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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0~202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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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진보 가면 벗어던진 친문… 좌파 몰락 예광탄

    최근 외국인 한국 전문가, 투자 전문가 등이 문재인 정권의 성향을 어떻게 규정해야할지 토론을 벌였는데 결론은 ‘소셜 내셔널리즘(social nationalism)’으로 모아졌다고 한다. 좌파 민족주의, 즉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성향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특징을 지닌다는 의견들이었다. 소련 식의 사회주의나 종북 등으로 매도하는 그런 이념몰이, 색깔논쟁 수준의 논의가 아니니 오해 말기 바란다. 외국인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은 문재인 정권의 성향이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가장 주목하고 우려한 점은 남북분단 일제강점 등의 역사·지리적 조건에 따른 민족주의가 평등주의 성향과 결합해 서민 대중을 선동하면 엄청난 폭발적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 주말 서초동 촛불집회를 보면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사회엔 FTA나 주한미군, 남북관계처럼 이념·진영에 따라 정반대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사안들이 많다. 하지만 조국 사태는 그럴 사안이 아니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그 누구도 조국 가족이 누린 특권 특혜와 위선이 정의와 공정에 어긋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텐데, 어떻게 조국 수호를 외치는 이들이 또 저렇게 있을까…아노미적 혼란을 느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아함은 두 가지 점을 인식하면 풀린다. 첫째는 우리 사회 좌파 진영의 조직력과 동원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이다. 민노총 등 노동운동 조직 외에도 한국사회에는 수를 헤아리기 힘든 좌파 단체 모임들이 있다. 그들의 투쟁 노하우와 전략은 군부독재시절부터, 자금·조직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부터 쌓여왔다. 그들에게 정권은 중요한 물적 토대다. 좌파 정권이 창출되면 행정부와 공공기관 간부직 진출, 프로젝트 수주, 지원금 등등 거대한 좌파 산업이 생겨난다. 우파에 정권을 빼앗긴다는 건 그런 생존의 토대가 흔들리는 사변이다. 둘째, 모든 대중 집회가 어떤 가치나 대의를 위해 모이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4·19혁명, 6월민주항쟁처럼 가치, 정의감 등 양심적 동기에 의해 거리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철저히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모이는 경우도 많다. 원시시대 부족 간 전쟁을 예로 들어 보자. 자기 부족이 더 도덕적이고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싸우지 않으면 부족이 멸절한다는 위기감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운다. 그런 몰가치적 투쟁에는 조국이 공정 정의 같은 가치를 짓밟았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친문 인사들은 어떤 가치가 아니라 그저 문재인 정권을 지키기 위해 모인 것이다. 지금 검찰 개혁을 외치고 있는 이들 중 상당수는 만약 현 정권이 박근혜 정부이고 검찰이 권력 핵심 인사를 수사하는데 박 대통령이 무소불위 검찰을 질타하며 검찰개혁을 압박했다면 “검찰수호”를 외쳤을 것이다. 2년 넘게 진행된 적폐청산 수사 때 그 숱한 과잉수사와 인권침해, 피의사실 공표 논란에도 불구하고 친문진영에서 검찰을 질타한 이가 누가 있었나. 물론 집회 참가자중에는 검찰 과잉수사 피해자들, 사법 개혁 소신을 오랫동안 주창해온 이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다수는 문재인을 지키기위해 나선 친문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유시민 등 친문인사들과 여당 지도부에서 궤변사(史)의 신기원을 경신하는 발언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런 부족 간 전쟁에 임하는 차원으로 보면 된다. 부족 간 전쟁에서 중요한 건 전투력이지, 논리와 이성 합리성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런데 친문이 공정 정의를 짓밟은 조국 특혜를 옹호하다보니 공정 정의라는 진보의 핵심 가치들을 팽개친 결과가 되어버렸다. 문 대통령부터 조국 임명을 강행하고 검찰을 압박함으로써 자신이 내걸었던 인사 원칙과 검찰 독립 등의 가치들을 저버리고 말았다.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자가 아니라 진영의 수장을 자임한 셈이다. 유연성이 없으면 원칙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원칙마저 버린 것이다. 집회 참가자숫자를 놓고 과장을 일삼지만 민심, 여론의 가늠자는 참가자 숫자가 아니다. 자발성과 참여 동기의 순수성, 참가에 따르는 불이익 감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다. 6월민주항쟁이 온 국민의 항쟁이었던 것은 가두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숫자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택시가 멈춰 서서 경적을 울려주고 빌딩 창문마다 직장인들이 손수건을 흔들며 응원하고, 행인들이 최루탄 속에서도 박수를 쳐주는 그런 지지가 민심의 척도였다. 좌파가 공정 정의 같은 진보의 가치와 결별하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기층 민중은 계급·계층적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므로 조국을 수호하고 핵심 지지층만 잘 다지면 된다는 생각이 집권세력 내엔 팽배한 것 같다. 베네수엘라같은 사회에선 그런 게 통할 것이다. 그러나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는 계급적 이익 못잖게 시대정신과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중들이 계급적 이익만으로 투표한다면 어느 나라든 노동자·서민 기반 정당이 항상 집권할텐데, 선진국은 그렇지 않은 것은 누가 그 시대에 요구되는 가치를 구현하느냐에 승패가 갈리기 때문이다 친문은 이번에 공정 정의 같은 가치를 팽개친 채, 오로지 재집권을 목표로 한 전투력 응집력 동원력 넘치는 부족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집단이 돼버렸다. 우파가 공동체에의 헌신, 자기희생. 도덕성 등 보수의 가치를 팽개치면 몰락하듯이, 진보의 가치를 벗어던진 좌파에게 미래는 없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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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조국 이후가 더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국 임명 강행이 패착(敗着)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 뭐라든 내 소신대로 한다’가 트레이드마크인 문 대통령이지만 이번엔 적잖이 흔들렸던 것 같다. 임명 강행이 ‘까먹는 게임’이 될 것임이 훤히 내다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임명 강행을 택한 것은 항복(임명 취소)을 택하면 조국 개인을 우상시하는 핵심 지지층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여권 책사들의 선거공학적 분석이 ‘마이웨이’ 본능에 불을 지폈을 것이다. 임명 강행 전날 밤 당정청 고위 회의에서는 내각과 청와대의 고위급 인사 2명이 임명 강행에 무리가 따른다는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당과 청와대 관계자들은 견고한 핵심지지 세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범진보층, 그리고 한일 갈등 정국이 내년 총선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점 등을 들어 임명 강행을 고집했다고 한다. 물론 문 대통령도 조국 의혹을 덮은 채 계속 갈수는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시한 논리가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다”였다. 문 대통령도 내심으론 ‘위법 확인 여부’가 임명 강행의 논리적 근거로 억지스럽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역대 청문회 낙마자 가운데 위법이 확인돼 낙마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청문회의 본질이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논리를 편 것은 훗날 ‘탈(脫)조국’시에도 쓸 수 있는 양수겸장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임명 강행 열흘이 지나도 조국 사태가 사그라들지 않는 상황이지만 집권세력도 예상 못 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임명을 강행한 건 결국은 만회가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만회 시나리오는 ‘여권 내 기득권 청산 이벤트와 세대교체 → 선거법 개정을 통한 좌파 연대 → 무당파로 이탈한 지지층 재흡수를 통한 정권 재창출’의 구도일 것이다. 하지만 설령 문 대통령은 그런 시나리오대로 실점을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한국 사회가 조국 사태로 인해 받은 심대한 폐해는 오랫동안 만회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 폐해는 첫째,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계층 간 불신의 심화다. 조국 가족이 누려온 특권이 드러나면서 ‘기득권층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 ‘역시 우리 사회는 썩었다’…등등 혐오·반감이 더 깊어졌다. 둘째, 공동체 리더십의 훼손이다. 조국 가족의 문제는 일부 뒤틀린 특권층의 일탈이라 쳐도 국가 통치자가 미리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장관으로 발탁하고 임명한 것은 인사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든 일이다. 최순실 사태로 큰 상처를 입은 국민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준 것이다. 셋째, 공정한 경쟁 시스템에 대한 신뢰 상실이다. 경쟁 과정이 공정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결과에 승복할 텐데, 조국 딸이 입시생이던 시절엔 그런 방법이, 또 다른 시절엔 또 다른 형태의 방법이 동원돼 특권층들은 어느 시대든 항상 나무에 먼저 올라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 공동체의 기반은 무너진다. 그럼에도 집권세력엔 조국 사태가 필패(必敗)의 사건은 아닐 수 있다.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민주당 이탈층은 부동층으로 남고 한국당으로는 가지 않고 있다. 여권은 적당한 시기에 조국을 정리하고 대대적인 기득권 청산 모드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당내 386 기득권으로 불리는 인사들도 자진불출마 선언 등의 형식을 통해, 도마뱀의 꼬리가 ‘나를 잘라 주십시오’ 하듯이 당 쇄신에 자기 목을 내놓을 것이다. 그들은 그런 집단이다. 지도부가 결정하면 기꺼이 시위를 주도하고 감옥행을 택했듯이 자기를 던질 줄 안다. 공천을 포기해도 진보진영의 재집권이 자신의 번영을 뒷받침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더구나 조국 사태가 심화시킨 기득권층의 반칙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집권세력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당장은 집권세력과 가면 벗겨진 강남좌파의 부도덕성에 실망한 중도성향 중산층들이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득권에 대한 서민 대중의 더 깊어진 혐오감이 선거에서 좌파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좌파진영으로선 조국은 좌파의 가면을 썼던 기득권층, 즉 강남우파로 정리하면 그뿐이다. 조국은 그동안 누려온 특권의 실태를 대중에게 노출시킴으로써, 특권문화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지피는 의도치 않은 전과(戰果)를 올린 셈이다. 보수진영이 조국만 물러나면 그걸로 승리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여든 야든 조국으로 상징되는 기득권·특권·반칙과의 단절과 청산을 과감히 보여주지 못하는 쪽이 패자가 될 수 있다. 조국 사태로 대한민국 공동체는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받았지만 이 사태를 초래한 집권세력은 기층민중 대(對) 특권층 대립 구도를 심화시켜 전화위복의 역전 득점을 노릴 것이다. 조국 논란이 조국 사태라 불려 마땅한 이유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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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文 대통령은 ‘조국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까

