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주

손효주 기자

동아일보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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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효주 기자입니다.

hjson@donga.com

취재분야

2026-05-27~202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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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차례 이상 전투기 출격, ‘전설’에게도 죽음의 충격이…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93·예비역 대장)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 최초로 100차례 이상 전투기 출격을 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100회 출격을 한 영광의 그날이 그에겐 전쟁 중 가장 착잡했던 날이기도 했다. 그가 겪은 6·25와 소회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3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여의도 논둑에 몸을 숨겼다. ‘저거 다 부서지면 큰일인데. 한 번 타보지도 못했는데….’ 애태우며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정오였다. 북한군 야크 전투기 대여섯 대가 여의도 공군기지 상공에 나타났다. 곧장 격납고(항공기 보관·정비 시설)에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격납고는 벌집이 됐다. 격납고엔 T-6 10대가 있었다. T-6는 그해 5월 초까지 캐나다에서 들여온 ‘건국기’였다. 비무장 정찰기밖에 없던 공군을 위해 국민 성금 3억5000만 원을 모아 마련한 훈련기였다. 6월 25일까지도 공군엔 전투기가 없었다. T-6는 그나마 전투기 대신 투입해볼 만한 유일한 기종이었다. 나는 T-6 탈 날만 고대하던 스물세 살 중위였다. 종이연 수준의 L-5, L-4 정찰기만 조종하던 내게 T-6는 꿈의 항공기였다. 그 귀한 항공기가 눈앞에서 고철이 될 위기였다.●200대 vs 0대 25일 아침 서울은 평온했다. 장승백이 하숙집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오전 9시쯤 동기 전봉희 중위와 함께 노면 전차를 탔다. 극장에 가던 길이었다. 한강인도교에 들어서던 찰나 비행기 굉음이 전차를 뒤덮었다. 당시 공군 항공기는 L-4, L-5 정찰기 12대와 T-6 10대가 전부였다. 하늘에 낯선 항공기 2대가 보였다. “이야, 저 비행기는 뭐지?” 얼마 전 영국 항공모함이 인천항에 입항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사이렌이 울렸다. 헌병 차량이 질주해왔다. “국군 장병은 즉시 부대로 귀환하라.” 안내방송이 반복됐다. 항공기 정체는 북한군 전투기였다. 공군 조종사임에도 북한군 전투기를 몰라볼 만큼 우리는 전투기에 대해 무지했다. 이튿날 등장한 미군 F-80 전투기 연료 탱크를 보고는 비밀 무기라고 여길 정도였다. 북한은 소련에서 지원받은 전투기와 지상공격기를 200대 가까이 확보해놓고 있었다. ‘전투기 한 대 없이 어떻게 싸우나….’ 군용 차량을 타고 여의도로 가는 길. 막막함이 밀려왔다.●전투기 없는 맨손 전투 그날 저녁 L-5를 타고 문산(경기 파주시) 상공에서 내려다본 전황은 서글펐다. 북쪽에선 소련제 155mm 포가 남쪽을 향해 무더기로 불을 내뿜고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포탄은 없었다. 군인 한 명이 105mm 포를 끌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 정도 열세면 나는 정찰기만 타다가 죽겠구나.’ 죽을 운명이라면 T-6 훈련기를 타다가 죽고 싶었다.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26일 밤 기회가 왔다.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T-6 탈 자신 있나”라고 물었다. T-6를 타던 선배들은 미군 F-51D 전투기를 긴급 지원받기 위해 그날 일본으로 갔다. 그 덕에 온 기회였다. 다행히 격납고에 있던 T-6 중 9대는 북한군의 집중 포화가 비켜가 멀쩡했다.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27일 동이 트기도 전에 여의도기지로 달려갔다. 아무리 조종이 쉬운 기종이라도 기종 전환 훈련에는 2, 3개월이 걸린다. 나는 교관도 없이 1시간가량 비행한 뒤 T-6로 전환했다. 전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곧바로 문산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됐다. 단번에 끝장내겠다는 패기와 달리 철교 인근 상공에서 구름에 갇혀버렸다. 구름 속에선 계기(計器)비행(계기에 의존해 고도 등을 측정해 비행하는 것)을 해야 하지만, 나는 계기비행 훈련을 못 받은 상태였다. 기체가 뒤집혔다. 추락하던 비행기는 지표면을 40m 남겨두고서야 수평을 되찾았다. 후방석 정비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렸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얼이 빠져 있었다. 그날 공군은 후방석 탑승자가 폭탄을 안고 있다가 100여 m 초저고도에서 맨손으로 투하해가며 싸웠다. 폭탄걸이가 있는 건 항공기 22대 중 2대가 다였다. 경기 의정부, 서울 미아리고개 등 북한군이 내려오는 전선 곳곳에서 소형 폭탄 270발을 거의 다 썼다. 공군이 보유한 폭탄 전부였다. 북한군 전차 대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역대 최강의 소련제 T-34 전차 240여 대에 장갑차까지 앞세우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고민했다.●운 좋은 사람 27일 저녁 서울이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공군은 수원으로 철수했다. 나는 이후 대전 등으로 기지를 옮기며 출격을 거듭했다. 수차례 죽을 위기를 겪었다. 7월 6일 T-6를 타고 평택에 갔다가 시커멓고 긴 행렬을 발견했다. T-34 전차였다. 모두 몇 대인지 확인하는 순간 전차포 수십 발이 날아들었다. 7월 9일엔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있던 트럭을 목표로 폭격에 나섰다. 폭격 결과를 확인하려는데 ‘꽝’ 하는 소리가 났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대공포 탄흔이 선명했다. 간발의 차이로 조종석을 비켜갔다. 전쟁 기간 “나는 참 운이 좋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 전쟁은 계속됐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는 늘었다. 6월 30일 조명석 대위(추서 계급)를 시작으로 공군이 연이어 전사했다. 조종사들은 공포심을 잊으려 출격 전날 밤에도 술을 마셨다. 1951년 5월엔 조종사 한 명이 여의도기지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1950년 7월 도입된 F-51D 전투기를 타고 몇 차례 출격했던 그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나” 하며 울었다.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중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다. 통곡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최초 100회 출격의 슬픔 개전 후 1년 반 가까이 나는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다. 두려움과 공포는 남의 일이라 여겼다. 그런 내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년 1월 9일이었다. 그날 F-51D 3대로 편대를 이뤄 출격했다. 1950년 10월부터는 나도 F-51D를 탔다.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 북한군 보급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문제는 창도리에서 발생했다. 나와 다른 조종사가 1, 2차 폭격을 한 뒤 후배 이일영 중위(추서 계급)가 폭격하는데 대공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다.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저공비행을 하며 그를 찾아 헤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강릉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나는 백지상태였다. 본능적으로 조종했을 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비행할 때면 늘 후련했던 하늘이 그날은 버거웠다. 그간 동료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눈앞에서 동료가 전사한 건 처음이었다. 기지에 돌아와 그의 전사를 보고했다. “뭐 어떻게 하겠나”라는 읊조림이 돌아왔다. 이틀 뒤, 북한군 보급기지를 파괴한 후 강릉기지에 착륙하자 정비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한국군 최초의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다고 했다.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쳤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하는데….’ 1952년 1월 13일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 투입된 것을 끝으로 경남 사천기지로 갔다. 후배 조종사 양성 임무를 부여받고서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됐다. 하늘에 바친 청춘들을 생각하면 나라가 반으로 갈라진 채 휴전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40년 만의 비행 2015년 6월 23일. 원주 공군기지에서 40년 만에 조종복을 입었다. 최초의 국산 전투기 FA-50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국산 전투기를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다. 비록 후방석에 앉았지만 88세이던 나는 20대 조종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상공에서 본 조국은 아름다웠다. 6·25 때 산야는 헐벗은 황톳빛이었다. 1950년 8, 9월 T-6를 타고 정찰한 낙동강과 인근의 산은 핏빛이었다. 유엔 공군의 공습이 한 차례 끝나면 능선엔 북한군 시체 수백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나라가 초록빛이 돼 있었다. 고속도로까지 뻗어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자니 감개무량했다. 올해 1월 9일엔 이일영 중위 추모식에 다녀왔다. 생전에 이 중위가 전사한 곳에 가보고 싶다.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강산댐이 생겼다는데 그가 산화한 곳이 수몰되진 않았을까. 일영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가 살아 있다면 덕담이나 나누며 함께 늙어갈 텐데. 해마다 6·25가 되면 그 친구 생각이 많이 난다. 6·25 기간 공군 수십 명(조종사 27명 등 84명)이 전사했다. 그들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젊음을 창공에 묻었다. 그들의 희생이 아직 결실을 맺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다. 여생엔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한다. 전쟁은 비참한 일이다. 그런 비참한 일이 후대에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말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 마음으로는 아직도 현역 시절처럼 창공을 가를 수 있을 것만 같다.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 202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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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상미종 생식빵’ 매일 먹어도 속이 편안해요

    파리바게뜨는 식빵 본연의 맛에 집중한 프리미엄 식빵 ‘상미종 생(生)식빵’을 선보였다. ‘상미종’은 SPC식품생명공학연구소가 서울대, 충북대와 함께 15년간 토종 유산균과 토종 효모의 혼합 발효에 관한 연구를 지속해 지난해 개발에 성공한 발효종이다. SPC그룹 모태가 된 제과점인 ‘상미당(賞美堂)’에 ‘차원이 다른 건강한 맛’이라는 뜻을 더해 ‘상미종’으로 명명했다. 상미종 생(生)식빵은 다른 식빵에 비해 첫 식감이 훨씬 쫄깃쫄깃하다. 입안에서는 부드럽게 풀어지는 등 갓 지은 밥 같은 식감을 자랑한다. 식빵 크러스트(빵의 겉면)도 얇아 가장자리 마지막 한 입까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수 공법을 이용해 반죽을 긴 시간 발효하고 숙성해 매일 먹어도 속이 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꿀, 버터, 생크림을 넣어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은은한 맛도 특징. 그대로 먹었을 때도 맛있지만 생크림, 아몬드스프레드, 각종 잼 등을 곁들이면 다채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다. 파리바게뜨 관계자는 “상미종 생(生)식빵은 식빵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것”이라며 “파리바게뜨는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차원이 다른 베이커리 식문화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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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장에서 희망은 ‘살자, 살아남자’뿐… 다른 꿈은 꿀 수 없었다”

