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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1849년 전 유럽을 뒤흔든 시민혁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민주화나 자치권 부여 같은 요구사항이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고,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겉만 요란했던’ 혁명은 그보다 반세기 전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나 반세기 후 제1차 세계대전과 공산혁명보다 많은 작곡가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시기가 마침 낭만주의 음악의 융성기로 많은 작곡 거장들이 음악 혼을 꽃피우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찬찬히 살펴볼까요. 오스트리아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탈리아 혁명을 진압한 보수파 장군 라데츠키를 찬양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썼습니다. 그의 아들인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진보파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다 수배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슈만의 부인이자 명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는 연주여행 후 집으로 돌아가다 바리케이드에 가로막히자 길을 막는 사람들을 호되게 꾸짖고 통과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혁명으로 운명이 크게 바뀐 사람으로는 바그너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보수 왕정의 체포 영장이 발부돼 파리로, 취리히로 도주 생활을 했고 12년 동안 독일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억압 속에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에서는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 등 애국적인 소재를 오페라로 만들었던 베르디가 애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면서 한껏 인기를 높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으로 ‘2등 시민’ 취급을 받던 체코인들에게 혁명의 열기는 한층 높았습니다.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는 프라하의 카렐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혁명이 좌절된 뒤 그는 급진파로 찍혀 설 자리가 없어졌고 스웨덴의 예테보리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날엔 그의 동상이 카렐 다리 옆에 서있습니다. 정치적 지형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작곡가들의 삶에 뚜렷한 선을 그은 혁명. 그 기폭제가 되었던 프랑스 파리의 2월혁명이 1848년 2월 22~24일 일어났습니다. 이맘때면 바그너나 스메타나의 명선율을 듣고 싶어지는 이유입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주변에 감기 걸린 분이 많군요. 독자들께서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릴 때는 TV에서 잔잔한 실내악이 흐르고 어린이 모델이 등장하는 감기약 CF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이지 보케리니의 미뉴에트’죠. ‘이렇게 온화한 음악을 쓰다니, 그윽한 미소를 늘 머금은 작곡가가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보케리니에게는 의외로 까칠한 면이 있었습니다. ‘보케리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성(姓)입니다. 그런데 ‘미뉴에트’ 다음으로 사랑받는 그의 작품이 기타 5중주 4번 ‘판당고’죠. 판당고는 스페인의 강렬한 색채가 물씬 묻어나는 춤곡으로 기타가 맹활약해 더욱 남국의 분위기가 풍깁니다. 캐스터네츠가 연주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18세기 이탈리아인이 왜 스페인 무곡을 썼을까요? 로마에서 첼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18세 때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루이스 안토니오 공의 눈에 들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로 활동무대를 옮깁니다. 그는 궁정 음악가로 화려한 활동을 펼치지만 어느 날 왕이 새로 작곡한 작품 일부가 마음에 안 든다며 바꾸어 보라고 말합니다. 기분이 상한 그는 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부분을 고치기는커녕 두 배로 늘려 버렸습니다. 결과는? 물론 파직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프로이센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섬겼습니다. 스페인 궁정에서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죠. 왕 자신이 플루트와 첼로를 잘 연주했고 음악의 후원자로 자처했거든요. 바흐에게 ‘음악의 헌정’을 쓰도록 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왕이 죽은 뒤 보케리니는 돌아갑니다. 고국 이탈리아가 아닌 제2의 고향 마드리드로. 후원자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 깃든 스페인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금난새와 함께하는 클래식 갈라 콘서트’에서는 기타리스트 미리암 브룰로바와 칼라치 스트링콰르텟이 보케리니의 기타 5중주 4번 ‘판당고’를 연주합니다. 마침 19일은 보케리니의 272번째 생일이네요. 이 ‘까칠했지만 제2의 고향을 사랑했던’ 남자의 자취를 돌아볼 계기가 될 듯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주변에 감기 걸린 분이 많군요. 독자들께서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릴 때는 TV에서 잔잔한 실내악이 흐르고 어린이 모델이 등장하는 감기약 CF를 볼 수 있었습니다. ‘루이지 보케리니의 미뉴엣’이죠. ‘이렇게 온화한 음악을 쓰다니, 그윽한 미소를 늘 머금은 작곡가가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보케리니에게는 의외로 까칠한 면이 있었습니다. ‘보케리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성(姓)입니다. 그런데 ‘미뉴엣’ 다음으로 사랑받는 그의 작품이 기타5중주 4번 ‘판당고’죠. 판당고는 스페인의 강렬한 색채가 물씬 묻어나는 춤곡으로 기타가 맹활약해 더욱 남국의 분위기가 풍깁니다. 캐스터네츠가 연주에 참가하기도 합니다. 18세기 이탈리아인이 왜 스페인 무곡을 썼을까요? 