상을 취재해 쓴 책이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일본 우경화를 추동해 온 우파조직 ‘일본회의’를 추적했다. “…빛나는 역사는 잊히고 오욕됐으며, 국가를 지키고 사회 공공에 힘쓰던 기개는 사라졌다.” 1997년 5월 30일 열린 ‘일본회의’의 설립대회에서 메이지 신궁의 신관인 다나카 야스히로가 이사장에 취임하며 발표한 설립 선언 중 일부다. 이 조직은 우파 성향 종교단체 ‘생장의 집’이 1974년 결성한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정·재계 및 학계의 우파가 1981년 만든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통합하며 만들어졌다. 전국에 243개 지부를 갖춘 풀뿌리 운동을 전개하면서 천황 숭배, 헌법 개정, 애국 교육, 역사 수정 등을 목표로 활동한다. 신사 등의 자금 후원을 받으면서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아베 내각의 각료 19명 중 15명이 이 ‘일본회의’에 속해 있다고 한다. 교도통신 기자 출신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일본회의는 전후 일본 민주주의 체제를 사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가해자입니다’는 일본 신문이 2014, 2015년 보도한 특집기사를 재구성했다.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의 침략 과정과 함께 난징대학살, 731부대 만행,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전쟁범죄 중에서도 우익단체가 가장 외면하려 하는 사실들을 파고든다. “병사는 칼로 머리를 벤다. 토민(土民)은 총살.” “사단장 각하 ‘돼지 같은 놈들은 주저 없이 죽여도 된다’.” 중일전쟁에 종군했던 병사의 딸이 아버지가 1937∼39년 쓴 일지를 2015년 여름 아카하타신문에 보내왔다. 토민은 민간인을 가리키고 병사는 포로를 말한다. 일지가 기록한 민간인 살해만 15명이다. 일지를 쓴 고바야시 다로는 1938년 5월 27일 취사병이었던 중국군 포로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담은 연속 사진 3장도 남겼다. “아베 총리는 중일전쟁이 침략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버지의 일지를 보면 애초부터 침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일지가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이 신문은 1928년 일본공산당이 창간했다. 1930년대에도 ‘3·1기념일’ ‘조선민족 해방기념일을 맞아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 등의 논설을 1면에 게재하는 등 제국주의 반대 투쟁의 선두에 섰다. 싱가포르와 말레이반도에서 ‘항일 중국인을 일소한다’며 자행된 민간인 대규모 학살, 1943년 중국 후난성 창자오에서 일으킨 끔찍한 학살, 대만과 오키나와의 ‘위안부’ 등 일본군의 만행이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 분노하더라도 식민 지배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군국주의를 경계하는 양심적인 일본인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두 책은 다시금 하게 만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본 정부가 조사하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이 발간한 ‘종군 위안부 자료집’에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과 운영에 개입했음을 의미하는 언급이 담긴 원본 사료가 고의로 누락됐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2년여의 노력 끝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고에서 발견한 ‘위안부’ 관련 자료를 11일 공개했다. 일본군이 ‘위안부’와 위안소 운영에 개입했다는 사실, 각지에서 운영된 위안소의 규모와 운영 상황 등을 알려주는 사료다. “전투지역에 있는 최전선 군인들에게 강간과 약탈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강간과 약탈을 전쟁의 분리할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여겼던 중국 주둔군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아주 흔했다.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군(軍)은 점령 후 즉각 허가된 공용 위안소를 설립했지만 강간은 흔하게 계속되었기 때문에 많은 말레이시아 여성들은 머리를 짧게 깎거나 남자처럼 옷을 입었다.” 미군이 2차대전 당시 작성한 ‘동남아시아번역심문센터 심리전 시보(時報) 제182호’(시보 제182호) 16쪽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번에 국편이 공개한 사료 중 일부다. 특히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군(軍)은 점령 후 즉각 허가된 공용 위안소를 설립했지만…”이라는 포로의 진술은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의 주체라는 걸 뒷받침하고 있다. 또 같은 사료 18쪽은 “몇 달간 여자를 보지 못했던 일부 군인들이 마을의 소녀들을 강간했다”라고 일본군의 성범죄를 증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이 펴낸 위안부 자료집인 ‘정부 조사 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政府調査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에는 이 같은 내용이 빠져 있다. 