    2주전 칼럼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조국 전 민정수석을 지명하는 등 계속 마이웨이를 고집하면 많은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고 썼다. 예상대로 문 대통령은 조국 지명을 강행했고, 며칠 만에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임명을 강행하기도 철회하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일거다. 임명 강행 시엔 넘어야할 장애물이 너무 많다. 우선 법무장관이 검찰 수사 피의자가 되는 초유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 현재 조 후보자에 대해선 ①논문 부정(업무방해 혐의 등) ②웅동학원 재산 처분 의혹(강제집행 면탈, 사기혐의 등) ③사모펀드 투자 및 업체의 관급공사 수주 ④의전원 교수의 의료원장 취임 ⑤교육부의 미성년논문 조사팀에 대한 민정수석실 감찰 ⑥부동산 위장매매 등등 여러 의혹이 제기돼 있다. 수사와 진상규명 없이는 의혹을 벗기 힘든 내용들이다. 윤석열 검찰이 적극 나선다면 전대미문의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법무장관은 검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갖고 있다. 개별사건 지휘권은 없지만 수사내용은 보고 받는다.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면 개별사건을 지휘할 수도 있는데, 이는 2005년 강정구 교수 사건 때 외엔 전례가 없다. 특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시중에선 자칫하다간 법무장관이 아니라 ‘법무부 교정시설 식구’(수감)가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만약 청와대가 검찰 수사도 없이 “불법은 없었다”고 결론짓고 임명을 강행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당에서 최근 “특혜가 아니고 보편적 기회였다” “누구나 신청하고 노력하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라는 등의 발언이 나오는 등 “부적절한 일이지만 불법은 없었다” 쪽으로 몰아가려는 기류가 강하다. 청와대가 그런 결론을 내면 이는 조 후보자 딸이 시험 한 번 치르지 않고 누린 최고의 코스가 국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던 기회였다는 뜻인데, 그런 ‘보편적이고 합법적인 기회’를 놓친 대다수 국민은 게을러 제 밥을 찾아먹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귀결돼 버린다. 허탈해하는 젊은이와 학부모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열려있던 합법적 공간을 이용하지 못한 ‘곰바우’로 만드는 것이다. 여당은 민심 격노를 두려워하지만 섣불리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질 못하는 분위기다. 청와대는 임명을 강행해도 일본 아베 신조 정부가 또 도발하고 김정은-트럼프가 대형 이벤트를 만들어주면 바뀌리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판일 수 있다. 곧 국감이 다가오고 총선으로 이어진다. 임명철회는 문 대통령으로선 두 가지 이유에서 고개를 흔들 것이다. 첫째 386운동권의 상징 같은 인물의 추락은 상상하기도 싫을 것이다. 차기 대선 플랜에도 영향을 미친다. 집권세력과 지지진영에서 나오는 철회 불가론의 두 번째 근거는 사법개혁의 무산 우려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런 우려들은 타당하지 않다. 첫째 이 정권 지지세력 일부에선 조국을 386 학생운동권의 상징처럼 여기는데 이는 과장된 것이다. 조국은 1980년대 초중반 전두환 군부독재시절 학생운동사에서 별로 족적이 없다. 이미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가 쟁취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한 1990년에서야 사노맹 사건에 등장한다. 주사파의 대부였던 김영환은 “조국은 운동권의 축에도 못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자녀입시, 사모펀드, IMF 때 부동산 투자 논란 등은 조 후보자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미안해하며 절제하고 나누는 그런 신독(愼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문재인 정권의 도덕적 담론의 축이 되기엔 부족한 것이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그의 퇴진을 자신의 아바타의 추락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 조국이 없으면 사법개혁이 위태로워질 것이란 논리도 허구다. 조국이 주도한 사법개혁안은 검찰의 직접 수사권은 거의 그대로 둔 채 경찰의 힘을 키워주는, 즉 시민 입장에선 공권력의 수사 총량만 심대하게 늘리는 기형적 타협안이다. 검찰공화국 탈피를 위한 실질적인 사법개혁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의원입법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그 누구를 법무장관에 앉혀도 검찰독립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만 확고하면 더 완성된 사법개혁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정치적·이념적 진영논리를 벗어나면 해법은 너무도 뚜렷이 보인다. 진보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고, 숱한 의혹으로 수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인사를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문 대통령이 택해야할 길은 너무도 명확히 보이는데, 정반대로 가려는 기류가 강하다. “후보자에 대해 제기된 모든 의혹은 한점 남김없이 규명하겠다. 그 결과 만약 불법이 드러나면 즉시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 하지만 진실이 완전히 규명되기 이전엔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후보자에게 일할 기회를 주자”는 식의 논리를 들이대며 임명을 강행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태의 수습이 아니라, 두고두고 짐이 될 것이다. 어제 한일 정보보호협정 폐기 결정에서도 보이듯 지지세력만 바라보며 마이웨이 하려는 성향은 대통령 자신의 가장 큰 장벽인 것 같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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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文정권의 ‘내 맘대로 한다’… 도 넘었다

    “최고 통치자는 신념을 끝까지 밀고 가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문재인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이 사석에서 한 얘기다. 청와대의 위기 상황에 대한 얘기 끝에 나온 말이다. 노 대통령은 참모들이 반론을 펴면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지만 최종적으론 자기 생각을 접는 경우가 많았다. 문재인 비서관은 그런 점에선 조금 철학이 달랐던 것 같다.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 3개월간 정말로 ‘끝까지 신념을 밀고 가는’ 대통령을 목도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누가 뭐라든 내 뜻대로 한다’가 트레이드마크다. 결국 조국 전 민정수석을 법무장관에 임명할 것이라 하니, 문 대통령의 소신은 역대 누구도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다. 법무장관은 이념·정치적 중립성, 객관성, 권위와 신중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리인데, 우리 사회 이념 스펙트럼에서 한쪽의 거의 끝부분에 서 있는 인사를 기어코 써야겠다는 것이다. 조 전 수석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최근 검찰 간부 인사는 ‘내 맘대로 한다’가 대통령 측근들도 공유하는 특질임을 보여준다. 정권이 싫어하는 수사에 관여한 검사들을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무더기로 좌천시킨 전례는 찾기 힘들다. 과거 정권들은 아무리 내부적으로 곪고 독재를 해도, 여론과 야당의 시선을 의식해 원하는 게 100이면 80 안팎만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정권은 거의 100% 관철하려 하는 게 특징이다. 이는 사회를 선악 이분법으로 나눠, 자신의 반대론자를 악의 위치에 놓는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비판세력의 눈은 의식할 가치가 없다고 마음먹은 결과다. ‘명분, 신념, 결집된 지지세력’이라는 삼위일체만 있으면 돌파하지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필연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만 하겠다’로 이어진다. “남북 경제협력으로 평화 경제가 실현된다면 단숨에 일본 경제의 우위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는데 이는 위험한 징후 세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청와대의 시스템 장애다. 즉흥적 발언이 아니었는데 참모들은 사전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정치인인 대통령의 관점을 외교·경제·전략 보좌진이 걸러줘야 했는데 아무도 그런 말을 못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이는 정권 내 길항 기능의 마비를 뜻한다. 최고 통치자가 좀처럼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걸 학습한 참모들은 점차 고언을 포기하게 된다. 대통령의 발언 후 현직 장관급 인사마저 지인들에게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입 밖에 내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두 번째 징후는 1980년대 민족해방계열(NL) 시각의 부활 조짐이다. NL은 한국 사회의 핵심 모순을 분단으로 봤고, 주적은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미국 일본 등이고 극복 주체는 민족으로 봤다. 세 번째 위험한 징후는 총선과 재집권을 목적으로 한 민족주의 드라이브의 과열이다. 논리적 설득력만 염두에 뒀다면 문 대통령도 그런 발언을 안 했을 것이다. 남북경협이 일본을 이겨낼 동력이 될 만큼 이뤄지려면 북한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완비되어야 하는데 최소한 수년 이상 걸리는 작업이다. 극복해야 할 문제와 대안 간에 시간적 격차가 너무 크다. 당장 수돗물이 안 나오는데 황허 강물을 끌어오면 된다고 하는 격이다. 극일은 시간이 걸린다. 일본이 수십, 수백 년 쌓아올린 기초과학 연구개발을 우리는 새로 투자하는 건데, 정부가 집중 지원하면 시간이 단축은 되겠지만 기술 특허가 독점화되어있는 부분을 국산화한다는 게 간단치는 않을 것이다. 부품·소재 국산화를 해도 경쟁력을 가져야 자생할 수 있다. 방위산업이 아닌 모든 부품·소재·장비를 국가예산으로 상용화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많은 기업들이 엄청난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지만 친일 매도 분위기에 눌려 내놓고 말은 못 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낱낱의 사실관계는 어쩌면 청와대에겐 무의미할지 모른다. 문 대통령은 국민 일반이라기 보다 핵심 지지층을 겨냥해 장기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분단모순을 극복해 하나 된 한반도의 힘으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수십 년전 이상론의 21세기판인 것이다. 집권세력은 민족주의 드라이브가 남북관계 이벤트와 맞물린다면 총선·재집권의 특효약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정략적 확신과 그것이 대의라는 주관적 신념이 맞물려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비전은 몽상과 다르다. 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주변국 관계, 세계정세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동방정책의 주역인 서독의 빌리 브란트는 1957년 서베를린시장 시절부터 참모인 에곤 바르와 발언 하나하나를 협의하며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일관되면서도 신중한 메시지가 수십 년 쌓여 훗날 독일 통일이라는 열매로 이어진 것이다. 열광하는 지지층만 바라보며 신념과 명분으로 무장한 채 마이 웨이 하는 현상을 과거 정권들에서 여러 번 목도했는데, 그 결말은 비슷했다. 최근엔 박근혜 정권의 2016년 4·13총선 공천파동이 한 사례다. 대통령의 독선은 총선 참패를 불렀고 탄핵으로 이어졌다. 대통령발(發) 뉴스에 평범한 사람들마저 “어”하며 어이없어하는 현상,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적신호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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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시대착오 색맹증인가, 총선책략인가

    23일은 한국 근현대 정신사의 거봉(巨峰)인 작가 최인훈의 1주기였다. 그는 1994년 소설 ‘화두’에서 인류를 커다란 공룡에 비유했다. 머리는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에 머물며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는 지금의 우리사회를 표현하는 데도 유효하다. 공룡의 머리는 다양성 다층성 상대성 자율성의 21세기인데 꼬리 쪽은 절대악과 절대선이 맞부딪치는 봉건시대, 일제 강점기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그렇게 꼬리 쪽에서 맴돌고 있는 이들이 시정잡배가 아니라 영향력을 지닌 청와대와 집권여당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경제 보복에 한마음으로 맞서 해결책을 찾아도 쉽지 않을 판국에 대통령민정수석과 여당 원내대표 등이 앞장서서 친일·반일 이슈로 둔갑시켜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친일이냐 반일이냐에 따라 대응이 달라질 성격의 사안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우리 측 안을 만들면 된다. 스펙트럼 1~10을 가정할 때 1은 한국 내 일본 전범기업 자산 압류절차를 밟으며 배상을 끝까지 요구하는 것이고, 10은 일본 측에 경제적 부담을 전혀 지우지 않는 자체배상이 될 것이다.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전략적 선택을 하면 된다. 대내적으로는 부품 자생력을 키우고 다른 공급처를 찾아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여기에도 국민적 이견이 있을 여지가 없다. 설령 이완용이라해도 지금 이 이슈에 대해 별달리 친일행각을 벌일 여지가 있겠는가. 항일 무장투쟁가가 환생한다해도 불매운동 이외엔 마땅히 나설 일이 없을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대목이 있었다면 그동안 문재인 정부의 대처와 준비가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다. 즉 정권의 유능·무능에 대한 논란이었는데 이를 친일·반일 논란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선택지 1~10 사이의 어떤 방안을 놓고 벌이는 찬반 토론이 아닌 소모적인 친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의견에 친일 딱지를 붙이는 행태는 극우 반공 시대의 데자뷔다. 전두환 정권이 세상을 빨갱이냐 아니냐로 나눴듯, 이 정권 인사들은 친일·반일의 흑백 렌즈로만 세상을 보는 것 같다. 공룡의 머리와 몸은 21세기 초중반인데, 아직도 구한말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이들을 ‘시대지체 색맹증’이라 불러도 될 듯 하다. 그런데 과연 그게 다일까. 그들이 정말 흑백논리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 어쩌면 그들은 매우 간교한 책략가들일지 모른다. 친일 프레임은 오로지 총선 승리, 좌파 장기집권을 목표로 한 전략의 결과물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이슈는 올가을 국정감사의 집중력을 흩뜨리고 내년 총선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여권은 우리 대기업들이 필사적으로 뛰어 범퍼 역할을 함으로써 실물경제와 민생에 미칠 충격을 일정한 수준에서 막아준다면, 한일 분쟁은 총선에 호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한일 관계를 악화시켜 온 아베 정권 역시 칼을 꺼내 목에 겨눈 상태를 이어가는 관리 모드를 택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찔러버리면 더 이상 남은 패가 없고 역풍도 거셀 것이기 때문이다. 한일 분쟁은 아베와 한국 여당 모두에 정략적으론 나쁘지 않은 판이다. 하지만 책략가의 계산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항상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책략에 묻은세균이 종기를 만든다. 22일의 중·러 동해 독도 상공 도발이 한 예다. 중·러의 도발은 1차적으로 미국을 향한 메시지인 동시에 이완된 한미일 협력의 빈틈을 찔러 더 벌리려는 것이다. 독도를 건들면 한국이 방어할 테고 그러면 일본이 발끈할 것임을 중·러는 안다. 밥 먹듯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해온 중국은 이어도를 지나서 독도까지 왔다가는 걸 반복하고, 러시아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까지는 안 가는 걸 묵계한 듯 독도를 기점으로 동해상 영향력을 균점하려 한다. 열강들의 태도는 19세기 말이나 마찬가지인데 집권세력이 총선 전략 차원에서 민족 프레임을 내건다면 정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삶을 다룬 뮤지컬 영웅이 요즘 전국 순회공연중이다. 2막에서 안 의사는 이런 유언을 남긴다.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이토를 쐈지만, 아들(미래세대)의 두 손은 기도하는 손이 되길 바란다.” 투쟁의 목적은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다. 친일·반일로 국민을 편 가르고 대(對)아베 대응 보다 내부 공격에 더 열을 올려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인가. 그런 행태야말로 아베를 돕는 이적 행위나 다름없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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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제국주의 후예들에 설마 하다 기습당한 아마추어 정권