    《8만9600명. 정부에 등록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중 지난해 12월 현재 살아있는 이들이다.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생존자 수는 18만6315명이었지만 9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줄었다. 6·25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우리 나이로 90세다. 동아일보는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6·25 참전용사들이 직접 전쟁의 참상과 후대에 남기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취재진이 만난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각자의 전쟁 이야기는 6·25 전쟁사의 숨겨진 퍼즐이었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이근엽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90)는 이등중사(현재의 병장) 시절인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이 나왔지만, 이를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에야 수훈한 잊혀진 영웅이었다. 이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몸소 겪은 날것의 전쟁 이야기다. 》 지옥에서 빠져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쟁 없는 공기’였다. 트럭 한 대가 산 중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52년 늦봄이었다. 전쟁통에도 봄은 왔다. 중부전선 오성산(강원 김화군·현재 북한) 고지를 벗어나 서울로 가는 길. 트럭 짐칸에 앉아 둘러본 전쟁 한복판의 봄은 허허벌판이었다. 사람들은 종적을 감췄다. 생명력 잃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입대 1년 반 만의 첫 휴가였다. 그간은 여러 번 휴가를 포기했다. 고향이 함경남도 함흥이어서 휴가를 가봐야 갈 곳도, 만날 이도 없어서였다. 당시 중대장 편부만 대위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집으로 휴가 가면 되지 않느냐”며 등을 떠밀었다. 편 대위 집이 있는 종로로 가는 내내 이른 뙤약볕을 받고 앉아 산야를 구경했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서울에서의 2박 3일 휴가 기간 대부분 잠을 잤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계속되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38선 중심의 고지 쟁탈전은 치열했다. 한밤중 계속되는 진지 이동과 전투에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유엔군이 공습을 실시하는 낮을 피해 야간에 집중 공격했다. 한 밤중 소변을 보러 나간 전우는 머리에 조준사격을 받고 죽었다.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밤은 공포였다. 먹고 자는 것 외에 휴가 중 한 유일한 일은 종로의 극장에 간 것이었다. 점령과 수복, 재점령과 재수복을 겪은 서울은 폐허를 방불케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극장을 채우고 있었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 구경을 했다. 영상이 빛을 터뜨리며 관객석을 밝혔다. 그때마다 웃음기 머금은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어쩌다 사람 죽는 곳, 그것도 한복판에 들어가게 됐나.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군복을 입고 M1 소총을 세워놓은 채 앉아있던 나는 총구를 이마에 갖다 댔다. ‘여기서 죽을까. 지금 죽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방아쇠를 당기자.’ 하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전장에서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죽은 전우를 볼 때면 그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는 이는 없었다. 현실의 죽음은 비장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이처럼 “엄마” 하고 중얼거리며 죽는 이들을 나는 여러 번 봤다. 광복 이후 내겐 남쪽의 대학에 다니고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내 꿈은 “살자, 살자”뿐이었다. 다른 꿈을 꿀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전쟁은 낭만이 아닌 죽는 일 1950년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해도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북한 체제와 소련을 혐오하고 남한과 미국을 동경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미군 전투기가 지나갈 때는 산꼭대기에 올라 러닝셔츠를 벗어 흔들며 반겼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기만을 고대했다. 1950년 10월 수도사단이 함흥에 왔다. 나를 포함한 함흥남부교회 청년들은 그해 12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 안 가려고 나이를 열 살씩 올리는 식으로 호적을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사나이로서 치사해보였다. 12월 14일부터 흥남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그즈음 어느 저녁, 나는 미군 수송선(LST)에 올랐다. 나와 다른 훈련병들은 함정 아래 선창(船倉)에 몸을 실었다. 밤새 파도 소리가 새어 들었다. 동이 트고 배에서 내려보니 묵호항(강원 동해시)이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새벽 5시부터 밤까지 훈련을 했다. 소총을 쏘고 얼어붙은 논밭 위로 포복했다. 훈련병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전방에 보내 달라. 싸우고 이겨서 고향에 가겠다.” 저마다 아우성이었다. 나는 전쟁을 낭만적인 무언가로 생각했다. 전방에 투입된 건 1951년 5월(중공군 제6차 공세)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 소총수로 첫 전투에 나섰다. 강원 양양군 오색리 350m 고지 전투였다. 그날 ‘전쟁의 낭만’은 끝났다. 첫날 투입된 1중대 병력 대부분이 전사했다. 뒤이어 2중대가 진격하는데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북한군 수류탄이 바위에 부딪힌 뒤 제멋대로 튀며 폭발했다. 전술도 작전도 무의미했다. 죽고 사는 건 그저 운이었다. 9분 능선부터 일제히 돌격해 올라가보니 머리가 깨진 북한군 시체가 가득했다. 우리 중대도 16명이 전사했다. 밤새 시체를 옮겼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 죽는 곳에 왔구나. 순간 철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방엔 영웅도 낭만도 없었다. 전방은 죽는 곳이었다. 수도사단은 이후 중공군 주도의 공세가 이어진 가리봉, 향로봉 등으로 진지를 이동하며 전투를 치렀다. 전투 현장에서 나는 미군 병사가 건네준 노래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총탄에 죽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해 10월 공비 토벌 임무를 맡아 후방에 가기까지 매일 “살자, 살자” 되뇌었다.● 전장 최고의 행운은 부상 후방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52년 봄 김화로 투입됐다. 트럭에 실려 다시 최전방으로 향하는 길. 나는 무덤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최전방은 쉴 틈이 없었다. 내 꿈은 그즈음 바뀌었다. 부상당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하면 후방에 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살아있으면 고생이요, 죽으면 행복이요, 부상당하면 100만 달러”라고 말하곤 했다. 부상은 병사에게 전장 최고의 행운이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지(死地)에도 희망을 가진 이는 있었다. 1952년 가을 윤필효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나를 불러 “곧 휴전이 될 거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도 종종 물었다. 1953년 1월 초엔 고향인 경남 함안으로 휴가를 가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했다. “휴전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너는 고향에 갈 수 없으니 함안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도 했다. 그는 내게 남쪽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일주일 후 윤 중위는 전사했다. 1월 15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김화군 원남면에 구축한 우리 진지를 공격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대장 벙커엔 윤 중위가 쓰러져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쥔 채였다.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중공군은 휴전 직전 최후의 공세에 돌입했다. 7월 13일 밤 소대장은 “우측 5사단이 무너졌다. 우리가 포위되고 있다. 제2방어선으로 이동하라”고 소리쳤다. 금성전투의 서막이었다. 나는 죽자 사자 뛰었다. 1연대가 2500명쯤이었는데 제2방어선에 모인 병력은 600명이 안돼 보였다. 14일 밤엔 부슬비가 내렸다. 중공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그날 백암산(강원 화천)에 있던 나는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을 맞았다. 다리와 머리에 파편이 박혔다. 적정(敵情)을 살피려는 섬광탄이 연이어 터졌다. 나는 혼자였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고 고지로 올라갔다. 배가 고팠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건빵은 비에 젖어 밀가루 반죽이 돼 있었다. 이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섬광탄이 또 터졌다. 산 아래를 보니 국군 차량 수십 대가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휴전이 코앞이었다. 대검으로 칡넝쿨을 끊어내며 아래로 향했다. 새벽 4시쯤 되자 큰길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국군 앰뷸런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속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쳤다. 나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부산 제5육군병원에 도착했다. 미군이 구호품으로 준 분유를 따뜻한 물에 타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먹어보는 우유의 온기가 몸 곳곳에 퍼졌다. 이제는 살았다 싶었다. 나는 인간 세상에 돌아와 있었다. 8개월간 병원 생활을 했다. 그사이 휴전(1953년 7월 27일)이 됐다고 했다. 휴전은 내게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살았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기억은 힘이 없다”지난해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 훈장이 나왔다는데 전쟁통이라 까맣게 몰랐다. 지난해 9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전쟁 당시 수도사단)에 가 훈장을 받았다. 사단에선 장갑차를 내보내 나를 연병장 사열대까지 태워갔다. 사단장과 장병들이 나와 예우를 다했다. 하사(당시 일등중사)로 전역한 나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날 후배 장병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전쟁이 나면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해야 합니다.” 여생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각성시키는 글을 쓰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기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시신을 후송할 겨를조차 없어 산 아래 아무렇게나 묻어둔 내 전우들을 누가 기억해 줄까. 죽기 전에 잠든 전우들이 있는 백암산에 가보려 한다. 초목 무성해진 그곳에서 그들은 편히 쉬고 있을까. **이제는 다 잊고 고이 쉬게나. 종달새 울음소리가 나거든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주시게. 나는 젊은 당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철의 삼각지대’서 전투 치러…금성전투서 중공군에 부상 ▼이근엽 전 교수가 6·25전쟁 당시 주로 전투를 치른 북한의 강원 김화군은 철원군, 평강군과 함께 중부전선 최대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다. 철의 삼각지대는 38선 일대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서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아군과 중공군, 인민군 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 저격능선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등 유명한 고지 쟁탈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대에서의 아군 사상자만 2만4000여 명에 이른다. 전쟁 기간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그가 부상당한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19일 김화군 금성면, 원남면 등에서 벌어진 6·25전쟁 마지막 대규모 전투다. 당시 중공군은 7월 13일 15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유엔군이 1951년 10월부터 확보한 금성돌출부(전선이 헬멧처럼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를 차지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수도사단, 5사단 등 국군 6개 사단은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한 뒤 반격해 ‘아이슬란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회복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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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장에서 희망은 ‘살자, 살아남자’ 뿐…다른 꿈은 꿀 수 없었다”