이 자료집이 ‘시보 제182호’ 전체 46쪽 중 달랑 4쪽(목차, 표지, 19·20쪽)만 담고 있는 탓이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립’ 등의 진술이 담긴 페이지는 누락됐다. 김득중 국편 편사연구관은 “확인 결과 해당 자료는 46쪽이 한 덩어리로 돼 있는데도 일본군의 개입이 언급된 핵심 부분이 자료집에 빠진 건 고의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5년 일본 민간단체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금’을 모금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기금이 발간한 자료집은 지금까지도 위안부 연구의 기초가 되고 있는 주요 사료집이다. 이 자료집에 중요 진술을 담은 원본 사료가 고의로 누락됐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더 있다. 자료집은 원본 사료의 출처, 즉 일본이나 미국 등 자료 소장처의 상세 소장 정보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일본 방위성’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 와 같은 식으로만 기록해 연구자가 원본을 확인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고를 처음부터 다시 뒤져야 하는 것이다. 김득중 편사연구관은 “이처럼 원본을 확인하기 지극히 어려우면 학자들이 자료집에 포함된 사료에만 근거해 연구하는 방향으로 유도되기 쉽다”며 “헌데 이 자료집은 일부 사료를 번역하면서 일본군의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술의 뉘앙스를 왜곡하고 있기까지 해 문제의 심각성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이 자료집의 ‘포로심문보고서 94번 문서’는 “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아니지만…(the army did not run brothels, but…)”이라는 한 포로의 진술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이라고 원문에는 없는 ‘절대’라는 단어를 임의로 추가하기도 했다. 이날 국편이 공개한 또 다른 사료에는 일본군 위안소의 규모와 운영 상황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일본군 통신 감청과 포로 심문, 일본군 문서 번역 등의 임무를 담당했던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 작성 일본군 심문 보고서 중 일부다. 그중 제91번 보고서는 파푸아뉴기니 라바울 지역에서 1943년 3월 11일 붙잡힌 일본군 하지메 나카지마에 대한 심문이 담겼다. 그는 “위안소가 군의 관리(army supervision) 하에 있다”고 진술했다. 제470번 보고서는 인도네시아 자바 섬 동부 말랑 지역에서 1944년 4월 29일에 체포된 일본군에 대한 심문보고서로 “군의 사법관할(jurisdiction) 내에 7개의 위안소가 설립됐고 조선인과 일본인, 인도네시아인 등 총 15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다”고 나온다. 국편은 지난해 미국과 영국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및 전쟁범죄 관련 사료 2만4000여 장과 단행본 439책, 마이크로필름 255릴을 수집했다. 이들 사료를 망라한 자료집을 올 연말부터 순차적으로 간행해나갈 예정이다. 국편 관계자는 “기존 자료집의 문제를 바로잡은 정본 자료집이 간행되면 ‘위안부’ 연구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그리워하지 마오. 편안히 계시오.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이만.” 1592년 12월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이 경상우도 감사로 부임 도중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다. 넉 달 뒤 그는 여러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 편지는 12월 16일까지 열리는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 성남시 분당구) 장서각의 특별전시 ‘옛사람들의 사랑과 치정(癡情)’에서 볼 수 있다. 전시 도록에서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옛사람들도 오늘날만큼이나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선비 보쌈’ 이야기 등이 담긴 치정 부분은 더욱 놀랍다. 왠지 이름부터 경건한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원 나이트 스탠드’ 뒤에 지은 여성 화자의 사설시조가 들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연구원의 그간 전시를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화려한 그림이나 서예 같은 건 전시에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짬을 내 선인들의 사랑 이야기에 빠져 보면 어떨까. “지난밤 그놈을 차마 못 잊어 하노라”로 끝나는 이 시조의 나머지는? 직접 읽어 보시라.