    “경제 교류는 정치와 다르게 봐야 한다.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우려하는 일본 기업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게 3월 28일이었다. 외교 관계가 나빠져도 경제는 무탈하게 굴러갈 거라는 판단에 많은 이들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여 만인 7월 1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가 나왔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일본 발표 직후 우리 정부의 태도였다. 설마 대비를 안 했을까 싶었는데 정말로 ‘설마’ 하며 별다른 대비를 안 한 것으로 드러났다. 올봄 일본 자위대 초계기 사건 당시 경제계 지인으로부터 “일본이 세정액(에칭가스) 하나만 통제해도 우리 반도체 공장이 다 멈춰 선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미국 등 해외 백화점이나 전자제품 매장에 가면 삼성·LG 제품이 최고급 대접을 받고 일본 제품들은 진열대 뒤편에 처박혀 있는 걸 보며 느꼈던 뿌듯한 마음과, 부품·소재 산업에서 우리가 그렇게 뒤져 있다는 진단 사이의 괴리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 언론이 한일 관계를 방치하면 경제에 피해가 올 거라고 우려하는 글을 숱하게 실었는데도 집권세력은 마이동풍이었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8개월 넘게 뒷짐 진채, 문 대통령이 뜬금없이 친일 청산을 어젠다로 제기하며 ‘친일 대(對) 반일’ 프레임을 설정할 때, 집권세력 내에 일본의 이런 보복을 예상한 의견이 있었을까. 한국 경제가 1960년대부터 일본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왔으며, 기판 절삭기 하나만 공급 안 돼도 휴대전화 생산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정밀기술 장비 의존이 심하다는 걸 아는 이들이 있었을까. 일본이 이중(二重) 용도 전용 우려를 이유로 통제할 수 있는 품목 리스트가 약 1200개에 달하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만 가지고 있는 원천기술이어서 대체 불가능한 게 상당수라는 걸 아는 이들이 있었을까. 비확산체제 수출통제 시스템은 물품만이 아니라 기술 물질 장비 등을 포괄하는 것임을 경계한 이들이 있었을까. 이 정권의 친일 프레임이 이번 사태를 불러온 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설정한 친일 프레임이 여권 내에서 한일 관계에 대한 진언을 움츠리게 만든 건 사실이다. 올봄 한 여권 인사는 “대통령이 싫어하니 일본 얘기는 하기 꺼려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물론 이번 사태의 주된 책임은 경제를 무기화해 자유무역시대 국제 분업의 암묵적 약속을 깬 아베 신조 총리에게 있다. 금수(禁輸)라는 확정적 보복 대신 칼자루 쥔 측의 재량권과 가변성이 큰 심사라는 방식을 택해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하고, 근거 없는 전략물질 유출 의혹까지 제기하는 아베 정권의 행태는 극악하고 저열하면서도 치밀했던 제국주의 시대 일본 정치권력의 속성을 데자뷔처럼 떠올리게 한다. 아베 정권의 치밀한 보복 근저에는 징용 판결 등에 대한 대응 차원을 넘어서서 ‘잃어버린 20년’ 동안 세계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밀린 데 대한 자괴감에서 어떻게든 한국에 타격을 줘 끌어내리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은 2013년 11월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배상금을 징수당하면 금융 제재로 응수해야 한다. 그러면 삼성도 하루 만에 괴멸할 것”이라는 일본 금융계의 주장을 전한 바 있다. 기사엔 “아베 신조 총리는 노골적으로 한국을 비하하고, 측근들은 ‘새로운 정한(征韓·한국 정벌)’을 제기하고 있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런 아베 정권에 맞선 문재인 정부의 당장의 대책은 기업들을 앞세우는 것이다. 사실 필자는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아낼 것이라 생각한다. 삼성 등 우리 글로벌 기업들의 생존력과 위기 대응력은 세계 최고다. 어떤 바터(물물교환)를 하든 당장의 위기를 넘길 방도를 찾을 것이고, 그 덕분에 정권 자체가 흔들릴 정도의 경제위기로 번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당장의 위기를 넘긴다 해도 절벽 끝에서 밑지며 한 흥정들은 장기적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갉아먹을 것이다. 이 정부가 또 하나 기대는 곳이 미국인데,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을 급파했지만 현재로선 미국이 징용문제에 대해 중재력을 발휘할 여지는 크지 않다. 사실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0년대 중후반엔 미국 워싱턴에는 일본보다 한국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북한이 테러단체와 불량국가로 핵물질 등 대량살상무기를 확산시키는 걸 막는 게 최우선 관심사였기 때문에 한국과의 공동대응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최우선 관심사는 중국 견제다. 일본은 이에 적극 협력하는 최고의 파트너지만 한국은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면 먼저 우리가 대안을 가져가야 한다. 무턱대고 미국이 나서달라고 하면 “우리도 말발에 한계가 있다”며 난감해할 것이다. 지난번 우리 정부가 일본에 비공식 제안한 타협안보다 더 진전된 안을 들고 가야 미국도 움직일 공간이 생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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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文정부의 이율배반 메시지