    《8만9600명. 정부에 등록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중 지난해 12월 현재 살아있는 이들이다. 2010년 12월까지만 해도 생존자 수는 18만6315명이었지만 9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줄었다. 6·25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우리 나이로 90세다. 동아일보는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와 공동으로 6·25 참전용사들이 직접 전쟁의 참상과 후대에 남기고 싶은 말을 전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취재진이 만난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각자의 전쟁 이야기는 6·25 전쟁사의 숨겨진 퍼즐이었다. 소총수로 참전했던 이근엽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90)는 이등중사(현재의 병장) 시절인 1953년 6월 화랑무공훈장이 나왔지만, 이를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에야 수훈한 잊혀진 영웅이었다. 이 전 교수와의 인터뷰를 1인칭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몸소 겪은 날것의 전쟁 이야기다. 》 지옥에서 빠져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 공기를 실컷 들이마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쟁 없는 공기’였다. 트럭 한 대가 산 중턱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52년 늦봄이었다. 전쟁통에도 봄은 왔다. 중부전선 오성산(강원 김화군·현재 북한) 고지를 벗어나 서울로 가는 길. 트럭 짐칸에 앉아 둘러본 전쟁 한복판의 봄은 허허벌판이었다. 사람들은 종적을 감췄다. 생명력 잃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입대 1년 반 만의 첫 휴가였다. 그간은 여러 번 휴가를 포기했다. 고향이 함경남도 함흥이어서 휴가를 가봐야 갈 곳도, 만날 이도 없어서였다. 당시 중대장 편부만 대위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집으로 휴가 가면 되지 않느냐”며 등을 떠밀었다. 편 대위 집이 있는 종로로 가는 내내 이른 뙤약볕을 받고 앉아 산야를 구경했다. 어쩌면 다시 못 볼지도 모를 풍경이었다. 서울에서의 2박 3일 휴가 기간 대부분 잠을 잤다.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계속되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38선 중심의 고지 쟁탈전은 치열했다. 한밤중 계속되는 진지 이동과 전투에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유엔군이 공습을 실시하는 낮을 피해 야간에 집중 공격했다. 한 밤중 소변을 보러 나간 전우는 머리에 조준사격을 받고 죽었다.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했다. 밤은 공포였다. 먹고 자는 것 외에 휴가 중 한 유일한 일은 종로의 극장에 간 것이었다. 점령과 수복, 재점령과 재수복을 겪은 서울은 폐허를 방불케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극장을 채우고 있었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사람 구경을 했다. 영상이 빛을 터뜨리며 관객석을 밝혔다. 그때마다 웃음기 머금은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어쩌다 사람 죽는 곳, 그것도 한복판에 들어가게 됐나. 저들은 저렇게 자유로운데….’ 내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군복을 입고 M1 소총을 세워놓은 채 앉아있던 나는 총구를 이마에 갖다 댔다. ‘여기서 죽을까. 지금 죽지 않으면 다시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다. 방아쇠를 당기자.’ 하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진 못했다. 전장에서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린 채 죽은 전우를 볼 때면 그 모습이 내 모습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의연하게 죽는 이는 없었다. 현실의 죽음은 비장하지 못했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아이처럼 “엄마” 하고 중얼거리며 죽는 이들을 나는 여러 번 봤다. 광복 이후 내겐 남쪽의 대학에 다니고 영어 공부를 해보자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내 꿈은 “살자, 살자”뿐이었다. 다른 꿈을 꿀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전쟁은 낭만이 아닌 죽는 일 1950년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해도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북한 체제와 소련을 혐오하고 남한과 미국을 동경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미군 전투기가 지나갈 때는 산꼭대기에 올라 러닝셔츠를 벗어 흔들며 반겼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기만을 고대했다. 1950년 10월 수도사단이 함흥에 왔다. 나를 포함한 함흥남부교회 청년들은 그해 12월 국군에 자진 입대했다. 군대에 안 가려고 나이를 열 살씩 올리는 식으로 호적을 바꾸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사나이로서 치사해보였다. 12월 14일부터 흥남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그즈음 어느 저녁, 나는 미군 수송선(LST)에 올랐다. 나와 다른 훈련병들은 함정 아래 선창(船倉)에 몸을 실었다. 밤새 파도 소리가 새어 들었다. 동이 트고 배에서 내려보니 묵호항(강원 동해시)이었다. 기상나팔이 울리면 새벽 5시부터 밤까지 훈련을 했다. 소총을 쏘고 얼어붙은 논밭 위로 포복했다. 훈련병들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전방에 보내 달라. 싸우고 이겨서 고향에 가겠다.” 저마다 아우성이었다. 나는 전쟁을 낭만적인 무언가로 생각했다. 전방에 투입된 건 1951년 5월(중공군 제6차 공세)이었다. 수도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 소총수로 첫 전투에 나섰다. 강원 양양군 오색리 350m 고지 전투였다. 그날 ‘전쟁의 낭만’은 끝났다. 첫날 투입된 1중대 병력 대부분이 전사했다. 뒤이어 2중대가 진격하는데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북한군 수류탄이 바위에 부딪힌 뒤 제멋대로 튀며 폭발했다. 전술도 작전도 무의미했다. 죽고 사는 건 그저 운이었다. 9분 능선부터 일제히 돌격해 올라가보니 머리가 깨진 북한군 시체가 가득했다. 우리 중대도 16명이 전사했다. 밤새 시체를 옮겼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 죽는 곳에 왔구나. 순간 철이 들었다. 그때부터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전방엔 영웅도 낭만도 없었다. 전방은 죽는 곳이었다. 수도사단은 이후 중공군 주도의 공세가 이어진 가리봉, 향로봉 등으로 진지를 이동하며 전투를 치렀다. 전투 현장에서 나는 미군 병사가 건네준 노래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총탄에 죽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해 10월 공비 토벌 임무를 맡아 후방에 가기까지 매일 “살자, 살자” 되뇌었다.● 전장 최고의 행운은 부상 후방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52년 봄 김화로 투입됐다. 트럭에 실려 다시 최전방으로 향하는 길. 나는 무덤으로 가는 기분이었다. 최전방은 쉴 틈이 없었다. 내 꿈은 그즈음 바뀌었다. 부상당하는 것이었다. 부상당하면 후방에 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살아있으면 고생이요, 죽으면 행복이요, 부상당하면 100만 달러”라고 말하곤 했다. 부상은 병사에게 전장 최고의 행운이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지(死地)에도 희망을 가진 이는 있었다. 1952년 가을 윤필효 중위가 중대장으로 부임해 왔다. 그는 나를 불러 “곧 휴전이 될 거 같다”고 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도 종종 물었다. 1953년 1월 초엔 고향인 경남 함안으로 휴가를 가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했다. “휴전이 되면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너는 고향에 갈 수 없으니 함안에서 나와 같이 살자”고도 했다. 그는 내게 남쪽 고향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일주일 후 윤 중위는 전사했다. 1월 15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김화군 원남면에 구축한 우리 진지를 공격했다. 전우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중대장 벙커엔 윤 중위가 쓰러져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쥔 채였다.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해 7월 중공군은 휴전 직전 최후의 공세에 돌입했다. 7월 13일 밤 소대장은 “우측 5사단이 무너졌다. 우리가 포위되고 있다. 제2방어선으로 이동하라”고 소리쳤다. 금성전투의 서막이었다. 나는 죽자 사자 뛰었다. 1연대가 2500명쯤이었는데 제2방어선에 모인 병력은 600명이 안돼 보였다. 14일 밤엔 부슬비가 내렸다. 중공군의 총공격이 이어졌고, 그날 백암산(강원 화천)에 있던 나는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파편을 맞았다. 다리와 머리에 파편이 박혔다. 적정(敵情)을 살피려는 섬광탄이 연이어 터졌다. 나는 혼자였다. 소총을 지팡이 삼아 짚고 고지로 올라갔다. 배가 고팠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건빵은 비에 젖어 밀가루 반죽이 돼 있었다. 이를 입으로 욱여넣었다. 섬광탄이 또 터졌다. 산 아래를 보니 국군 차량 수십 대가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더군다나 휴전이 코앞이었다. 대검으로 칡넝쿨을 끊어내며 아래로 향했다. 새벽 4시쯤 되자 큰길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국군 앰뷸런스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속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쳤다. 나의 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부산 제5육군병원에 도착했다. 미군이 구호품으로 준 분유를 따뜻한 물에 타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먹어보는 우유의 온기가 몸 곳곳에 퍼졌다. 이제는 살았다 싶었다. 나는 인간 세상에 돌아와 있었다. 8개월간 병원 생활을 했다. 그사이 휴전(1953년 7월 27일)이 됐다고 했다. 휴전은 내게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살았으면 그걸로 된 것이었다.● “기억은 힘이 없다” 지난해 뒤늦게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 훈장이 나왔다는데 전쟁통이라 까맣게 몰랐다. 지난해 9월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전쟁 당시 수도사단)에 가 훈장을 받았다. 사단에선 장갑차를 내보내 나를 연병장 사열대까지 태워갔다. 사단장과 장병들이 나와 예우를 다했다. 하사(당시 일등중사)로 전역한 나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날 후배 장병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전쟁이 나면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평화통일을 해야 합니다.” 여생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도록 각성시키는 글을 쓰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할 수 없다. 기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시신을 후송할 겨를조차 없어 산 아래 아무렇게나 묻어둔 내 전우들을 누가 기억해 줄까. 죽기 전에 잠든 전우들이 있는 백암산에 가보려 한다. 초목 무성해진 그곳에서 그들은 편히 쉬고 있을까. **이제는 다 잊고 고이 쉬게나. 종달새 울음소리가 나거든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주시게. 나는 젊은 당신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오.**▼ ‘철의 삼각지대’서 전투 치러…금성전투서 중공군에 부상 ▼ 이근엽 전 교수가 6·25전쟁 당시 주로 전투를 치른 북한의 강원 김화군은 철원군, 평강군과 함께 중부전선 최대 격전지인 ‘철의 삼각지대’다. 철의 삼각지대는 38선 일대 전략적 요충지이자 동서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 요지여서 아군과 중공군, 인민군 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이다.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 저격능선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4일) 등 유명한 고지 쟁탈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철의 삼각지대에서의 아군 사상자만 2만4000여 명에 이른다. 전쟁 기간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 중 한 곳이다. 그가 부상당한 금성전투는 1953년 7월 13~19일 김화군 금성면, 원남면 등에서 벌어진 6·25전쟁 마지막 대규모 전투다. 당시 중공군은 7월 13일 15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유엔군이 1951년 10월부터 확보한 금성돌출부(전선이 헬멧처럼 북쪽으로 돌출된 지역)를 차지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수도사단, 5사단 등 국군 6개 사단은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한 뒤 반격해 ‘아이슬란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회복했다.손효주기자 hjson@donga.com}

    •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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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년만에 GAP 인증농가 10만호 돌파… 안전 먹거리 보증수표로

    경남 함양안의농협사과작목반은 지난해 설날 전후로 큰 성과를 거뒀다. 작목반 내 10개 농가가 도내 무역회사에 도매시장에 파는 것보다 2.8배 높은 가격에 사과를 납품한 것. 이들 농가는 2016년 국가 인증인 농산물우수관리(GAP) 인증을 받았다. 작목반 이대준 대표는 “GAP 인증으로 안전한 사과라는 점이 입증된 것이 좋은 가격을 받은 결정적 이유였다”며 “지난해 GAP 인증 농가를 작목반 내 73개 농가까지 확대한 만큼 올 추석엔 납품 물량도 늘어나고 농가 소득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6년 국내에 도입된 GAP 인증 농가가 10만 가구를 돌파했다. 12일 농림축산식품부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2016년 7만4973가구였던 GAP 인증 농가 수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다 지난해 말 기준 10만 가구를 넘어섰다. 전체 농가(102만 가구)의 10%가량이 GAP 인증을 통해 안전성이 입증된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GAP 인증은 생산부터 수확, 저장 등 관리, 유통에 이르기까지 용수, 토양, 저장 시설 등 농업 환경과 농약 등 유해 요소를 안전하게 관리한 농가의 농산물을 국가가 인증하는 제도다. 농가엔 일반 농산물 생산 및 출하의 기본을 지키게 하고, 국민에겐 보다 안전한 농산물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제도 도입 취지다. GAP 인증 농가가 10만 가구를 돌파한 데는 함양안의농협사과작목반처럼 농가의 적극적인 참여는 물론이고 유통업체의 요구도 큰 몫을 했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는 판매 농산물에서 농약이 검출되는 등 문제 발생 시 후폭풍이 큰 만큼 GAP 인증을 계약 기본 조건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기존 거래 농가에도 계속 거래하려면 GAP 인증을 받아올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 GAP 제도를 운영하는 농식품부의 설명이다. 최근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언택트(비대면) 구매’가 활성화되면서 GAP 인증 여부로 농산물의 안전성을 판단한 뒤 구매를 결정하는 소비자도 증가하는 추세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유통업체 GAP 인증 요구는 물론이고 소비자의 GAP 인증 농산물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GAP 인증을 받으려는 농가가 크게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농식품부는 현재 토양 및 수질 등 안전성 검사 비용을 100% 국고로 지원하는 등 GAP 인증 각 과정에 드는 비용 상당 부분을 지원하고 있다. GAP 인증 농가의 판로를 확보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도 진행 중이다. 농산물품질관리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GAP 정보서비스’에는 지난해 7월부터 ‘출하정보 서비스’가 신설됐다. GAP 인증 농가가 농산물 출하 관련 각종 정보를 올려놓으면 유통업체가 관련 정보를 본 뒤 해당 농가에 연락해 납품 협상을 진행하도록 유도하는 서비스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GAP 인증을 받은 뒤 이를 홍보에 활용해 농산물을 납품하는 방식으로 소득을 늘리는 농가도 증가하고 있다”며 “GAP 인증 농가 수를 늘려 국민들이 더 안전한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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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한국군을 북한군 변호인으로 만들었나[국방 이야기/손효주]

    “군 생활을 수십 년간 했지만 군이 이렇게까지 북한을 변호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북한군이 우리 군 감시초소(GP)에 총격을 가한 3일 이후 한 군 간부가 한 말이다. 현역 군인인 만큼 우리 군 편에 서려 해봐도 이번 사안에 대한 군의 대응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 당국이 사건 발생 당일 진행한 언론 브리핑의 초점은 북한군 변호에 맞춰져 있었다. 당시 군 관계자는 우리 군 대응사격은 몇 시에 이뤄졌는지, 북한군과 우리 군이 각각 이용한 총기 종류가 무엇인지 등 총격 사건 발생 시 기본적으로 공개해온 사건 개요조차 함구했다. 그 대신 어떤 대응 조치가 이뤄졌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가운데 “현장에서 우리 군의 대응은 잘 이뤄졌다”고 ‘셀프 평가’했다. 군은 당일 대응 조치에 대해 군사 보안을 지키는 선에서 조목조목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것이 잘한 조치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사건 팩트에 기반해 판단하는 언론과 국민의 몫이다. 더 큰 문제는 군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군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의 질의에 앞서 진행한 사건 설명의 상당 부분을 군이 왜 이번 총격을 북한의 우발적 오발로 평가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짙은 안개로 시계(視界)가 나빴던 점 등 의도적 도발로 볼 수 없는 서너 가지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북한군이 근무교대를 하며 화기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발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이 역시 군은 객관적인 팩트만 제시하면 될 일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이번 총격이 의도적 도발인지, 실수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언론과 국민이 할 일이지 사건 당일 군이 앞장서서 할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건 개요가 당장 파악할 수 있는 것인 데 반해 북한의 의도는 심도 있는 조사를 거친 뒤 보다 신중하게 결론내야 할 부분이었다. 군은 정반대로 사건 개요는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보류하면서도 의도성 여부에 대해선 전례 없이 신속하게 답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이상 지난 11일 현재도 군은 구체적인 사건 개요에 대해선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가 조사 중이어서 추후 설명하겠다”는 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말은 결국 사안에 대한 관심이 식은 다음에는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건과 연관된 군 고위 관계자들은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군은 총격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 군 GP를 언론에 공개할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GP 외벽의 북한군 고사총 탄흔은 이번 총격이 우발적 오발인지를 가려줄 결정적 증거다. 현역 장교인 A는 “2018년 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남북 초근접 GP 시설물을 철거할 때는 굴착기 진입부터 모든 과정을 연일 생중계하다시피 하며 GP 곳곳을 공개했던 게 군 아니냐”며 “파격 공개까지 불사하던 군이 이번엔 ‘GP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공개하기 어렵다’며 비공개 방침을 고수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가 필요한 사안은 GP를 공개하면서 정작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최소한의 공개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선 ‘GP의 특수성’을 명분으로 난색을 표하는 등 원칙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군 내부에선 이태원 클럽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군 내부까지 번지면서 GP 총격 사건에 집중됐던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분산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는 데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번 사건의 진실은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분명한 건 북한을 변호하는 듯한 태도와 사건 현장인 GP는 물론이고 사건 개요 공개조차 꺼리는 모습은 군답지 않다는 것이다. 군의 이런 모습은 남북 대화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통일부를 연상시킨다. 북한을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분단국가의 군은 냉정하게 군사·안보적 판단만 하면 될 일이다. 대북 유화책이 정부 정책 기조라고 해도 통일부 역할까지 하며 북한 변호인을 자임하는 분단국가 군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손효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hjson@donga.com}