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수없이 많은 독립투사들이 활동했지만 아직도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이가 적지 않다. 한국민족운동사학회는 11일 서울 성북구 한성대에서 제72주년 광복절 기념 학술대회 ‘새롭게 밝히는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를 연다. 미리 받아본 발표문에서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는 1934년 함경남도의 주재소에서 단독으로 무기를 탈취한 ‘함남 권총의거’의 주인공 김춘배(金春培·1904∼1946)의 활동을 들여다봤다. “자경단원을 시켜 콩을 구워먹고 앞잡이 세우고 도주… 어두운 속에서 돌연 발사하는 바람에 목하(木下) 순사부장이 왼편 어깨를 맞고….”(동아일보 1934년 10월 22일자 호외 중) 당시 동아일보 보도로 재구성한 김춘배의 의거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김춘배는 1934년 10월 2일 북청군 신창주재소에 침입해 장총 6정, 기병총 5정, 보병총 1정, 권총 2정과 실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그는 무기 일부를 숨긴 뒤 도주 중 자경단원이 모인 곳에 나타나 식사를 해결하고, 아내를 만나러 집에 들르고, 순사부장의 어깨와 갈비뼈에 총상을 입힌 뒤 기차로 경성으로 가려다가 19일 만에 붙잡혔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과 자경단원 등이 연인원 2만 명 넘게 동원됐다. 황수근 학예연구사는 “김춘배는 1927년 정의부 의용군으로 간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출옥 뒤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에 건너가려 했던 것”이라며 “함남 권총의거는 1934년 국내 항일운동 중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인물들에 대한 발표도 이뤄진다. 황민호 숭실대 교수는 노은 김규식(蘆隱 金奎植·1882∼1931)의 생애를 조명했다. 그는 북로군정서 교관,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등으로 활동한 인물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우사(尤史) 김규식과는 다른 인물이다. 황 교수는 “독립군은 1922년 말 연해주 도처에서 일본군을 철퇴시키기 위한 전투에 참여했다”며 “그해 11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대한독립군이 적군(赤軍)과 함께 우수리스크를 점령할 때 수천 명이었고, 이들의 총사령이 김규식이라고 보도했다”고 말했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 출신으로 북로군정서와 신민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나중소(1867∼1928)의 독립운동에 관해 기조 강연을 한다. ‘1930∼40년대 성북지역의 학생운동’(변은진 고려대 교수)도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와대 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을 원래 위치인 경북 경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진정서가 청와대와 국회에 7일 제출됐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주에서 약탈해 서울로 옮겨진 불상이 지금까지 청와대 경내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진정서를 냈다”고 이날 밝혔다. 이 불상은 1913년 경주금융조합 이사였던 오히라(小平)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에게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7년 경복궁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면서 청와대 관저 뒤편의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이 불상은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형태라서 일명 ‘미남 불상’으로 불린다.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 혜문 대표는 “불상이 경주로 돌아간다면 일제강점기 문화재 약탈 문제를 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 하시마(端島) 탄광에 징용된 조선인 소재의 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는 개봉 닷새 만인 30일 약 400만 명의 누적 관객을 동원했다. 역대 최다 관객 ‘명량’에 견줄 만한 흥행 속도다. 그러나 온라인 리뷰는 대체로 냉랭하다. 한 포털 사이트의 누리꾼 평점은 10점 만점에 평균 5점이 안 된다(관객 평점은 7점대). 핵심은 영화의 ‘국뽕’(배타적이고 지나친 국수주의·민족주의를 비하하는 속어) 논란이다. 심지어 포털 검색창에 ‘국뽕’을 입력하면 연관 검색어로 ‘군함도’가 저절로 뜰 정도다. 일본 관방장관과 한국 외교부 대변인까지 나서 각각 ‘이 영화는 창작물’ ‘역사적 사실이 바탕’이라고 설전을 주고받았다.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 시비도 지속됐다.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하는 이 영화는 29일에만 2019개 스크린에서 1만808회 상영(상영 점유율 55.8%)됐다. 