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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이래서다. 노인과 경찰이 나오고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주인공 각각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흠 없이 완결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은 트릭을 통해 모두의 관점에서는 모순 없는 서사가 성립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짜 놨다. 소설처럼 세계를 하나의 관점에서 온전히 서술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기 잘난 맛에 살다 가는 게 인생’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확신범’이다. 뇌 과학 관련 교양서에 자주 나오는 사례의 하나가 2015년 세계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달군 드레스 색깔 논쟁이다. 같은 옷 사진이 보는 사람마다 파랑과 검정 조합이나 흰색 금색 조합으로 달리 보였던 것. 사람들은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데 경악했다. 색깔 정도야 괜찮다. 문제는 인간이 세계를 선악 구도로 인식하는 일과 자신과 다른 집단의 악마화에 능숙하다는 것이다. 십자군전쟁이 왜 일어났겠나. 확신범들이 무섭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 ‘황산벌’(감독 이준익)은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마주친 신라군과 백제군이 각각 진한 영호남 사투리를 쓰도록 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일했다(一統三韓)”고 자부했지만 후삼국 시대 백제와 고구려의 계승이 건국의 슬로건으로 내걸린 사실은 당시에도 ‘지역감정’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역사학계 최대 연례행사인 전국역사학대회가 27, 28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역사전환기 이상과 현실’을 주제로 개최된다. 대회 둘째 날에는 신라사학회와 백제학회가 공동으로 학술대회 ‘한국 고대 동서 지역 간 갈등과 극복’을 연다. 대회에서는 신라가 멸망한 백제 유민을 대상으로 편 융합정책이 조명된다. 최희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원은 “백제 멸망 뒤 673년 유민들이 만든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의 명문(銘文)에는 조성한 이들이 신라의 관등으로 기록돼 있다”며 “옛 백제의 중앙 귀족들이 신라 지배층으로 새롭게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신라가 효율적 통치를 위해 옛 백제지역의 지방 세력을 향리(鄕吏)나 촌주(村主)로 편제해 기득권을 인정하고 경제적 기반을 유지시켰다고 봤다. 전덕재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통일전쟁기 신라·백제 지배체제와 수취체계의 변동’에서 “신라가 통일 이후 중간 행정단위로서 군(郡)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방 통치조직을 재편한 건 백제의 지방제도를 일부 반영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물론 융합정책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것만은 아니었다. 조인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발표문 ‘통일에서 분열로―후백제의 성립을 중심으로’에서 “문무왕이 유언으로 웅천주 출신의 백제계 승려인 경흥법사를 국사(國師)로 삼을 것을 부탁했는데, 아들 신문왕은 (그러지 못하고) 국로(國老)로 삼았다”며 “이는 신라 지배층이나 불교계의 반발 때문이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사는 당시 나라에서 가장 높은 승직(僧職)이고, 국로는 일종의 특별직이다. 또 조 교수는 “경덕왕 대에 왕권 강화를 위해 전통적인 군현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자 지방 세력이 반발했을 것”이라며 “혜공왕 대에 다시 원래 지명으로 되돌렸는데, 이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유민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학술대회에서는 ‘7세기 중반 백제·신라의 정치체제와 대외정책’ ‘신라·백제의 문화적 특성과 융합’ ‘신라·백제 지역 간 교통로의 개설과 운영’ ‘백제 미술의 신라 전파와 수용’ 등이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70년대 후반부터 10년 넘게 존속하며 군 장교의 공무원 전직을 유도한 ‘유신 사무관 제도’가 군의 정치 개입 소지를 줄이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의 서울대 연구단은 27일 열리는 이 사업 공동 워크숍 발표문에서 “이 제도의 최초 구상자인 당시 국군 보안사령부 연구발전실 연구 장교로부터 이 같은 구술을 들었다”고 밝혔다. 정식 명칭은 ‘사관특채 공무원 제도’로 1977∼1988년 이 제도에 따라 군 장교 784명이 공무원으로 전직했다. 제도 시행 당시에는 육사생도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의 장래를 고려한 것이라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연구단에 따르면 이 제도를 구상한 연구 장교는 1973년 ‘윤필용 사건’(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 계기가 돼 군사 쿠데타의 발생 요인으로 군 인사 적체를 지적한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 연장선에서 이 제도를 구상했다는 것이다. 연구단은 또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군단장을 청와대로 불러 1000만 원을 주면서 군내 부재자투표 부정을 노골적으로 강요하려 했다는 구술도 들었다. 현대사를 당사자의 구술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 현대한국구술사연구사업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443명으로부터 2950여 시간에 이르는 구술 자료를 확보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 속 캐릭터를 빌려 속내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영화 주인공을 설명하려는 걸까. 23일 배우 문근영(30)을 인터뷰하는 동안 생긴 궁금증이다. 25일 개봉하는 영화 ‘유리정원’(감독 신수원)에서 순수하면서도 고지식한 과학도 재연 역을 맡은 그는 극 중 인물과 몹시 닮아 보였다. 그는 영화를 “상처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재연은 후배에게 연구 아이디어를 도둑맞고 연인까지 잃지만 자신의 믿음을 밀고 나간다. “재연이 상처를 받은 건 연인의 배신 탓이라기보다 사랑하는 마음 자체를 가졌기 때문이겠지요.” 배우라기보다 선승(禪僧)의 말처럼 들렸다. “약간 잔인한 말일까요? 전, 거리를 두고 영화를 봤더니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재연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위안을 받았어요.” 문근영은 올 2월 ‘급성구획증후군’(염증으로 근육에 압력이 증가해 조직이 괴사하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수술을 여러 차례 받고 최근까지 활동을 중단했다. 지금은 회복됐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상태였느냐고 묻자 그는 “얘기하면 (팬들이) 걱정하실까 봐…”라고 말을 흐렸다. “아프고 나니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살지는 말아야겠다 싶더라고요.” 영화 속 재연은 실험실 가운이나 펑퍼짐한 의상만 입는다. 스토리상 분장도 얼굴의 푸석푸석함이 강조되는 장면이 적지 않다. 