로마에서 첼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18세 때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의 동생인 루이스 안토니오 공의 눈에 들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로 활동무대를 옮깁니다. 그는 궁정 음악가로 화려한 활동을 펼치지만 어느 날 왕이 새로 작곡한 작품 일부가 마음에 안 든다며 바꾸어보라고 말합니다. 기분이 상한 그는 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 부분을 고치기는커녕 두 배로 늘려버렸습니다. 결과는? 물론 파직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프로이센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섬겼습니다. 스페인 궁정에서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죠. 왕 자신이 플루트와 첼로를 잘 연주했고 음악의 후원자로 자처했거든요. 바흐에게 ‘음악의 헌정’을 쓰도록 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왕이 죽은 뒤 보케리니는 돌아갑니다. 고국 이탈리아가 아닌 제2의 고향 마드리드로. 후원자들도 다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 깃든 스페인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금난새와 함께하는 클래식 갈라 콘서트’에서는 기타리스트 미리암 브룰로바와 칼라치 스트링콰르텟이 보케리니의 기타 5중주 4번 ‘판당고’를 연주합니다. 마침 19일은 보케리니의 272번째 생일이네요. 이 ‘까칠했지만 제2의 고향을 사랑했던’ 남자의 자취를 돌아볼 계기가 될 듯합니다.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인기를 끌면서 1월에는 전 세계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빈 왈츠가 자주 연주됩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만 왈츠가 있었던 것은 아니죠.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 저는 종종 다른 작곡가의 왈츠를 떠올립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작곡가 에밀 발퇴펠(1837∼1915)의 ‘스케이터 왈츠’입니다. 제목처럼 느긋하게 양날을 지치는 사람들, 그렇지만 오늘날처럼 스포티한 차림이 아니라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정장을 한 채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우아한 모습이 연상됩니다. 프랑스 작곡가인데 왜 영국 빅토리아 시대냐고요? 발퇴펠은 1874년 당시 웨일스공의 눈에 들어 런던에 건너와 활동하게 됩니다. 훗날 에드워드 7세 왕이 되는 사람입니다. 런던에서 그는 빈 왈츠와는 다른 분위기의 왈츠를 발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1882년 작곡한 ‘스케이터 왈츠’가 그중 가장 인기 높은 작품이죠. ‘여학생 왈츠’로 잘못 번역된 ‘학생악대(Estudiantina) 왈츠’도 젊은이의 활기찬 모습을 신선한 멜로디로 꾸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라. 따져보면 그의 이름도 국경을 넘습니다. 그는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함께 쓰이던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자랄 때는 프랑스 땅이었지만 사람들 이름에는 독일 성이 많았죠. 태어날 때 그의 이름은 에밀 레비였습니다. 그런데 자라서 발퇴펠(Waldteufel)이라는 묘한 성으로 바꾸었습니다. 독일어로 발음하면 발트토이펠, ‘숲의 악마’라는 뜻이 됩니다. 왜 이런 이름으로 활동했는지, 바꾸려면 왜 아예 프랑스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는지… 수수께끼입니다. 오늘날 두 곡의 듣기 편한 왈츠로 기억되는 발퇴펠이지만, 이 코너에서 소개해온 여러 대작곡가들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런 그를 왜 내세웠냐고요? 12일이 바로 그의 서거 100주년이거든요.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까운 빙상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피겨스케이트를 신고 우아한 왈츠에 도전해 볼까요?유윤종 gustav@donga.com}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가 인기를 끌면서 1월에는 전 세계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빈 왈츠가 자주 연주됩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의 빈에만 왈츠가 있었던 것은 아니죠. 요즘같이 추운 겨울에 저는 종종 다른 작곡가의 왈츠를 떠올립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작곡가 에밀 발퇴펠(1837~1915)의 ‘스케이터 왈츠’입니다. 제목처럼 느긋하게 양날을 지치는 사람들, 그렇지만 오늘날처럼 스포티한 차림이 아니라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정장을 한 채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의 우아한 모습이 연상됩니다. 프랑스 작곡가인데 왜 영국 빅토리아 시대냐구요? 발퇴펠은 1874년 당시 웨일스공의 눈에 들어 런던에 건너와 활동하게 됩니다. 훗날 에드워드 7세 왕이 되는 사람입니다. 런던에서 그는 빈 왈츠와는 다른 분위기의 왈츠를 발표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1882년 작곡한 ‘스케이터 왈츠’가 그중 가장 인기 높은 작품이죠. ‘여학생 왈츠’로 잘못 번역된 ‘학생악대(Estudiantina) 왈츠’도 젊은이의 활기찬 모습을 신선한 멜로디로 꾸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라. 따져보면 그의 이름도 국경을 넘습니다. 그는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함께 쓰이던 프랑스 알사스 지방에서 성장했습니다. 그가 자랄 때는 프랑스 땅이었지만 사람들 이름에는 독일 성이 많았죠. 태어날 때 그의 이름은 에밀 레비었습니다. 그런데 자라서 발퇴펠(Waldteufel)이라는 묘한 성으로 바꾸었습니다. 독일어로 발음하면 발트토이펠, 숲의 악마라는 뜻이 됩니다. 왜 이런 이름으로 활동했는지, 바꾸려면 왜 아예 프랑스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는지… 수수께끼입니다. 오늘날 두 곡의 듣기 편한 왈츠로 기억되는 발퇴펠이지만, 이 코너에서 소개해온 여러 대작곡가들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런 그를 왜 내세웠냐구요? 12일이 바로 그의 서거 100주년이거든요. 기념하는 의미에서 가까운 빙상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피겨 스케이트를 신고 우아한 왈츠에 도전해 볼까요?유윤종 gustav@donga.com}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명 이상이 앙상블을 이루는 오케스트라는 그 존재 자체가 기적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의 순회 연주(투어)는 때로 그 이상의 기적이다. 