영화 ‘군함도’에 대해 정지욱 영화평론가(50), 관객 곽지윤 씨(27·대학원생), 조종엽 장선희 문화부 기자가 28일 영화 속 다양한 논란을 짚어봤다(기사에 스포일러 있음). ▽곽지윤=보는 동안 크게 지루하진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봤던 상투적 요소들로 가득했어. 딱 흥행만 노린 영화 같다고 할까? ▽정지욱=전형적인 인물, 선악 구도로 상업영화의 전형성을 보여준 거지. 감독의 위상을 생각하면 범작 정도? 최칠성(소지섭)-오말년(이정현)의 러브라인, 이강옥(황정민)-소희(김수안)의 부녀애가 다양한 연령에 어필할 수 있고, 출연 배우 송중기(광복군 소속 특수요원 박무영 역)의 인기를 고려하면 흥행은 성공할 듯. ▽조종엽=도입부 하시마 탄광 갱도 표현이 인상적이었는데 거기서 끝이었어. 온라인에 ‘뻔한 반일영화’란 혹평이 상당해. 군함도라는 소재만 가져왔을 뿐 역사적 진실과 강제징용자의 고통 표현은 뒤로한 채, 허구인 대규모 탈출극과 총격전만 부각했다는 거지.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 ▽정=내 주변 반응은 괜찮던데? 다만 인물의 변화가 예측 가능하고, 그마저도 ‘툭툭 끊어진다는 느낌’이 들더라. ▽장=‘나쁜 조선인’을 넣어서 이분법을 넘어서려 했다는데, 그 때문에 강제동원의 본질적 주체가 일제라는 점이 모호해졌다는 의견도 있더라. ▽조=이분법을 넘어서려면 ‘나쁜 조선인’을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착한 일본인’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일본인 노무자가 조선인 탈출을 방관하는, 딱 한 장면 나오더라. ▽장선희=그랬다면 욱일승천기를 찢는 장면 같은 데서 관객이 통쾌함을 느끼겠어? ‘군함도’는 류승완 감독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장기를 잘 살린 상업영화지, 다큐멘터리는 아니잖아. 일부 혹평은 류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것 아닐까? ▽곽=박무영이 일본인을 단칼에 목 베는 장면은 어땠어? 너무 전형적이어서 실소가 나오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어. ▽조=광복군 요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관동군이나 전국시대 사무라이 같더라. 그렇게 적과 닮은 모습이 거북했어. ▽장=나는 좋았는데? (일동 웃음) 카타르시스를 주잖아. ▽조=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각 독립운동 세력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며 윤학철(이경영)을 구해오라고 지목하는데, 그 정도의 인물을 ‘민족의 배신자’로 묘사하는 건 말이 안 돼. 류 감독 영화가 엘리트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번에는 심한 듯해. ▽정=류 감독이 커다란 틀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되 내용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고 했잖아.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장=하지만 류 감독도 실제 역사를 모티브로 했다고 분명히 했는데, 일본 정치인이나 극우 매체가 ‘날조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는 뻔뻔한 일이야. ▽조=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를 보면 보편적 울림을 갖는 게 많잖아.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장벽 세우고 하는 현실 문제가 있는데도 그런 영화 보면 유대인 수난사에 동정적이게 된다고. 그런데 식민 지배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일본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손잡고 ‘군함도’ 보러 가자고 할 수 있을까? ▽정=일본 관객에게 보이기에는 일본어 대사부터 완성도가 떨어져. ▽곽=극장에서 오전 10시 45분, 11시, 11시 20분…, 이렇게 계속 ‘군함도’만 틀더라. ▽정=한 영화가 스크린을 2000개 넘게 차지하는 건 거의 폭력 수준 아닌가. 한 800∼1000개 스크린만 해서 오래 상영해도 될 텐데. ▽장=류승완 감독한테 일본인까지 설득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아.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 더구나 군함도를 모르는 국내 관객도 태반일 텐데, 강제징용 문제에 관심을 갖게 했잖아? 그것만으로도 점수를 주고 싶어. 정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황금박쥐’(1967년) ‘우주소년 아톰’(1970년) ‘마징가Z’(1975년) ‘캔디’(1977년) ‘독수리 오형제’(1979년) ‘은하철도999’(1981년)…. 이제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 시대 자라난 한국인 다수에게 ‘추억의 애니메이션’이 된 이 애니메이션들은 모두 일본산이다.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금지됐던 시절이기에 방영이 국회에서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은 당시 어린이 시간대 편성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그뿐 아니다. 공식적으로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건 1998년이지만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일본 소설, 만화, 가요 등을 대중은 자연스럽게 소비했다. 