영화를 고를 때 망설여지지 않았을까. “원래 메이크업도 별로 안 좋아하고,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지 않아요.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아역부터 연기 생활을 시작해 선행에도 ‘악플’이 달리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그에게 “팬이나 대중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느냐”고 묻자 곧바로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배신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마음과 다른 반응과 시선이 돌아올 때 상처 아닌 상처를 받지요. 나는 그게 아니었는데….” 극 중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보면 재연의 순수한 캐릭터는 ‘국민 여동생’이라는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가 작품에서 이 이미지를 유지하면 ‘식상하다’, 변화를 시도하면 ‘안 어울린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라는 서운함은 없을까. “어느 장단이든 제가 만들고 찾아야 되겠지요. (다음 작품은?) 일단 밝고 따뜻한 작품을 하고 싶어요. 제 마음이 지금 그렇거든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1950년대 말 미국 해군 관리들은 인도양 한가운데 영국령 차고스제도의 디에고가르시아섬에 새로운 미군 기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과 영국 정부는 1968∼1973년 이 섬의 모든 토착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양 서부의 모리셔스섬과 세이셸섬으로 이주시켰다. 이주 지원금은 한 푼도 없었고, 이들은 이주한 섬에서 가장 가난한 빈민이 됐다. 미국 워싱턴 아메리칸대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가 미국의 해외 군사기지가 끼치고 있는 폐해를 취재해 썼다. 이탈리아에서는 미군이 마피아와 연계됐다고 한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솔리니의 단속 표적이었던 마피아는 연합군의 시칠리아섬 공격을 도왔다. 상륙 뒤 연합군은 마피아 조직원을 시장으로 임명하는 등 마피아를 행정의 파트너로 사용했다. 나폴리 마피아는 연합국 군정청장을 등에 업고 세력을 확장했다. ‘카모라’라고 불리는 이 조직범죄 집단의 힘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간 배경에는 이탈리아에 대규모로 조성된 미군 기지와 휴양 시설 건설 사업이 있었다. 미국이 19세기 이래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미군 기지를 통해 군사 개입을 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재자나 반군을 지원했다는 익숙한 이야기도 책은 소개했다. 저자는 6년 동안 세계 60여 곳의 미군 기지를 찾아가 취재했다. 그는 “해외 미군 기지 이야기는 곧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연대기이며, 미군 기지로 인해 미국인은 ‘영구적인 군사 사회’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외 미군 기지는 비용도 많이 든다’는 대목에서는 미군 병력을 일부 축소하는 한편 첨단 신속 기동군으로 재편하려는 미국 정부의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과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뚜렷이 구별되는지 물음이 생긴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나는 이 원수 놈의 물건 때문에 대제학을 하지 못한다.” 조선 선조의 사위로 정숙옹주의 남편인 신익성(1588∼1644)이 어느 날 옥관자가 붙은 망건을 아내 앞에 던졌다. 옥관자는 정3품 이상이 망건에 달 수 있는 물건. 옹주와 혼인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지만 과거 응시에 제한을 받고 보통의 관직에는 나아갈 수 없었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의 신세 한탄이다. 위(尉)는 부마에게 주는 작위다.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국민대 박사 수료·사진)은 부마와 그 가문에 주목한 신간 ‘조선 왕실의 백년손님’(역사비평사)에서 부마 12명의 일대기를 담았다. 부마의 처지는 ‘학무소용(學無所用), 재무소전(才無所展)’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학문이 뛰어나도 쓸 곳이 없고, 재능이 뛰어나도 펼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성종대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부마의 정치 참여는 법으로 금지됐고, 부마는 의약을 담당하는 혜민서 제조(提調) 등 정치와 무관한 관직을 으레 맡았다. 그러나 책은 부마와 부마 가문이 왕의 최측근 근위 세력으로 정치에 음양으로 깊숙이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책에 따르면 부마라는 용어는 한 무제 때 처음 설치된 관직명에서 유래했다. 원래 임금의 수레를 모는 말을 담당하는 관직이었으나 그 관직을 주로 공주와 혼인한 사람이 맡으면서 왕의 사위를 뜻하는 말이 됐다. 조선의 부마도 왕과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는 도총부 총관(摠管)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신 연구원은 “전시에는 부마가 오늘날 대통령경호실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동양위 신익성도 이괄의 난 때 인조와 인목대비를 호위했다. 인조는 고모부인 신익성에게 보검과 궁시(弓矢)를 내려주면서 “곁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신익성은 정묘호란 때도 소현세자를 호종해 전주로 피란을 갔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인조 곁을 지켰다. 선조의 또 다른 부마 해숭위(海嵩尉) 윤신지(1582∼1657)는 비빈과 왕손들이 피한 강화도로 건너가 청나라 군과 싸웠다. 평시에도 부마의 아버지나 자손 등 부마 가문이 왕의 정치적 후견인으로서 왕실의 근위세력이 됐다. 효종은 서인계 관료 가문에서 부마를 간택한 뒤 그 가문의 인사들에게 의정부의 삼정승을 독점적으로 맡겼다. 영조는 일곱 부마의 가문 인사를 모두 탕평파의 핵심 세력으로 양성했다. 이는 대군(大君), 군(君)을 비롯한 종친이 역모에서 새로운 왕으로 추대될 소지가 상존했기에 종친의 처가도 국왕의 은근한 견제를 받았던 것과 대조된다. 또 왕비 가문이 소수였던 데 비해 공주, 옹주의 수만큼 간택된 부마의 가문은 수도 많았다. 신 연구원은 “부마 자신은 벼슬이 제한돼 전해지는 사료가 많지 않고, 그 탓에 그간 연구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다”며 “조선 정국 운영의 숨은 실세인 부마 가문의 동향을 보면 정치사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청나라는 만주족이 흥기한 근본이 되는 땅이라며 중국 동북지방에 다른 민족의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재해 등으로 생긴 유민이 흘러드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도 백성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는 걸 엄격히 처벌했지만 마찬가지였다. 1619년 조선과 명 연합군이 후금(청)에 패했을 때부터 패잔병들이 살았을 것이고, 뒤에도 사냥꾼이나 화전민들이 눈치 보지 않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간도 개척과 이주가 본격화된 뒤 청나라와 조선(대한제국)은 간도의 영유권을 놓고 대립한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가 최근 연 ‘지역사’ 관련 학술대회에서 ‘대한제국기 압록강 두만강 일대 변경의 장소성’(은정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발표문은 청조와 대한제국의 정규군, 민간 군사력이 서로 충돌하면서 보복의 악순환을 일으켰던 데 주목했다. 