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욱

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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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 익숙해질 때쯤 다시 경찰서로 돌아왔습니다. 유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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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5-11-18~202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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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쥐에 물린 증상 비슷” 고양이 그려 ‘콜레라 부적’

    ‘울타리 밖 인가에서 전염병에 걸린 자가 있어 사흘간 앓았다. 그의 부인은 도망갔다고 하므로 염려스러웠다. 붉은 글씨로 ‘(벽,피)瘟’(벽온·역병을 피함)이라고 써서 창문에 붙였다.’ 조선 중종 때 문신 묵재(默齋) 이문건(1494∼1567)이 1535년부터 17년간 쓴 묵재일기(默齋日記)의 1547년 1월 26일 기록이다. 부인마저 남편을 버리고 도망갈 만큼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역병은 두려운 대상이었다.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해볼 수 있는 일이라곤 주술적 의미의 글씨 쓰기뿐이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감염병 와중에 일상을 영위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병, 일상’ 특별전을 24일 열었다. 조선시대 역병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 묵재일기를 비롯해 정조 때 무관 노상추(1746∼1829)가 176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기록한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등 약 350점을 선보인다. 한글 번역을 마친 묵재일기와 노상추일기 원본이 일반에게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전시자료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결혼이 연기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노상추는 1767년 4월 25일 일기에 ‘김순을 만나 혼사를 의논했는데 내가 두창(천연두) 때문에 속히 진행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가을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집으로 돌아왔다’고 썼다. 앞서 4월 17일 노상추가 살던 마을에 천연두가 퍼진 사실이 알려졌다. 노상추는 감염을 우려해 여동생의 혼인을 주선한 김순과 만나 혼례를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여동생은 천연두에 걸려 발병한 지 보름 만인 6월 30일 숨을 거뒀다. 마치 전시처럼 피란을 떠나기도 했다. 경남 고성군에 살던 구상덕(1706∼1761)이 쓴 일기 승총명록(勝聰明錄)에 따르면 1748년 1월 그가 살던 마을에 천연두가 퍼졌다. 이에 구상덕은 자신의 부모를 경북 갈산의 누이 집으로 긴급히 피신시켰다. 구상덕 자신도 앞서 1740년 역병이 발생했을 때 제자 집으로 몸을 피했다. 조선인들이 감염병 사태에 무력하게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감염병 치료를 위한 약제 개발도 이뤄졌다. 동의보감(東醫寶鑑) 등 각종 의학서에는 천연두나 홍역 증상인 열을 낮추기 위해 미나리아재빗과 승마(升麻), 갈근(葛根·말린 칡뿌리) 등을 달인 승마갈근탕 조제법이 담겨 있다. 감염병에 얽힌 풍속도 눈여겨볼 만하다. 1889년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남긴 조선기행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콜레라에 걸리지 않으려는 염원을 담아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였다. 콜레라 증상이 쥐에 물렸을 때와 비슷한 데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충북 청주시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서 개최된 ‘기록으로 본 치유와 염원’ 특별전에 전시된 9세기 일본 의학서 대동유취방(大同類聚方) 내용도 주목된다. 이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나병(癩病) 치료제로 물개 지방을 이용한 연고를 개발해 사용했다. 이 연고는 분석 결과 현재 사용되고 있는 나병 치료제와 화학 성분이 거의 같은 것으로 조사됐다.조선시대 사람들의 팬데믹 대응▲남편이 발병한 지 사흘 만에 그를 버리고 도망간 부인(이문건의 ‘묵재일기’)▲마을에 천연두가 번지자 여동생의 혼사를 미룬 오빠(노상추의 ‘노상추일기’)▲천연두를 피해 부모를 누이 집으로 피신시킨 아들(구상덕의 ‘승총명록’)▲콜레라 증상이 쥐에 물렸을 때와 비슷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임(샤를 바라의 ‘조선기행’)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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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현실참여 문학사조, 조조가 창시… 간웅은 꾸며낸 이미지”

    “조조는 문인으로서 공로가 큽니다. 중국 전통문학이 조조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22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자택에서 만난 원로 중문학자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87)는 조조(155∼220)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밝혔다. 김 명예교수는 중국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문학사를 정리하다가 조조가 현실참여의 문학사조를 중국에서 처음 창시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 간웅으로만 알려진 조조의 일생을 재평가한 책 ‘조조의 재발견’(연암서가)을 20일 출간했다. 김 명예교수는 조조 이전 중국 시는 문인들이 황제에게 잘 보여 출세하기 위해 지은 게 다수라고 말한다. 중국 전한시대 문인 사마상여(기원전 179∼기원전 117)가 한 무제(기원전 156∼기원전 87)에게 사냥하는 황제의 위엄을 칭송하는 시 ‘상림부(上林賦)’를 바치고 중랑장(中郞將·황제 근위병을 통솔하는 장수) 벼슬에 오른 게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조조는 ‘역적이 나라의 권세를 잡아 왕을 죽이고 도읍을 부수었네’라는 문구를 담은 한시 ‘해로(해露)’를 통해 당대 실권자 동탁(137∼192)을 비판했다. 그는 시에서 동탁이 한나라 수도 낙양(洛陽)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도읍을 옮기도록 헌제(181∼234)에게 강요한 사실을 애통해했다. 김 명예교수는 “조조의 현실참여 문학에 감동한 문인들이 모여 중국 최초의 문단이랄 수 있는 건안칠자(建安七子)를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조조의 간악한 이미지는 유씨가 아닌 조씨가 한나라를 계승한 데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는 게 그의 견해다. 예컨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아버지의 의형제인 여백사의 일가족을 죽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 명예교수는 “사서 ‘삼국지’를 보완하는 주석마다 여백사 관련 기록이 서로 다르다. 몰살 자체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북위 사서 위서(魏書)는 여백사의 아들들이 조조를 위협하며 그의 말과 소지품을 빼앗아 조조가 반격한 것이라는 기록을 담고 있다. 김 명예교수는 “조조는 중국에서 정치, 문학적 업적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이 책이 조조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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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박신혜-최태준 내년 1월 결혼