    • 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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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시간씩 재봉질… 면마스크 1만장 만든 군무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면서 해군 장병들이 마스크 수급에 어려움을 겪을 것에 대비해 면 마스크를 손수 제작해 공급한 군무원의 사연이 27일 알려졌다. 주인공은 해군 군수사령부 보급창 병참지원대 피복·세탁팀 조미혜 군무주무관(47·여·사진). 조 씨가 면 마스크 제작에 뛰어든 건 2월 23일 코로나19 경보 단계가 ‘심각’으로 격상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해군 수병들에겐 KF94 마스크가 보급되고 있었지만 부사관, 장교 등 간부들은 마스크를 각자 구해야 했다. 그러나 마스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에 군부대 측에선 의류학과 출신으로 의류 제작 강사 경력이 있는 조 씨에게 면 마스크 제작이 가능한지 물어왔다. 함정, 잠수함, 지휘통제실 등은 밀폐된 공간 특성상 집단 감염 위험성이 높아 간부들이 면 마스크라도 확보해 놓는 것이 시급했다. 조 씨는 부대의 문의를 받자마자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행동에 나섰다. 성인용 마스크 제작 경험이 없던 그는 인터넷에 올라온 마스크 제작 영상부터 뒤졌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견본 3개를 만들었다. 이때부터는 의류 부자재 시장을 돌며 원단을 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마스크 5000장가량을 만들 수 있는 면 100% 고밀도 원단을 확보했다. 이런 추진력을 바탕으로 조 씨는 문의를 받은 지 만 이틀도 되지 않은 2월 25일 오전부터 마스크 생산에 들어갔다. 피복·세탁팀 팀원은 물론이고 재봉틀을 조금이라도 다룰 줄 아는 병참지원대 군무원까지 16명이 동원됐다. 마스크 대란이 이어진 3월 한 달은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까지 근무하며 마스크 생산에 온 힘을 쏟았다. 하루에 길게는 10시간 이상 재봉틀을 돌렸다. 조 씨와 동료들이 최근까지 만들어 낸 면 마스크는 1만2000여 장. 이 중 약 1만 장이 함정, 잠수함, 지휘통제실에서 근무하는 간부에게 지급됐다. 3월 9일부터 마스크 5부제가 시행되면서 수급이 안정됐다고 하지만 함정, 잠수함 근무 간부들은 긴 시간 바다에서 근무해야 해 5부제 일정에 맞춰 마스크를 구매하기 어려웠다. 이들에게 면 마스크는 그 무엇보다 유용한 보급품이었다. 조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비상 상황에서 주어진 임무인 만큼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최선을 다해 마스크를 만들었다”며 동료들과 공을 나눴다. 조 씨와 동료들의 목표는 이달 말까지 면 마스크 1만3000여 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만든 마스크를 쓰고 지나가는 간부들을 볼 때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탠 것 같아 뿌듯하다”며 “목표량을 모두 생산해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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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신선한 원두의 풍미가 살아있다… ‘카누’만 있으면 여기가 카페

    편리함과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편리미엄(편리함+프리미엄)’ 소비족이 늘어나면서 국내 프리미엄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의 관련 상품 개발 경쟁이 뜨겁다. 동서식품이 선보이는 ‘맥심 카누 시그니처’는 이 같은 트렌드를 선도하는 대표 상품이다. 커피전문점 못지않은 풍부한 맛의 프리미엄 커피를 집에서도 간편하게 즐기려는 소비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어서다. 비결은 커피 추출액을 얼린 뒤 수분을 제거하는 향보존동결공법(아이스버그·iceberg)에 있다. 원두에서 추출하는 커피 양을 줄인 저수율 추출공법으로 원두 본연의 신선한 맛과 풍부한 향을 살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동서식품은 소비자 반응에 힘입어 지난달 용량을 0.9g으로 줄인 ‘카누 시그니처 미니’ 2종을 출시했다. 소비자들이 작은 컵으로 좀 더 간편하게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편의성을 높인 제품이다. 한국인의 음용 습관에 가장 적합한 용량으로 언제 어디서나 한번에 마시기 좋은 양으로 만들었다. 패키지는 포장 상단을 삼각지붕 모양의 디자인으로 차별화를 꾀했다.동서식품은 카누 시그니처 미니 출시에 맞춰 카누 시그니처 2종도 리뉴얼했다. 기존 카누 시그니처의 양이 다소 많다는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용량을 2.1g에서 1.8g으로 14% 줄였다. 이를 반영해 가격도 14% 낮춰 카페 아메리카노를 보다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카누 시그니처와 카누 시그니처 미니는 ‘카누 시그니처 다크 로스트’와 ‘카누 시그니처 미디엄 로스트’ 등 2종으로 구성돼 있다. 커피 취향에 따라 고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카누 시그니처 다크 로스트’는 풍부한 산미(酸味·신맛)가 특징인 케냐 원두와 묵직한 보디감이 매력인 과테말라 원두를 섞어 와인처럼 깊은 산미와 초콜릿처럼 짙은 향을 느낄 수 있다. ‘카누 시그니처 미디엄 로스트’는 케냐, 과테말라, 브라질, 에티오피아 등 4가지 원두를 최적의 비율로 섞어 한층 더 부드러운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 원두 특유의 향긋한 꽃향기를 그대로 살려 보다 풍성한 커피 향을 즐길 수 있다. 옥지성 동서식품 마케팅 담당자는 “카누 시그니처는 카페에 가지 않고도 언제 어디서나 신선한 원두커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프리미엄 커피”라며 “동서식품은 앞으로도 점차 다양해지고 까다로워지는 소비자들의 커피 취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폭넓게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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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간 최고 미사일 전문가’ 장영근 교수 “北미사일은 코로나와 비슷…”

    “북한 발사체는 코로나19와 비슷하다. 피해를 줄일 순 있어도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다는 점에서다. 탄도미사일이든 순항미사일이든 방사포든 북한이 실전에서 쏘면 우리는 일단 맞은 뒤 방역하듯 대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 장영근 한국항공대 항공우주기계학부 교수는 북한이 단거리 지대함 순항미사일을 쏜 14일 이같이 말했다. 연구용 인공위성 ‘한누리 1호’ 개발자이기도 한 장 교수는 과거 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이었으며 현재는 한미연합사령부 자문위원으로 활동중이다. 민간 최고의 미사일 전문가로 꼽힌다. 이날 강원 문천 일대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2017년 6월 8일 쏜 미사일(KN-19)과 같은 탄종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미사일은 2017년 6월 당시 지상에서 발사된 다음 해수면과 불과 3~5m 떨어진 고도에서 초저공 비행을 한 뒤 가상의 적 함정을 족집게 타격했다. 해수면에 바짝 붙어 비행하는 이런 방식을 쓰면 미사일을 사전 탐지해야 할 우리 군 레이더망이 무력화되면서 요격 대응시간이 짧아져 요격이 어려워진다. 총선 하루 전 요격이 어려운 위협적인 대남 타격용 무기를 3년 만에 다시 발사한 셈이다. 북한은 이 순항미사일 외에도 지난해 5월 미사일 도발 재개 이후 한반도에 배치된 한미의 미사일 요격망을 무력화하기 위한 발사체를 최근 1년간 연이어 등장시키고 있다. 한국군이 구축 중인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의 빈틈을 노린 발사체 개발에 사활을 건 듯하다. 장 교수를 만나 북한의 대남 타격용 미사일 기술 진전 현황과 한미의 요격 가능성 등을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 북한은 지난해 5월 이후 사실상의 탄도미사일인 초대형 방사포를 포함해 대남 타격 전력인 단거리 탄도미사일만 발사해왔다. 그런 북한이 총선 하루 전 대뜸 순항미사일을 들고 나왔다. 게다가 이날 전투기까지 동원해 공대지미사일 사격 훈련도 했다고 한다. “한국군 당국이 북한의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점을 겨냥한 행보로 보인다. 탄도미사일뿐만 아니라 지대함 순항, 공대지미사일 등 다른 대남 실전 타격용 미사일 수준도 북한이 최근 개발 중인 탄도미사일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과시하는 것이다. 실제 전쟁을 할 때 사용할 미사일을 백화점식으로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 긴장을 끌어올리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 순항미사일은 최고 속도가 마하 1이 되지 않는다. 탄도미사일은 단거리라도 보통 마하 5가 넘는데…. 속도가 느린 만큼 요격도 쉬운 것 아닌가. “북한은 순항미사일을 최대한 낮게 비행하게 하는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속도가 아무리 느려도 낮게 날면 사전 탐지가 어렵다. 사전 탐지는 요격 작전의 시작이다. 사전 탐지가 늦어지면 요격이 불가능하다. 일단 맞아야 한다. 14일 북한이 순항미사일을 쏜 시간이 오전 7시인데 이 사실을 군이 발표한 시간은 점심시간이 지나서였다. 군 당국이 순항미사일 발사 궤적 포착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는 증거 아니겠나.” 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순항미사일이 아침 7시부터 발사된 건 맞지만 이후에도 공대지미사일을 쏘는 등 북한 군사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상황이 모두 정리된 뒤 발표하느라 늦어진 것이다. 북한 순항미사일을 탐지하는 감시·정찰 자산에 레이더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자산이 있다. 레이더로 사전 탐지하는데 한계가 발생할 경우 다른 자산으로 보완 탐지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 북한이 최근 잇달아 쏘고 있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은 어떤가. 요격이 가능한까? 군 당국은 지난해 남북 미사일 전력을 비교한 자료까지 내며 “패트리엇으로 북한의 신형 미사일을 충분히 요격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북한이 최근 1년 내에 발사한 북한판 이스칸데르, 북한판 에이태킴스, 초대형 방사포는 모두 하강 단계에서 거의 수평으로 비행한 다음 급상승(풀업·Pull-up)하는 등의 요격 회피 기동을 한다. 포물선 궤도로 하강하는 일반적인 탄도미사일과 비행 경로를 다르게 설계해 한국군이 구축 중인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를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물론 요격 회피 기동의 맹점은 있다. 요격을 회피하기 위한 수평 비행 과정에서 공기 저항으로 비행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맹점이다. 속도가 느려지면 요격도 쉬워진다. 요격 회피 기동이 오히려 요격을 쉽게 하는 양날의 검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북한이 한국군 요격하기 좋으라고 속도가 느려지는 수평 비행 구간을 길게 설계하겠는가. 요격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가능한 짧게 설계할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어느 구간부터 수평 비행을 할지 예측이 불가능하게끔 미사일 마다 수평 비행 고도를 달리 설계해 혼란을 주려할 것이다. 북한이 실전에서 미사일을 쏠 경우 ‘나 잡아봐라’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뛰어가는 식으로 쏘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군 당국은 요격을 자신하며 요격 회피 기동 시 미사일 속도가 오히려 느려진다는 점을 대표적인 근거로 들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접근이다.” - 그렇다고 군이 “우리 사실 다 못 막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하면 관련 데이터를 최대한 확보해서 요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해야 맞다. 무턱대고 다 요격할 수 있다면서 지나친 낙관론을 펴는 건 정반대로 모두 요격할 수 없다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한 미사일은 정치적으로 봐선 안 된다. 기술적으로 냉정하게 봐야 한다. 군 당국은 마치 어차피 전쟁은 안날 것이고 요격 무기를 실전에서 검증받을 일은 없을 테니 일단 마구 말하고 보는 듯하다.” - 요격이 어렵다면 북한이 최근 개발 중인 단거리 탄도미사일 3종 세트를 실전 사용하면 우리는 맞을 수밖에 없나. “현실적으로 그렇다. 북한이 한국군이 요격하기 좋으라고 딱 한 개 종류의 미사일만 그것도 요격하기 좋은 속도로 쏘겠는가. 실전에선 3종을 동시에 쏘는 식으로 무차별 공격해 요격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요격을 한다는 건 피해를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지 피해가 하나도 없도록 모두 막는다는 뜻은 아니다. 요격 작전을 그나마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적의 미사일 관련 데이터가 최대한으로 축적돼있어야 하는데 군 당국이 최근 1년간 북한이 발사한 대남 타격용 단거리 탄도미사일 관련 데이터를 그만큼 확보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군은 기술적 의미에서 ”막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에서 ”막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듯 하다.” - 미국의 북한전문매체 38노스는 최근 북한이 지난달 21일 시험발사한 ‘북한판 에이태킴스’ 탄도미사일을 두고 비행거리가 410km 일 때 500kg 이상의 핵탄두 탑재가 가능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실제 이 미사일에 사용된 로켓모터가 뭔지는 공개된 정보가 거의 없어 정확히 모르지만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 저각 발사하고 회피 기동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무게 650kg 탄두 탑재 시 최대 407km(정점고도 48km)를 날아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북한의 핵탄두 소형화(무게 기준 1000kg 이하)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이미 600kg 이하로 소형화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에 기초하면 지금도 충분히 탑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외관이 짧고 뚱뚱한 점도 핵탄두 탑재가 가능하다는데 무게를 싣는 대목이다. 다만 실제 전쟁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탑재한 북한판 에이태킴스를 사용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핵무기는 실전용이라기 보다 억제용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 대남 실전 사용 시엔 재래식 탄두를 탑재한 뒤 3종을 마구 섞어 쏠 가능성이 크다. - 북한의 최근 1년간 미사일 기술 진전에 대해 종합 평가를 한다면? ”북한이 지난해 5월 도발을 재개한 이후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3종을 속속 내놓자 대부분 ‘북한이 1년 만에 엄청난 기술 진전을 이뤘구나’라고 생각하더라. 그런데 북한은 10년 전부터 최근 단거리 탄도미사일 기술의 기반이 되는 고체추진제 개발에 사활을 걸어왔다. 이미 10여 년 전에 고체연료 미사일 KN-02를 개발했고 이를 계기로 기습 타격에 한층 유리한 고체연료 미사일로 북한 미사일 라인업을 죄다 교체하고 있다. 오랜 연구의 결실을 최근 1년 내에 한꺼번에 거두는 것뿐이다. 그것이 러시아나 중국 미사일을 들여와 이를 역설계하는 식으로 사실상 베낀 것이든 아니든 북한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무서운 속도로 미사일 기술을 진전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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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부대는 어쩌다 ‘나물 캐기 좋은 곳’이 됐나[국방 이야기/손효주]