이 지역은 일종의 피난지이자 이상향 같은 곳이었으나 경계를 획정하려는 양국의 충돌로 주민들의 삶이 갈수록 악화됐다는 것이다. 실재했던 ‘우복동’(牛腹洞·풍수적으로 소의 배 속처럼 생겨 전쟁 등을 피할 수 있다는 길지)은 오래가지 못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받으신 편지는 즉시 불사르십시오(來札卽投丙丁矣).” 조선 영조(1694∼1776·그림)가 왕세제(王世弟) 시절 보낸 비밀 어찰(御札)이 최근 확인됐다. 수신자는 경종 비 선의왕후의 아버지 어유구(魚有龜·1675∼1740)다. 어유구의 8대 후손인 어환 성균관대 의대 교수는 가문 대대로 보관하던 어찰들의 내용을 확인하고 동아일보에 사진을 공개했다. 발견된 편지는 모두 4편으로 이 중 2편은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가 1724년(경종 4년) 쓴 친필일 가능성도 높다. 나머지 2편은 후대 인물인 홍직필이 문집 ‘매산집’에 전체 또는 일부를 베껴놓았다. “소자(小子·영조)의 이 한 몸을 전적으로 경(어유구)에게 의탁합니다.” 영조가 어찰에 쓴 표현이다. 이는 ‘미래 권력’이지만 지위가 위태로운 세제 영조와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어유구 사이의 ‘핫라인’을 보여준다. 세제 시절 영조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다.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 동생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고,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지만 소론으로부터 역공을 당했다. 그 결과 노론 대신 4명을 포함해 약 60명이 목숨을 잃고 170여 명이 유배 등에 처해지는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났다. 영조를 지원하던 노론 세력이 거의 ‘싹쓸이’를 당한 것이다. 심지어 영조 자신도 ‘경종을 암살하려는 역적과 접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영·정조 시기 정치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최성환 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어찰 내용을 본 뒤 “노론 신하들이 참혹히 살해되자 극도로 근신하던 영조가 왕후와 국구 어유구를 최대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 드러난다”라고 말했다. 이근호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는 “어유구와 선의왕후는 애초 영조가 아니라 ‘종친의 아들로 나이 어린 자’를 세자로 세우려 했기에 왕세제 및 노론 주류와 불편한 관계였다”며 “하지만 영조와 어유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관계를 수습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영조는 어찰에서 어유구에게 ‘모종의 행동’을 독촉하기도 했다. “국구의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좋은 방책을 말한다면, 일이 나의 몸에 관련돼 있으니 어찌 감히 입으로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국구께서 깊이 헤아려 충분히 알고 계실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 공께서 만약 나라를 위해 종묘사직을 부지하려면 잘 아뢰어 처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조선 후기 사상·정치사 연구자인 이경구 한림대 한림과학원 교수도 “어유구가 무언가 세제와 관련된 어려움을 알렸고, 왕세제는 이에 대해 어떤 처리나 결단을 촉구하는 입장이 드러나 있다”고 말했다. 이 어찰을 통해 영·정조 시기 정치사의 미스터리 하나가 풀렸다는 평가다. 신임옥사로 사형당한 노론 4대신의 후예들은 노론의 핵심 중 하나인 어유구가 경종 대에 과격파 소론과 결탁한 듯한 행적이 있다며 지속적으로 문제를 삼았다. 그때마다 영조가 어유구를 옹호한 이유를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경구 교수는 “왕세제의 과감한 편지는 이례적인 것”이라며 “성년이 되고 나서 갑자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던 영조의 정치력이 잘 드러난다”라고 평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천재도 실수를 한다. 사상 최고의 천재들을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도 그랬다. 책은 24개 언어로 번역된 베스트셀러 ‘E=mc²’의 저자가 아인슈타인의 잘못된 결정과 오만에 초점을 맞춰 쓴 전기다. 저자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실수는 이른바 ‘우주상수’(우주를 불변의 것으로 서술하기 위해 방정식에 추가한 상수)를 도입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1915년 찾아낸 일반상대성 이론은 질량과 에너지가 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것. ‘사물(T)이 변형된 기하학적 구조(G)를 만들어낸다’는 걸 압축하면 방정식 ‘G=T’로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당대 천문학적 지식과 이 방정식이 배치된다는 데 있었다. 허블이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욱 빨리 멀어진다’는 걸 알아내기 전까지 천문학자들은 별들이 대체로 고정된 위치를 중심으로 회전할 뿐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헌데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별들은 공간을 휘게 만들어 점점 하나로 뭉쳐져야 했다. 자신의 이론이 당대의 지배적 지식, 관찰적 증거와 배치되는 걸 알고 아인슈타인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는 1917년 불만에 가득 차 자신의 아름답고 단순한 방정식을 ‘G-Λ(람다)=T’로 수정했다. ‘Λ’가 우주상수다. 별들이 뭉치게 만드는 인력의 일부를 제거하도록 방정식을 고친 것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다른 학자들의 지적을 받고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다. 그의 두 번째 실수이자 더욱 치명적인 잘못은 초미시 영역에서 발전한 물리학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확신했고, 양자역학의 불확정성과 무작위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1933년 이후 그는 세계 물리학계에서 외면당했으며 스스로도 양자역학의 발전을 외면했다. 책은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가 자신의 편협한 사고에 갇혀 버린 채 말년을 낭비하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의 삶과 내면, 사고와 과학자들의 논쟁 과정이 흥미롭게 버무려져 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 실학의 비조(鼻祖)로 꼽히는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의 사상을 살피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실학학회(회장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교수)와 실학박물관 등은 13, 14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서 국내 학자와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의 실학 연구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반계 유형원과 동아시아 초기 실학’을 연다. 