    문재인 대통령의 혁신성장 행보가 활발하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발전 모토가 창조경제였다면 문 대통령은 단연 혁신이다. 박수받아 마땅한 행보다. 한데 필자가 만난 경제인들의 반응은 차갑다.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운동장에 가서 뛰어놀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깨진 병 조각이 널려있고 불량배들이 어슬렁거린다면 누가 선뜻 운동장에 가겠습니까.” 지난주 문 대통령의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전략’ 선포식 며칠 후 만난 경제인들의 말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 정부의 혁신 드라이브가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실행전략이 너무 나이브(naive·무지)하며, 둘째 정권발 메시지들이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혁신이 자판기처럼 동전 넣으면 나오는 겁니까. 혁신이 가능하려면 안정된 경제생태계. 인적자원 공급,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지요.” “제조업 해외 직접 투자가 최고치를 기록했더군요. 기업인은 자기 돈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최우선입니다. 정부가 혁신을 독려해도 불안정·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으면 국내에 돈을 안 풉니다” “대통령이 기업을 응원하는 발언을 해 기대를 하면, 곧이어 기업을 옥죄는 메시지가 정부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실제로 현 집권세력만큼 방향성이 엇갈리는 시그널을 남발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업 지원, 규제 개혁을 강조한 직후 반(反)기업 시그널이 나오기 일쑤다. 청와대 경제라인 전격 교체는 반(反)시장적 경제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일 텐데 대타가 ‘대기업 저격수’다. 화해와 통합을 지향하나 싶었는데 법무장관-검찰총장 라인업에 적폐청산 돌격수들을 배치해 ‘내 뜻대로 가겠다’는 메시지를 발신한다. 선거 때는 서로 배치되는 공약들을 두루 내놓는다 해도 통치 단계에서는 한 방향을 택해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율배반적 목표를 제시한다면 신뢰를 얻을 수 없다. “현 집권세력은 기업이 고임금, 정규직화, 주 52시간, 환경·안전 규제 등등 겹겹의 밧줄에 묶여 있는 것과, 혁신으로 세계시장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로 여기는 것 같아요.” “기업 혁신을 통해 복지국가 재원을 마련한다는 구상 같은데, 좀 동화책 같은 발상이죠. 기업은 사회와 동떨어져 발전할 수 없습니다. 혁신의 성패는 고용시장의 유연성과 노사관계, 교육시스템, 세금, 조세정책 등 수많은 요소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습니다.” 사실 그런 모순적 사고방식은 좌파 진영에 만연해 있다. 혁신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인재인데 수월성 교육은 한사코 거부한다. 대학은 혁신을 이끌어갈 과학·공학 인재를 더 키우고 싶어도 정원규제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이는 경제와 사회를 잉크를 떨어뜨리면 색깔이 변하는 비커 속 단세포생물처럼 여기는 이념 과잉의 산물이다. 경제를 자신들이 기획한대로 바꿔나갈 수 있는 단순물로 착각하는 것이다. “실물경제는 핏줄과 지방 단백질 세포 피부 등등 수많은 요소가 결합된 고등생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정부 사람들은 그냥 로봇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두 발을 다 묶어 놓고도 팔만 따로 움직여 열매를 따올 수 있다고 생각하죠.” 인간 사회는 자극이 가해질 때 반응의 종류에 무한대의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복잡한 유기체다. 좌파건 우파건 극도의 관념주의자들은 인간세상을 평면 도화지 속의 도형, 조건 반사만 하는 단순물로 여겨 마음먹은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좌지우지했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이 대표적이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단행한 네오콘은 자신들의 계획대로 개전 43일만에 승전을 거뒀다고 환호했지만 그 후 길고 긴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들 줄은 아무도 몰랐다. 최고의 수재, 전략의 귀재라 불렸던 그들이지만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후 이라크 내 상황이 그렇게 복잡하게 전개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주도면밀하게 전쟁을 기획하고 도상연습을 했지만 이라크 점령 후 벌어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갈등 관계, 이라크 민중의 그 복잡다기한 반응을 예측한 전략가는 없었다. 극좌건 극우건 이념지향적 엘리트, 책상물림의 특징은 현실의 함수관계를 압도하는 관념, 이상론이다. 선명한 목표와 로드맵을 만들었지만 현실에선 예상 밖의 변수들에 걸려 허우적댄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주도한 문재인 정부의 전략가들도 경제현장에서 그런 혼란이 벌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네오콘들이 부시 행정부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결국 우리가 옳았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확신을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청와대는 여전히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며 정책 기조 전환을 거부하고 있다. “미중 통상전쟁과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기업들은 방향을 어떻게 틀어야 할지 고민이 큽니다.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이 큰 이런 때는 국내 환경이라도 최대한 안정성이 필요합니다.”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을 좌우하는 국제정세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부보다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그들만의 국내적 정의로 옥죄네요.”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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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6월 항쟁에 미적지근한 文정권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시위대, 뿌연 최루가스…. 홍콩 시위 장면을 TV로 보다 보니 32년 전 이맘때 6월 민주항쟁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사실 당시 한국의 시위는 홍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5공화국 내내 경찰의 시위 진압은 요즘 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이었다. 6월 항쟁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시위대는 비폭력을 지켰다. 요즘 진보진영은 촛불집회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비폭력 시위였다고 예찬한다. 하지만 경찰이 집회를 보장해주고 누구든 집회참가로 인한 불이익에 대한 조금의 걱정도 없이 참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비폭력으로 진행한 촛불집회와, 경찰이 집회 자체를 봉쇄하고 사람이 모이기만 하면 최루탄과 곤봉을 휘두르며 마구 연행해 가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기방어권마저 포기한 채 비폭력을 외친 6월 항쟁의 비폭력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6월 항쟁은 그렇게 위대한 명예혁명이었다. 4·19, 5·18로 이어져온 민주화 투쟁의 완성을 이룬 혁명이었다. 여러 젊은이의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수천,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하는 제3세계식의 유혈 사태 없이 군부정권의 영구집권 야욕을 꺾은, 세계사에 남을 비폭력 혁명이었다. 그런데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은 올해도 조용히 지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32주년 기념식도 행정안전부 장관을 보내 기념사를 대독하게 했다. 물론 올해는 북유럽 순방 때문에 불참했다고 이해하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기념사 내용이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뜬금없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좋은 말을 골라 사용하는 것도 민주주의의 미덕”이라고 했다. 자유한국당의 막말 논란을 겨냥한 것이다. 그런 정치성 발언을 기념사에 굳이 넣었어야 할까. 아무리 그 시점에 꼭 표명하고픈 정치 현안 의견이 있었다 해도 정말 중차대한 기념사라 여겼다면 끼워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촛불집회를 촛불시민혁명이라고 입만 열면 강조하는 이 정부와 여당에서 6월 항쟁을 혁명으로 부르자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사회 발전에 미친 영향과 역사적 의미, 그것이 이뤄지기까지의 희생과 노력으로 볼 때 6월 항쟁의 의미는 촛불집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집권세력은 지난해 영화 ‘1987’ 열풍 때를 제외하곤 6월 항쟁에 대해선 별다른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 6월 항쟁은 학생 중산층 야당 재야 종교계 문화계 등이 총결집해 이뤄낸 것이고, 촛불집회는 초기 조직화부터 진행까지 한국진보연대 등 좌파단체들이 중심이 됐다. 6월 항쟁은 보수 진보 구분이 무의미한 온국민의 민주화 투쟁이어서 좌파가 온전히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문재인 정권에 지분을 주장하는 핵심 그룹들은 그래서 6월 항쟁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세력이 6월정신에 부끄럽지 않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6월정신은 유신과 5·17쿠데타로 빼앗긴 대통령 선출권 회복, 고문 강제연행 노동3권 탄압을 일삼는 군부독재의 종식, 인권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실현이었다. 직격탄과 강제연행을 무릅쓰고 거리를 메운 학생들, 시위대를 향해 티슈 뭉치를 던져주고 물병을 갖다 준 직장인들, 경적을 울려대던 택시 기사들 모두가 염원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였다. 그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의제와 시스템에 의한 통치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대중을 상대로 한 직접민주주의, 선동정치의 담을 수시로 넘는다. 정당 해산 청원에 호응해 국민 심판을 당부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행태도 그 한 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정당을 없애달라는 요구는 아무리 세(勢) 과시용이라 해도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발상인데 청와대가 그에 편승해 정치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시스템을 다중의 선동적 에너지로 압박하려는 포퓰리즘적 행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과 가치의 상대성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역사 해석마저 자신들의 코드에 맞추려 하고, 코드와 배치되는 것들에 권력을 동원해 불이익을 주는 행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선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그렇게 외치면서도 막상 검찰 경찰 인사의 중립성 확보는 외면하는 것도 제왕적 권력의 분산이라는 민주주의 정신에 배치된다. 자유한국당 대표가 6월 항쟁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도 한심스러운 일이다. 6월 항쟁은 좌파만의 투쟁이 아니라 학생과 중산층이 주축이 된 자유민주주의 세력이 주역이었다. 나라의 진로를 놓고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는 이럴 때일수록 6월 항쟁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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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故 최종근 하사

    소말리아 해역 아덴만 파병근무를 마치고 귀환한 해군 장병이 입항 행사 도중 사고로 숨졌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왜 특히 더 안타까웠을까. 얼마나 덥고 험한 바다였을지, 그곳에서의 파병 근무는 얼마나 고됐을지, 제대를 한 달 남겨놓고 고국 항구에 들어올 때 미래에 대한 꿈에 얼마나 부풀었을지…. 그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아 며칠 뉴스를 보고 검색을 해봤지만, 막상 고 최종근 하사의 스물두살 삶에 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검색 뉴스들은 그의 죽음을 모독한 남혐 성향 인터넷 사이트 논란과 영결식 행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최 하사의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어떤 표현으로도 담을 수 없을 큰 아픔을 다시 건드리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29일 밤 통화에서 최 하사 부친은 근 한 시간 동안 조용한 어조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드님을 안장할 때 유골함에 가족사진을 함께 넣으셨더군요. “아들을 어둡고 무서운 곳으로 혼자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너 옆에 아빠 엄마 여동생이 항상 함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24일 아침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내 부두에서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이 다가와 정박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부두엔 환영 나온 가족 800여 명이 있었다. 이제 곧 선상 행사가 끝나면 아들이 배에서 내려오겠지… 설레며 기다리는데 폭발음이 들렸다. 앰뷸런스가 달려왔다. 부두의 가족들은 다들 불안감에 발을 굴렀다. 옆의 아내도 “불길하다”고 중얼거렸다. 앰뷸런스가 3 대째 도착하고 다친 수병들이 내려왔다. 그런데 들것에 실린 수병을 앰뷸런스에 태우던 군 관계자가 “최종근”이라고 아들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가족을 찾는 것이었다. 아내는 거의 실신했고, 최 씨만 앰뷸런스에 올랐다. 아들에게 눈을 떠보라 했지만 응급실 의사는 심장이 멎었다고 말했다. 정말 귀하게 키운 아들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캐나다에 유학 보내 기러기 생활도 했다. 말썽 한 번 피운 적 없던 아들은 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해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했다. 제대가 한 달 남았는데 귀국 당일부터 보름 휴가고,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면 파병 기간 못 쓴 휴가를 다시 받게 돼 있어 군 복무는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아라비아반도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40도를 넘는 고온, 계절풍을 타고 오는 높은 파도 속에 300명이 4300t 배 안에서 견뎌야 하는 6개월. 관 크기의 공간에서 잠을 자고, ‘아덴만 여명작전’으로 잘 알려졌듯 목숨을 건 해상작전이 언제 전개될지 모르는 날들이지만, 갑판병 아들은 위성통화에서 한 번도 힘들다거나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집에 가면 아빠하고 맥주에 교촌치킨 먹고 푹 자고 싶다는 말에서 고된 생활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 아들을 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에도 그는 단 한번도 누구의 멱살을 잡거나 욕을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통화 중간 중간 슬픔에 목이 메는 듯 말을 멈췄지만, 조용한 목소리를 이어가던 그는 딱 한 번 단호히 분노를 표출했다. 최 하사 사고를 모욕한 인터넷 집단에 대해서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안 받으려 하지만 강한 사람이 못 되는지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처 치유는 힘들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갖고 남의 죽음을 모독해선 안 된다는 걸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야 합니다.” 필자가 미국 주재원 시절 목도했던 숱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숨진 장병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아무리 한밤중이어도 대통령이 공항에 나가 거수경례로 맞이하던 장면들, 연방 예산과 인력·펀딩 배분 때 보훈처(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를 최우선으로 하는 게 당연한 문화, 비행기를 탈 때 흔히 듣는 “군인 먼저 탑승하세요”라는 안내방송…. 한국에서 성적 우수 학생들이 판검사가 되려고 기를 쓰던 시절이 있었듯 미국의 성적 최우수자들은 월스트리트로 진출해 투자은행 등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걸 꿈꾼다. 하지만 정말 지도층의 자제들은 군에서 일정 기간 국가에 봉사하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최고의 엘리트 지도자 코스로 여겨진다. 사회가 제복을 최고로 예우해주는 만큼 공복으로서의 사명감이 매우 강하며 윤리 의무를 어겼을 때 받는 페널티도 매우 엄하다. 군복이 무색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진보 평화운동가로 혼동하는 듯한 국방관료들, 법복이 부끄러운 일부 이념 판사들, 정치권에 외교 기밀을 알려주는 외교관 등으로 시끄러운 우리 현실과는 차이가 크다. 최 하사 부친과의 대화는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한국여성이 포함된 인질구출작전 중 숨진 프랑스 특공대원 2명의 영결식(14일 파리)으로 이어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영결식장에서 유족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슬픔을 함께 나눴다. 27일 최 하사 영결식에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은 없었다.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와주셨으면 힘이 됐을 거라는 생각은 어느 부모라도 하겠지요. 군인 소방 경찰 이런 분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이라도 남을 위해 희생해 유명을 달리했을 때 국가가 최고로 예우해 떠나보내 준다면 유가족의 마음도 조금은 더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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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대놓고 지지세력만 바라보는 文정권