    2년 전쯤, 기자는 긴박한 장면을 목격했다. 차량 한 대가 국방부 위병소를 지키던 군사경찰(헌병)의 검문 요구에 불응하더니 돌진한 것. 군사경찰 여러 명은 차량을 뒤쫓으며 “정지하라”고 외쳤다. 이외에 별다른 대책은 없어 보였다. 상황은 차량이 100여 m를 질주한 뒤 스스로 멈춰서면서 종료됐다. 차량 탑승자는 국방부 산하 외부기관 직원이었다. 국방부 출입 차량은 보안 문제로 사전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는 국방부에서 열린 회의에 지각하자 마음이 급해져 미등록 차량으로 돌진했다고 한다. 이 남성은 군부대 침입에 준하는 행위를 했지만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은 그에게 부대를 위해(危害)할 목적이 있었는지 등을 파악하는 선에서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최근 잇따른 군부대 침입 사건으로 군이 여론의 포화를 받고 있다. 7일 민간인이 제주 해군기지에 침입한 사건이 시작이었다. 16일엔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방공진지에 민간인이 침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앞서 1월엔 진해 해군기지에, 지난해 10월엔 해군작전사령부에 민간인이 침입했다. 지난해 6월 북한 목선의 삼척항 귀순 등 잇따른 경계 실패 사건으로 얻은 ‘당나라 군대’라는 오명을 떼어내나 싶던 군은 또다시 모욕적인 수렁에 빠졌다. 물론 군의 경계 실패는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경계는 모든 작전의 기본이어서다. 문제는 장병들이 침입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침입 사건에 대해 군을 무작정 비난할 수만도 없는 이유다. 군 수사기관 관계자는 “철통 경계 태세를 갖춘다고 해도 작정하고 돌진해버리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호소했다. 장교 A는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등에는 수하해도 불응하거나 도주할 경우 초병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적이 아닌 이상 과잉 대응 비판을 감수하고 차량을 향해서라도 총기를 사용할 병사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목격한 차량 돌진 사건에 대해 군사경찰이 발만 구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 안팎에서 경찰 등 민간 수사기관에서 민간인의 군부대 침입 사건을 보다 엄정하게 수사하고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부대에 무단으로 들어가면 엄벌에 처해진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는 초병 폭행 등이 동반되지 않은 군부대 침입 사건에 대해선 민간인에 대해 군이 수사할 권한이 없다. 군은 대공용의점 유무만 판단한 뒤 경찰에 사건을 인계한다. 침입으로 피해를 입은 군이 직접 수사하지 않는 탓에 훈방 처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물을 캐러 갔다”거나 “술에 취해 실수로 들어갔다” “고기가 잘 잡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갔다”고 하면 없던 일이 되기 일쑤다. 기소되더라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박한기 합참의장은 19일 경찰청장에게 군사시설을 무단 침입한 민간인을 강력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협조 서신을 보냈다. 최근 국방부도 법무부에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군의 이런 협조 요청에는 민간 수사기관의 엄단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는 인식이 반영돼 있다. 군의 한 법무관은 “언론에 보도된 군부대 침입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며 “엄벌이 이뤄지지 않는 데다 향후 상비병력 감소까지 진행되면 침입 사건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대민 관계를 의식해 침입 사건을 유야무야해 온 군도 자성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제주기지 사건의 경우 철조망을 절단하는 등 사안이 중대해 군이 경찰에 군 형법상 군용시설 등 손괴 혐의 등을 적용한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군은 다른 사안에 대해선 ‘지역민과의 상생’ 등을 이유로 고소·고발장 제출을 꺼려 왔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17일 장관 지휘서신을 통해 장병들에게 “국민의 군대로 거듭날 수 있도록 경계 태세를 확립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민의 군대’라는 뜻이 국민이라면 언제라도 들어와도 되는 군대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군부대가 더 이상 ‘나물 캐기 좋은 곳’이나 ‘낚시 명소’, ‘술주정하기 좋은 곳’이 돼선 안 될 일이다.  손효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hjson@donga.com}

    •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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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전 적조로 큰 피해… 이젠 폐사율 90% 줄어”

    경남 하동군에서 참숭어 가두리 양식장을 운영하는 박이진 하동 녹차참숭어 영어(營漁)조합법인 대표(51)는 5년 전 여름 ‘가슴이 찢어지는 일’을 겪었다. 남해안에 적조가 확산돼 수온이 상승하면서 3년을 기른 녹차참숭어 300t가량이 폐사한 것. 박 대표는 “어류 생존의 관건인 수온이나 용존산소량 등을 체계적으로 측정할 장비가 전혀 없어 감에 의존하다 낭패를 본 것”이라고 했다. 그의 불안이 해소된 건 최근이다. 해양수산부와 국립수산과학원이 2018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2.7ha 규모의 양식장 중 0.44ha를 제공받아 스마트양식 시범 운영에 들어간 것. 박 대표에 따르면 0.44ha 규모 양식장의 2016년 생산량은 150t이었지만 지난해엔 400t으로 급증했다. 폐사율도 기존 대비 90% 이상 줄었다. 박 대표는 “주변 양식장 운영자들도 제 양식장 전광판에 표시된 수온 등의 수질 정보를 보고 양식에 참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동군 내 다른 어민들이 운영하는 양식장에도 이르면 올해 안에 스마트양식 시설이 구축될 예정이다. 하동군이 지난해 8월 해수부의 스마트양식 시설 기반 구축 사업 주관 지자체로 선정된 것. 하동군은 국비 9억 원 등 30억 원을 투입해 양식장 10곳에 관련 시설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들 양식장엔 사육환경 관측 장치, 사료 자동 공급장치 등이 설치된다. 박 대표 역시 자신의 양식장에 이들 장비를 설치해 올해부터는 직접 스마트양식에 나설 계획이다. 시설이 구축되는 가두리 양식장은 모두 하동 특산물인 하동 녹차를 배합한 사료를 먹는 녹차참숭어를 양식하는 곳. 하동군은 스마트양식이 확산되면 참숭어 품질이 향상되고 안전성도 확보되면서 캐나다 등에 국한된 녹차참숭어 수출국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동군 관계자는 “고령화된 양식 어민들이 정보통신기술(ICT)에 밝은 젊은이들을 채용하면서 일자리도 창출되고 어가 소득도 증대될 것”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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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앱으로 먹이 주고 수온 체크… ‘아쿠아팜 4.0’ 수산강국 꿈꾼다

    경남 하동군 중평항 인근의 한 가두리 양식장. 녹차참숭어를 양식하는 이 양식장 한쪽 편에선 2018년부터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해상 스마트양식 기술을 개발하고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참숭어 시범 양식이다. 해양수산부와 국립수산과학원은 2018년 말 기존 양식장 내 0.44ha 구역(6개 수조)에 스마트양식 시설물을 설치했다. 자동 먹이공급 장치, 사육환경 모니터링 시스템, 수중카메라, 통합제어 시스템 등 첨단 장비가 재래식 양식장에 속속 들어왔다. 이를 통해 수온, 용존산소, 염분 등에 관한 사육환경 정보를 실시간으로 관측해 수집하고 있다. 0.44ha 내에서 양식 중인 참숭어 26만 마리의 먹이 활동 등 상태도 양식장 관리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모니터링하고 있다. 양식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조기에 발견하고 즉시 개선할 수 있게 된 것. 이는 곧 생산원가 절감 및 폐사율 감소로 이어진다. 해수부와 수산과학원은 올해 6월부터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양식 어민과 기업이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기술 확보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6개 중 1개 수조를 택해 참숭어 치어 5만 마리를 넣는 것이 그 시작이다. 성어가 될 때까지 14개월을 키워 양식 전 과정 데이터를 축적하는 한편 관련 기술을 패키지 형태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이와 동시에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수산과학원 내수면양식연구센터에서는 담수어 스마트양식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20t 규모의 수조 2개와 5t 규모의 수조 20개에선 지난해부터 뱀장어, 메기, 향어 등이 자라고 있다. 지능형 사료 공급 시스템 등 각종 시설물이 설치됐다. 육상 양식장 관리 로봇도 개발 중이다. 로봇은 추후 먹이 공급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육상 양식장 무인화의 한 축을 담당할 예정이다. 그간 양식 어민들은 눈대중과 경험에 의존한 노동집약적 양식을 주로 해왔다. 불확실한 감에 의존한 탓에 양식장 내 산소 부족 등 각종 문제가 발생해 어류가 집단 폐사하는 사고도 겪었다. 스마트양식은 구체적인 데이터 및 인공지능 기술에 기반한 보다 정확한 첨단 양식 방법으로 양식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한다. 스마트양식 기초 연구를 주도 중인 수산과학원 이동길 박사는 “스마트 양식장을 시범 운영하며 장기간 수집한 사육환경, 성장 등에 관한 각종 데이터는 디지털 데이터화된 다음 양식 전 과정을 인공지능(AI)화하는 데 있어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 스마트양식 기술 개발 및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또 다른 한 축은 스마트양식 산업단지격인 ‘클러스터 조성 사업’이다. 스마트양식 클러스터에선 수산과학원이 진행 중인 시범 양식은 물론이고 연구, 실제 양식, 가공, 유통 등이 모두 이뤄진다. 해수부는 지난해 부산시와 경남 고성군에 이어 올해 1월 전남 신안군을 클러스터 조성사업자로 선정했다. 이 중 해수부와 부산시는 국비 220억 원을 포함해 시비, 민간자본 등 총 400억 원을 투입해 기장군 일광면 동백리 일대 6만7320m² 부지에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올해 말 스마트양식 육상 테스트베드 건립 공사에 먼저 들어간다. 부산시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대서양 연어를 2023년부터 테스트베드에서 양식할 계획이다. 단지 내에 민간기업과 연구시설 등 각종 건물이 들어설 것에 대비해 상하수도, 도로 등을 조성하는 공사도 2022년 말까지 진행한다. 2025년까지 민간기업 등이 대거 입주하면 클러스터는 최종 완성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시 관계자는 “클러스터에서 대서양 연어를 양식해 수입 물량의 10%를 대체하고 나아가 역수출하는 것이 목표”라며 “기장의 오시리아 관광단지와 연계에 클러스터가 첨단 스마트양식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관광지로도 활용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해수부와 수산과학원이 해상 및 육상 스마트 양식장에서 축적한 데이터와 개발한 기술은 부산, 신안, 고성 클러스터 내 테스터베드 운용에 참고될 예정이다. 클러스터 테스트베드에서 축적된 데이터와 개발된 기술은 또다시 클러스터 내 민간기업과 연구소가 활용하는 방식으로 실용화되며 민간으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해수부는 이들 데이터와 관련 기술이 ‘아쿠아팜 4.0’의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쿠아팜 4.0은 스마트양식 관련 각종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관련 기술을 지능화해 표준화하는 한국형 스마트양식 사업. 재래식 양식업의 체질을 뼛속부터 바꿔 한국을 세계적인 양식기술 국가 반열에 오르게 할 토대를 만드는 사업이다. 해수부가 주도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가 공동 추진하는 이 사업엔 총 사업비 6050억 원이 투입된다. 현재 과기정통부가 예비타당성 조사 심사 평가를 진행 중이다. 해수부는 2027년 아쿠아팜 4.0 사업이 완료되면 국내 양식어류 생산량이 2018년 8만 t에서 2030년 222만 t까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수부 관계자는 “아쿠아팜 4.0 기술 개발이 완료되면 미래 식량 산업으로 꼽히는 양식업에 접근하지 못했던 젊은층의 도전도 늘 것으로 기대한다”며 “아쿠아팜 4.0이 양식 품종 중에서도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어류에 적용되는 만큼 향후 어류 양식업은 아쿠아팜 4.0을 배경으로 정부 전략산업으로 육성될 것”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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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후된 어촌-뱃길로 가장 먼 섬… ‘바다 위 힐링명소’ 부푼 꿈