이번 학술대회는 근래 발견된 유형원의 저작 ‘반계일고’와 ‘반계잡고’를 역주해 올해 ‘반계유고’로 간행하는 것을 기념해 열리는 것이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발표문 ‘17세기 문명적 위기의식과 실학’에서 “유형원은 병자호란에서 국왕이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은 일에 대해 ‘천하국가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사고하고 변법(變法) 개혁을 주장했다”고 밝혔다. 재야 학자였던 유형원의 대표적 경세서인 ‘반계수록’은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 윤증(1629∼1714)의 제자 덕촌 양득중(1665∼1742)이 영조에게 추천하면서 당대 주목을 받았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소장은 발표문 ‘반계 유형원과 덕촌 양득중의 실사구시’에서 “조선 실학은 성리학, 양명학 등 특정 학문과 배타적이지 않았고, 당색과 무관하게 경세론을 발전시켰다”며 “덕촌이 ‘반계수록’을 추천한 것도 실사구시의 정신이 발현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술대회에서는 조선 실학과 동아시아 각국 실학의 연관도 조명된다. 차이전펑 대만대 교수는 ‘동아시아 실학 속의 형이상학’에서 명말청초 중국의 자연철학자 방이지와 19세기 조선의 과학사상가 최한기의 사상을 살폈다. 그는 “17세기 초 동아시아 실학의 흥기는 유학 혁신의 시작”이라며 “서양 근대성의 측면에서는 그들의 유학 부흥운동이 근대화를 완성하지 못했으나 이들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사유는 동서 융합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밝혔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31회 인촌상 시상식이 1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 열렸다. 이 상은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용훈)와 동아일보사는 매년 인촌 선생의 탄생일(10월 11일)에 맞춰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교육) △강효 줄리아드음악원 교수(언론·문화)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인문·사회) △김종승 고려대 교수(과학·기술)는 각각 상패와 기념메달, 상금 1억 원을 받았다.▶ 수상자 공적은 9월 5일자 A8면 참조 이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올해 복잡하게 얽혀가는 북핵을 둘러싼 혼란이 인촌 선생의 리더십을 더욱 생각나게 한다”고 말했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은 축사에서 “수상자들은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으로 헌신한 선생의 유지를 이어 큰 성과를 내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앞서 인촌상운영위원회(위원장 한승주)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하고 7월부터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를 선정한 뒤 수상자를 확정했다. 교육 부문 수상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는 “6·25전쟁 시절 병상에서 일어나 민족과 국가의 장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인촌 선생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마음으로 가까이 모셨던 선생이 직접 상을 주시는 듯해 큰 영광”이라며 “제자와 함께 상을 받는 스승의 마음을 모르실 것”이라고 했다. 인문·사회 부문 수상자인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80)는 김 교수가 연세대 문과대에서 가르친 제자다. 몸이 불편한 이 교수를 대신해 부인 김정매 동국대 명예교수가 수상자로 참석했다. 부인이 읽은 수상소감에서 이 교수는 “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놓아본 적이 없다”며 “우리말 사전 편찬을 함께한 선배, 동료, 후배 학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언론·문화 부문 수상자인 강효 교수(73)는 “남은 삶의 기간 동안 무엇이든 더 잘해보고 싶은 의욕과 용기가 생겼다”며 “상금은 한국 음악계와 인재 양성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다. 암 표적 치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공로로 과학·기술 부문에서 수상한 김종승 고려대 교수(54)는 “실험실에서 밤낮없이 함께 연구한 연구원들 덕에 보잘것없는 제가 좋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다”며 “과학 발전에 초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현악 앙상블 ‘조이 오브 스트링스’와 바리톤 서정학 씨가 축하 공연을 펼쳤다.조종엽 jjj@donga.com·유원모·김민 기자 ● 주요 참석자 명단▽정·관·법조계=김수한 전 국회의장, 고건 노재봉 이홍구 한덕수 전 국무총리(이하 가나다순) 김종빈 전 검찰총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유성엽 국회의원, 윤영찬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 이진강 전 대한변협 회장, 장성원 전 국회의원, 정성진 대법원 양형위원장, 조영달 전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학계·교육계=강석중 한국세라믹기술원장, 국양 서울대 교수, 권순달 수원대 교수,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 김광수 한신대 명예교수, 김기문 포스텍 교수, 김문석 과천여고 교사, 김병완 고대부고 교감, 김병휘 한양대 명예교수,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김성우 연세대 명예교수, 김성진 한림대 명예교수,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영진 인하대 명예교수, 김용복 광운대 명예교수, 김용찬 고려대 연구기획본부장, 김용학 연세대 총장, 김원희 고려사이버대 총무처장, 김재호 고려중앙학원 감사,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진성 고려사이버대 총장, 김학준 인천대 이사장, 김혜숙 이화여대 총장, 김흔 전 중앙고 행정실장, 나승일 서울대 교수, 나홍석 고려사이버대 교수, 남기심 연세대 명예교수, 명순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장, 문세준 고려중앙학원 사무국장, 박길성 고려대 교육부총장, 박길준 연세대 명예교수, 박명식 고려중앙학원 상임이사, 박순영 연세대 명예교수, 박연정 고려사이버대 교무처장, 박인서 연세대 명예교수, 박종훈 고려대 의무기획처장, 박찬욱 서울대 교육부총장,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 서성규 고려대 기획처장,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송창범 고대부중 교감,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 신현석 고려대 교수, 안동규 한림대 부총장,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 안정오 고려대 세종부총장, 엄정식 서강대 명예교수, 염재호 고려대 총장, 염철현 고려사이버대 학생처장, 유병현 고려대 대외협력처장, 윤성택 고려대 이과대학장, 윤영철 연세대 교수, 이관영 고려대 연구부총장,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 이기영 인천대 교수, 이동준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 이민영 고려사이버대 입학홍보처장, 이용균 중앙고 교감, 이원희 대원교육장학재단 이사장, 이주현 고대부중 교장, 이초식 고려대 명예교수, 이충환 인촌장학생동문,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 이홍우 상명대 석좌교수, 임상호 고려대 대학원장, 장승문 중앙중 