    배우 박신혜(31)와 최태준(30)이 오랜 열애 끝에 결혼한다. 박신혜 소속사 솔트엔터테인먼트는 23일 “두 사람이 내년 1월 22일 서울 모처에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고 밝혔다. 결혼식은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다.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2017년 교제를 시작해 2018년부터 공개 연애를 해왔다. 박신혜는 이날 공식 팬클럽 커뮤니티에 “긴 시간 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인간 박신혜의 부족한 모습들까지도 감싸주었던 사람과 부부로서의 삶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습니다”는 글을 올렸다. 최태준도 같은 날 자신의 팬클럽 커뮤니티에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그리고 배우 최태준으로서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연기로 인사드리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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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혼자-경단녀-다둥이맘 뭉쳤다…귀농 여성들이 꾸린 ‘공동경비부엌’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는 9명의 여성이 모여 운영하는 식당 ‘모여라땡땡땡’이 있다. 여타의 다른 식당과는 다르다. 요일마다 요리사가 다르고, 점심 한 끼만 판다. 지역사회의 요청이 있으면 케이터링을 진행하기도 한다. 19일 출간한 신간 ‘공동경비부엌 모여라땡땡땡’(소일·1만4000원)은 즐겁게 농촌살이를 해 나가는 여성 9명의 이야기다. 공동 저자 9명의 이름은 키키 별나 시루 바비 수작 햇살 슨배 로제 하하. 자급자족을 꿈꾸며 귀촌한 이들은 완주군 문화예술협동조합에서 만나 2016년부터 식당을 운영했다. 30대부터 5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전업주부, 비혼자, 경력단절녀, 다둥이 엄마는 서로 의지하며 농촌살이에 적응해왔다. 이들은 9명 모두가 사장이면서 각자 맡은 요일에 자신의 방식으로 식당을 운영한다. 운영비를 함께 모으고(경비·經費), 공동책임제로 공간을 지켜왔다(경비·警備)는 의미를 담아 책 제목에 ‘공동경비부엌’을 넣었다. 손수 농사지은 수확물로 음식을 만들고, 식당을 직접 꾸미고 수리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농촌 적응기는 농촌살이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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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아름다운 바다가 사라지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세계 79개국 정상은 2014년 7월 지구 대기온도를 인위적으로 낮추기 위해 개발된 인공냉각제 ‘CW-7’을 대기에 살포하기로 결정한다. 하늘에 뿌려진 냉각제는 강력한 한파를 불러왔고, 지구는 빙하기에 돌입한다. 영화는 기후 위기를 소재로 극단적 상황을 그렸지만, 지구 온난화는 이미 현실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과학계는 21세기 말까지 해수면이 최소 1.8m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인도네시아와 같은 섬나라들의 해안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기거나 폭풍우, 홍수 등 기상 이변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지난 10여 년간 찾아다니며 그곳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한다. 특히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더는 이러한 위기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전한다. 저자는 지금의 상황을 야기한 인류의 탐욕을 먼저 꼬집는다. 대표적 휴양지인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해변은 미국 중서부 출신 사업가 칼 피셔(1874∼1939)가 20세기 초 바다에서 모래를 퍼 올려 만든 땅이다.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자 마이애미에는 부동산 광풍이 불어 간척 30여 년 만에 호텔 56개, 주택 858채, 상점 및 사무실 308개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를 비웃듯 1926년 마이애미에 찾아온 시속 200km의 허리케인은 높이 3m의 폭풍해일을 불러와 113명의 사망자와 1570억 달러(약 185조 원)의 손실을 불러왔다. 1992년, 2016년에도 도시를 뒤덮는 허리케인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마이애미에는 새로운 콘도가 지어지고 있다. 개발 욕심이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지난 20년 동안 그린란드가 있는 북극권의 온도를 1.6도 이상 상승시켰다. 이는 세계 평균보다 2배가량 빠르다. 심지어 2010년에는 그린란드에서 가장 큰 빙하 중 하나인 페테르만 빙하가 깨지기 시작했다. 2012년에서 2016년까지 불과 4년 만에 그린란드에선 1조 t의 얼음이 사라졌다. 만약 2100년까지 해수면이 2m 상승한다면 마이애미의 절반이 바다에 잠긴다. 문제는 기후 위기에 책임이 없는 국가들에 피해가 더 크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미국의 핵폭탄 실험장이었던 섬나라 마셜제도에서 지난 50년 동안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총량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시의 1년 배출량보다 적다. 하지만 해수면이 상승함에 따라 마셜제도는 서서히 물에 잠기고 있다. 마셜제도에는 이를 피할 만한 고지대도 없어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 정체성까지 전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저자는 부유한 국가들이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손놓고 있기보다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중단하고 더 높은 땅으로 옮겨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해수면 상승 속도를 조금이라도 낮춰 사람들이 그에 적응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소 냉정하고 비관적인 분석이지만 그만큼 기후 위기를 더는 외면할 수 없음을 절감할 수 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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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툴러도 얼굴엔 웃음 가득… 발달장애인 무용단 ‘희망의 몸짓’