    《국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이런 환경에서 바다는 자원의 보고이자 미래를 향한 기회다. 남다른 노력과 혁신으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어업, 양식, 유통, 수출 기업 등의 성공 사례를 통해 한국 수산업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한다.》 ■ 화성시 백미리, ‘해양생태휴양마을’ 변신 눈앞 지난달 21일 찾은 경기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 내 어촌체험마을. 식당과 숙소, 주민 커뮤니티센터 등이 있는 2층 건물은 한눈에도 심각하게 낡아 있었다. 1층 커뮤니티센터 벽 곳곳에선 곰팡이도 눈에 띄었다. 지하실 바닥엔 물이 흥건했다. 이창미 백미리 어촌 뉴딜 사무국장은 “빗물이 들이닥치는 등 누수 문제가 심각하다”며 “노후화에 따른 각종 문제가 발생해 2년 전 건물 2층 숙소를 폐쇄했다”고 전했다. 백미리 어촌계가 운영하는 이 건물은 1996년 정부 주도 어촌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됐다. 2009년 백미리에는 갯벌 체험, 망둑어(망둥어) 낚시 등을 할 수 있는 어촌체험마을이 조성됐다. 건물은 숙소, 식당은 물론 해양 생태 교육장 등 다목적 용도로 활용됐다. 5∼11월을 중심으로 연간 15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할 정도로 이 마을은 관광 명소가 됐다. 그러나 깨끗한 숙소 같은 관광 인프라가 부족한 점, 체험 외에 별다른 프로그램이 없는 점 등이 마을의 약점으로 남아 있다. 관광객 상당수가 조개 캐기 등 체험 프로그램만 마치고는 마을에 머물지 않고 돌아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행히 백미리는 2018년 말 이런 단점을 떨쳐낼 기회를 얻었다. 해양수산부가 진행 중인 ‘어촌 뉴딜 300사업’의 2019년 대상지로 선정된 것. 해양수산부는 낙후된 선착장 등 어촌 필수기반시설을 현대화해 해양관광을 활성화하고 어촌의 성장을 견인한다는 취지 아래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 70곳을 비롯해 올해 120곳이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다. 2022년까지 총 300곳을 선정하는 한편 이 사업에 국비 2조1000억 원을 포함해 총 3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 사업을 통해 백미리는 내년 말 ‘해양생태휴양마을’로 재탄생한다. 우선 문제의 2층 건물 리모델링 공사가 이달 중순 시작된다. 숙소는 최근 트렌드에 맞게 인테리어를 개선할 계획이다. 마을 1층엔 관광객들이 캔 조개나 굴 등 수산물을 직접 요리하거나 주민들이 요리해 파는 체험장이 조성된다. 마을 내 공터엔 주민들이 벼룩시장을 열거나 물놀이 시설, 공연 무대, 바다 조망 선베드를 설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도 조성된다. 지난해 말 이 공터와 해안 사이에서 바다 조망권을 훼손하던 군 철책이 철거돼 공터 활용도는 높아졌다. 갯벌과 주변 섬을 돌아볼 수 있는 3∼4km 구간의 해양 생태 트레킹 코스도 조성된다. 마을 주민들이 바다해설사로 활약하며 관광객들을 안내할 예정이다. 이외에 마을 문화 체험 및 자연 생태 트레킹 코스, 염전 체험장 등도 만들어진다. 백미리 어촌계는 백미리가 해양생태휴양마을로 재탄생하면 외국인 관광객도 이 마을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천국제공항과 백미리는 차로 1시간 10분 남짓 걸린다. 김호연 백미리 어촌계장은 “백미리를 관광객들이 최소 2, 3일 이상 머물며 조용히 쉬었다 가는 힐링마을로 만들고 싶다”며 “주민과 관광객이 소통하며 상생하는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신안군 만재도, 내년 운항시간 6시간→2시간 단축 전남 신안군의 숨겨진 섬 만재도는 2015년 갑자기 유명해졌다. 한 케이블 방송의 예능 프로그램 ‘어촌편’ 촬영지로 등장한 것. 인구 1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섬의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낚시객 등 관광객이 늘 것이란 기대감도 커졌다. 그러나 이는 관광객 증가로 이어지지 못했다. 접근성이 나쁜 탓이었다. 신안군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만재도를 찾은 공식 집계 관광객 수는 467명. 신안군 관계자는 “진도에서 낚시 어선을 타고 만재도로 들어오는 비공식 관광객을 포함하더라도 연간 수백 명 수준에 불과하다”며 “접근성이 워낙 나빠 방송 효과를 보려야 볼 수 없었다”고 했다. 현재 전남 목포여객터미널에서 쾌속 여객선을 타면 만재도까지 꼬박 6시간 20분이 걸린다. 목포에서 비금도, 흑산도, 상태도, 하태도, 가거도 등을 경유한 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섬이어서다. 당시 프로그램도 만재도를 “대한민국에서 뱃길로 가장 먼 섬”이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만재도엔 300t급 여객선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없다. 이 때문에 주민과 관광객은 만재항 인근 해상에서 종선(從船·큰 배에 딸린 작은 배)으로 갈아타는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고현진 만재도 어촌계장은 “파고가 2∼3m만 돼도 종선 운행이 불가능해 여객선이 들어올 수 없다”며 “6시간이면 해외에 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누가 이 먼 곳까지 오겠느냐”고 했다. 이르면 내년 초부터 주민과 관광객은 이런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해양수산부 주도의 ‘어촌 뉴딜 300사업’에 따라 만재도에도 여객선 접안시설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시작된 ‘만재항 어촌 뉴딜 300사업’에 따라 현재 만재도에선 길이 40m의 여객선 접안시설을 건설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접안시설이 생기면 올 초부터 신설된 목포∼가거도 직항 노선 여객선이 만재도에도 입도할 예정이다. 이 경우 6시간 20분이던 만재도까지의 소요 시간이 2시간대로 크게 줄어든다. 이와 별도로 경사식 선착장 건설도 진행 중이다. 그간 만재도에는 경사식 선착장이 없어 주민 생필품을 대량으로 실은 철부선(鐵艀船·다른 배에 끌려 다니는 철로 만든 짐배)이 만조 때 외엔 입도할 수 없었다. 고령의 주민들은 여객선을 타고 목포나 흑산도까지 나가 생필품을 개별 구매해야 했다. 신안군 관계자는 “물때가 맞지 않으면 철부선이 일주일에 한 번도 들어오지 못해 주민 불편이 컸다”며 “경사식 선착장이 생기면 물때와 상관없이 철부선이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경사식 선착장과 여객선 접안시설 건설을 포함해 산책로 정비 등 만재항 어촌 뉴딜 300사업에 투입되는 사업비는 77억3600만 원. 내년까지 모든 사업이 완료되면 주민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은 물론이고 관광객 안전 및 접근성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면서 관광객 수가 본격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관광 수입 창출도 기대된다. 고현진 어촌계장은 “동네 어르신들이 아플 때 참지 않고 목포 등 육지로 나가 병원을 더 자주 이용할 수 있게 되는 등 복지도 향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촌 뉴딜 300사업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에 걸맞게 300여 개 어촌·어항을 현대화해 해양관광을 활성화하고 어촌 재생과 혁신 성장을 견인하는 해양수산부 주도의 범정부 사업.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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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파리바게뜨, ‘시그니처 케이크’ 공개

    파리바게뜨가 ‘시그니처 케이크’로 프리미엄 제품 라인 ‘시그니처’ 브랜드를 보강했다고 19일 밝혔다. 파리바게뜨는 지난해 로스팅한 원두를 7일간 숙성해 7일간만 판매하는 ‘카페 아다지오 시그니처’와 13년 연구 끝에 개발한 토종효모 유산균 발효종인 ‘상미종’을 적용한 ‘시그니처 브레드’로 프리미엄 제품을 잇달아 선보였다. 최근에는 ‘시그니처 케이크’를 공개하며 시그니처 라인 외연을 확장했다. ‘시그니처 생크림 케이크’는 생크림 케이크의 기본이 되는 케이크 시트와 크림의 맛을 극상으로 끌어올린 제품. 고운 입자의 케이크 전용 밀가루를 사용해 더 폭신하고 부드러운 시트와 생크림으로 최고 품질의 케이크를 구현했다. 일반적인 케이크의 시트가 3단인 데 반해, 시그니처 생크림 케이크는 4단으로 높여 더 폭신한 식감과 함께 우아한 디자인을 자랑한다. 초코시트를 가나슈 생크림과 화이트 가나슈 생크림을 샌드하고 생딸기를 얹은 ‘생딸기 트리플 초코’, 피스타치오 시트에 피스타치오 무스와 화이트 가나슈 생크림을 샌드하고 생딸기를 올린 ‘생딸기 피스타치오’, 캐러멜 시폰 케이크시트에 진한 마스카포네 치즈크림을 얹은 ‘솔티드 카라멜’(사진) 등이 대표 제품이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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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od&Dining]오뚜기 ‘채황’ ‘북엇국’ 이색라면 눈길

    국내 라면시장 2위, 시장 점유율 26.4%(지난해 12월) 자랑하는 오뚜기는 면발 및 스프 소재를 다양화하는 등 변해가는 소비자 입맛에 맞추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출시 2개월 만에 1000만 개 판매를 돌파하며 2018년 하반기 라면시장을 평정한 ‘쇠고기미역국 라면’이 대표적인 예다. 면에는 한국인의 식생활을 고려해 국내산 쌀가루를 10% 첨가했다. 스프는 양지, 우사골 등의 진한 육수를 활용하고 소고기, 미역을 참기름에 볶아 푹 끓여내는 방식으로 쇠고기미역국 본연의 맛을 재현했다. 오뚜기는 지난해에도 이색 라면을 연이어 선보였다. ‘채황’은 10가지 채소를 사용해 담백한 맛을 냈다. 국내 라면 중 영국 비건협회 ‘비건 소사이어티’에 등록된 유일한 제품이다. ‘북엇국라면’의 경우 북엇국에 어울리는 소면처럼 부드럽고 차진 식감의 면발을 구현했다. 북어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풍미의 시원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새로워진 진짬뽕’은 넓은 면(3mm)을 사용해 쫄깃한 중화면 식감을 살렸다. 액상 소스를 사용해 짬뽕의 진한 국물맛도 구현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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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산물이력제, 유통 투명성-먹거리 신뢰도 높여