이 같은 수십 년의 경험은 한국에서는 ‘한류’ 이전의 ‘지우고 싶은 기억’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는 ‘혐한론’을 떠받치는 ‘한국의 문화적 후진성’으로 규정돼 있다. 책은 일본 대중문화 금지와 그를 뛰어넘는 문화의 역동성을 ‘금지의 구축’ ‘금지 메커니즘’ ‘금지의 해체 과정’으로 나누어 살폈다. 광복 이후 언론들은 왜색(倭色) 척결에 나섰다. 해방공간에서 ‘탈식민화’ 작업이었던 일본 대중문화 금지는 박정희 정권 들어 ‘정치적 검열’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극심해지자 당시 큰 인기를 누리던 ‘동백 아가씨’를 ‘왜색풍’이라며 방송 금지한 것도 그 예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는 부산까지 닿는 방송 전파나 해적판 음반 등을 통해 경계를 넘었다. 문화사회학자로 일본 홋카이도대 교수인 저자는 일본 대중문화 ‘금지론자’나 ‘개방론자’의 입장에서 책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생각은 자신이 일본어로 쓴 책을 옮긴 이번 한국어판 서문에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정말이지, 문화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힘을 들여 경계를 긋고, 바깥의 존재를 ‘위험하고 불결한 것’으로 규정하고 공고한 방어 장치를 작동시켜도, 어느새 뒤섞여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과 만나게 되는 그 과정이야말로 문화이며, 삶의 방식인 것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이사장 영담 스님)이 주관한 ‘2017년 제15회 재외한국어교육자 국제학술대회’가 22일 폐막했다. 이번 대회는 ‘인류의 지적 유산―아름다운 한글’이란 주제로 세계 29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어 교육자 60여 명과 외국인 교육 관계자 등 83명이 참가했다. 17일부터 열린 이번 대회에서는 한국어 교육 정책 방향과 한글의 과학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재외 한국어 교육자들의 학술포럼에서는 ‘대학·성인 학습자 대상 한국어 교육 주제’와 ‘초중고 학습자 대상 주제’에 관한 과제가 발표됐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한국어학당 교수를 초청한 ‘찾아가는 한국어학당 수업’과 함께 ‘해외 한국어 보급 정책’ ‘태국의 한국어 교육 운영 사례’ ‘한국어 교육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토론도 열렸다. 교육부와 외교부, 문체부가 공동 개최한 ‘세계한국어교육자대회’도 18, 19일 진행됐다. 재외한국어교육자 국제학술대회는 △재외 한국어 교육자들의 자질과 전문성을 높이고 △교수법을 상호 교류하며 △교육자들 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3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경제 침체 속에서 포퓰리스트들이 대중의 지지를 어떻게 얻어냈는지 살펴본 책이다. 사실 포퓰리즘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꽤 애매하다. 해제를 쓴 서병훈 숭실대 교수의 말마따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는 ‘대중영합주의’나 사회적 약자들의 참여 확대라는 현상을 강조하는 ‘민중주의’ 모두 마뜩잖다. 책은 단어 정의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포퓰리스트로 불리는 사람, 운동, 정당을 배타적으로 정의할 만한 일련의 특성은 없다.” 정치적 성향에서도 포퓰리즘은 좌우와 중도를 막론한다. 책은 인민당(1890년대 만들어진 미국 정당)에서 조지 월리스(우익 포퓰리스트 정치인)까지 미국 포퓰리즘의 논리를 살핀다. 또 지난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침묵하는 다수’와 민주당 경선에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며 버니 샌더스 후보를 지지한 이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사실 샌더스도 무역협정과 해외투자에 관해 트럼프와 의견이 일치했다. “무역협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는 샌더스 역시 포퓰리즘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저자는 본다. 유럽 좌·우익 성향 포퓰리즘도 이 책은 분석했다. 미국의 정치 분야 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포퓰리즘의 득세를 ‘조기 경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이슬람교를 극단주의 종교로 보거나 공개적 탄압을 옹호하는 건 분명 잘못됐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최하층 이민자 공동체와 관련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고심하고 있다. 실제로도 최하층 이민자 공동체는 복지국가에 필요한 대중의 신뢰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곱씹을 만한 얘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5일 중국 지안(集安)시의 고구려 유적 답사 중 태왕릉(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에서 동행이 돌무더기 속 기와조각(사진)을 주워 기자에게 건넸다. 