    “얘들아, 연습 시작하자.” 15일 오후 7시 경기 안양시 대림대 한림관 지하 1층 연습실. 임인선 필로스 장애인 무용단장(대림대 스포츠지도과 교수)의 한마디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무용단원 11명이 두 줄로 섰다. 한국창작음악이 흘러나오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원들이 율동을 시작했다. 단체 무용이지만 대형이 체계적이지 않고, 동작도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두 개의 대열이 앞뒤로 교차할 때 단원들끼리 엉키기도 하고, 손에 들고 있던 꽃 소품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필로스 장애인 무용단은 200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달장애인으로만 단원을 구성해 창단됐다. 장애인도 무용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14년간 교도소, 병원, 각종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공연해 왔다. 초등학생이던 단원들은 어느새 성인이 됐다. 이들은 몸짓이 정교하지 않고, 섬세한 표현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임 단장은 비장애인의 기준에 맞춰 안무를 구성하지 않는다. 단원들은 공연을 하는 것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용단 창단 멤버인 조동빈 씨(27)는 “무용을 계속하는 게 꿈이다”라고 말했다. 연습실에는 단원들의 부모와 자원봉사를 나온 대림대 스포츠지도과 학생들도 있었다. 발달장애인의 특성상 10분짜리 작품의 안무를 익히는 데 2∼3년가량 필요하다. 자원봉사자들이 이 긴 과정을 함께한다. 부모들은 매주 월요일 오후 6시에 단원들을 연습실로 데려온다. 자녀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조 씨의 어머니 우미숙 씨(54)는 “동빈이가 운동 삼아 무용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흥미를 느껴 계속하게 됐다. 아이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쁘다. 힘이 닿는 데까지 동빈이의 꿈을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임 단장은 “어떤 몸을 가졌든 무용을 할 수 있다”며 “무용단의 공연으로 힘든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은 19일 오후 2시 경기 수원시 호매실 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창작 한국무용 작품 4개와 발레 공연 1개를 선보인다. 무료.안양=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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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에 갇힌 역사는 좁다… 가자, 실크로드로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수염, 근육질의 상반신이 돋보이는 남성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옥좌에 앉아 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국박) 중앙아시아실에 상설 전시돼 있는 이 좌상(坐像)은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이집트 남신(男神) 세라피스. 지중해를 중심으로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신봉됐다. 2, 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20세기 초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허톈(和田) 지역에서 출토됐다. 고대 지중해 문화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앙아시아 동쪽 지역까지 전해진 것이다. 실크로드는 국내로도 이어졌다. 이달 5, 6일 열린 제45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박천수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유리기(琉璃器)로 본 유라시아 실크로드’ 논문을 통해 1973년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5세기 제작 추정 그물무늬 유리잔과 카자흐스탄 카라아가치 지역 훈족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잔을 비교했다. 잔 밑받침을 제외하면 녹색빛 바탕의 잔 형태와 푸른색 그물무늬 등 두 잔이 거의 똑같다. 박 교수는 “지중해에서 제작된 유리기가 흑해와 인접한 카자흐스탄 북부 초원지대를 거쳐 신라로 유입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 고고학계가 실크로드에 주목하고 있다. 한반도 내에서만 고고학 자료를 찾았던 경향을 벗어나 한반도 너머로 외연을 넓히기 위함이다. 특히 이번 전국대회에서는 그해 전국대회의 핵심 주제를 보여주는 제1세션을 ‘실크로드 고고학’으로 정했다. 국내 고고학계 학술대회 중 최대 규모인 전국대회에서 실크로드를 제1세션으로 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순발 한국고고학회장(충남대 고고학과 교수)은 “한국 고고학의 영역이 좀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며 “한반도 외부에서 우리와 관련된 것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 이번 대회의 기획 의도”라고 말했다. 고고학계의 이런 흐름은 국박이 6월부터 중앙아시아실에서 진행 중인 ‘투루판 지역의 한문자료―실크로드 경계의 삶’ 테마전에서도 읽을 수 있다. 국내 역사를 실크로드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꾸준히 교류했던 중국 문화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전시는 일본 부유층 출신 승려 오타니 고즈이(1876∼1948)를 중심으로 실크로드 일대를 조사한 ‘오타니 탐험대’가 1912년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투루판 지역 무덤에서 수집한 유물 19점을 통해 중국과 서역의 교류를 보여준다. 투루판 국씨고창국(麴氏高昌國)과 당나라 귀족 무덤인 아스타나 고분군 230호 무덤에서 출토된 시신깔개에는 당시 당나라 서주도독부(西州都督府)였던 고창국에 679년 당 조정이 전국 예산 집행 지침을 하달하는 문서와 675∼676년 도주한 병사의 처분과 관련한 문서가 붙어 있었다. 당 중앙정부가 서역과 직접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투루판 가오창고성(高昌故城)에서 출토된 비석도 있다. 이 비석은 강국(康國·현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7세기 중반 당으로 귀화한 소그드인 지도자 강거사(康居士)가 투루판 지역에서 불교 경전을 제작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주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였던 소그드인이 중국식 불교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은 당시 당나라와 서역이 문화적으로도 교류했음을 알려준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삼면이 바다인 한국에서 대륙과의 관련성은 필연적으로 북쪽 지역과 관련돼 있다”며 “이제는 유라시아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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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최초로 자화상 그린 여성 화가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황금기를 이끈 유딧 레이스터르(1609∼1660)의 ‘즐거운 술꾼’(1629년)은 19세기 말까지 그의 스승 프란스 할스(1582∼1666)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불과 24세에 당시 여성이 가입하기 힘들었던 네덜란드 화가조합 회원이 되는 등 걸출한 실력을 갖췄다. 하지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탓에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은 잊혔다.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16세기부터 현재까지 한동안 조명되지 못한 여성 미술가들의 삶과 이들의 대표작 60점을 소개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소포니스바 안귀솔라(?∼1625)는 여성의 미술수업이 금지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다. 그의 작품 ‘이젤 앞의 자화상’은 여성화가가 그린 최초의 자화상으로 기록됐다. 팔레트와 붓을 들고 정면을 당당히 응시한 그의 모습에서 오직 실력으로 인정받고자 한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300년이 흐른 19세기 말까지도 여성은 공립학교에서 미술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프랑스의 쉬잔 발라동(1865∼1938)은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그의 대표작 ‘푸른 방’(1923년) 속 인물은 줄무늬 파자마와 캐미솔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다. 강한 색채와 활기찬 붓 터치는 자신 만의 작품세계를 탄탄히 구축한 발라동 예술을 그대로 보여준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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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징어게임’ 연출 황동혁 감독, 아름다운예술인상 수상자 선정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50·사진)이 제11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은 올해의 영화예술인상에 황 감독을 선정했다고 9일 밝혔다. 재단 심사위원회는 황 감독이 오징어게임을 세계 흥행 순위 1위에 올리며 K문화의 연출 저력을 과시해 영상예술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재단은 황 감독과 함께 공로예술인상에 이장호 감독, 굿피플예술인상에 배우 정우성, 독립영화예술인상에 윤단비 감독을 각각 선정했다. 재단은 2011년부터 영화, 연극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하고 기부 등 선행으로 귀감이 된 예술인을 선정해 상금 1억 원과 상패를 수여하고 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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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 노예 5명 겨우 12이스쿠두에 사”