이국에서 연주자가 앓거나 사라지기도 하며,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제물도 되면서 수많은 변수에 적응해야 한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는 런던의 ‘5대’ 오케스트라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힌다. 1904년 창립된 이 악단이 초기에 확고한 명성을 확립한 데는 1912년 가진 미국-캐나다 투어가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이 악단 수석 플루티스트가 쓴 한 세기 전과 오늘날의 순회 연주 기록이다. 옛 연주자들의 일기를 정리한 기록 사이사이 저자 데이비스 자신이 경험해온 전 세계 투어의 스케치가 교차한다. 흥행사 하워드 퓨가 처음부터 LSO를 고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1889∼1893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맡았던 독일 지휘 거장 아르투르 니키슈를 미국 청중들이 엄청나게 그리워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니키슈를 다시 만나는’ 순회 연주를 위해 니키슈 자신이 선택한 악단이 LSO였다. 악단 대표는 민활하게 움직여 영국 왕실의 후원을 이끌어냈고 투어는 양국 관계의 증진을 상징하는 행사가 되었다. 자칫 이 계획은 재앙이 될 뻔했다. 악단이 미국으로 출항하는 날은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 예정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선사의 다른 배가 군함과 충돌해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면서 타이타닉호의 출항이 연기돼 다른 배를 타고 갔다. 반가운 지휘자의 귀환이었지만 영국의 악단을 보는 미국인들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니키슈가 지휘자로 재직했던 보스턴의 신문은 ‘니키슈 또다시 시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다/런던 오케스트라의 열악한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나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연주가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악단에도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처음 싸늘했던 뉴욕타임스는 대륙을 돌고 다시 돌아와 가진 연주에 대해 “음악 애호가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썼다. 출항에서 귀환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단원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은 부상으로 병원에만 누워 있다 돌아왔다. 한 세기 전 음악가들의 인간적 면모도 드러난다. 지루한 흔들림 끝에 역에 기차가 설 때마다 가장 먼저 뛰어가 매점 ‘약탈’에 나선 사람이 지휘자 니키슈였다. 블로그를 통해 이미 전 세계에 팬을 확보한 저자 데이비스의 필력은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를 제공한다. 한 세기 전의 순회 연주에 오늘날의 투어 장면들을 교차시키면서, 미국 풍자작가 빌 브라이슨을 연상시키는 요설(饒舌)이 장마다 약속했다는 듯이 곁들여진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위해 조율된 피아노는 양손 앙코르 연주 때도 소리가 썩 괜찮았다.” “게르기예프(LSO 수석지휘자)는 비올라만 혼자 약하게, 생명유지 장치를 단 것처럼 연주하라고 지시했다. 불쌍한 비올라.” 음악 팬들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비밀도 공개한다. “손을 파르르 떠는 게르기예프의 지휘를 어떻게 따라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눈이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계 수준의 악단들은 투어를 통해 실력을 확인받고 국가 간의 유대를 증진한다. 마침 서울시립교향악단이 4월로 예정한 북미투어 예산이 전액 삭감돼 실현이 불투명해졌다는 얘기가 들린다. 미국의 지인들은 이미 표를 사놓고 기다리고 있단다. 어떤 결말이 찾아올 것인가.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음악사를 들여다보면 작곡가가 죽은 뒤 꽤 세월이 지나서야 깜짝 발견된 명곡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전 이 코너에서 소개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그렇고,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도 40년 동안이나 서랍 속에 들어 있다가 발견된 작품입니다. 작곡가가 죽어서 다른 사람이 마무리한 명곡도 많습니다.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와 모차르트 레퀴엠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렇다면 이런 얘기는 어떨까요? 2010년에 죽은 작곡가의 유작 교향곡이 뒤늦게 발견됐고, 그의 아들이 완성시켜 발표했다면? “현대 작곡가도 많은데, 유명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죠. 하지만 “헨리크 구레츠키의 교향곡 4번이 나온 거야”라고 대답한다면, 많은 사람이 눈을 크게 뜰 겁니다. 폴란드의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는 1977년 교향곡 3번 ‘슬픈 노래의 교향곡’을 발표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된, ‘엄마’를 부르는 낙서를 가사로 쓴 2악장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곡은 1992년 처음 ‘넌서치’사가 CD로 발매한 뒤 영국 음반차트 6위(클래식이 아니라 전 부문 합산)에 올랐고 미국 클래식 음악 차트에서는 138주 동안이나 1위를 지켰습니다. ‘현대에 창작된 음악은 인기가 없다’는 통설을 뒤집은 ‘구레츠키 현상’이었습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07년 이 작곡가에게 ‘교향곡 3번을 잇는 다음 교향곡을 써 달라’고 위촉했습니다. 구레츠키는 2010년 77세로 사망했고, 작품 위촉 사실은 잊혀졌습니다. 그의 아들인 작곡가 미코와이 구레츠키가 아버지의 악보 더미를 뒤지다가 이 작품의 피아노 악보가 마무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미코와이는 이 곡의 관현악 악보를 완성했고, 작품은 지난해 4월 런던필이 세계 초연했으며 LA필은 이달 16일에야 처음 연주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구레츠키다운 영감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 유럽에 대해 문화적 시간차를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뜨거운 소식을 현장과 동등하게 따라잡기는 힘들군요. 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구레츠키의 유작인 교향곡 4번을.유윤종 gustav@donga.com}