    이 정부의 검찰, 경찰, 행정권력이 온 국민이 주시하는 사건을 공개적으로 다룰 때마저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드는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대통령이 경제현실을 대다수 전문가·언론의 진단과 정반대로 장밋빛으로 규정하는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좌우, 노사, 환경-개발 등등 대립 현안들에 대해 공권력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이 정권 만의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 이래 공권력이 이번 정권에서처럼 중인환시리에 당당하게 한쪽 편을 든 경우는 드물었다. 더구나 바로 앞 정권이 블랙리스트를 비롯해 편파적 권력 집행으로 궤멸되는 걸 지켜본 직후다. 그래서 이제 최소한 이것 하나 만은 사라지겠지라는 기대, 즉 공권력이 ‘정권의 시녀’처럼 편파적으로 운용되는 그런 고질적인 병폐는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한 상태에서 들어선 정권인데, 잠깐의 휴지기도 없이 곧바로 과거 관행이 되살아났다. 손석희 JTBC 사장에게 배임 혐의를 적용할지 법리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외부인사들로 구성된 수사이의심의위원회 멤버 10여 명 중 1명의 변호사만 불렀는데 하필 민변 출신이다. 형식은 밟되 어떻하든 정해진 결론으로 달려가려는 속내가 읽히는데,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점은 이 사건이 실제 중요도와 별개로 얼마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지 알면서도, 누가 봐도 비난받을 게 뻔한 선택을 한 경찰의 배짱이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 사건, 김경수 경남지사 사건, 만우절에 김정은 패러디 대자보를 붙인 ‘전대협’ 사건 등에서도 국민들이 설마하며 주시했는데도 경찰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정권이 손보려는 인사들에 대해선 별건수사까지 동원해 세계최고의 수사력을 발휘한 검찰은 정권에 불리한 수사에선 법리상 한계 등을 머쓱한 듯 드러낸다. 이 정권 들어 이렇게 대담하게 편들기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은 비판세력의 눈은 의식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결과다. 우리 편만 바라보고 달리겠다는 전략의 결과물인데, 근저에는 노무현 정권 때 이라크 파병, 한미 FTA 등으로 지지층이 등을 돌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렸을 수 있다. 오로지 지지세력만 바라보고 직진하는 선두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서 있는 것 같다. 그의 최근 발언들에선 마이웨이를 고수할 것이며, 반대세력은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진다. “우리 경제가 거시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청년 실업률이 아주 낮아졌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 “직장인들의 삶과 질은 분명히 개선됐다” 등등 대통령의 발언들은 지지자들에게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표현을 통해 지지자들이 주변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려는 것일 수 있다. 전문가들과 언론, 야당이 아무리 비판해도 지지자들에게만 확고한 논리를 심어주면 된다는 생각 같다. “적폐수사는 앞의 정부에서 한 것이고 우리 정부는 기획하거나 관여하지 않고 있다”는 대통령 발언도 그런 맥락으로 보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렵다. 최순실 등에 대한 수사가 이 정부 출범 이전 이뤄진 걸 논리적 근거로 삼은 듯한데, 지난 2년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나라 전체를 뒤흔든 적폐청산 수사를 전 정권이 한 것이라고 하는 건 지나친 논리비약이다. 만약 4대강 보 가운데 하나인 세종보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수립된 행정도시 기본계획에 따라 만들어졌으니 4대강 사업은 이명박 정부가 기획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터무니없게 여겨지겠는가. 그럼에도 문 대통령의 논리는 “2년 넘게 과거만 파헤치니 피로하다”는 비판론 앞에 위축된 지지세력에겐 새롭게 무장할 논리를 제공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올 봄 제기한 친일파 논쟁도 지지세력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확고히 심어주고, 반대파를 낙인찍는데 효과적인 재료다. 진보학계 거두인 최장집 교수도 지적했듯이 관제민족주의로 비판받을 소지가 있으며, 종북 논쟁 못잖게 낡은 수구적 프레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감수하고도 정치적 이득이 있다고 봤을 것이다. 좌파 진영으로선 지지세력에 집중하는 정치는 충분히 유혹을 느낄 만 하다. 숫자에서 다수인 계층 피라미드의 중하위층을 겨냥한 포퓰리즘 정치는 아무리 안팎에서 비판을 받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려도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여권 지도부가 진보 20년 집권을 외치는 것은 덕담이 아니다. 그들은 진보 장기집권이 대한민국을 위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고, 선거에 이기기 위해선 지지세력에 소구할 정책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을 분위기다. 대통령을 필두로 지지세력만을 바라보고, 비판론자의 시선에 개의하지 않는 직진 분위기가 확산되는데, 참으로 위험천만한 질주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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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왜 그토록 모질고 뻔뻔할까

    4월 25일 밤 국회 대치 상황 녹취.▽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이해찬 당대표, 심상정 의원님 이렇게 국회 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국회 운영하고, 불법적으로 사보임하고 이게 국회입니까.” ▽심상정 정의당 의원 : “얼굴 좀 보고 얘기합시다.”▽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 “너 한번 나한테 혼나볼래.” 제1야당 원내대표에게 반말로 혼나볼래라고 하는 이해찬 대표의 육성을 들으면서 1997년 5월 저녁이 기억났다. 당시 사회부 소속이던 필자는 사내 야근 중이었다. 옆에서 막내급 사건기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글로 옮길 수 없는 쌍욕이 마구 터져 나왔다. 순한 성품의 막내기자는 수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리면서도 과공이라 여겨질 만큼 공손한 말투와 존칭을 이어갔으나 끝내는 언성이 높아졌다. 얼굴이 벌개져서 전화를 끊은 막내기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로터리에서 국회의원이 탄 차가 불법유턴을 하다 이를 적발한 의경과 시비가 붙어 의경을 경찰서로 끌고 갔다는 제보를 받고 초벌 가(假)기사를 써놓고 해당 의원의 설명을 듣기 위해 통화를 한 것이라고 했다. 어렵게 연결된 전화에서 그 의원이 그렇게 욕설을 한 데 대해 막내기자도 어리둥절해했다. 그 의원이 바로 이해찬 대표다. 당시 의경 사건의 진상에 대해선 말이 조금씩 엇갈린다. 이 의원 차의 운전기사가 “의원 차”라고 하니까, 의경이 봐주거나 싼 걸로 끊어줄 수 있다는 식으로 건방을 떨었고, 이 의원이 원칙대로 끊으라고 했는데도 의경이 시간을 끌자, 차에 태워 경찰서장에게 넘겼다는 게 이 의원 측이 훗날 설명한 내용이다. 의경 사건 외에도 포털 검색란에 이 대표 이름과 뺨, 무릎 등의 검색어를 치면 여러 사건이 뜨는데 대체로 이 대표가 원칙을 꼬장꼬장하게 지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게 많다. 이 대표는 이번 국회 충돌 과정에서도 “도둑놈들한테 국회를 맡길 수 있겠냐” “반드시 청산할 사람 청산하고 정치를 마무리하겠다” 등등의 강한 말을 쏟아냈다. 그의 공언대로 대규모 소송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1일 기준 여야 의원 100여 명(중복 빼면 약 70명)이 고발당했다. 검찰발 대규모 의원 물갈이가 가능할 것이란 농담까지 나온다. 그런 강한 언행은 지지자들에겐 시원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강퍅하고 호전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가 이 대표에 국한되지 않고 점점 더 문재인 정권을 상징하는 특질처럼 느껴져 간다. 문 대통령의 선한 인상과는 달리 정권의 권력 행사가 참으로 모질기 때문이다. 항소심에서 뇌물혐의 무죄판결을 받은 박찬주 전 육군대장 사건의 경우 그렇게 탈탈 털어 형사처벌하려다 무죄판결이라는 망신을 당하지 말고, 공관병 문제만 엄정히 책임을 물었다 한들, 군대 내 갑질문화와 군 지휘관들의 구태 개혁에 어떤 지장이 있었을까.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전 국군기무사령관, 국정원 소속 변호사, 서울고검 검사 등이 자살하고, 조양호 전 회장에 11개 권력기관이 달려들었는데 이 정권의 어떤 속성이 그렇게 기네스북 기록감이 될 정도로 사람 잡는 데 모두들 매달리게 만들었을까. 심리학, 정치학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다. 공통된 대답은 집권세력이 선악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니까 이런 행태가 연출된다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부패·친일집단이 승승장구해온 굴절된 역사로 보다 보니, 개혁을 도덕전쟁·선악전쟁으로 여기게 되고, 그러니 죄가 아니라 사람 자체를 반드시 응징해야 하고, 그래서 어떤 죄목으로라도 감옥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설명이다. 정치적 선동전략 차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민들에게 나쁠 수도 좋을 수도 있는 존재로 비칠 경쟁세력을 확실하게 악으로 낙인찍어야 장기집권의 명분과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는 거다. 집권세력의 이런 마인드는 모진 권력 행사와 더불어 뻔뻔한 이중잣대로도 표출된다. 검찰 경찰에 이어 서울시장도 1일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국당의 광화문광장 천막 설치가 법 위반이면 실무부서에서 불허하고 한국당이 설치를 강행하면 철거하면 될 텐데, 서울시장이 직접 격정적인 입장문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천막 설치가 어떻게 실정법에 어긋나는지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세월호의 진실규명을 위한 국민들의 요구를 억압하고, 국정농단을 야기했던 정당”에 절대 촛불광장을 내줄 수 없다는 정치 격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뻔뻔함도 우리 편과 상대는 등가(等價)의 다른 진영이 아니라, 선과 악이므로 다른 잣대를 적용해도 무방하다는 자기합리화의 결과다. 진보든 보수든 시대와 더불어 진화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권은 유신·5공 마인드를 못 버리다 자멸했고, 현 집권세력은 5공 치하 시절의 선악관에 매몰돼 자신을 모질고 뻔뻔한 형상으로 일그러뜨리고 있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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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대법원·헌재 바꿔 대한민국 물갈이하려 하나

    2009년 5월 26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55세의 히스패닉계 여성 소니아 소토마요르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대동하고 백악관 회견장에 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토마요르를 차기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다며 이는 상원 법사위원 전원과 야당 지도자, 헌법학자들, 변호사단체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내린 결론이라고 밝혔다. 소토마요르는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초등학교 3년 중퇴 학력이 전부인 염색공 아버지를 9세에 여의고 마약과 갱 범죄가 득실대는 빈민가에서 소매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학해 프린스턴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공화당 대통령이 판사로 발탁하고 민주당 대통령이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할 만큼 신망 받는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오바마가 강조한 그녀의 장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소토마요르는 판사가 법을 해석하는 것이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법권의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정치적 이념보다는 공정함을 추구하는 자질을 갖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고른 후보였지만 의회 청문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소토마요르가 상원 법사위에 제출한 서면답변서는 첨부자료를 빼고도 173쪽에 달했고, 89명의 상원의원을 직접 방문했다. 재산, 사생활, 과거 판결 등은 이미 지명전 FBI, 법무부 등이 검증하고 심층면접을 실시해 다 걸렀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과거 로스쿨 학생들에게 “항소법원은 정책이 만들어지는 곳”이라고 한 발언이 큰 걸림돌이 됐다. 사법적극주의 입장을 내비친 것 아니냐는 매서운 추궁이 이어졌다. 8월 6일 상원의원 100명 중 뇌종양 투병 중인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참여한 가운데 인준투표가 실시됐다. 의원 1명씩 일어나 “찬성” “반대”를 외치는 형식이었다. 결과는 찬성 68, 반대 31표. 미국 역사상 세 번째 여성 대법관, 최초의 히스패닉계 대법관의 탄생은 이렇게 길고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쳐 이뤄졌다. 지명에서 상원 투표가 이뤄진 근 두달 반동안 미 언론의 관심도 온통 소토마요르에 집중됐다. 미국 사회가 대법관이라는 자리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준 과정이었다. 그렇다. 대법관은 한 명 한 명이 국가의 핵심 인스티튜션이며, 나라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막중한 자리다. 법적 다툼은 물론이고 인간 세상의 온갖 이견 갈등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려 강제하는 대법관은 최고의 경륜과 지혜, 균형감각을 지닌 법률가들이 맡아야하며, 그래서 더더욱 신중하게 인선하고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그 막중한 자리가 순식간에 무더기로 물갈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이미 대법관 14명 중 9명이 바뀌었고, 문 대통령 임기 내에 추가로 4명의 임기가 끝난다. 문 대통령이 무려 13명을 임명하는 것이다. 헌법재판관은 오늘 문형배 이미선 후보 임명이 강행되면 9명 중 8명이 바뀐다. 한 정권에서 최고법원 재판관이 이처럼 무더기로 바뀌는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원래는 전임 정권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새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 정도 겹치며 엇갈리므로 5년 임기의 한 정권이 임기 6년인 대법관과 헌재재판관 다수를 교체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일찍 물러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지명하므로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대법원장의 뜻이 맞으면 사실상 모든 신규 임명을 대통령이 원하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다. 헌법재판관도 문, 이 후보가 임명되면 9명 중 6명이 진보 인사로 구성돼 위헌 결정 정족수를 채우게 된다. 미국의 경우 대법관이 종신직이어서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에 한 명 이상의 대법관을 임명하기도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민주 공화 양측이 지명한 대법관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게 된다. 사회의 구심점인 최고법원은 치우치지 않는 인사들로 구성돼야 한다. 사회의 이념적 분포를 극좌 1에서 극우 10으로 놓았을 때 4~6 사이에 분포하는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우리법, 국제인권법, 민변 등 출신을 대거 임명해왔다. 문 대통령이 이런 인선을 하는 것은 최고법원의 중요성을 간과해서일 수도 있고, 한국을 바꾸는데 대법관과 헌재재판관이 얼마나 막강한 동력이 될지 알기에 코드가 맞는 인물 위주로 고르는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 혁명을 했다고 착각하는 촛불시위 조직 세력들은 정치 경제 역사 등 모든 것을 물갈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대한민국 물갈이는 그들이 원하는 것처럼 호락호락 이뤄지지 않는다. 경제가 말을 듣지 않고 중산층은 등을 돌린다. 그래도 촛불주도세력들은 대법원과 헌재를 장악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미몽이 될 것이다. 헌재와 대법원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구심점으로서의 권위는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아무리 평소 이념적 지향성이 강했다 해도 최고법원 판사에까지 오른 법관들이 헌법과 법률보다 이념을 섣불리 앞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정말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슈 앞에서 주관적 정의감과 이념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고,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들은 최고법원 판사를 특정 정권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법원 코드화를 밀어붙이면 당장은 유용한 사회변혁 지원군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이룬 변화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최고법원의 권위와 신뢰를 무너뜨린 대통령으로 오점만 남기게 될 것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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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홍 칼럼]대통령이 빠진 善惡 이분법의 함정