    “조선에서 모든 연령대의 수많은 남녀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나도 조선인 노예 5명을 겨우 12이스쿠두(포르투갈의 옛 화폐단위)에 살 수 있었다.” 1598년 일본 항구도시 나가사키에 머물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 일주기’ 중 일부다. 당시 유럽 상인들이 드나들던 나가사키에서는 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인, 중국인, 벵골인,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노예들이 거래됐다. 흑인 남자 노예가 100이스쿠두에 거래된 걸 감안하면 조선인 노예의 값이 현저히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인을 많이 끌고 와 노예시장에 공급이 넘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수는 약 1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일부 여성들은 유곽에 팔려가 외국 상인이나 뱃사람들을 상대했다. 이들을 따라 마카오, 인도 등을 떠돈 조선인 여성도 있었다. 최근 발간된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산지니)는 16세기 포르투갈 등 서구 식민제국들에 의해 이뤄진 아시아인 노예매매 실태를 다룬다. 포르투갈인 저자 루시오 데 소우사 도쿄외대 특임 준교수(국제지역학)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뿐만 아니라 필리핀, 멕시코 등으로 팔려간 일본인 노예 기록도 책에 담았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중 상당수는 도공(陶工)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다도(茶道)가 인기를 끌면서 찻잔 등 다기(茶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한 영향이 컸다. 조선 침략을 결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황금 다실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인 장인들을 데려올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일본 사가현 등에 자리 잡은 조선인 도공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히젠(肥前) 자기’를 꽃피웠다. 일본은 약 700만 개의 도자기를 서양에 수출하고 거둔 막대한 이윤을 바탕으로 근대화에 나설 수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일본인 상인에 의해 납치된 일본인 노예도 많았다. 한 일본인은 11세에 오이타현에서 납치돼 포르투갈 상인 루이 페레스에게 팔려 가스팔 페르난데스로 개명했다.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유대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이단으로 잡아들였다. 이에 페르난데스는 주인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 멕시코 등으로 도피하며 가사노동을 했다. 페레스는 마닐라에서 조선인 노예 가스팔 코레이아를 사들였다. 코레이아는 주인을 도와 뼛조각과 십자가를 섞어 위조한 순교자 유골을 팔았다. 나중에 그는 페레스가 가톨릭에서 신성시하는 성모상을 침대 아래 둔 사실을 증언해 이단 혐의로 체포되도록 했다. 저자는 “16세기 대항해시대 아시아인 노예 연구는 사료 부족으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 후속 연구를 통해 역사에서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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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운명은 기후가 결정했다