    경북 의성에서 사곡양돈영농조합을 운영하는 변정임 씨는 2014년 돼지고기 이력제가 시행된 이후 신경 쓸 부분이 더 많아졌다. 항생제 같은 약품 성분의 돼지고기 내 잔류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9500여 마리에 달하는 돼지의 휴약(休藥) 기간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육질을 개선해 식감을 좋게 만드는 것도 그가 주력하는 부분. 변 씨는 “소비자들이 자신이 구입한 고기가 어느 농장에서 출하된 건지 바로 알 수 있게 되면서 먹거리 안전에 대한 책임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축산물이력제는 가축의 출생 및 사육 단계는 물론이고 도축, 포장, 판매 등 거래 단계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이력 및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공개하도록 한 제도다. 축산물 유통의 투명성을 높여 먹거리의 신뢰도를 높인다는 것이 제도 시행 취지다. 이력제 중 쇠고기 이력제는 2008년 국내산에, 2010년엔 외국산에 도입됐다. 2014년부터는 국내산 돼지고기에, 2018년부터는 수입 돼지고기에 확대 적용됐다. 올 초부터는 닭, 오리, 계란에도 적용 중이다. 소비자는 마트에서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구매할 경우 판매표지판 등에 부착된 12자리 이력번호를 이력제 홈페이지나 모바일 앱 등에 입력하면 된다. 입력하면 농장 정보는 물론이고 육질등급 등이 포함된 도축 및 포장 정보, 구제역 백신 접종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을 통한 축산물 이력 조회 건수는 지난해 돼지와 소를 합해 5713만6843건. 전년 4572만4988건에 비해 1년 만에 1140만 건 넘게 늘었다. 자신과 가족의 입으로 들어갈 축산물에 대해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력제를 활용하면 소비자가 구매한 축산물에서 위생 등의 문제가 발생할 시 이력을 추적해 문제가 시작된 원점을 확인한 다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력 정보는 가축 방역의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질병의 확산을 방지하는 등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도 기여하는 것. 지난해 1월 경기 안성과 충북 충주에서 발생한 소 구제역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관계당국은 이력 시스템에 기록된 가축 이동 경로 및 구제역 백신 접종 유무, 사육 현황 등의 정보를 활용했다. 그 덕분에 총 3건만 발생한 뒤 사태를 조기에 종식할 수 있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에 따르면 돼지고기 이력제 도입 전인 2011년 구제역 발생 당시 전체 사육 돼지 988만 두 중 331만 두(33.5%)가 살처분됐다. 이력제 도입 이후인 지난해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생 때는 1234만 두 대비 15만 두(1.2%)를 살처분하는 데 그쳤다. 이력제 도입으로 방역의 효율성을 끌어올린 결과다. 농정연구센터는 2018년 유통의 투명성이 높아진 점, 방역의 효율성이 확보된 점 등을 종합할 때 소 이력제 도입에 따른 연간 사회적 편익이 45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돼지 이력제 도입의 사회적 편익도 연간 3500억 원가량으로 추정된다. 전상곤 경상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쇠고기 및 돼지고기 이력제 정보는 산지 물량 및 가격 전망에도 활용되고 있어 수급 안정화도 이끌어 내고 있다”며 “축산물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국내산과 외국산의 차별화가 가능해지는 등 이력제는 궁극적으로 국내 축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축산농가의 수익성을 높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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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 연합훈련, 이름을 왜 버릴까[국방 이야기/손효주]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명칭을 붙이긴 어려울 것 같다.” 군 관계자는 다음 달 시작될 한미 연합훈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한미는 다음 달 초부터 북한의 남침을 가정해 전시 작전계획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실행해보는 지휘소 훈련을 진행할 계획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훈련에 이렇다 할 상징적인 명칭을 붙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군 당국은 이번 훈련 명칭을 ‘전반기 한미 연합 지휘소 훈련’이라는 일반적인 이름으로 잠정 결론 낸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한미는 매년 3월 시행된 지휘소 훈련에 ‘중대한 결의’라는 의미의 키리졸브(Key Resolve)를, 8월 지휘소 훈련엔 ‘자유의 수호자’라는 뜻의 프리덤가디언(Freedom Guardian)이라는 명칭을 각각 붙여왔다. 이와 비교하면 ‘전반기 지휘소 훈련’이란 명칭은 명칭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할 정도다. 군 내부에선 “사람 이름을 ‘사람’이라고 지은 격”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다. 군의 훈련 명칭 ‘버리기’ 또는 ‘흐리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3월 키리졸브를 ‘동맹’으로 바꾸더니 8월엔 프리덤가디언을 아예 ‘후반기 한미 연합 지휘소 훈련’으로 변경했다. 명분은 ‘북-미 비핵화 협상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 명칭으로 대체했다는 것. 이런 명칭 변경 조치는 북한에 대한 반격과 지휘부 축출 등의 훈련 시나리오가 포함돼 있어 북한이 유독 크게 반발하는 지휘소 훈련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앞서 군 당국은 양대 한미 연합 공중 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와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도 각각 ‘연합 편대군 종합훈련’ ‘전투 준비 태세 종합훈련’이란 평이한 이름으로 바꾸는 등 ‘변경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북한의 비핵화 진전과 도발 중단을 불러올 수 있다면 한눈에도 한미 연합훈련임이 분명한 ‘키리졸브’류의 영문 명칭을 없애는 것을 넘어 ‘무명(無名)’의 훈련을 한다고 해도 찬성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미동맹의 결의와 상징성이 실종된, ‘명칭 아닌 명칭’을 택한 로키(low key) 전략의 효과는 오히려 기대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비핵화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고 대남 타격 전력인 신종 단거리 발사체를 지난해 5월부터 연이어 발사했다. 북한의 거꾸로 가는 행보는 올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충격적인 실제 행동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북한은 군 당국이 그 규모를 축소하고 명칭까지 포기한 채 연합훈련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훈련 때마다 “새로운 길을 택할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훈련 전면 중단 외에 어떤 조치도 소용없다고 공표한 것. 군 당국이 명칭 버리기를 더 이어갈 명분이 없는 셈이다. 군 내부에선 “정부 정책 기조가 대북 유화책인 만큼 군도 맞춰 가야 하지 않겠느냐. 훈련에 내실을 기한다면 명칭이 뭐든 상관없을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에게 있어 훈련의 목적과 내용, 한미 연합군의 빈틈없는 대북 대비태세 등이 고도로 함축된 훈련 명칭은 명칭 그 자체로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효과를 줄 수 있다. ‘키리졸브’ 등이 ’전반기 훈련‘ 등의 일상적인 훈련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이름으로 대체된 이후 일각에선 “한미 연합훈련을 이제 안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온다. 명칭 버리기 전략이 국민들에겐 안보 불안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북한은 지난해 11월 초대형 방사포 도발 이후 이렇다 할 도발을 하지 않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탓에 군사활동이 위축된 결과”라며 “북한은 연합훈련 명칭 변경과 무관하게 코로나19 확산세가 꺾이는 대로 도발 재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명칭 버리기 전략이 실익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면 명분 잃은 전략을 포기하고 1년 넘게 실종된 연합훈련 이름을 되찾아올 필요가 있다. 복원한 훈련 명칭을 널리 알려 국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하는 편이 더 현명한 조치가 아닐지 생각해볼 일이다.  손효주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hjson@donga.com}

    •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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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가사리-배스… 골칫덩이를 보물로 바꾼 청년들

    《국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바다 자원을 비롯한 수산 자원은 미래를 향한 기회다. 남다른 노력과 혁신으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어업, 양식, 유통, 수출 기업 등의 성공 사례를 통해 한국 수산업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한다.》● 불가사리로 친환경 제설제 개발 ‘스타스테크’ 양승찬 대표 육군 포병부대에서 복무 중이던 양승찬 상병(당시 22세·사진)에게 2017년 6월 기회가 찾아왔다. 현역 군인들이 창업 아이디어를 겨루는 ‘국방 스타트업 챌린지’ 대회. 서울대 화학생명공학부를 휴학 중이던 양 상병은 불가사리를 비장의 카드로 꺼내들었다. 불가사리 추출물을 제설제 보완 원료로 쓴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양 상병은 경기과학영재고 1학년 때 불가사리에서 다공성 구조체 추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연구하고 논문도 발표했는데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제설제는 눈을 녹이면서 염화이온을 방출한다. 이는 차량 부식, 콘크리트 파손, 가로수 등 식물 피해, 호흡기 질환 등 각종 부작용의 원인이 된다. 불가사리 추출물은 골칫거리인 염화이온을 흡착한다. 제설제에 불가사리 추출물을 넣으면 부식방지제 성능이 개선되면서 부식률이 크게 감소한다. 양 상병 팀은 이 아이디어로 ‘국방 스타트업 챌린지’ 상위 10개 팀 안에 들었다. 그해 11월엔 일반인도 참가하는 본선 대회격인 ‘도전! K-스타트업’에서 국방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는 2017년 12월 초 전역과 동시에 불가사리 추출물을 활용한 친환경 제설제를 만드는 ‘스타스테크’를 창업해 양 대표가 됐다. 그는 졸업도 하기 전에 창업부터 한 이유에 대해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하루라도 빨리 사업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사업은 시작하자마자 ‘폭풍 성장’했다. 정부는 조달청을 통해 친환경 제품에 한해 제설제를 구매한다. 스타스테크 제설제 ‘에코스트원(ECO-ST1)’의 현재 조달 시장 점유율은 25%가량이나 된다. 양 대표는 “타 친환경 제설제 업체 제품은 부식률이 20∼30%인 반면 스타스테크 제품 부식률은 0.8%에 불과하다. 물보다 더 부식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스타스테크는 이에 더해 연간 100억 원 규모의 경제적 손실을 일으키는 해양 폐기물 불가사리를 수협에서 무상 공급받아 생산 단가도 줄였다. ‘바다의 해적’으로 불릴 정도로 어민들이 기피하는 불가사리가 양 대표에겐 ‘바다의 보물’이 됐다. 스타스테크는 창업 다음 해인 2018년 6억 원 매출을 시작으로 지난해 매출이 30억 원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100억 원 달성이 목표다. 이를 위해 이달 중 미국, 캐나다 등 북미시장 온라인 판매를 시작으로 터키 중국 일본까지 올해 안에 수출국을 5개국으로 늘린다는 것이 양 대표의 계획이다.눈이 많이 와 제설제 판매의 가장 큰 시장이 될 러시아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양 대표는 “불가사리에서 추출한 콜라겐을 이용한 화장품, 액상 비료 등으로 제품 라인업을 확대해 글로벌 환경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며 “특히 친환경 제설제 분야에서는 세계 1위 기업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배스 추출물로 반려동물 식품 만드는 ‘밸리스’ 서정남 대표 민물에 사는 외래 어종 배스는 대표적인 생태계 교란종이다. 토종 물고기 씨를 말리는 탓에 ‘생태계의 폭군’으로 불린다. 퇴치 1순위로 꼽히는 배스가 ‘밸리스’ 서정남 대표(28·사진)에겐 ‘황금알을 낳는 물고기’가 되고 있다. 밸리스는 영양제, 사료, 간식 등 반려동물 식품을 제조해 판매하는 기업. 밸리스 제품엔 배스에서 추출한 타우린과 오메가3가 들어간다. 특히 타우린을 자체 생성하지 못하는 고양이에게 타우린이 들어간 식품은 면역력 강화 등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을 준다. 서 대표가 ‘골칫거리’ 배스의 잠재력을 알아본 건 2016년. 생태계 교란종을 다룬 다큐멘터리 한 편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서일대 창업동아리 소속 대학생이던 그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자’는 큰 목표를 세워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를 구체화할 만한 아이템은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서 대표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배스 등 생태계 교란종이 영양학적 가치가 높은데도 폐기되는 등 활용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저거구나’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일부 지자체도 배스에 타우린과 오메가3가 풍부하다는 사실에 주목해 과거 ‘배스 어묵’ 개발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생태계 교란종이 원료여서 먹기 찜찜하다”는 선입견에 막혀 대중화에 실패했다. 서 대표는 배스 추출물을 반려동물 식품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국내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1000만 명에 이른다. 영양성분을 강화한 반려동물 식품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막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서 대표는 “배스 추출물을 활용한 영양가 높은 식품을 만들면 국내 반려동물 식품 시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수입 제품과 겨뤄볼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그는 현재 연간 배스 50∼100t을 활용하고 있다. 각 지자체가 어민들에게서 수매하는 배스를 무료로 공급받는다. 사업 시작 당시 배스가 뭔지도, 어디서 구해야 할지도 몰라 낚시터를 배회하던 대학생은 이제 자타 공인 배스 전문가가 됐다. 배스의 유효성분만 추출하는 자체 추출법과 함께 타우린과 오메가3의 흡수율을 높이는 공법도 개발했다. 그는 “배스 1kg당 부가가치를 가장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연구 중”이라고 했다. 서 대표의 목표는 배스 외의 다른 생태계 교란종도 업사이클링(up-cycling)하는 것. 2018년 현재 환경부가 고시한 생태계 교란종은 21종이다. 그는 “해외 수출 시장을 개척해 한국을 대표하는 반려동물 식품회사로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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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도 인증한 ‘유기농 김’ 전도사… 젖먹이 업고 수산 수출길 개척