음악사를 들여다보면 작곡가가 죽은 뒤 꽤 세월이 지나서야 깜짝 발견된 명곡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전 이 코너에서 소개한 슈만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그렇고,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미완성’도 40년 동안이나 서랍 속에 들어 있다가 발견된 작품입니다. 작곡가가 죽어서 다른 사람이 마무리한 명곡도 많습니다.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와 모차르트 레퀴엠이 대표적인 사례죠. 그렇다면 이런 얘기는 어떨까요? 2010년에 죽은 작곡가의 유작 교향곡이 뒤늦게 발견됐고, 그의 아들이 완성시켜 발표했다면? “현대 작곡가도 많은데, 유명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죠. 하지만 “헨리크 구레츠키의 교향곡 4번이 나온 거야”라고 대답한다면, 많은 사람이 눈을 크게 뜰 겁니다. 폴란드의 작곡가 헨리크 구레츠키는 1977년 교향곡 3번 ‘슬픈 노래의 교향곡’을 발표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발견된, ‘엄마’를 부르는 낙서를 가사로 쓴 2악장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곡은 1992년 처음 논서치사가 CD로 발매한 뒤 영국 음반차트 6위(클래식이 아니라 전 부문 합산)에 올랐고 미국 클래식 음악 차트에서는 138주 동안이나 1위를 지켰습니다. ‘현대에 창작된 음악은 인기가 없다’는 통설을 뒤집은 ‘구레츠키 현상’이었습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07년 이 작곡가에게 ‘교향곡 3번을 잇는 다음 교향곡을 써 달라’고 위촉했습니다. 구레츠키는 2010년 77세로 사망했고, 작품 위촉 사실은 잊혀졌습니다. 그의 아들인 작곡가 미콜라이 구레츠키가 아버지의 악보더미를 뒤지다가 이 작품의 피아노 악보가 마무리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미콜라이는 이 곡의 관현악 악보를 완성했고, 작품은 지난해 4월 런던필이 세계 초연했으며 LA필은 이달 16일에야 처음 연주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구레츠키다운 영감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 유럽에 대해 문화적 시간차를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뜨거운 소식을 현장과 동등하게 따라잡기는 힘들군요. 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구레츠키의 유작인 교향곡 4번을.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오리 꽥꽥 오리 꽥꽥 염소 음매….’ ‘동물 흉내’라는 제목으로 너무나도 친숙한 동요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우리 서로 학교 길에 만나면’이라는 가사로 많이 불렸죠. 이 노래는 본디 ‘자크 형제(Fr‘ere Jacques)’라는 프랑스 동요입니다. 영미에서는 ‘존 형제’, 독일어권에서는 ‘야코프 형제’이지만 유럽에서 가사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형(동생아), 아직 자고 있어? 종소리가 안 들려? 딩 딩 동….’ 이 낯익은 선율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에도 나옵니다. 교향곡 1번(1888)의 3악장 시작 부분입니다. 명랑한 동요 선율은 놀랍게도 단조로 바뀌어 첼로의 쓸쓸한 저음에 실려 장송행진곡풍으로 흐릅니다. 말러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요? 그가 ‘사냥꾼의 장례식’이라는 목판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물 흉내’라는 우리말 동요와 우연히도 연관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다른 설명도 있습니다. 약간 몸서리쳐지지만 이렇습니다. 말러의 어머니는 아이를 열두 명이나 낳았는데 그중 다섯이 어려서 죽었습니다. 형제가 죽은 모습은 어린 시절 일상처럼 반복된 경험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말하던 동생이 한밤 고열을 앓은 뒤 눈을 뜨지 않습니다. 어린 말러의 머릿속에 스친 것은 ‘동생아, 아직 자고 있어? 종소리가 안 들려?’라는 노래였다는 겁니다. 말러의 부모가 유독 자식 욕심을 냈던 듯하지만 19세기만 해도 유럽에서 형제가 어려서 죽는 일은 매우 흔했습니다. 하지만 유독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던 말러에게는 나이가 들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심리적 외상)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말러 팬들은 대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박영민 신임 상임지휘자가 30일 부천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취임연주회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어서 한번 상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장례 행진 묘사도 들어 있지만 봄의 달콤한 깨어남, 청춘의 질풍 같은 격정도 느낄 수 있는 젊은 작곡가의 멋진 첫 교향곡입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1854년, 프란츠 리스트는 ‘교향시’라는 새로운 관현악 장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때까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교향곡은 내용을 설명하는 ‘표제’가 없거나 있어도 추상적인 제목만 있었지만, 교향시는 내용을 설명하는 ‘시’ 또는 줄거리가 달려 있고 음악으로 이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리스트가 말한 교향‘시’는 서정시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 ‘오르페우스’ 같은 제목들에서 보듯 영웅을 내세운 서사시에 가까웠습니다. 체코의 스메타나 같은 다른 나라 작곡가들도 표제 관현악에 흥미를 보였지만 이들의 작품도 극적인 줄거리를 지닌 서사시 풍이었습니다. 이윽고 서쪽의 프랑스 작곡가들도 표제적인 관현악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은 달랐습니다. 먼저 ‘풍경’이나 ‘인상’이라는 말이 따라붙었습니다. 마스네는 ‘그림 같은 풍경’ ‘알자스의 풍경’ 같은 관현악 모음곡을 썼고, 샤르팡티에는 ‘이탈리아의 인상’이라는 곡을 썼습니다. 영웅적 줄거리가 아니라 ‘장면’을 음악으로 묘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동쪽 나라들에 비해 프랑스는 ‘빛’이 풍성하고 근대 미술의 전통이 우세한 곳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1870, 80년대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인상주의가 미술계 전면에 나서면서 다른 예술 장르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19∼20세기 교체기에 프랑스 음악 거장 드뷔시와 라벨은 ‘인상주의 음악 거장’으로 불렸습니다. 