    지구 기온이 3도가량 오르면 세계에서 약 300만 명이 기근으로 사망하고 동식물의 20∼50%가 멸종위기에 처한다. 지난달 말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현 추세라면 2030년까지 지구 기온이 평균 2.7도 상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달 31일(현지 시간)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방안이 논의됐다. 이 책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기후가 인류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역사학과 지리학을 통합한 ‘빅 히스토리’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 기후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해왔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거 사례들을 바탕으로 미래의 기후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약 700만 년 전 등장한 고인류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때부터 기후변화가 지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아프리카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숲이 줄고 열대초원은 늘었다. 숲보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운 초원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더 많이 움직여야 했고, 에너지 소비 측면에서 네 발로 걷는 것보다 효율적인 직립 보행을 선택했다. 한반도에 인류가 처음 등장한 때는 약 2만5000년 전. 약 11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퍼져나간 호모 사피엔스는 5만 년 전 만주지방에 도착했다. 이들 중 일부는 2만9000년 전 빙하기가 시작되자 추위를 피해 한반도로 남하했다. 인류 이동에 기후변화가 핵심 변수였던 것. 따뜻한 기후에 힘입어 한반도에서는 약 5000년 전부터 농경이 시작됐다. 저자는 한국 고고학계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인 송국리 문화의 갑작스러운 소멸 원인을 기후변화에서 찾는다. 송국리 문화는 3000년 전부터 금강 중하류의 충청권을 중심으로 생성된 국내 최대 청동기 유적으로, 2300년 전 갑작스레 종적을 감췄다. 저자는 전남 광양 섬진강 일대의 퇴적물 연구를 바탕으로 2800년 전과 2400년 전에 각각 발생한 극심한 가뭄이 송국리 문화의 소멸을 가져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두 시기에 퇴적된 꽃가루 중 나무에서 만들어진 꽃가루 비율이 현저히 낮았다. 이는 당시 가뭄으로 나무의 꽃가루 생산성이 크게 줄었음을 뜻한다. 2800년 전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해진 송국리 문화 집단은 전라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일부 세력은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에서 야요이 문화를 생성했다. 이어 2400년 전 2차 가뭄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송국리 문화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저자는 조선왕조의 흥망성쇠도 기후와 연관짓는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을 낳은 영·정조 시기는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린다. 저자는 이때 태양 흑점 수가 증가해 지표로 유입되는 태양 복사에너지가 증가하면서 기온이 생활에 알맞게 높아졌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직전인 현·숙종 때는 봄철 냉해와 여름철 홍수로 인해 1670년 경신 대기근, 1695년 을병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 시기에는 태양의 흑점 수가 영·정조 시기보다 적어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것. 저자는 “기후변화가 필연이라면 새로운 환경을 오히려 발전의 기회로 삼는 역발상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송국리 문화가 국내에서는 사라졌지만 일본에서 꽃을 피운 것처럼 인류는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왔다. 지구 온난화에 대비해야 하는 현 인류에게 필요한 해법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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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日상대 외교전 뒤엔 국내외 단체 자금 지원”

    1921년 10월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1879∼1922)은 동아시아 평화에 한국 독립이 필수인 만큼 일본 정부가 이를 태평양회의에서 논의하도록 압박해 달라는 편지를 일본 시민단체들에 보냈다. 이어 중국 광둥(廣東)성에 호법정부를 수립한 쑨원(孫文·1866∼1925)을 찾아가 임정 승인과 태평양회의 공동 대처를 요청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태평양회의는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9개국 대표들이 참석해 해군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화 문제를 논의했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최근 ‘태평양회의와 독립운동가들’ 학술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외교적 해법을 모색한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을 상대로도 외교전을 펼쳤으며 외교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국내외 단체들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1877∼1946)은 대표단 파견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했다. ‘어떤 나라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우리의 적’이라는 문구를 담은 홍보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장형(1889∼1964)은 국내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해 지원 자금을 모았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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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쑨원에 외교전, 국내외선 자금 모금…독립운동가들의 고군분투

    “우리나라를 욕심을 낸 나라는 귀국이다. 귀국은 국제조약에 따라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제출해주기 바란다.” 1921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1879~1922)이 일본 시민단체들에 보낸 편지글 중 일부다. 동아시아 평화에 한국 독립이 필수인 만큼 일본 정부가 이 문제를 태평양회의에서 논의하도록 시민단체들이 압박해달라는 것. 당시 국제사회에서 승인 받지 못한 임정은 일본 내 양심적 시민단체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태평양회의는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9개국 대표들이 참석해 해군 군비축소와 아시아 태평양지역 평화문제를 논의했다. 최근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은 ‘태평양회의와 독립운동가들’ 학술회의를 열고 태평양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외교적 해법을 모색한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했다. 임정의 한국 대표단 파견이 결국 실패하고 태평양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도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념과 소속 단체를 막론하고 힘을 모아 회의를 성사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김희곤 전 경북독립기념관장은 학술회의에 발표한 논문 ‘태평양회의와 신규식’에서 신규식이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을 상대로도 외교전을 펼쳤다는 것을 강조했다. 1921년 10월 12일에는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수립한 쑨원(孫文·1866~1925)의 호법정부를 방문해 쑨원을 만났다. 신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태평양회의에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요청했다. 쑨원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광둥국회에서 한국독립승인안을 통과시켰으며, 신규식과 중한협회(中韓協會)를 설립해 태평양회의에 대한 한중의 요구조건을 전보로 제출했다. 신규식이 외교전을 펼칠 수 있던 배경에는 국내외 단체들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 김용달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태평양회의와 홍진’ 논문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홍진(1877~1946)을 조명했다. 홍진은 태평양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1921년 8월 13일 상해에서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외교후원회)를 결성해 대표단이 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어떤 나라든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자는 곧 우리의 적이다’는 선언서를 담은 홍보지 ‘선전’(宣傳)을 발행해 태평양회의 참가국들에게 한국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한국인 입학생 모집 임무를 수행했던 독립운동가 장형(1889~1964)이 있었다. 박성순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태평양회의와 장형’ 논문에서 장형이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할 자금을 모금했다고 설명했다. 상해에서 외교후원회가 조직되던 날 장형은 국내 경제인 단체였던 상공진흥회 회원 가운데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반도고학생친목회’(半島苦學生親睦會)를 조직했다. 외교후원회가 국내에 파견한 서무간사 여운홍(1891~1973)은 반도고학생친목회에 합류했고, 장형은 여운홍과 함께 국내에 태평양회의를 알리고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다녔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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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난 선포하고 국가서 제사까지… 정조의 ‘독감 대유행’ 신속 대처법