    《국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 이런 환경에서 바다는 자원의 보고이자 미래를 향한 기회다. 남다른 노력과 혁신으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어업, 양식, 유통, 수출 기업 등의 성공 사례를 통해 한국 수산업이 나아가야 할 비전을 제시한다. 》■ ‘신안천사김’ 권동혁 대표… 조미-스낵김 등 모든재료 유기농美대형마트 납품후 각국 주문쇄도, 6년만에 ‘5000만불 수출탑’ 일궈김 수출 기업 ‘신안천사김’ 권동혁 대표(58·사진)는 처음에는 마른 김을 도소매로 판매하는 일로 시작했다. 도소매업체를 운영하며 마른 김을 국내 대형마트에 납품했다. 그가 ‘조미김’으로 방향을 튼 건 2004년. 조미김 수요가 늘어나자 ‘예맛식품’을 설립했다. 2006년부터는 일본 등으로 조미김을 수출했다. 그러나 수출 규모는 크지 않았고 국내 판매가 주력이었다. 기회는 2011년 찾아왔다. 미국 유통회사 코스트코 관계자들이 자체 브랜드(PB) 상품으로 납품받을 김 업체를 물색하러 방한한 것. 이들은 식품 대기업을 포함한 복수의 국내 업체를 후보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다 예맛식품을 낙점했다. 그러나 경기 이천의 예맛식품 공장만으로는 납품 물량을 맞출 수 없었다. 권 대표는 이에 2012년 전남 신안에서 새 법인 신안천사김을 설립하고 공장도 세웠다. 수출 제품 생산에 주력하는 공장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미국 내 코스트코 납품은 ‘대박’이었다. 신안천사김은 지난해 기준 미국 내 543개 코스트코 매장에 조미김, 스낵김 등을 납품 중이다. 미국 코스트코 납품액만 지난해 기준 월평균 350만 달러(약 40억5000만 원)에 이른다. 이를 발판으로 캐나다, 멕시코, 호주, 프랑스, 영국, 스페인 내 코스트코로 납품 국가를 늘렸다. 코스트코 외에 미국, 호주, 이스라엘 유통업체에도 김을 납품하고 있다. 신안천사김이 빠른 시간 내에 수출 국가를 늘릴 수 있었던 데는 2015년 미 농무부 국제 유기농 표준(USDA NOP)인증을 획득한 덕이 컸다. USDA NOP 기준에 맞춰 마른 김부터 해바라기유, 참기름 등에 이르기까지 조미김의 모든 원료를 유기농으로 쓰고 있다. 계약 중인 물김 양식장 4곳에도 ‘유기농 물김’을 생산하도록 관련 설비를 지원 중이다. 이런 노력 덕에 권 대표는 지난해 12월 무역의 날 행사에서 ‘50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2018년 7월부터 1년간 신안천사김이 기록한 수출 실적은 5226만 달러, 우리 돈 약 605억5000만 원이다. 전년 같은 기간 실적이 4556만 달러였던 것에 비하면 가파른 성장세다. 신안천사김의 목표는 ‘김’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 신안천사김 관계자는 “김이 미국 등 해외에서 seaweed(해초)나 일본어인 ‘노리(のり)’로 불리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전 세계에 한국 김을 수출해 외국인들이 김을 ‘김’이라고 부르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 ‘에스엘에스컴퍼니’ 김수경 대표… 유럽박람회 생후 70일 아기와 동행한국산 냉동 바지락 중개무역 시작, 연어-생선포 등 37개국에 수출김수경 에스엘에스컴퍼니 대표(47·사진)는 2011년 태어난 지 갓 70일이 된 둘째 아들을 안고 벨기에 브뤼셀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유 수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갓난아기를 동반한 13시간이 넘는 비행의 목적은 유럽수산박람회 참가. 김 대표는 “이제 막 회사를 설립해 해외 영업을 시작하던 때라 해외 바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박람회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 박람회에서 만나 나에게 ‘미쳤다’고 했던 유럽 바이어들과는 지금도 거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산 가공품 전문 무역 기업인 에스엘에스컴퍼니는 2009년 설립됐다. 수산물 수출 전문 무역상사에서 10년간 해외 영업 일을 하던 ‘워킹맘’ 김 대표가 나와 차린 회사였다. 본격적인 해외 영업을 시작한 건 2010년부터. 출산도, 육아도 신생 기업 대표가 된 그의 시장 개척 열정을 막진 못했다. 갓난아기와 함께한 투혼으로 김 대표는 2011년 48회 무역의 날 행사에서 ‘500만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해외 영업 시작 첫해인 2010년 매출 145억 원을 거둔 데 이어 이뤄낸 쾌거였다. 성과는 2014년 ‘1000만불 수출의 탑’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 한국산 냉동 바지락을 수출한 것이 시작. 중국과 베트남에서 가공한 연어와 생선포를 브라질에 수출하고, 베트남산 냉동 메깃살을 콜롬비아에 수출하는 등 중개무역 시장도 공략했다. 에스엘에스컴퍼니가 직수출과 중개무역으로 2018년 거둔 매출은 286억 원. 김 대표는 “해외 바이어들은 보통 한국산만 콕 집어 찾기보다 아시아 전체 상품을 찾는다”며 “이런 수요에 맞춰 한국산은 물론이고 중국산, 베트남산 등으로 선택지를 다양하게 구성해 놓으면 중국산만 찾던 바이어들도 나중에는 한국산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에스엘에스컴퍼니가 지난해까지 직수출과 중개무역으로 제품을 수출한 국가는 37개국에 이른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리비아, 나이지리아 같은 아프리카 국가도 있다. 김 대표가 1년에 20개국 이상을 돌며 영업한 결과다. 김 대표의 다음 목표는 뭘까. 그는 “지난해 말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며 “10년간 추진해 온 중국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중국 지도를 펼쳐놓고 다짐했습니다. 식품 안전성이 높은 한국산 수산 가공품으로 무역 장벽이 어느 나라보다 높은 중국 시장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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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북적이던 ‘별’들이 안 보였다, 간밤의 ‘12·12’ 때문에…

    장희선 씨(68)는 ‘장군의 이발사’였다. 육군본부 장군 이발소에서 ‘꼬마 보조’로 일을 배운 뒤 50년 가까이 ‘별’들의 머리를 만졌다. 소총 든 군인을 처음 보고 뒷걸음치던 16세 소년은 웬만한 군인보다 더 오래 군 생활을 한 노인이 되고서야 군을 떠났다. 지난해 12월 31일, 손에 익은 가위를 놓고 국방부 문을 나서는데 “평생 살던 집을 떠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고 했다.장 씨가 군에 처음 발을 들인 건 1968년. 전남 곡성에서 상경해 먹여주고 재워줄 곳을 찾던 그의 눈에 들어왔던 일자리가 당시 서울 용산 육군본부의 장군이발소 견습생 자리였다. 용산역 전봇대에 붙은 구인 전단을 떼어 들고 찾아간 육군본부 입구엔 소총을 맨 헌병이 버티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을 처음 본 시골 소년은 몸을 떨었다. 서슬 퍼런 군부 정권 시절이었다. 장군들 머리를 감겨주고 이발소 청소를 하던 견습생은 몇 년 뒤 육군본부 장군 이발사가 됐다. 이후 국방부 장군이발소로 옮겼다. ‘50년 장군 이발사’ 장 씨가 지켜본 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7일 만난 장 씨는 “70, 80년대 장군들은 딱딱했다”고 기억을 되짚었다. 이발소에 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장군의 이발 예약은 1인당 1시간으로 잡았는데, 그 1시간이 침묵의 시간이었다. 침묵이 바로 장군의 체통이었다. 그 시절 권위의 상징이던 장군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나이가 어려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전반적인 분위기가 엄격했다”고 말했다. 당시엔 이발소에 올 때 부관을 포함한 수행 인원을 대동해 위세를 드러내는 장성도 종종 있었다. 장군들이 아침에 이발소를 찾을 때는 긴장한 표정이 많았다. 권위주의 그 자체이던 군의 단면을 보여주듯 장군들은 상관 보고 전 통과의례처럼 이발소를 찾아 드라이를 했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카락 한 가닥 삐져나오지 않게 매만진 뒤에야 보고에 들어갔다. 손에 포마드가 마를 날이 없었다. 장 씨는 “매일 아침 드라이를 하러 오는 장군도 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드라이 손님 10명을 받고 나면 진이 빠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이발소를 채우던 장군들이 어느 날 한 명도 얼굴을 보이지 않아 놀란 적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장군 이발사와 보조 직원들이 “간밤에 난리가 났다더라”고 수군댔다. 1979년 12·12쿠데타(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였다. “우리가 다 퇴근한 밤에 일어난 일이니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 분위기가 싸늘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나요. 나중에 TV를 보고야 12·12 사태라는 걸 알았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장 씨는 군의 변화를 체감했다. 우선 ‘보고용 머리’를 하러 오는 장군이 줄었다. 그는 “지금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드라이를 하러 오는 장군은 없다”고 말했다. “장군들 머리 스타일도 자연스러워졌고 딱딱한 분위기도 사라졌어요. 수행인원과 함께 이발소를 찾는 장군도 이제는 없어요.” 장 씨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장군이발소는 국방부 제1이발소에서 제2이발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 대신 영관급 이하 장교 및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한 이발소인 제2이발소가 제1이발소가 됐다. 이런 변화 역시 권위주의 탈피를 위한 군의 노력을 보여주는 모습으로 풀이된다. 이발사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던 장군들이 말이 많아진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장 씨는 “내 나이가 장성들과 비슷해져 편안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과거처럼 이발소에서 입을 닫고 있는 장군은 별로 없다”며 “이제는 소소한 대화가 곧잘 오간다”고 했다. 장 씨에게 준장 시절부터 대장, 국방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줄곧 머리를 맡겼던 전직 장관들 중에는 장관직을 내려놓거나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종종 연락해 안부를 묻는 인물도 있었다. 장 씨가 50년간의 장군 이발사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던 날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그와 그의 아내를 장관실로 초대해 환담을 나누고 감사장을 수여했다. 국방부 장관이 이발사를 직접 챙기는 것은 과거엔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감사장엔 “국방부 직원 복지 향상에 기여한 공이 크다”는 내용과 함께 “유능한 안보, 튼튼한 국방에 이바지했다”는 문구가 담겼다. 장 씨는 최근 장군들 모습에 대해 “예전엔 식사 후 또는 이발 후에 장기, 바둑을 두거나 하면서 여유 있어 보였는데 요즘은 머리를 자르다 말고 중도에 나가는 일도 흔하다”며 “장군들 업무 환경이 더 빡빡해진 것 같다”고 했다. 특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는 등 북한의 도발이 집중됐던 2016년과 2017년엔 이런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가 머리를 만져준 국방부 장관만 25명 안팎. 장군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나에게 머리를 맡겨준 모든 장군들이 고맙지요. 갈 곳 없던 나를 거둬주고 키워준 국방부에 무엇보다 감사해야죠. 군에서 50년 넘게 혜택을 받았으니 군에서 쌓은 실력으로 주변 노인들 머리를 이발해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살려고 합니다.”▼ “어머니 김태순-여동생 희자, 50년 넘게 찾고 있습니다” ▼ 장희선 씨는 인터뷰 말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꼭 찾고 싶다는 말이었다. 1968년 그는 서울로 돈 벌러 간다며 먼저 고향을 떠난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겠다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당시 어머니는 곡성에 있던 장 씨에게 “곧 데리러 가겠다”며 보낸 편지에 주소 대신 ‘동대문에서’라는 글귀만 남겼다. “동대문에 가면 대문에 서 있는 어머니를 바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 보니 여기도 동대문, 저기도 동대문 사방팔방이 다 동대문인 겁니다.” 그는 “이발사 일을 하며 어느 순간 포기하고 살았는데 뒤늦게라도 꼭 어머니와 여동생을 찾고 싶다”며 울먹였다. 장 씨는 과거 어머니가 보내온 사진을 기자에게 보내며 “어머니가 살아계실지 모르겠지만 꼭 찾아 달라”고 당부했다.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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