드뷔시는 이 용어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바다’, 라벨의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 등을 들으면 이 시기 미술의 특징과 음악작품의 특징이 매우 닮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상주의 미술에서 윤곽선이 흐릿해지듯이, 이들 작품에서는 선율이 해체되어 동기(motive)들로 떠다닙니다. 인상주의 미술에서 안료들이 중첩되며 그동안 없던 색감을 만들어냈듯, 화음도 예전의 규칙에서 벗어나 중첩되며 새로운 음의 인상을 표현합니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2월 15일까지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모네와 쿠르베, 터너 등이 만들어낸 생생한 빛의 마술을 맛보며, 드뷔시와 라벨이 지어낸 매혹의 화음도 떠올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싶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1월, 음악 팬들에게는 무엇보다 빈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왈츠와 폴카로 수놓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로 기억되는 달입니다. 올해는 인도 출신 지휘자 주빈 메타가 통산 다섯 번째 출연을 했습니다. 저도 내년에는 이 콘서트에 가보려 계획하고 있답니다.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父子)로 대표되는 빈 왈츠는 다른 지역, 다른 나라 악단들이 흉내 내기 힘들다고 합니다. 특유의 박자 표현 때문입니다. 한 마디 세 박자 중에서 첫 박자가 조금 짧고 둘째 박자가 조금 길어서, 둘째 박자가 앞 박자를 약간 ‘먹어들어’ 갑니다. 음표로 표현하자면 ♩♩♩가 정상이겠지만, 약간 ♪♬♩에 가까운 느낌을 낸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첫 박은 짧고 두 번째는 깁니다. 빈 왈츠의 전통에는 ‘처음보다 두 번째가 더 긴’ 역사가 또 하나 있습니다. 슈트라우스 집안입니다.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들이 음악을 공부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려 나가고서야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음악가로 데뷔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아들에 대해 부친은 치사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출연했던 음악회장에는 자기가 출연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들의 명성이 아버지를 압도했고, 45세로 별세한 아버지보다 77세까지 산 아들이 더 많은 음악적 결실을 누렸습니다. ‘왈츠의 왕’인 그에 이어 동생 요제프와 에두아르트도 왈츠 작곡가로 인기를 얻었지만, 형만큼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두 번째가 가장 긴’ 모습도 왈츠 박자와 흡사했다고 할까요. 올해도 빈 필 신년음악회는 예년과 다름없이 앙코르로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에 이어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고 끝냈습니다. 앙코르 순서는 세상에 나온 순서와 달리 2세가 1세보다 먼저인데, 연주 시간은 2세의 ‘도나우’가 더 길군요. 올해도 ‘왈츠의 왕’뿐 아니라 아버지와 두 동생의 왈츠와 폴카도 고루 연주하는 풍성한 프로그램이 펼쳐졌습니다. 저세상에서라도 슈트라우스 일가족이 화목했으면 좋겠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지난달 내한한 마리스 얀손스 지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콘서트. 익숙한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에서’ 2악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시작 부분 잉글리시호른의 주선율이 후반부에 다시 나오고 현악이 이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정적이 흐릅니다. 이어지다 또 끊깁니다. “….” 친숙한 작품이라 오래 듣지 않았었는데, 불현듯 상기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작곡가, 울고 있구나….” 이 부분의 메시지는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드보르자크는 향수병에 시달리는 서글픈 마음을 흐느끼는 듯한 악구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페라나 가곡에서 ‘우는’ 사람을 표현하는 부분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가사의 뒷받침 없이 기악적 표현만으로 우는 모습을 표현한 음악은 의외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3번 5악장 ‘카바티나’를 들어볼까요. 온화한 선율이 죽 이어진 뒤 갑자기 박자의 마디를 셈하기 어려운 선율이 등장합니다. 주선율을 맡은 제1바이올린이 끊겼다 이어졌다 합니다. 마치 작곡가가 여기서 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아픈 몸과 속 썩이는 조카 때문에 마음이 몹시 힘든 상태였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마지막 교향곡인 6번 ‘비창’ 마지막 악장도 살펴볼 만합니다. 이 악장이 끝없는 비탄에 잠긴 사람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선율에서는 아예 대놓고 어깨를 들먹이며 꺼억꺼억 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음악을 발표한 뒤 며칠 만에 차이콥스키는 죽고 맙니다. 사인은 콜레라라고 하지만, 음독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신년음악회에서는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이 베토벤 3중협주곡과 함께 연주됩니다. 신년음악회로는 의외다 싶게 심각한 프로그램이지만 서울시향이 유럽 투어와 CD 발매 등을 통해 원숙한 연주력을 세계에 과시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새해 우리 모두의 눈에 눈물 고이는 일이 없기를 기원하는 ‘소망음악’으로 들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시벨리우스(사진)는 59세 때인 1924년 7번 교향곡을 쓴 후 사실상의 절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한창 나이에 교향시 ‘타피올라’와 일부 소품을 빼면 손을 대지 않고 33년간의 긴 침묵에 빠진 겁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음악 사회가 크게 변했습니다. 기존의 음악 어법을 깬 ‘신음악’이 난무했고, 작곡가들은 작품마다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타성에 안주한다’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미 성취할 만큼 성취한 시벨리우스가 펜을 내려놓은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뿐일까요. 