교장,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 정인재 서강대 명예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명예교수, 정진곤 한양대 명예교수, 정진택 고려대 공과대학장, 조성규 연세대 명예교수, 조완규 서울대 명예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석좌교수, 최광식 고려대 교수, 최덕 명지대 교수, 최용석 중앙중 교감, 하윤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장, 한금선 고려대 교수, 한상복 서울대 명예교수, 허도영 고대부고 교장,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경제계=구자열 LS그룹 회장, 권영민 전 태영건설 상무, 권이상 전 경방 감사, 김명하 김앤에이엘 회장, 김선휘 삼양염업사 고문, 김양수 전 현대차 부사장, 김영 코나딥코리아 대표, 김재억 삼양홀딩스 고문,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김정환 호텔롯데 대표이사, 김창세 제일특허법인 대표, 김태희 삼표에너지 회장,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서정호 앰배서더호텔그룹 회장, 안병모 유창건축사사무소 사장, 오세정 한국금융투자협회 본부장, 이기황 다음소프트 이사, 이병연 세화애드컴 대표, 이중홍 경방 고문, 정세장 면사랑 대표, 정종섭 다림바이오텍 대표, 홍성훈 삼양홀딩스 감사 ▽언론·출판·문화·체육계=고승철 나남출판 사장, 김광희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김기경 한국오리엔티어링연맹 명예회장, 김달수 울산김씨대종회장, 김병건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고문, 김복수 전 동아일보 관리국 부국장, 김상준 울산김씨대종회 상근부회장, 김유리 인촌장학생동문, 김은 인촌기념회 이사, 김재봉 지역신문발전위원장, 김정옥 전 예술원 회장, 김정일 전 동아애드넷 대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종태 평화의 마을 대표,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김천주 한국여성소비자연합회장, 김태선 동우회 명예회장, 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류재림 한국영상자료원장, 민경갑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박기정 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박오학 전 동아일보 전무, 박진오 동아일보 감사, 박충서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배인준 EBS 감사, 성낙오 전 영남일보 사장, 양철화 전 동아일보 관리국장, 어경택 화정평화재단 감사, 오명 전 동아일보 회장, 이기웅 열화당 대표, 이대훈 전 동아일보 이사, 이연택 동아마라톤 꿈나무재단 이사장,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장, 이종세 한국체육언론인회장, 이희범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임성준 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임연철 서초문화예술회관 관장, 전만길 전 서울신문 사장, 전용호 한국어문언론인협회 부회장, 정준기 전 동아일보 광고국장, 조강환 동우회장, 조천용 동우회 이사, 최규철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최동욱 한국방송디스크자키협회장,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 최명우 안전신문 주필, 한종우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장, 허승호 한국신문협회 사무총장, 현재천 인촌기념회 이사, 홍공선 동우회 이사, 홍성훈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홍인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미술 작품에 숨겨진 암호를 추적하는 소설 ‘다빈치 코드’처럼 국보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겉에 쓰인 명문(銘文)에 숨겨진 비밀을 밝힌 연구가 나와 주목된다. 한국 고대 사상사 연구자인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12일 신라문화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인 ‘신라성덕대왕신종의 명문 신탐(新探)’에서 명문을 새로 판독, 분석했다. ○ 코드1―종의 사주팔자(四柱八字) “유사(有司·실무부서)에서 일을 준비하고 기술자들은 밑그림을 그렸다(畵模). 때는 신해년(771년) 12월이었다.” 명문의 기존 번역 중 일부다. ‘종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표현도 어색하거니와 바로 뒤 “이때 해와 달이 서로 빛을 빌고 음과 양이 기운을 조절하였다”는 구절로 특별히 강조할 만한 일 같지도 않다. 실마리는 ‘그릴 화(畵)’자에 있다. 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기존 번역은 오역이다. 당시 ‘畵’자는 오늘날 ‘쪼갤 획(劃)’과 같은 뜻이 있었다. 바른 해석은 “장인들이 거푸집(模)을 떼어내니(畵)”가 된다. 종이 완공될 때 “음과 양이 기운을 조절하였다(陰陽調氣)”는 것도 의례적 수식이 아니라 숨겨진 비밀이 있다. 종의 제작일은 음력으로 771년 12월 14일. 논문에 따르면 연(신해·辛亥)과 월(신축·辛丑)의 간지(干支)가 모두 음에 속하고, 제작일(병인·丙寅)의 간지는 반대로 양에 속한다. 백제 칠지도 등의 사례에 비춰 보면 제작 시간의 간지 역시 양에 속하는 갑오(甲午)로 추정된다. 최 교수는 “간지 여덟 글자의 음과 양이 4 대 4로 양분됐고, 오행도 고르게 배열됐다”며 “완공 날짜를 음양오행에 맞춰 미리 정해 놓고 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코드2―풍류 사상 ‘성스러운 덕이 크다’고 번역돼 온 명문의 ‘원원성덕(元元聖德)’도 최 교수는 새로 해석했다. 원래 ‘현현(玄玄)성덕’이었으나, 당나라 현종(玄宗)의 시호 글자를 피해 ‘玄’을 ‘元’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현현은 노자에 나오는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줄임말이다. 또 뒤 구절의 ‘묘(妙)하고 묘(妙)하도다 맑은 교화여!’와 짝을 이루며 성덕왕의 덕을 ‘현묘(玄妙)’로 묘사한 것이 된다. 최 교수는 “최치원은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라고 해 신라에 현풍(玄風)이 있었음을 증언했다”며 “이 구절은 성덕왕(재위 702∼737년)의 통치 원리가 우리 고유의 풍류도(風流道)와 연결됐다는 걸 시사한다”고 밝혔다.○ 코드3―숨은 이념 갈등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는 이 종은 아들 경덕왕(재위 742~765년)이 시도했으나 종을 주조하지는 못했다. 결국 손자인 혜공왕(재위 765∼780년)이 완성했다. 명문은 경덕왕의 유교적 정치이념 등 한화(漢化) 정책에 대해 “속(俗)을 다스림에 고(古)를 따랐으니 풍조를 바꿈에 무슨 어긋남이 있으랴(治俗仍古, 移風易俗)”라고 칭송했다. 최 교수는 “명문은 또 한화 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린 혜공왕 대를 ‘보배로운 상서(祥瑞)가 자주 나타나고, 신령한 영험(靈驗)이 늘 생겼네’라며 우회적으로 옹호했다”며 “이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고 강조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인 1912년 조선총독부는 최초의 성문화된 한글 맞춤법으로 평가되는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공포한다. 이 맞춤법이 사실은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한글을 활용하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 일본인 경찰이나 교사의 한국어 습득을 염두에 두고 정한 것이어서 한글 표기법을 퇴보시켰다는 연구가 나왔다. 