    요즘 많은 국민이 말없이 주시하는 곳이 서울동부지검이다. 이곳에선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남부지검의 손혜원 부친 상훈 수사를 제외하곤 산(生)권력을 향한 유일한 수사다. 적폐청산 수사 때는 타깃으로 찍으면 어떻하든 구속시키고 마는 ‘놀라운 수사력’을 보여준 검찰이 산권력에 대해서도 그런 수사력을 발휘할지, 검찰의 독립과 명예가 걸린 수사다. 동부지검은 어제 국립공원공단 권모 이사장을 불러 조사했다. 요즘 언론에 나오는 수사 속보는 귀를 의심케 한다. 2017년 9월 공단 이사장 공모 때 환경부가 권 씨의 서류심사 지원서 내용을 첨삭까지 해준 정황이 드러났다고 한다. 단지 밀어주는 차원을 넘어 반드시 이사장이 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한 정황이다. 도대체 정권과 얼마나 각별한 인연이길래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런 궁금증에서 취재를 해봤다. 사실 그의 임명을 놓고 돼지국밥집 주인이 등산을 좋아해 공단 이사장이 됐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다는 걸 안다. 사실일까. 확인해본 결과 그가 부산에서 20여 년 전부터 돼지국밥 식당을 운영했던 것은 맞다. 지금은 식당 운영은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식당 사장으로만 규정하는 건 무리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온 뒤 조선소에 다니다가 산이 좋아 직장을 그만두고 히말라야 등 숱한 국내외 산을 오르내렸으며, 부산 어린이대공원에서 첫 노인무료급식 사업을 시작하고 라오스 등에서도 많은 봉사활동을 했다. 문 대통령이 히말라야에 갈 때 동행한 게 인연이라고 한다. 어떤 생업을 갖고 있었느냐가 자격을 판단하는 요소가 되어선 안 된다. 직원 2200명이 넘는 거대한 조직을 이끌 경륜과 리더십을 갖췄는지를 평가해야한다. 어쨌든 문 대통령이 반드시 보은을 해야 할 그런 각별한 인연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환경부는 왜 그렇게 무리를 한 걸까. 한 인사는 여권 핵심 그룹의 특징을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정당한 일’이라고 신념화해 관철하는 게 행동패턴화됐다”고 설명한다. 자신들은 도적적인 목적을 위해 움직이고 반대 세력은 부도덕한 동기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세상을 선악 이분법으로 보면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지금 밀고 나가는 방향에 무리수가 있어 보여도 대안은 없다. 공단 이사장 자리는 어차피 과거에도 정치인이나 퇴직 관료들 차지였으니 그보다는 (위에서 낙점한) 산애호가가 적임자라고 정당화하는 논리를 체화하고 관철시켰을 것이다. 인사 참사 책임론에 청와대가 “뭘 잘못했느냐”고 반박한 것도, 자기 정당화의 논리에 함몰된 탓이다. 그 논리가 성냥개비를 얼기설기 쌓아올린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인사 파동 내내 침묵하던 문 대통령은 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미동맹간 공조의 틈을 벌리고, 한반도 평화 물길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북미의 대화 노력 자체를 못 마땅히 여기고, 갈등과 대결의 과거로 되돌아가려 하는” 세력을 겨냥해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긴박했던 위기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라고 질타했다. 침묵하던 대통령의 첫 공개발언으로는 느닷없다는 느낌은 차치하고 사실관계도 수긍하기 어렵다. 한미공조 엇박자의 주된 책임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집착에 있다. 긴박했던 위기 상황을 반전시킨 제1의 공(功)은 대화 자체가 아니라 김정은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낸 공고하고 집요한 2017년의 국제제재에 있다. 이분법적 편 가르기는 정치투쟁 단계에선 거의 본능적 생존수단이며 선전선동에 매우 유용한 방법론이지만 정책과 통치의 단계에서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함정이 된다. 칼로 무 베듯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현실은 많지 않다. 밤과 낮 사이에도 여명과 황혼처럼 시나브로 변하는 회색지대가 있고, 동지와 적 사이에도 무수한 회색지대의 아이콘이 널려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정책 방향과 속도에도 여러 선택지가 있고 다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경제·사회 정책, 역사 이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옳다고 믿는 것만이 선이고 나머지는 악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면 선택지는 좁아진다. 촛불 vs 적폐, 다함께 잘사는 사회 vs 기득권층의 특권사회, 통일·평화 vs 전쟁…이렇게 나누어야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상대를 도덕적으로 먹칠해 고립시키고 회색지대를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교집합은 갈수록 작아진다. 배제되는 원(圓)이 많아질수록 지도자의 입지는 전체의 리더가 아니라 협소한 자기 진영의 우두머리로 축소될 것이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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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기홍]거꾸로 가는 대통령의 시계

    2017년 3월 24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강조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요즘,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은 커녕 낡은 시대의 장면들이 자꾸 재방송처럼 연출된다. 김학의 사건 등에 대해 대통령이 한마디 하자 즉시 나라의 공권력이 총동원되는 분위기다. 법무부 장관은 복창하듯 철저 이행을 다짐한다. 공영방송 ‘땡전 뉴스’ 첫머리에 등장한 대통령이 근엄한 표정으로 “사회부조리 척결”을 말하면 온 나라 행정력이 총동원됐던 시대의 데자뷔다. 동아일보는 2013년 당시 김학의 법무차관이 연루된 별장성접대 사건 보도를 주도하며 숱한 의혹을 파헤쳤다. 하지만 언론의 부실 수사 비판에 귀를 닫은 채 “동영상 속의 인물을 식별하기 어렵다”며 흐지부지해버렸던 검찰 경찰이 이제야 태도가 바뀐 듯하다.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 사건은 당연히 진실을 낱낱이 밝혀내야 할 사안이다. 검찰도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해도 그대로 덮을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고 대통령의 육성 동영상까지 배포됐다. 특권층 등 흥행 요소를 지닌 사건들의 클라이맥스에 대통령을 정의의 사도처럼 등장시키고픈 욕구는 이해되지만, 그 결과 검경은 이번에도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 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시스템이 아니라 청와대가 온갖 국사를 주무르는 ‘대통령 1인 왕정’은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면 사라졌어야 할 관행들도 그대로다. 대표적인 게 온갖 자리와 이권을 나눠 갖고, 그게 순조롭지 않으면 행정력을 동원해 유무형의 압력을 넣는 행태다. “원래 선거 논공행상이라는 게 그런거다”고들 하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관행을 바꾸는 게 새로운 대한민국 아닌가. 대통령이 불쑥 꺼낸 친일파, 빨갱이 논쟁도 시계를 돌려버렸다. 총선과 재집권 전략의 일환이겠지만 그 결과 한국사회는 또다시 친일파 대(對) 민족자주세력의 대결 프레임으로 접어들게 됐다. 한국사회를 친일파와 독재권력, 친미 매판자본 연합세력 대(對)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한 민족·민중세력의 대립구도로 이등분해 바라봤던 군부독재 시절의 데자뷔다. 문재인 정권은 한국사회 문제의 근본 이유를 친일파에서 찾는다. 그런데 친일파건 친미파건 친중파건 그런 건 그 나라의 힘에 빌붙어 이권과 특혜를 얻는 세력일 텐데, 지금 일본 등의 나라가 우리사회에서 그런 힘을 가진 존재인가. 지금 우리 사회에 특권을 누리는 친일파가 얼마나 남아 있길래 그렇게 강조하는 걸까. 반민특위에 대한 제1야당 원내대표의 망언은 특별히 일본을 옹호하고 싶어서라기 보다 역사와 사회과학 공부를 게을리한 무식의 소치 아니었을까. 문 대통령은 2012년 6월 대선 출마출정식과 지난해, 올해 3·1절 만세삼창을 독립문에서 했다. 독립문은 일본이 아닌 중국 사대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1897년 세워진 것인데, 좁은 우물을 벗어나 변화하는 세계를 보자는 그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문재인 정부에 필요한 것은 시야를 민족이라는 울타리와 과거에 두지 말고 세계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안정적인 민주주의, 자유무역 확산을 누렸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엔 패권 무역이 판을 치고 있다. 다자간 규범은 약화되고 개별 강대국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로의 초입에 들어섰다. 전후 한국의 지속적·안정적 성장과 안보를 담보했던 국제환경에 근본적 변화가 일고 있다. 진정한 친구를 확보하지 못하면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대다. 이런 시기에 한미동맹은 흔들리고, 중국엔 무시당하고,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여권 핵심 누구도 이를 걱정하지 않고 정치적 득실로만 따진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사회 좌우의 소수 극단을 제외하면 누구도 반대편 이념을 가진 이를 빨갱이 등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친일파의 빨갱이 낙인찍기를 걱정할 시대는 수십 년 전에 지났는데 대통령의 시계만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란 약속을 들은 지 2년이 지났지만, 떡고물을 나눠 먹는 진영만 바뀌었을 뿐, 낡은 시스템, 낡은 프레임은 그대로, 아니 더 복고로 치닫는 것 같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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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기홍]북핵, 文정부부터 색안경 벗어라