자료를 찾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펜을 내려놓은 시점이 대략 두 가지와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그 무렵 시벨리우스는 술을 끊었고, 비슷한 시기에 평생을 따라다닌 빚을 다 갚았습니다. 1923년 시벨리우스는 헬싱키에서 자작곡 콘서트를 지휘할 예정이었습니다. 리허설을 마친 후 그는 카페에 가서 술을 주문했고 한 모금씩 마시다 만취했습니다. 간신히 제시간에 지휘대에 선 그는 몇 소절이 연주된 뒤 보면대를 딱딱 쳐서 연주를 중단시켰습니다. 리허설로 착각했던 겁니다. 객석에 앉아있던 부인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후 연주는 정상적이었을 뿐 아니라 아주 감동적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곡인 2번 교향곡 연주 뒤엔 환호와 갈채가 밀려왔습니다. 이 경험 때문인지 시벨리우스는 이후 술을 거의 끊고 빚도 그 무렵 다 청산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창작의 불도 꺼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다 보니 겁이 납니다. 마치 예술가들은 알코올의존증도 감수해가며 창작력을 불태워야 하고, 경제적 풍요는 창작력에 독이 된다는 주장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2015년은 시벨리우스의 탄생 150주년입니다. 국내외에서 북유럽의 대가를 기리는 기념 콘서트가 예정돼 있습니다. 자연주의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그의 음악은 21세기의 시대정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더 많은 음악 팬들이 그의 세계와 친해질 수 있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술자리가 많은 연말입니다. 모두들 건강에는 주의하면서 즐거운 시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1781년 6월, 25세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엉덩이를 걷어차입니다. 잘츠부르크의 통치자였던 콜로레도 대주교(사진)의 명에 의해 그의 비서인 아르코 백작이 글자 그대로 ‘발로 걷어찬’ 것입니다. 이 궁정음악가를 대주교의 궁에서 쫓아낸다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모차르트는 짐을 싸들고 오스트리아제국의 수도 빈으로 향했습니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가 천재를 잃는 날이었습니다. 왜 대주교와 모차르트는 갈등 끝에 결별했을까요? 낮은 급료를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시내의 다른 귀족이 세 배의 급료를 주겠다고 했어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핵심적인 요인은 ‘존중’과 ‘자유’였습니다. 어린 시절 전 유럽을 다니며 각국의 군주를 알현했고 교황에게서 황금박차 훈장을 받았던 모차르트는 대주교가 자신을 한낱 하인으로 취급한다며 불쾌감을 표현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불화에 기름을 부은 것은 대주교가 그의 외부활동을 막은 일이었습니다. 천성적 자유인이었던 모차르트는 뮌헨을 비롯한 큰 도시를 다니며 솜씨를 뽐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대주교는 자신의 ‘하인’이 마음대로 다니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이 파열음의 손익을 따지면 어떻게 될까요? 단기적으로 모차르트에게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빈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한 자작곡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으니까요. 이후 인기가 떨어지면서 곤궁에 빠지게 됐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런 시각이 과장됐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대주교에게도 손해는 아니었을 겁니다. 자기 말을 잘 듣는 새 악장을 뽑으면 그만이니까요. 손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모차르트를 잃은 잘츠부르크의 음악팬들이었을 겁니다. 당시 모차르트는 이미 잘츠부르크 안에서도 자작곡 연주회를 열면서 수많은 숭배자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를 모욕적으로 떠나보낸 잘츠부르크는 오늘날 모차르트의 도시로 전 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콜로레도 대주교와 그의 신하인 아르코 백작의 이름만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죠. 절대주의 시대였기에 망정이지 당시 잘츠부르크에 원로원이나 의회라도 있었으면 시민들 전체가 훗날까지 험담을 들을 뻔했습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나그네(Winterreise·단어 의미는 ‘겨울여행’)의 계절입니다. 올겨울에도 전국 곳곳에서 이 가곡집이 무대에 오를 겁니다. 모두 24곡의 노래 중 ‘보리수’가 가장 사랑받지만 저는 네 번째 곡 ‘얼어붙다(Erstarrung)’에 가장 자주 손이 갑니다. 얼어붙은 들판을 보면서, 푸른 봄날 그곳을 연인과 함께 걸었던 일을 회상하는 가슴 저릿한 노래입니다.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귀에 뭔가 딱 하고 걸렸습니다. ‘내 마음은 죽어버린(erstorben) 듯/그녀의 모습 그 속에 차가워라’라는 부분에서 가수는 ‘죽어버린 듯’ 대신 ‘얼어붙은(erfroren) 듯’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왜 가사가 다를까요? 지인이 가곡 가사 웹사이트를 참고해 ‘슈베르트가 작사자 빌헬름 뮐러의 원시(原詩)에서 여러 부분을 바꾸었다. 겨울나그네 속의 다른 노래들도 그렇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습니다. 다른 부분들은 슈베르트가 바꾼 그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유독 이 부분만 뮐러가 쓴 ‘얼어붙은 듯’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가곡 바리톤의 대명사인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도 ‘죽어버린 듯’과 ‘얼어붙은 듯’을 녹음 시기에 따라 바꾸어 쓰고 있었습니다. 별 차이는 없는 듯했습니다. 노래 속에서의 운율도 두 가사 모두 들어맞고, 마음이 죽어버리거나 얼어붙거나 한탄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다른 지인이 얘기합니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왜요?” “죽어버린 것은 다시 살아날 수 없죠. 하지만 얼어붙은 것은 봄에 다시 녹잖아요.” 그러고 보니 문맥상으로는 ‘얼어붙은 듯’이 자연스러운 듯합니다. 