동아일보는 김주필 국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57)가 ‘국어사연구’에 투고한 논문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1912)의 특성과 문제점”을 게재 전 입수했다. 앞서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는 이 맞춤법을 제정하기 위해 1911년 7∼11월 5차례 열린 ‘조선어 조사회의’ 회의록을 찾아내 2004년 공개했다. 권 교수는 당시 “한글을 일본어 50음도 틀에 맞춰 일본어의 발음기호로 전락시켰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주필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회의록을 한글 표기 역사 관점에서 정밀 분석했다. 1911년 7월 28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조선어 조사회의 첫 모임에서 “언문(한글) 가나 표기법 회의를 개최함에…”라며 인사말을 했다. 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이는 애초부터 일본어의 가나를 한글로 표기하는 법이 이 맞춤법의 핵심 목적이었음을 뒷받침한다. 또 도쿄외국어대 교수 가나자와 쇼자부로가 맞춤법 검토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12년 펴낸 ‘일어유해’ 서문에서 “한마디라도 많은 국어(일본어)를 이해하는 조선인을 한 사람이라도 많이 양성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도 그 방증이다. 일제가 제정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은 ‘ㅱ치’(꽃이) ‘압흘’(앞을) ‘어덧다’(얻었다)로 표기하도록 규정했다. 주시경(1876∼1914) 어윤적(1868∼1935) 등 우리말 학자들이 이보다 앞서 1909년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히고 고정해 적는 ‘형태음소적 표기’를 원칙으로 ‘국문연구의정안’을 마련했지만 그보다 훨씬 퇴보한 것이다. 의미 단위인 형태소를 살리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어 15세기 표기에 가깝다. 이는 일본인 경찰, 교사 등의 우리말 습득 편의가 맞춤법의 목적 중 하나였던 탓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우리말의 음운규칙을 모르는 일본인에게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적 표기’가 쉽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어윤적이 조사회의에 참여해 반대를 무릅쓰고 ‘형태음소적 표기’를 관철시켰지만 조선총독부가 이를 일방적으로 뒤집었다”며 “그럼에도 총독부는 철자법을 공포하면서 ‘조사촉탁원에게 명하여 조사 결정하게 했다’고 거짓으로 설명했다”고 지적했다. 일제가 왜곡한 맞춤법은 한글학자들이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정정됐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간이 하던 고차원적인 일을 사물이 해내고, 인간과 사물의 구별마저 점점 어려워지는 오늘날 ‘인간과 세계’를 연구하는 건 마치 과학자나 공학자들의 전유물처럼 돼 간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지만 적어도 평범한 이들의 눈높이에서는 급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질 들뢰즈(프랑스 현대 철학자) 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모든 철학은 당대의 자연과학과 나란히 가야 한다”며 이런 세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컴퓨터와 마음’ 과목을 3년여 강의한 게 집필의 바탕이 됐다. 결론부터 보자. 가까운 미래,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공지능이 등장하고 인간을 지배할까? “아니다.” 인간은 목표를 스스로 정하지만 인공지능의 목표는 인간이 정해준다. ‘기계학습’이라는 말은 마치 기계가 인간처럼 공부한다는 오해를 만들지만 이 역시 인간이 정한 수행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새로운 작동 규칙을 스스로 생성하는 일 역시 저자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생명은 ‘버그’(결함)를 바탕으로 진화하지만 컴퓨터는 버그가 있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고장을 수리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한 단계 높은 층위의 컴퓨터 프로그램, 곧 ‘자의식’이 필요한데 이는 수학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계산과 관련된 인간의 일, 알고리즘으로 짤 수 있는 일은 인공지능이 빠르게 대체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간에게 남은 건 문제를 제기하고 목표를 세우는 일, 즉 창조적인 일이다. 창조성을 어떻게 배우나? 예술가처럼 살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예술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창작이 학습의 핵심 활동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책은 초인공지능보다 먼저 인간과 컴퓨터가 얽힌 ‘네트워크 마음’ 또는 ‘네트워크 지능’이 출현할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얽혀 들어갈 ‘인간이라는 버그’다. 네트워크 지능이 인간의 나쁜 특성도 지니게 될 소지가 크다는 얘기다. 정부나 기업이 ‘빅브러더’가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만약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완성된 제품을 분석해 작동 방식을 역으로 알아내는 공학) 방식으로 인간의 커넥톰(뉴런의 연결망)이 프로그램과 로봇으로 재현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인공지능을 처음 본격적으로 논의한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의 1950년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에는 참고문헌이 불과 9개밖에 없다고 한다. 참고문헌 중 하나인 새뮤얼 버틀러(1835∼1902)의 책 ‘Erewhon’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계에 작용하고 기계를 만드는 것이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작용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기계들이다.” 생물과 기계의 차이는 모호해진다. 튜링의 논문,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철학,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비롯해 책이 발췌해 안내하는 여러 고전과 관련 자료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거대하고 다양한 쟁점을 압축해 다루다 보니 키다리가 겅중겅중 뛰어가는 듯 서술됐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독자가 생각할 거리를 잽처럼 날리는데, 저자 스스로 탐구한 발걸음에 힘을 실은 잽이 한 방 한 방 묵직하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직 임명이 쉬웠던 만큼 공직 수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제도는 가히 징벌적이었다. …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출된 공직자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가 터무니없이 허술하다. … 공직자들이 서로 담합하거나,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많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4월 강연한 내용 중 일부다. 