    ‘마을에 또 괴이한 병이 생겼다. 이 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사람이 죽는다. 한양 사람들이 상주 없는 시신을 실어 날라 짚으로 덮어 쌓아둔 게 산과 같다고 한다.’ 조선시대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 살던 류의목(1785∼1833)이 1796∼1802년에 쓴 일기 ‘하와일록(河窩日錄)’의 1799년 독감 관련 기록이다. 김정운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은 최근 전국역사학대회에 발표한 논문 ‘1799년 독감과 국가의 대응 방식’에서 조선 사회의 전염병 대응방식을 다뤘다. 하와일록에 따르면 독감 창궐 두 달여 만에 하회마을에서만 약 400명이 사망했고 한양에서는 6만3000여 명이 숨졌다. 당시 홍문관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낸 김종수(1728∼1799), 우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1720∼1799)을 비롯해 전국 8도 관찰사 8명 중 7명이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괴소문이 퍼졌다. ‘호인(胡人·청나라 사람)이 단지 2개를 조선에 가져왔는데 하나는 창질(瘡疾·피부병) 단지이고, 하나는 감기 단지다. 지금 이 병은 감기 단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루머였다. 지금이야 독감이 중병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었다. 류의목은 일기에 ‘소고기가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되기에 요즘 시골 거리에서 소를 많이 잡는다’고 썼다. 잘 먹고 쉬는 것 외에 뾰족한 대응법이 없던 서민들이 평소 먹기 힘든 소고기로 효험을 기대한 것이다. 농사에 필수인 소를 도축해야 할 정도로 당시 독감 피해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은 국가적 재난상황에 바싹 긴장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국가 재난상황을 선포하고 약 20일 만에 대책을 마련한 후 매일 이행사항을 보고받았다. 진휼청(賑恤廳)에 빈민들을 모아 치료하고, 각 지방에도 임시 치료시설을 만들었다.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조세를 줄이고 감염 방지를 위해 군역도 일시 중단했다. 무엇보다 민심 수습에 역점을 뒀다. 여귀(厲鬼·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가 병을 일으켰다고 믿는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시신 매장을 위한 별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당시는 3년상이 관례였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은 철저히 격리해야 했다. 땅이 부족해 시신 매장에 어려움을 겪자 국가가 나선 것. 하와일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임금이 시신 묻을 곳이 없는 가련한 백성들을 위해 슬퍼했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정조는 전염병 사태 속에서도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재난에 신속하게 대응했다”고 강조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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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품 플렉스, 탄탄한 몸매, 정치인 저격으로 ‘좋아요’를 산 2030

    ‘지금 여의도 ○○ 고깃집에서 한우 먹을 사람, 선착순 3명!’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는 조정호(가명·31)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런 글을 종종 올린다. 팔로어들의 충성도를 수시로 확인하기 위한 것. 이들은 ‘우왕 맛나겠당. 저도 사주세요’ ‘지금 홍대인데 바로 한강 건넙니다’ 등의 댓글을 남기며 환호한다. 인스타그램에는 본인 소유의 벤틀리 등 고급 자동차 사진이 즐비하다. 이른바 ‘금수저’인 그는 8년 전 부모 도움으로 성형수술도 받았다. 약 10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중 상당수가 그의 물질적 과시에 열광한다. 최근 출간된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까지’(천년의상상)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2000명 이상의 팔로어를 보유한 2030세대 인플루언서 325명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연세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생인 저자 정연욱 씨(38)가 이들을 심층 인터뷰해 어떤 심리로 SNS에서 활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분석한 결과물. 정 씨는 “SNS를 통해 큰 노력 없이 유명해지는 게 가능해졌다”며 “2030세대가 자기 과시나 현실 탈피의 수단으로 SNS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정 씨는 책에서 인플루언서를 물질파, 육체파, 정신파로 분류한다. 물질파는 조 씨처럼 SNS를 통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인기를 얻는다. 이들은 돈으로 인기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팔로어들이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면 인간관계에서 공허함을 느끼기 일쑤다. 육체파는 외모를 강조해 유명세를 얻은 이들로 연예인 지망생이 많다. 예컨대 보디클렌저 모델인 김준(가명·26) 씨는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20만 명이 넘는다. 탄탄한 몸매와 뚜렷한 이목구비로 태국에서도 관심을 끌 정도. 그의 계정에는 ‘Oppa, Where are you?(오빠 어딨어?)’라는 글을 다는 태국 여성들이 적지 않다. 팔로어들은 그의 벗은 몸에 높은 관심을 보인다. 이 때문에 김 씨는 광고 촬영 때 속옷까지 벗으라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그는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내면이 아닌 외모로만 평가받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했다. 정신파는 지적 능력으로 승부를 건다. 정치, 사회, 문화에 걸쳐 대중이 관심을 갖는 이슈에 대해 소위 ‘썰’을 푸는 식이다. 하지만 현실은 업무 시간에 상사의 눈을 피해 SNS 글을 올리는 월급쟁이들이 적지 않다. SNS에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업무성과가 떨어지고 오프라인 인간관계에 취약한 이들도 있다.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이우성(가명·32) 씨가 대표적인 사례.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페이스북 정치비평 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는지부터 확인한다. 주로 정치인을 저격한 글에 대한 반응이 좋은 편이다. 소신 발언을 하다 공천에서 탈락한 국회의원에 대해 ‘소신이 아닌 내부 규칙을 흔드는 변절자의 최후’라는 악평을 남겼다. 이 씨는 “내 글이 온라인에서 파급효과를 일으켜 정치권에 영입되는 꿈을 꾼다”고 했다. 저자는 “인플루언서들은 자기 삶을 소재로 삼아 유명해졌다는 점에서 이 세상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 하는 행태는 자기주도적인 삶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만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현실의 삶과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생리를 짚고 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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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떡 만들기’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나눔과 배려의 상징”