곡 후반부에 ‘마음이 다시 녹을 때’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슈베르트는 뮐러의 원시를 읽고 나서 화자(話者)의 삭막한 마음을 한층 절망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슈베르트의 슬픔이 작사자 뮐러의 슬픔보다 더 깊고 아득했던 것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는 ‘겨울나그네’를 작곡한 1828년 31세의 나이로 사랑을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학창 시절, 난생 처음 기타를 산 후배는 의기양양했습니다. 동아리방에서 간단한 코드를 짚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잘 치네, 라는 제 말에 “밤새 연습했어요. 흐흐” 했습니다. C-a min-d min-G. 코드 네 개만 계속 짚으면 부를 수 있어 기타 초보자들이 사랑하는 노래였습니다. “노래는 말고, 기타만 쳐봐.” “왜요? 제가 그렇게 못 불러요?” 같은 코드로 계속되는 반주 위에 제가 다른 노래들을 계속 붙였습니다. 떨어지는∼ 낙엽들 그 사이로….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와. 다 화음이 맞네. 신기하다!” 화음이 이어지는 ‘코드진행’ 또는 ‘화음진행’ 중에는 작곡가들도, 듣는 사람도 특별히 사랑하는 ‘친숙한’ 방식들이 있습니다. 위에 적은 코드진행도 그렇습니다. 도미솔-라도미-레파라-솔시레. 화성학 기호로는 I-ⅵ-ii-V입니다. 영화 ‘빅’에서 톰 행크스가 발 건반으로 치는 ‘마음과 영혼(heart and soul)’도 이 코드진행의 반복으로 친숙한 음악입니다. 왜 이런 화음진행이 특히 사랑을 받을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봤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나왔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아예 별도 항목으로 들어 있습니다. ‘20세기 대중음악에서 특히 애호 받는 화음진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가 왜 이걸 떠올렸을까요. 연말이면 전국 곳곳에서 차이콥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이 무대에 오릅니다. 누구에게나 친숙한 ‘꽃의 왈츠’가 끝나면, 조용해진 무대 위에 잔잔한 하프의 화음이 떠오릅니다. 예의 I-ⅵ-ii-V 진행입니다. 이 발레의 하이라이트인 ‘그랑 파 드 되’입니다. 눈물이 날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낭만주의 후반기에 활약한 차이콥스키의 시대에는 이 화음진행이 잘 쓰이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엔 얼마간 ‘선진적인 코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로 고전낭만시대의 음악을 듣는 제게 왜 이 화음이 이토록 아늑하고 편하게 느껴질까요. 20세기 대중음악의 여러 기호에 이미 친숙하기 때문일까요. 차이콥스키에게는 자신의 후대 사람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코드를 미리 내다보는 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윤종 gustav@donga.com}

언제나 돌아올 수 있을까, 과연 돌아올 수는 있을까. 남자주인공 쿠퍼는 낡은 집을 돌아보지만 딸 머피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관 스피커가 가슴 먹먹한 선율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심장에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멜로디, 꼭 말러 교향곡 10번 마지막 악장 같군!”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심장 이상으로 삶의 마지막을 감지하는 가운데 1910년 교향곡 10번의 스케치에 들어갔습니다. 이 곡의 끝악장 앞부분에서는 비애로 가득한 플루트 솔로의 단조 동기(motif)가 뚜렷한 인상을 줍니다. 이 동기는 악장 뒷부분에 장조로 바뀌어 전체 현악기의 세찬 합주로 다시 등장합니다. 앞쪽 플루트 연주가 삶의 마지막에 선 사람의 회한과 같다면, 뒤쪽 현악 연주는 거센 감정의 파도 속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일말의 희망과 동경을 보내는 듯한 느낌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와 꼭 빼닮은 동기 또는 음형(音型)을 영화 ‘인터스텔라’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말러의 교향곡에서 플루트로 처음 제시된 것과 유사한 ‘라 레… 도시 도’ 음형과 이를 같은 높이의 장조로 바꾼 ‘도 파… 미레 미’ 음형이 끝없이 이어지며 교차됩니다. 우리 행성과 집을 떠나는 회한과, 인류의 구원을 향한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교차하는 느낌을 줍니다. 공교롭게도 이 부분은 영화 공식 사운드트랙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영화음악가 겸 지휘자 존 모체리는 예전에 “말러의 음악이 볼프강 코른골트를 비롯한 후배 유대계 음악가들에게 이어졌고, 이들이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로 이주하면서 영화음악계가 말러의 음악어법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어느 정도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후배 음악가들은 선배들이 남겨놓은 음악적 ‘의미 유전자’ 안에서 움직이기 마련이고, 태양 아래 새로운 착안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해의 마지막 달이 다가오는군요. 이때 말러 교향곡 10번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누구나 한 해를 보내는 감상에는 회한과 희망이 교차되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후회할 점이 많더라도 결국은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하겠죠. 유윤종 gustav@donga.com}

고속 인터넷 세상은 여러 가지 가능성과 편리함을 열어주었습니다. 음악 문헌을 뒤적거리다 궁금한 작품이 나오면, 이제 음반을 갖고 있지 않아도 바로 찾아 들어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쇼스타코비치가 푸시킨의 시에 곡을 붙인 ‘부활’이라는 가곡을 들어보고 싶었는데, 음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제 인터넷에서 ‘rebirth’라는 검색어로 동영상을 찾아보니 바로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가사도 찾아보았습니다. ‘자칭 예술가라는 야만인이/게으른 붓을 들어/천재의 그림 위에 덧칠을 했다/세월이 흐르면서 덧칠은 떨어져나가고/천재의 그림이 다시 나타났다(…).’ 제가 왜 이 곡을 찾아보았을까요?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다 일어나 나가버렸습니다. 실험성을 추구한 음악, 퇴폐적인 내용, 더군다나 ‘독살’ 장면이 나오는 점이 스탈린을 분노하게 했다는 분석입니다. 이어 관영 일간지 프라우다에 혹독한 논설이 실렸습니다. 이 작품이 ‘부르주아적이고 혼돈 그 자체’라며 사회주의 예술가들은 이런 방종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작곡가의 운명이 위험했습니다. 이듬해인 1937년, 쇼스타코비치는 마지막 4악장이 굳건한 승리의 행진처럼 들리는 교향곡 5번을 발표했습니다. 30분 동안 앙코르 함성이 쏟아졌고, 관영 매체들도 찬사를 보냈습니다. 