최 교수는 강연에서 다원적 구조와 시민사회로부터 조직된 정당의 변화, 새로운 사회적 힘의 진입을 촉구한다. 책은 ‘문화의 안과 밖’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시리즈 강연 중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이상익 부산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의 강연을 비롯해 정치와 윤리 관련 강연 5개와 토론을 묶었다. 박성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다. 그는 직접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작동한 기원전 4, 5세기 ‘데모스’(민중)가 실질적인 지배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제도로 ‘도편추방’ 등을 꼽는다. 도편추방은 흔히 참주(독재자)가 될 위험이 있는 인물을 추방하는 제도로 알려져 있지만 참주 출현 위험과 별개로 철저히 엘리트를 견제하는 제도였다는 것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근대 세계의 희망과 불안’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통해 행복한 삶과 가까운 미래 사회의 전망을 묻는다. 토론자로 나선 장대익 서울대 교수는 “진화의 관점에서 행복은 생존과 번식의 수단에 불과하며,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가 바뀐 이 시대에는 유토피아 논의도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일부 논의가 충분히 전개되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듯한 감도 없지 않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국인들이 지역 내 신흥 강자의 부상과 파워 밸런스의 재조정을 맞닥뜨리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고려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적지 않은 중원 패권국가의 공존과 교체를 겪으며 대체로 유연하고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중세사학회가 22일 부산대에서 여는 학술대회 ‘고려시대 대중국 외교 현안과 대응 방식’의 발제문을 미리 살펴봤다. 고려 외교사에는 남북으로 오늘날 한국의 영토를 규정한 사건들이 적지 않다. 정동훈 박사(서울시립대 박사후연구원)는 발표문 ‘몽골의 유산 상속 분쟁’에서 고려-명의 초기 외교에서 등장한 제주(탐라) 문제를 분석했다. 삼별초의 패배 뒤 몽골은 약 20년 동안 탐라를 직할 통치했고, 고려가 행정 관할권을 장악한 뒤에도 목마장과 말은 몽골의 소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위에 오른 명 홍무제(주원장)는 원의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천명한다. 발표문에 따르면 이는 몽골 제국이 보유하던 여러 권한이 모두 자신에게 귀속된다는 것으로 탐라 역시 명이 연고권이나 권익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탐라라는 섬은 고려 사람들이 개국한 이래로 주(州)를 설치하고 목(牧)으로 삼아왔습니다.” 공민왕은 1370년 명에 표문을 보내 △제주는 고려가 관할하겠다 △몽골인 목자(牧子)들도 고려에서 관할하겠다 △원 조정에서 풀어 먹이던 말은 명에 진헌하겠다고 제안한다. 선제적으로 탐라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 명에서 제주에 대한 권리를 부풀려 주장하는 상황을 막은 것이다. 명은 영유권에 대한 즉답을 피했다. 고려는 몽골이 파견한 목장 관리자들(牧胡·목호)이 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민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명에 파견해 탐라 출병 의사를 밝힌다. 고려사와 명태조실록에 나오는 명의 답변은 온도차가 있다. 정동훈 박사는 “홍무제에게 탐라는 탐나는 이권이지만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며 “홍무제의 답변 자체가 일관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민왕은 강수를 둔다. 1374년 최영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을 보내 탐라 정벌을 강행하고, 결과를 명에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고려의 실효 지배를 기정사실화한 것이다. 정 박사는 “공민왕의 탐라 정벌은 몽골 제국이 동아시아에 남긴 유산을 실력 행사로 차지하는 과정의 일부”라며 “공민왕 말년까지 고려는 정확한 정세 분석과 과감한 행동으로 실리를 챙겼다”고 말했다. 박윤미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이 발표하는 ‘고려의 보주(保州) 수복과 금의 승인’에서도 고려의 실리 외교를 엿볼 수 있다. 보주는 압록강 하류 동쪽의 의주(義州)로 고려가 ‘강동6주’를 설치했지만 거란이 1014년 강점해 수복해야 했다. 고려는 새로 흥기한 여진(금)이 보주의 거란군을 공격해 함락시키기 전에 보주를 차지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을 맞았다. 고려는 금의 공격을 받아 식량이 떨어진 거란군을 상대로 쌀을 무기로 외교적 회유와 압박을 병행했고, 패배한 거란군으로부터 피 흘리지 않고 보주성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금은 승인을 보류하고 고려의 영토라는 걸 한동안 인정하지 않았다. 박윤미 연구원은 “고려는 같은 시기 송나라의 원병 요청을 부드럽게 거절하는 한편 금이 원하는 ‘서봉(誓封·충성맹세 문서)’을 제출하면서 압록강을 국경으로 얻어냈다”고 말했다. 학술대회에서는 ‘10세기 고려의 대송 외교와 정책기조’, ‘14세기 초반 요양행성(遼陽行省)의 합성(合省) 건의와 고려-몽골 관계’ 등도 발표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연일 하늘이 높고 푸르다. 창밖만 내다보면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가을 빚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당장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이라면 나중에 더 힘들더라도 일단 응하고 봄)고 했으니, 웬만한 일 제쳐두고 거리를 걸어볼까. ‘가을에 중 싸대듯’(매우 바쁘게 싸돌아다님) 하지 말고 느긋하게. 비소식이 있기는 하지만 ‘가을비는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도 피한다’(잠깐 오다 그치기 마련이다)고 했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가을걷이를 할 때 매우 바쁘고 손이 모자람)는 속담은 오늘은 없는 것으로 치자. ‘가을에는 손톱 발톱이 다 먹는다’(식성이 좋아져서 많이 먹게 된다)고 했으니, 저녁에는 ‘문 걸어 잠그고 먹는다’는 가을 상추로 쌈을 싸먹을까. ‘소 발자국에 괸 물도 먹는다’(가을의 물은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가을의 물도 한 모금 들이켜고…. ‘가을 부채’(필요한 때가 지나 소용이 없어진 것) 팔랑대면 세월 가는 줄 모르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사람이 천지 사이를 살아가는 것은 문득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여관 가운데서 지내면서 꼼꼼하게 갖추어진 집을 구하는 것과 같아서, 그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을 사람이 없다. 돌아보건대 아등바등 애를 써서 오직 입고 먹는 것만을 위해 애쓴다면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 조선 최고의 학자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이 1810년 유배 중 해남 사람 천경문에게 써서 준 ‘증언(贈言)’이다. 글은 배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끝난다. 증언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가르침의 글이다. 