    “여전히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개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발목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가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우리에게 다가온 기회를 붙잡는 데 전력을 다하자.” (문재인 대통령, 2월 25일 수석·보좌관 회의) 색안경, 빨갱이 등등 수십 년전 횡행했던 단어들이 요즘 대통령 입에서 자주 나온다. 대통령의 시계가 아직 군부독재 시절에 유예돼 있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와 별개로, 민족의 명운이 걸린 북핵 문제에 발목을 잡거나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된다는 호소에는 백번 공감한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북핵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집단의 대표 주자가 바로 청와대라는 생각이 든다. 하노이 담판 결렬 원인은 복잡한 설명을 다 생략하면 단 한가지다. 진정한 비핵화를 할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김정은이 답을 회피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번에 스몰딜을 할 의향이 있었다. 다만 트럼프는 이번엔 맹지들만 거래하지만 장차 신뢰가 쌓이면 땅주인이 결국은 노른자위 알짜 땅을 포함해 모든 땅을 내놓을 의향이 정말 있는지 확약을 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즉 기 보유 핵탄두·물질까지 폐기하는 정말 비핵화를 할 의향이 있는지를 물어본 게 첫날 만찬 때 김정은에게 건넨 빅딜 서류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를 거부했다. 이행 시한표와 일정까지 규정하며 한번에 다 내놓으라는 로드맵이었다면 설령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이해된다. 하지만 미국이 요구한 건 당장 모든 걸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미래에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가야할 게 김정은은 지금까지 한 번도 기 보유 핵탄두·물질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더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핵무기 4불(不)’은 강조하지만 이미 갖고 있는 걸 폐기하겠다는 언급은 일절 없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항상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동북아에서 미국의 핵우산, 핵 전략자산 전개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어서 훗날 북-미간에 핵군축 협상을 통해 논의해야 할, 얼마나 세월이 걸릴지 모를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하노이 담판 결렬 후 한국 정부의 대응은 현실을 무시하는 듯하다. 문 대통령의 열망대로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재개 및 제재 완화로 영변 폐기를 얻어낸다고 해도 그 다음 단계, 즉 핵탄두의 폐기는 어떻게 강제할 수 있을지, 대통령의 전략이 궁금하다. 현재 객관적 현실은 김정은이 핵무기 포기 약속을 거부한 것이고, 그런 그를 견인할 유일한 수단은 제재다. 트럼프는 그동안 싱가포르 회담이 형편없었다는 비판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잘해서 더 이상 핵·미사일 실험이 없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덕분인건 맞는데 그건 싱가포르 회담을 잘해서가 아니라 2017년에 이뤄놓은 촘촘한 국제 제재덕분이었다. 그 제재가 김정은을 여기까지 끌고 온 유일한 휘발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대통령의 중재도 중요했지만 윤활유 역할이었다. 그런데 목적지가 한참 남은 상태에서 휘발유를 윤활유 용도로 다 써버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가겠다는 것인가. 만약 핵탄두·물질은 먼 훗날 미완의 과제로 접어두고 핵동결-제재 해제, 평화협정 등으로 평화와 남북경협을 정착시키는 게 문재인 정부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솔직히 그렇게 얘기하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청와대가 객관적 상황을 외면한 채 남북 관계로만 내달리는 데 대한 우려와 비판은 색안경을 썼기 때문도, ‘과거를 잊지 못해’(4일 국가안보회의 총리 발언) 불안한 마음에서 발목을 잡으려 해서도 아니다. 비핵화 노력이 한 발씩 완성을 향해 가는 벽돌 쌓기, 되돌릴 수 없는 진전이 되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철근 콘크리트 기초공사, 즉 김정은으로 하여금 핵탄두·물질까지 포함한 완전한 비핵화를 결심케 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사상누각이다. 비핵화가 목표라면서도 실제론 다른 걸 더 우선시하는 듯한 대통령의 행보가 안타깝다. 색안경을 벗어야 할 사람은 바로 문 대통령이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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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기홍]돼지들은 언제까지 견뎌야 하나

    서울 경동시장에 남아있던 개 도축업소가 모두 문을 닫았다고 동대문구가 18일 밝혔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내 개 도축업소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공표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 변두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개천 너머를 봤다. 천변에 슬래브 가건물과 천막이 있고 옆의 철망엔 개 10여 마리가 갇혀 있었다. 한 중년부인이 먹을 사람이 많지 않으니 작은 걸로 맞춰 달라 하니 주인아저씨는 철망에서 갈색 소형 견을 꺼내왔다. 아저씨는 개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흥정을 했고 개는 납작 엎드린 채 바들바들 떨면서도 쓰다듬는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잠시 후 중년부인이 돈을 건넸고, 아저씨는 개를 안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개농장이나 도살장의 잔혹한 풍경과는 많이 다르지만, 어린 마음에 그 장면은 아주 깊은 슬픔으로 새겨졌다. 며칠 후 동네 아주머니들의 대화에서 그 개 도살장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손님으로 그곳을 찾았다가 주인 부부의 살림집인 슬래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사람 사는 곳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가난했다고 한다. 빈틈으로 바람이 쌩쌩 들어오고 넝마 같은 포대엔 아기가 울고 있었단다. 개를 죽여파는 아저씨에 대한 미움과 가난한 그들의 삶에 대한 안쓰러움, 죽음을 앞둔 생명에게 미안한 듯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던 모습 등이 뒤섞이면서 오랫동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서울 경동시장의 사례는 국내외에서 숱한 논란을 불러온 한국의 개 도살 문화가 아주 조금씩 해결 실마리를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여전히 3000 곳 가까운 개농장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개는 축산물위생관리법 대상이 아니어서 어쩔 방법이 없다”며 방관하던 당국이 적극 나서는 것은 변화한 태도다. 이런 변화 과정에서 영세한 개농장 주인 등에게 생계 대책을 알선해주는 등의 지원도 적극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이걸로 해결은 아니다. 반려견 인구가 급증하면서 개 도살은 변화가 시작됐지만 돼지 닭 등의 경우,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하기 힘들만큼 끔찍한 공장형 축산이 이뤄지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구제역 등 전염병이 돌면 일단 대규모로 죽여서 예방하는 살처분 집착 행정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매년 평균 100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이 살처분된다. 2010년 겨울 소 돼지 347만 마리, 닭 오리 647만 마리를 생매장 등으로 살처분해 세계를 경악시켰던 이래 생매장은 자제하고 있지만, 현재 쓰이는 이산화탄소 가스 주입 방법 역시 동물을 극심한 고통 속에 죽게 한다. 이산화탄소 대신 질소가스를 사용하면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우리는 거의 사용을 안한다. 질소가스 거품을 사용해 무산소증으로 기절시킨 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안락사 시키는 방법인데, 국제수역사무국(OIE)도 이를 권고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2016년 축산진흥원이 질소가스 거품을 만드는 장비를 개발했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비용이 더 들고 살처분 시간이 길어진다며 소극적이다. 농식품부에 따르면 한해 1050만 마리를 살처분 한다고 가정할 때 질소가스 방법은 연간 30억 원이 더 든다고 한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1천만 마리 동물의 고통, 그리고 이를 지켜봐야 하는 방역담당자들과 국민이 받는 정신적 상처를 감안하면 감당할 만한게 아닐까. 공장형 축산은 차라리 외면하고픈 진실이다. 실태를 글로 옮길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설 연휴에 읽었다는 ‘사랑할까, 먹을까’의 저자도 지적했듯 한국에서 사육되는 돼지가 1000만 마리가 넘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대부분이 공장 같은 건물 내에서 사육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채식 실천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공장형 사육을 농장형 사육으로 바꾸어야 하는건 분명해 보인다”고 했다.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로 챙기지 않으면 해당 부처는 미적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매년 예방 명목으로 살처분되는 1000만 마리의 가축은 물건 1000만 개가 아니다. 비록 언젠가는 도축될 운명이었을지언정, 좀 더 숨 쉴 자격이 있었던 생명이었다. 짧은 평생 내내 몸을 돌리지도 못할 만큼 좁은 스툴(감금틀)에 갇힌채 비육되다 도살되는 동물들도 햇볕과 바람, 장난을 좋아하는 생명들이었다. 사람에게 고기를 내주기 위해 키워지지만, 살아있는 동안만은 쾌적하게 생활하고, 최소한의 고통 속에 마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최소한의 예의다. 육식을 즐기는 대다수 사람들의 정신건강은 물론 육체건강을 위해서도 더 이상 미뤄선 안 되는 과제다.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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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기홍]주한미군 흔드는 한미동맹 혐오자들