작곡가는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쇼스타코비치는 조용히 가곡 ‘부활’을 내놓았습니다. 그 반주부의 일부는 교향곡 5번 마지막 악장과 거의 똑같습니다. 천재의 그림 위에 가해진 야만인의 덧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드러난 천재의 손길….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마리스 얀손스 지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합니다.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도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지휘하는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이 같은 곡을 연주합니다.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은 17년 전 일주일 동안 이들의 연습과 녹음을 지켜본 일이 있어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콘서트를 감상하실 관객께서는 4악장의 외견상 화려함뿐 아니라 그 뒤에 감춰졌던 쇼스타코비치 내면의 투쟁을 상기해 보시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지난달 독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현지에서 수석지휘자 리카르도 샤이 지휘로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표를 구입하고 며칠 뒤, ‘샤이가 사고로 팔을 다쳤다’는 뉴스를 접했거든요. 다행히 다음 날 후속 뉴스가 나왔습니다. “4주 내 완치될 것이며 이후 스케줄은 이상 없이 소화한다.” 연주자가 사고나 병으로 스케줄을 취소하는 일은 흔합니다. 콘서트 지휘자나 오페라 출연자인 경우 대부분 대타를 수소문해서 일정을 진행하게 됩니다. 공연을 기다리던 팬에게는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만, 이 덕에 깜짝 스타로 떠오른 음악가도 많습니다. 1886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를 준비하던 공연팀은 무능한 지휘자가 단원들의 반발로 지휘대를 떠나는 비상사태를 겪었습니다. 첼로 파트 단원으로 합창 연습을 이끌던 19세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대에 올랐고, 공연은 대성공으로 끝났습니다. 그가 악보의 모든 파트를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엔 다른 대륙에서 급히 날아와 공연 직전에 지휘대에 서는 것도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7년 런던 바비컨센터에서는 대타를 불러올 수도 없는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가 현대 작곡가 구바이둘리나의 신작을 음악감독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연주할 예정이었는데 게르기예프가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알려진 작품도 아니어서 외부에서 대타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토스카니니의 기적’과 닮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악단의 더블베이스 주자였던 33세의 마이클 프랜시스(사진)가 지휘대에 투입돼 연주를 성공으로 이끈 것입니다. 프랜시스는 한 달 뒤 역시 런던 심포니 공연에서 작곡가 겸 지휘자 존 애덤스가 신작 지휘를 펑크내자 다시 투입됐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제 프랜시스는 ‘대타’가 아니라 차세대 명장으로 평가받으며 내년 미국 플로리다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에 취임 예정입니다. 그가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합니다. 멘델스존 교향곡 3번과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글루즈만이 협연하는 브루흐 바이올린협주곡 1번 등을 무대에 올립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

‘컬래버레이션(협업, 합작)’이 시대의 화두입니다. 전통적으로 음악 창작은 ‘콜라보’가 힘든 분야였습니다. 천재가 밀실에서 영감을 끌어올리며 수행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혼자 작업하기 불가능한 음악 장르도 있습니다. 오페라가 한 예입니다. 좋은 대본이 갖춰지지 않으면 작곡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대본부터 작곡까지 혼자 해낸 바그너와 같은 사례도 있습니다. 주세페 베르디가 74세의 고령에 쓴 오페라 ‘오텔로’(1887년)는 멋진 컬래버레이션의 사례입니다. 대본작가이자 소설가, 평론가, 그리고 오페라 ‘메피스토펠레’를 쓴 작곡가이기도 했던 아리고 보이토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소재로 멋진 오페라를 작곡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베르디”라며 대본을 써서 제공했거든요. 보이토는 이후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 ‘팔스타프’ 대본도 쓰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베르디와 보이토가 ‘한때의 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보이토는 1860년대 이탈리아 문화계 ‘스카필리아투라’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봉두난발’이라는 뜻의 이 운동은 이탈리아 문화계의 중심이었던 작곡가 베르디나 시인 겸 소설가 만초니가 ‘낡고 퇴행적인 예술’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독일과 프랑스의 예술을 선진적 기법의 모범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베르디와 스카필리아투라 주인공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베르디는 ‘보이토가 쓴 대본을 검토해 보자’는 출판사 리코르디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갈등은 가라앉았습니다. 스카필리아투라 음악가들은 여전히 독일과 프랑스에서 영감을 찾았지만 베르디가 가진 역량과 깊이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베르디 역시 프랑스 오페라와 바그너의 독일 오페라가 가진 장점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화해 이후’의 산물인 베르디 만년의 두 걸작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한번 ‘진영’이 갈라지면 적대감을 버리지 못하는 사회 전반의 폐해가 문화계에서도 심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국립오페라단은 11월 6∼9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힘과 강력한 심리묘사가 빛나는 베르디의 걸작 ‘오텔로’를 올립니다.유윤종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