    명절이나 잔치마다 만들어 먹는 음식인 떡 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1일 떡을 만들고 나눠 먹는 전통적 생활관습인 ‘떡 만들기’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떡은 곡식가루를 이용해 만든 음식으로, 시루에 안쳐 찌거나, 쪄서 치거나, 물에 삶거나, 혹은 기름에 지져서 굽거나, 빚어서 찌는 등 다양한 조리 방법이 있다. 15세기 요리서 ‘산가요록’(山家要錄), 17세기 요리서 ‘음식디미방’ 등 고문헌에 기록된 떡의 종류만 200종이 넘는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백일·돌잔치 등 주요 기념식과 설날·추석 등 명절에 떡을 만들어 나눠 먹었다. 백일상에 올리는 백설기는 아이가 밝고 순진무구하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설날에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여겼다. 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신앙, 각종 굿 등 의례와 제사에도 제물(祭物)로 떡을 바쳤다. 오늘날에도 개업떡, 이사떡 등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유지 및 전승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떡은 한국인이 일생동안 거치는 각종 의례와 행사 때마다 만들어서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나눔과 배려’, ‘정(情)을 주고받는 문화’의 상징이며, 공동체 구성원 간의 화합을 매개하는 특별한 음식”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철기 시대 유적의 시루에서 떡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황해남도 안악군의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 벽화의 부엌에도 시루가 그려져 있다. 삼국사기에서도 떡을 의미하는 ‘병’(餠)이 적혀있으며, ‘고려사’ 등에도 떡을 만들어 먹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고대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마다 다양한 떡이 전승되는 것도 떡 만들기 문화의 특징이다. 감자와 옥수수 생산이 많은 강원도에서는 ‘감자시루떡’ ‘찰옥수수시루떡’이 전승되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쌀이 귀한 대신 잡곡이 많이 생산된 제주도에서는 ‘오메기떡’ ‘빙떡’이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말 서양식 식문화 도입으로 떡 만들기 문화가 일부 축소됐지만, 여전히 지역별로 떡 문화는 전승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무형적 자산인 떡 만들기가 오랜 역사를 가지고 한반도 전역에서 전승·향유되고 있다는 점, 삼국 시대부터 각종 고문헌에 떡 관련 기록이 확인된다는 점, 현재에도 떡 만드는 지식이 전승·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떡 만들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온 국민이 전승·향유하고 있는 문화라는 점에서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는 인정하지 않았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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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서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 12월 17일까지 특별전 열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장서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 특별전을 12월 17일까지 연다. 총 45종(국보 6종, 보물 30종, 시도 유형문화재 9종) 100여 점의 고서화를 선보인다. 이 중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국보 제335호)와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보물 제1597호)가 일반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80년 조선 숙종 때 열린 회맹제(임금과 공신들이 천지신명에게 지내는 제사)를 기념해 1694년 제작한 왕실 문서다. 역모를 고발해 보사공신으로 녹훈된 서인 공신들이 이후 남인과의 당파싸움으로 파훈에 이어 복훈된 사실이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회맹축 2건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이 문서는 국새가 찍혀 있다. 펼치면 가로 길이가 25m에 달하는 문서 양끝에 파란색과 붉은색 비단을 덧댔다. 문서를 둘둘 마는 막대인 축을 옥으로 장식하는 등 정교한 공예 기술도 반영됐다. 아국여지도는 조선이 러시아와 1884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전 조―러 국경을 정탐해 고종에게 보고한 지도다. 20면의 지도를 접어 책으로 만들었는데 펼치면 길이가 약 3m에 이른다. 19세기 말 조선과 청나라, 러시아 국경지대뿐 아니라 연해주 거주 조선인 수와 러시아 군사시설 위치도 담겼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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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산 쌍릉서 백제건물터 2동 확인… ‘제의 창고’ 추정

    백제 무왕과 왕비 무덤으로 알려진 전북 익산 쌍릉에서 제의 창고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2동(사진)이 확인됐다. 쌍릉 동쪽 구릉에서 발견된 길이 30m 내외의 이 건물지는 원두막처럼 기둥을 세워 땅에서 바닥을 띄운 지상식 건물인 것으로 조사됐다. 발굴조사를 진행한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건물지 2동에서 온돌이나 화덕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일반 거주시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하는 지상식 건물로 지어 내부 기물을 보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쌍릉과 연관된 제의 기물을 보관하는 창고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26일 밝혔다. 건물지에서는 백제 사비도읍기의 벼루 조각과 인장이 찍힌 기와, 통일신라시대 토기 등이 출토됐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건물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구상유구(溝狀遺構·도랑 모양의 터)도 발견됐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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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생들도 경복궁 드나든 것 아시나요?