손가락 자국이 두 개, 지문이 선명했다. 1600년 전 기와를 구운 고구려 도공의 지문일 게다. ‘한국인 최고(最古)의 지문 발견’이라는 1면 기사 제목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시간을 초월해 지문 주인과 잠깐 이런 대화도 나눴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한국(韓國)이면 남쪽에 있던 작은 나라들을 말하는 건가?” “조선인입니다.” “옛 나라를 다시 세웠는가?” “좀 복잡한데…, 어쨌든 당신과 같은 고려(Korea)인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는 연인(燕人)과 도공 모두 중화민족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우리 대왕이 모용씨(연의 왕족)와 그리 전쟁을 치렀는데….” 변경의 민족주의가 불안했을 2000년대야 그렇다 치고, 지금 중국은 ‘G2’ 아닌가. 대다수 한국인들은 만주 수복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으니 ‘족보 왜곡’은 그만두길. 어쩌면 정복지 출신 노예였을 수도 있는 지문의 주인 역시 선린과 평화만을 바라지 않았을까.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존 고(古)천문학 연구는 수학으로 분석해야 할 부분이 상당 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 전공인 계량경제학의 수학으로 들여다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더군요.”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의 연구총서 ‘서운관의 천문의기’(경인문화사)를 출간한 정기준 서울대 명예교수(76)는 최근 서울대 연구실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는 논문이 미국의 계량경제학 교과서에서 다뤄진 경제학자다. 지난해에는 제25회 수당상을 받기도 했다. “고천문학은 천체가 있는 3차원 공간을 2차원의 구면인 천구(天球)로 바꾼 뒤, 투영을 통해 이를 다시 평면으로 환원시켰습니다. 이를 이해하는 데는 다차원의 수량을 그보다 낮은 차원으로 바꾸는 계량경제학의 ‘좌표변환과 투영’ 기법이 매우 유용합니다. 사실 이 기법 자체가 원래 천문학과의 관련 속에서 발전한 것이죠.” 정 교수는 정년퇴임 뒤인 2006년부터 고천문학과 고지도를 파고들었다. 이 책은 여말선초 천문 관측기관인 서운관에서 사용한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원모습과 제작 원리를 탐구한다. 그는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의 원래 모습에 관해 새로운 의견을 밝혔다. 세종 당시 제작한 앙부일구를 복원한 모형들에 마치 조선 후기 앙부일구처럼 ‘영침’(影針·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늘)이 사용된 건 잘못됐다는 것이다. “앙부일구가 시간과 절기를 정확히 나타내려면 수평, 방위를 똑바로 맞추는 일과 더불어 천구의 중심 위치가 정확해야 합니다. 조선 후기 앙부일구에서 ‘영침의 끝’이 자리한 곳이지요. 그러나 세종 대 앙부일구는 영침이 아니라 남북으로 가로질러 ‘둥근 막대’(圓距·원거)를 설치하고 정중앙에 ‘겨자씨 같은(芥然·개연)’ 구멍을 내 그리로 햇빛이 통과하도록 했습니다.” 정 교수는 조선 후기 앙부일구 모형 중에서도 엄밀하지 않게 복원된 것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복궁 사정전 앞에 있는 앙부일구 모형은 정확히 중심에 있어야 할 영침의 끝이 옆에서 봤을 때 살짝 위로 튀어나와 있어요.” 기자가 경복궁에서 살펴보니, 일부러 신경을 써야 보이기는 했지만 0.5cm가랑 돌출돼 있는 건 사실이었다. 정 교수는 국립과천과학관에 복원 전시돼 있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세종 대 처음 제작된 해시계이자 별시계)는 “눈을 대고 관측하는 구멍이 있어야 할 자리가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천문서에 비해 조선의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1795년 편찬된 천문서) 같은 책은 더 이해하기 어렵고, 틀린 구석도 적지 않습니다. 중국은 서양의 천문학 지식을 선교사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 탓입니다.” 정 교수는 “세종 이후 숙종 때까지 한양의 ‘북극고’(北極高·오늘날 위도와 비슷한 개념) 관측에 관한 기록이 없다”며 “세종 이래 열심히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천문을 관측해 온 서운관이 독자적 관측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건 풀리지 않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정조 독살설’에는 영남 남인들의 정치적 입장이 깊숙이 반영돼 있습니다. 정조가 진짜 독살됐느냐를 따지기 전에 어떤 맥락에서 독살설이 전해졌는지가 중요하지요.” 연구서 ‘조선왕실의 의료문화’(민속원)를 최근 낸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50)는 14일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는 책에서 정조 독살설의 기원과 확산 과정을 살폈다. 개혁군주 정조가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에 의해 독살됐다는 정조 독살설은 1990년대 이후 소설과 사극, 대중역사서 등을 통해 확산됐지만 이후 학계에 의해 반박돼 왔다. 