    진통을 겪고 있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세 가지 점에서 다른 때보다 특히 더 어렵고, 세 가지 점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 어려운 이유 첫째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 협상을 일본 나토 등과의 협상에 기준으로 적용할 ‘표준 운영 절차(SOP·Standard Operation Procedure)’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한국에 밀리면 다른 나라에서 돈을 받아내기가 더 어려워진다고 보고 있다. 둘째, 분담금을 더 받아내려는 건 과거의 미국 대통령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들은 한미동맹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일본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주일 기지와 오키나와 등에 막강한 공군력 해군력이 버티고 있는데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한국에 대규모 지상군을 주둔시켜야하는 이유를 잘 납득하지 못한다. 그의 찌푸린 얼굴 앞에서 반론을 펴며 한미동맹의 가치를 설득할 ‘어른의 축(軸)’도 다 물러났다. 세 번째 이유는 한국의 집권세력이 반미·민족자주를 내세우는 좌파진영을 핵심 지지층으로 하고 있어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번 협상이 특별히 더 중요한 첫째 이유는, 만약 결렬 상태가 계속되면 주한미군이 북-미 간 흥정 카드로 전락할 수 있는 시기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주한미군 철수를 김정은에게 선물로 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병력감축, 전략자산 전개 중단 등을 협상용으로 내놓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둘째, 김정은의 평화 공세·남북화해 무드와 한미 갈등이 결합하면서 한국 내에서 주한미군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밑바닥부터 금이 가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셋째, 미국 내에서도 회의감이 확산되고 트럼프의 후임 정권들도 주한미군 감축을 큰 방향으로 밀고 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번 분담금 협상을 둘러싼 환경 가운데 다행스러운 점도 두 가지 있다. 첫째, 미국의 세계 전략상 주한미군 병력을 빼내야 할 필요성이 크지 않은 국제 정세다. 2000년대 중반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철군·감축을 집요하게 추진했다. 한국, 독일에서 지상군을 빼낸 뒤 아프리카 중동 등 테러세력이 준동하는 지역들에 ‘수련의 잎(Lily Pad)’ 같은 거점을 두고 병력을 필요에 따라 신속히 배치하는 세계 재배치 전략(GPR·Global Posture Review)이었다. 다행스러운 두 번째 환경은 한국의 좌파가 아이로니컬하게도 트럼프에 대해 덜 적대적이어서 반미 시위가 상대적으로 덜 거센 시점이라는 점이다. 2017년 트럼프 방한 때 물병을 던지며 강렬히 규탄했던 좌파진영은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화에 나서자 태도가 바뀌었다. 정상적인 진보적 세계관을 가졌다면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보다 패권주의적이고, 자국 이기주의적이며, 소수자 인권을 경시하는 트럼프야말로 규탄 1순위여야 마땅한데, 의외로 잠잠하다. 이상과 가치가 아니라 다른 데 더 우선순위를 둔 이념집단임을 드러내는 사례다. 트럼프는 이번 협상이 결렬되면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할 것이다. 주한미군 2만8500명 가운데 전투부대는 2사단 예하 5000명 규모 전투여단뿐인데 이 여단은 6~9개월 단위로 순환 배치된다. 올여름 본국에 귀환한 뒤 후속 부대를 안 보내면 자연스레 감축되고 주한미군은 지원부대만 남게 된다. 현재 미국은 마지노선으로 10억 달러, 한국은 1조 원 미만을 내걸고 있다. 이젠 양국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미국의 마지노선이 정 깨기 어렵다면 돈에선 좀 양보하되 그 대신 돈 이상의 것을 얻어내는 전략도 써볼 만하다. 예를 들어 한국이 도입을 원했지만 미국이 기술 유출을 이유로 거부해온 최첨단 감시·정찰 무기의 도입 약속을 받아내는 식이다. 주한미군 분담금은 인건비(40%)·군사건설비(40%)·군수지원비(20%) 등으로 구성돼 있어 90%는 다시 한국경제로 흡수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결국 가장 큰 걸림돌은 동맹을 경시하는 트럼프의 아집, 그리고 좌파그룹을 의식하는 한국 집권세력의 낡은 인식이다. 비록 1980년대 중반 국군을 ‘양키 용병’이라 규정했던 민족해방계열(NL) 출신이 포진해 있는 문재인 정권이지만 이젠 한미동맹을 지키기 위해 지지 세력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야 한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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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기홍]“반드시 가야 한다”는 그 길은 어디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2일 신년사, 8일 청와대 개편 등을 통해 경제정책 등 국정 방향 전환은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우리 경제를 바꾸는 이 길은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라는 발언은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목표로 하는 경제모델이 어떤 것인지는 설명이 없다. 문 대통령은 ‘함께 잘 사는 길’ ‘경제성장의 혜택을 온 국민이 함께 누리는 경제’ 등이라 했지만 이는 보수정권들도 수없이 했던 말이다. 최저임금 급속 인상, 복지·분배 재정 확대, 보유세 등 증세, 재벌 개혁, 친 노조·시민단체 정책 등 뚜렷한 이념적 색채를 드러내는 정책 방향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남미화, 남유럽화로 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방향을 밟게 될 것이라는 우려와 그걸 목표로 하고 있다는 진단은 엄연히 다르다. 비록 여권 내에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노조 등 핵심지지 기반의 이익과 충돌할 혁신이나 규제개혁은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렇다해서 지향하는 목표 자체가 포퓰리즘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만나본 여권 인사들은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복지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사실 진보 성향 정치인들 가운데 자기 나라를 북유럽처럼 고소득과 복지를 함께 누리는 나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모델로 가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건에 있느냐다.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와 유럽 경제 전문가, 외교관의 의견을 종합해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웨덴이 복지국가를 실현했을 때와 지금 한국의 여건은 너무 다르다는 의견이 많다. 스웨덴은 이미 19세기부터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제지 제철 등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항공기 자동차 등에서 세계 수준의 공업화를 이뤘다. 그런 최고 수준의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복지국가가 가능했다. 스웨덴이 복지에 재정을 투입했던 수십 년 전만해도 기업의 기술력이 세계 일류 수준에 올라서면 안정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초일류 기업이라도 순식간에 망할 수 있는 글로벌 경쟁시대다. 스웨덴의 노사정 합의 시스템은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2017년에 인구 1000만 명을 넘어선 스웨덴과 한국은 경제규모가 다르다. 엄격하고 성실한 근로윤리, 사회적 타협의 전통과 문화, 엄정한 교육·평가 시스템, 정치권의 도덕성 등에서도 차이는 있다. 그랬던 스웨덴도 과도한 복지 재원과 근로의욕 저하로 1990년대 들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극심한 진통을 겪기도 했다. 복지국가의 주된 재원은 기업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선 기업들이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윤을 내야한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기업을 지원한다. 각종 조세감면 정책, 대주주 소유 주식 차등 의결권 제도 등 대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도 많다. 그런데 정작 스웨덴의 복지를 부러워하는 한국 좌파의 대기업에 대한 태도는 정반대다. 대기업의 혁신과 투자를 지원하기는 커녕 자꾸 밖으로 쫓아내려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스웨덴 모델은 언젠가 우리 경제가 안정적인 선진국 대열에 올랐을 때 지향할 수는 있어도, 현 수준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모델이라는 의견이 많다. 막다른 골목일 거라는 느낌이 들면 속도를 줄이고 돌아 나오는 게 상식인데 경제를 이념, 선악의 틀로 보는 이들은 골목 끝까지 질주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비도덕적 동기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한 반대집단의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막다른 길임을 시사하는 표지판이 나타나도 ‘가짜뉴스’ ‘거짓 프레임’으로 치부해버린다. 경제를 정치적 잣대로 보는 시각은 “촛불은 더 많이 함께할 때까지 인내하고 성숙한 문화로 세상을 바꿨다. 같은 방법으로 경제를 바꿔나가야 한다.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때까지 인내할 것”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엿보인다. 시위는 참여자 수가 성공과 명분 당위성을 좌우하는 중요 요소지만 경제정책도 지지 여론이 성패를 가름할 수 있다는 발상은 놀랍다. 남미를 빈곤의 악순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경제정책들도 대부분 압도적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정치는 표의 많고 적음으로 결론나지만, 경제는 철저히 결과물이 방향의 옳고 그름을 말해준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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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기홍]대통령의 진화를 막는 코드경쟁

    문재인 대통령이 요즘 ‘변화 논쟁’ 한가운데에 섰다. 대통령이 최저임금 등 경제정책의 속도조절을 얘기하자 찬반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막상 그 후 최저임금법 시행령을 강행하는 등 속도·방향조절은 커녕 오히려 가속페달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해석은 세 가지다. 첫째, 문 대통령은 변할 의지가 없다는 해석이다. 둘째, 고용노동부 등이 코드를 맞추려 질주하는 바람에 덩달아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세번째는 대통령이 원한 속도조절은 최저임금 인상률을 다소 낮추는 정도였고 시행령 개정은 그것과 무관한 기술적 문제여서 관여하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필자는 세 해석 모두를 합친 게 정답이라고 본다. 문 대통령은 이념적 지향성이 강하다. 변화하려면 사고의 프레임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노동부는 예전의 그 곳이 아니다. 보도자료 등에 표기하는 약칭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바꿨다. 지난해 김영주 장관 때는 MBC 사장 경질에 공헌하며 검찰과 충성 경쟁을 벌였다. 전 정권의 주요 노동정책에 관여했던 간부들은 사직하거나 한직으로 물러났다. 장관의 의원실 비서관이 장관 정책보좌관 자리를 꿰차고 정책 전반을 주물렀다. 그 보좌관은 장관 경질로 그만뒀지만 지금도 민노총 출신이 보좌관으로 있다. 이재갑 현 장관은 정통 관료 출신이어서 균형을 잡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오히려 친노조 성향 구현에 더 앞장선다. 노동부의 어젠다는 원래 노사 양측의 요구를 주고받는 패키지 방식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1997년 추진된 노동법 대개정은 복수노조 허용과 정리해고제 도입 등을 맞바꾸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노동부는 노동계 요구사항들만 추진한다. 이번 최저임금법 시행령이 다룬 ‘최저임금 산정시간’ 문제는 주휴수당제 존폐, 임금체계 개편과 맞물려서 논의해야 할 사안인데, 노동계가 꺼리는 주휴수당제 존폐 논의는 일언반구 않는다. 노동시장 개혁 등도 장기과제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미뤄버렸다. 이달 11일 문 대통령이 노동부 사무실을 방문해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너무 빠르냐?”고 묻자 한 간부는 “온도차가 다를 수 있는데 일단 소상공인들은 어려움을 호소한다”며 “기업들이 감당할 수 있음에도 ‘조금 더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목소리를 낸다는 시각이 일부 있다”고 답했다.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진 지 몇 달째인데, 왕은 “가뭄이 심하냐”고 묻고 신하는 “갈수기엔 늘 이런데 엄살 피운다”고 답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역시 직업공무원(군인)이 장관인 국방부도 최근 정권 핵심 관심사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지난주 국방부 업무보고는 국방부가 ‘9·19 남북 군사합의 이행과 대통령 임기내 전시작전권 전환 완수를 위한 특별추진본부’로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9·19 군사합의가 수반하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사항들의 보완방안 등은 관심사항이 아니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국형 3축 체계 조기 구축 등은 아예 실종됐다. 업무보고에서 ‘북한 위협’ 대신 ‘주변국 잠재적 위협’을 앞세우더니 내년 초 발간될 국방백서에서는 북한을 적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을 아예 삭제할 움직임이다. 정경두 국방장관은 현 정권 들어 합참의장을 거쳐 장관으로 연거푸 발탁됐다. 직업공무원 출신 장관들이 ‘캠코더’(대선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출신) 장관들이 무색할 정도로 코드 정책을 펴는게 권력 핵심부와의 끈의 취약성을 의식해서인지, 감춰왔던 소신의 발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의 인식과 정책 구상의 프레임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현장을 잘 아는 참모와 장관들이 고언을 하고 균형을 잡아줘야 하는데, 지금 청와대에는 군부독재시대에 시계가 멈춰버린 선악관의 소유자들이, 내각에는 딸랑이들이 경쟁하고 있다. 변하지 않아야할 초심(初心)이란 어떤 걸까. 문 대통령은 그제 SNS에 올린 성탄메시지에서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 일부를 인용했다.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할머니는 이불 속에서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참으로 아름다운 시다. 할머니의 마음이 솜이불처럼 따뜻하다. 2010년 발표된 이 시를 1984년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과 비교하면 박노해 시인의 ‘진화’를 볼 수 있다.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의 핵심 박노해는 사회주의체제 붕괴 등을 거치며 생명, 땅, 사람, 평화를 강조하는 진보인사로 변했다. ‘변절자’라는 손가락질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진화라고 부른다. 한결같아야 하는 것은 바로 할머니의 마음 같은 그런 마음이다. 생각은 현실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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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기홍]‘트럼프發 혼돈’

    “그 보트 당신 건가요?” 허리케인으로 범람한 강변 마을에 요트가 떠내려 와 집이 풍비박산 났다. 집 앞을 지나던 대통령이 망연자실해 있는 집주인 노인에게 건넨 첫마디는 보트가 누구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집주인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하자 대통령은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적어도 당신은 멋진 보트를 얻었군요.” ▷풍자 유머처럼 들리는 이 대화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 허리케인이 강타한 뉴번을 방문했을 때의 실화다. 피해 주민에 대한 대통령의 공감 능력이 정상인지 의문이 일면서 당시 트럼프의 발언들을 묶은 책 ‘이 보트는 누구 것이지?’까지 나왔다. 어린이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가르쳐 주기 위한 책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 책을 포함해 ‘화염과 분노’ 등 트럼프를 다룬 책 4종류가 24일 발표된 아마존의 2018년 연간 베스트셀러 톱10에 오르는 기현상을 빚었다. ▷전 세계가 ‘트럼프발(發) 혼돈’에 몸살이다. 트럼프는 지난주 사임 의사를 밝힌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예정된 퇴임일보다 2개월 일찍 내보내기 위해 현 부장관이 내년 1월 1일부터 장관 대행으로 일하라고 23일 지명했다. 매티스에게 삐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20일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기준금리를 올리자 격분한 트럼프가 제롬 파월 연준 의장 해임 방안을 논의했다는 소식에 뉴욕 증시는 급락했다. ▷트럼프는 집권 1년 11개월여 동안 무역 환경 등 여러 이슈에서 기존 질서를 무너뜨렸다. CNN은 그를 ‘최고 질서파괴자(disruptor-in-chief)’라 지칭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불량 대통령직(rogue presidency)’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예스맨만 대통령 주변에 남았다”고 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은 대통령 혼자 끌고 가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 의회, 사법부, 언론, 싱크탱크 등의 견제 기능이 살아있다. 북핵 문제 해결 등에서 ‘미국 변수’가 특히 큰 한국 입장에서는 트럼프의 질서 파괴가 민주주의와 정의, 인권 등 미국이 주창해온 가치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 201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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