    “모터사이클을 팔던 역사 문외한인 제가 역사책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죠.” 신간 ‘사사건건 경복궁’(시대의창)을 펴낸 양승렬 씨(46)는 명품 모터사이클 할리데이비슨과 두카티에서 16년간 영업, 마케팅을 담당했다. 퇴직 직전 직함은 영업본부장(임원). 어렸을 때 본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의 오토바이 질주 신을 보고 모터사이클에 푹 빠졌단다. 25일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그는 검은 라이더재킷을 입고 최신식 두카티 스트리트파이터V4S 모델을 탄 채 나타났다. 학창시절부터 역사와 담을 쌓고 지냈다는 그는 2005년 우연히 들른 경복궁에서 궁궐길라잡이의 해설을 듣게 됐다. 궁궐길라잡이는 관람객을 대상으로 궁궐과 종묘 곳곳을 설명해 주는 자원봉사자다. 관람객 20여 명을 이끌며 경복궁을 흥미롭게 소개하는 모습에 매료된 그는 그해 길라잡이에 지원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역사 비전공자라도 서류심사를 거쳐 이론교육 3개월, 현장실습 9개월을 마치면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 양 씨는 “명품 모터사이클이 수입품 위주다 보니 외국 것만 전달해 아쉬웠다”며 “우리 전통문화를 전달하는 궁궐길라잡이 활동을 통해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8년 건강 악화로 일을 그만둔 그는 막연히 구상한 책 쓰기를 결심했다. 그는 “내가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제 우리 문화를 재밌게 전달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신간은 왕실 전유물인 경복궁을 그곳에 드나들던 비주류 인물들의 삶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예컨대 연회가 열린 경복궁 경회루에는 기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이곳에서 왕의 눈에 띈 천민 출신 장녹수(?∼1506)는 종3품 후궁까지 올랐다. 연산군일기에는 “녹수는 왕을 조롱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노예처럼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신하를 거침없이 처형한 연산군도 장녹수 앞에서는 작아진 것. 이에 양반들은 그녀에게 인사 청탁까지 시도했다. 왕이 정사를 논하고 타국 사신을 맞은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은 환관 이야기로 풀어간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환관 300여 명을 바치라는 명나라 사신의 요구에 태종은 “종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느냐”고 토로한다. 조선은 천민은 물론 양인 중에서도 환관을 뽑아 조공으로 바쳤다. 이들 중 일부는 사신으로 고국에 돌아와 친척의 관직을 조정에 요구하기도 했다. 양 씨는 “기생, 환관 등 비주류를 통해 경복궁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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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정장에 샌들 신은 남성은 왜 상상이 안 될까

    매일 집을 나서기 전 무슨 신발을 신을지 고민한다. 격식을 차릴 땐 구두를, 부담 없는 모임에 갈 땐 스니커즈를 신는 것처럼 신발마다 각각 알맞은 상황이 있다. 신발의 종류마다 다른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캐나다 토론토 바타 신발 박물관 수석 큐레이터인 저자는 오늘날 주로 착용하는 샌들, 부츠, 하이힐, 스니커즈 등 네 종류를 중심으로 신발의 변천사와 그 속에 담긴 사회 문화적 의미를 설명한다. 샌들은 5세기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사라졌다 18세기 말 서구 패션에 등장했다. 자유분방한 히피나 검소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즐겨 신었다. 하지만 발을 드러내는 샌들을 신는 여성은 정숙하지 못하다고 여기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다. 이에 19세기 중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저항의 표현으로 샌들을 신었다. 이를 시작으로 점차 인식이 바뀌었고,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대관식에서 신을 정도로 샌들의 지위는 상승했다. 현대 남성들은 1984년 스포츠 샌들이 처음 등장한 후 활동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샌들이 속속 나오자 본격적으로 샌들을 받아들였다. 현재도 여성은 공식 석상에서 샌들을 착용하지만, 남성은 구두를 신는다. 샌들이 여성의 전유물이었다면 부츠는 남성이 주로 향유했다. 16세기 군인은 말을 타기 위해 승마용 부츠를 신었고, 18세기 영국 시골 대지주들은 작업용 부츠를 착용했다. 부츠는 육체노동과 연계돼 남성성을 상징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부츠는 군인을 대표했다. 그러던 1960년대 ‘배트맨’의 캣우먼, ‘스타트렉’의 우후라가 부츠를 신고 등장하면서 부츠는 영웅적 여성의 상징이 돼 여성도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어그 부츠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등 부츠는 남녀 모두가 착용하는 신발이 됐다. 하이힐은 원래 남성 신발이었다. 승마용 발걸이에 신발을 끼우기 위해 굽이 있는 신발이 필요했기 때문.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도 착용했던 힐은 18세기까지 남성을 표현하는 신발이었다. 남성용 힐이 부츠로 대체되자 힐은 여성적인 신발이 됐다. 당시 여성들은 주로 침실에서 뒤축이 없는 힐을 신었고, 남성들은 침실과 힐을 엮어 성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성적 욕망과 힐의 연결은 하이힐의 여성성을 강화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2015년 칸 영화제는 힐을 신지 않은 여성 참석자들을 복장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남녀 모두가 즐겨 신는 신발로는 스니커즈가 있다. 19세기 서구에서는 테니스가 유행하고 농구가 고안됐다. 운동에 대한 관심은 그에 특화된 신발을 필요로 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 스니커즈가 탄생했다. 체육관의 바닥을 보호하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고무 밑창 신발이 필요했던 것. 스니커즈가 대중화되면서 소비자는 본인을 돋보이게 해줄 신발을 원했다. 스니커즈는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소비자를 만족시키며 운동과 패션 모두 사로잡았다. 저자는 “신발은 신은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해준다”고 말한다. 신발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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