한양대 교수로 다산 전문가인 저자가 다산의 증언을 모아 번역과 해설을 달았다. “안영과 전문은 모두 몸집이 왜소하고 비루해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직간으로 임금을 바로잡고 기절을 숭상하여 세상에 이름났다.… 몸이 집이라면 정신은 주인과 같다.” 다산이 1818년 체구가 작은 15세의 제자 윤종진에게 준 글이다. 다산은 외모는 보잘것없지만 큰일을 한 위인들을 꼽으며 독려한다. 이처럼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맞게 가르침을 내렸다. 1802년 강진에서 서당을 처음 연 뒤 맞은 제자 황상(1788∼1870)에게 내린 가르침은 또 어떤가. 배움을 시작한 7세 제자가 ‘저처럼 아둔하고 꽉 막힌 사람도 정말 공부를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외우는 데 민첩하면 소홀해지고, 글짓기에 날래면 들뜨고,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칠어지는 폐단이 있다”며 “너는 그런 병통이 없으니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답을 내린다. 이른바 ‘삼근계(三勤戒)’로 널리 알려진 증언 ‘증산석(贈山石)’이다. 제자들은 증언을 곁에 두고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10대 초반 다산초당에서 배운 제자 윤종민은 스승이 준 글을 읽고 또 읽어서 통째로 외웠다. 그리고 1868년 70세가 된 어느 날 이를 작정하고 종이에 적었다. 다산의 글 원본도, 윤종민이 쓴 원본도 남아 있지 않지만 윤종민의 후손이 이를 다시 옮겨 적은 사본이 전한다. “흉년으로 농부들은 밥 먹기조차 어렵고 나쁜 병마저 번져서 열에 일곱 여덟이 죽었다.…하늘 또한 어질지 않은 존재이다.…마음으로 빌고 또 빈다.” 농경사회를 살았던 다산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같지 않으므로 증언은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속뜻을 읽어야 한다. 사제의 인연과 함께 200년을 넘어 내려오는, 대학자의 가르침이 참 귀하다. 책을 읽다 보면 다소 엉뚱하게 ‘스테이 헝그리, 스테이 풀리시(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살라)’라는 스티브 잡스의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저자는 어떤 흐린 복사본 자료는 4, 5년간 틈날 때마다 한 글자씩 읽어서 마침내 모두 해독해 냈다고 한다. ‘다산 증언첩’은 지금까지 발견된 증언 모두를 담은 소장판이고 ‘다산의 제자 교육법’은 보급판이다. 소장판은 두껍고 무겁지만 증언의 앞뒤 맥락을 자세히 알 수 있어 더 흥미롭다. 보급판은 설명이 간단해 증언의 진의를 이해하기가 오히려 쉽지 않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별다른 논쟁 없이 민주공화정을 채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 바로 대소민(大小民·양반과 백성)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가던 민회(民會) 같은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후기 공론정치의 새로운 전개’(서울대 출판문화원)를 최근 낸 김인걸 서울대 명예교수(65·사진)를 13일 만났다. 김 교수는 향촌사회 연구 등에서 업적을 낸 조선 사회사의 권위자다. 책은 18, 19세기 향회(鄕會)와 민회를 중심으로 공론정치의 전개를 살폈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규정한다. 그럼 임시정부의 민주주의는 어디서 왔을까. 근대 전환기 위정척사파나 외세에 기댔던 개화파에서 연원을 찾기는 어렵다. 김 교수는 “위로부터의 관념적 근대 지향이 아니라 향회, 민회, 동학농민운동 등 아래로부터의 역사적 경험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 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공론정치가 18세기까지 유지되다가 19세기 세도정치로 종식됐다고 봤다. 그러나 그건 중앙정부와 지배층 중심의 시각일 뿐 지방에서는 향회와 민회를 통해 새로운 공론의 장이 열렸다는 게 김 교수의 결론이다. 이 공론장은 기존과 완전히 단절돼 민중이 주도했다기보다 대민과 소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처럼 ‘아래로부터’ 공론을 모으는 것이 한국인 정체성의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일례로 1834년 경상도 선산부의 향회에서는 면장 격인 ‘풍헌(風憲)’을 해당 면의 백성들이 투표해 뽑도록 정했다. 1893년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위해 모인 동학도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일컬어 ‘각국에 있는 민회와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그간 근대 전환기에 민중으로 성장하는 이들을 평가하는 데 너무 인색했습니다. 서구적 근대라는 결과를 중심에 놓지 말고 우리는 어떤 근대를 만들어 왔는가를 역사적으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한신대에 이어 1986년부터 일한 서울대에서 최근 정년퇴임한 그는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정체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연구 경험을 후학들에게 전하는 책 ‘나의 자료 보기, 나의 역사 쓰기’(가제)는 11월경 발간할 예정이다. “옛날에는 내가 가르친 것보다 더 훌륭하게 시험 답안을 쓰는 학생이 적지 않아 참 고마웠지요. 요즘은 ‘공부를 계속했으면 좋겠다’ 싶은 학생도 여러 이유로 공부를 포기하고 사회로 일을 찾아 나가는 걸 자주 봅니다. 대학원 장학금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역사가 인간 정체성의 기본이 된다는 걸 우리 사회가 잘 몰라요.”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주한미군이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미군과 관련된 기념물을 평택기지로 반출하겠다고 요청하자 문화재청이 56점을 승인한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인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이 문화재청에서 제출받은 ‘용산 미군기지 내 기념물·기념비 평가결과 목록’ 자료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과 올 1월 국방부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단 요청에 따라 용산기지 내 기념물 68건을 평가했다. 이 중 조선시대 문인석상 등 12건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 ‘이전 가능’이라고 승인했다. 이전 허가가 난 기념물에는 주한미군군사고문단 기념비,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7사단 코이너 소위의 이름을 딴 ‘캠프 코이너’ 안내 동판,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 창설 기념 박정희 전 대통령 휘호 비석 등이 포함됐다. 낙동강전투 등을 지휘한 워커 장군 동상을 비롯한 12점은 평택기지로 6월까지 이전이 완료됐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사변 사망 장병을 기린다며 1935년 용산기지 자리에 세운 충혼비를 미군이 교체해 건립한 ‘한국전쟁 미군 기념비(미8군 본부 기념비)’ 등 용산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 유물에 대해 이전 결정을 한 것은 성급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미군 장군 동상 같은 것은 평택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면서도 “한국과 미국 양측 모두 이전 뒤 그 장소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 한미동맹에서 용산기지의 의미를 어떻게 역사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