책에 따르면 1800년 정조의 죽음 당시에는 노론과 대립한 남인들 사이에서도 독살설이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김 교수가 주목한 건 당시 남인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하와일록(河窩日錄)’이다. 김 교수는 “안동의 류의목(1785∼1833)이 남인이었던 할아버지 류의춘에게 들려오는 소식을 기록한 책인데, 당시 류의춘에게 전해진 정조의 죽음은 독살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말했다. 독살설의 뿌리에는 인동 장씨 집안의 비극이 있다. 1800년 인동부사 이갑회는 인동 장씨 집안의 장현경이 “(노론) 심환지가 정조에게 독약을 올리도록 했다”고 말했다고 ‘역모의 기미’를 보고한다. 장현경 집안은 역모를 꾸민 것으로 몰려 풍비박산 난다. 시골에 전해진 소문이 ‘역사’에 남게 된 것이다. 김 교수는 “하와일록은 이 사건 역시 광인이나 ‘망한(妄漢·망령된 놈)’이 저지른 해프닝으로만 봤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인동 장씨 역모 사건은 이후 영남 남인에 대한 정치 탄압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서술됐고, 이 집안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남인 전체의 신원(伸원)이 걸린 문제로 확대됐다. 정조의 독살설 역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근대에 들어 정조 독살설이 ‘역사적 사실’로 제기된 것도 이 같은 남인들의 집단적 기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독살설을 다시금 소개한 건 영남학파의 거유(巨儒) 면우 곽종석(1846∼1919) 문하에서 수학한 경북 울진 출신의 최익한(1897∼사망연도 미상)이다. 그는 1939년 동아일보 연재에서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중 인동 장씨의 억울한 이야기에 관해 쓴 ‘기고금도장씨여자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를 근거로 정조 독살설을 주장했다. 김 교수는 “남인들의 정치적 재기를 바랐던 다산의 고금도 기사가 없었다면 정조 독살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독살설의 기원과 확산에 담긴 당파성을 고려하지 않는 건 사료의 의도적인 오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인동 장씨 후손들이 이 같은 기록을 남긴 다산의 은혜를 갚기도 했다. 인동 장씨인 위암 장지연과 일제강점기 대구 경일은행의 설립자인 장길상이 ‘여유당전서’ 간행을 추진했고, 장길상이 위당 정인보에게 초고 원고를 넘겨줬다. 사실 책 ‘조선왕실의…’에서 정조 독살설에 관한 내용은 말미의 한 절에 불과하다. 책은 왕실의 출산 문화, 식치(食治·음식물로 몸을 조리하는 것), 왕의 온행(溫幸·온천행차) 등을 통해 왕실의 의료가 성리학적 가치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탐구한다. 김 교수는 “조선은 몸을 다스리는 일과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 행위의 원리가 동일했다”며 “정치와 의료 모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시중(時中)’을 찾고, 병의 예방을 중요시하는 한편, 왕도와 패도의 조화를 추구했다”고 설명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종교학자의 눈으로 인류 진화의 역사를 바라봤다. 스페인의 고원 지대인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동굴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 인간의 두개골에는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이 2개여서 누군가 주먹도끼 같은 무기로 되풀이해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여기서 구약성서에서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두개골은 최초의 살인사건에 대한 증언이고, 당시 인간 사이의 갈등을 볼 수 있는 창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인간의 폭력성보다 이타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같은 동굴에서는 치명적인 선천성 두개골 기형을 앓았던 5세가량의 어린아이 뼈도 발견됐다. 생후 1년 동안 증상이 현격하게 나타나는 병인데도 5세까지 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 헌신적으로 돌봤다는 뜻이다. 저자는 “인류는 함께 모여 살면서 갈등이 생겨나고, 자신들이 개발한 무기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약자를 돌보는 배려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며 “인간의 위대한 여정은 스스로를 ‘이타적 동물’로 변모시켰다”고 했다. 고인류학 소재의 기존 교양서들과 차별화되지 않는 부분도 꽤 되지만 저자의 전공인 고전문헌학과 연결되는 서술 등은 특히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을 ‘안트로포스’로 불렀는데 이는 ‘얼굴을 위로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한다. 저자는 “눈이 양옆에 달려 자신을 공격하려는 다른 동물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동물과 달리 생존을 위해 대상을 관찰하면서 눈이 정면으로 이동한 인간이라는 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