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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잠을 적게 자는 영장류다. 침팬지나 여우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하루 10∼17시간씩 선잠 자는 동안 인간은 지상에서 7∼8시간 꿀잠을 잔다. 짧지만 숙면을 취하는 습관은 인류 문명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요소다. 수면 시간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국내총생산(GDP)이 높고 집단주의 문화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적게 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KAIST 연구진과 영국 노키아 벨 연구소는 노키아 스마트워치를 착용한 11개국 3만여 명의 4년 치 수면 자료를 분석해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11개국 사람들은 0시 1분에 잠자리에 들어 오전 7시 42분 일어난다. 가장 오래 자는 나라는 핀란드로 8시간, 가장 적게 자는 나라는 일본으로 6.9시간이다. 11개국에 한국 중국 싱가포르 등 다른 스마트워치를 쓰는 나라를 추가해 16개국을 비교하면 한국이 6.3시간으로 가장 적게 자는 것으로 나온다. 다음이 중국으로 6.7시간. 하루 7시간을 못 자는 나라는 한중일뿐이다. 싱가포르도 7.2시간으로 잠이 적은 편이다. ▷수면 시간이 달라지는 원인은 취침 시간이다. 일어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잘사는 나라일수록 늦게 잠자리에 든다. 늦게까지 일하거나 첨단 기기로 영화나 오락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연구진은 해석했다. 또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나라는 자정을 넘기는 경향이 있다. 집단주의 지수가 가장 높게 나온 나라는 일본과 스페인인데 스페인도 수면 시간이 7.5시간으로 짧은 편이다. 직장 동료나 친지들과의 저녁 모임 등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느라 늦게 잔다는 설명이다. ▷국가 안으로 범위를 좁히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PBS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백인보다는 유색인종이 잠을 적게 잔다. 매주 1시간을 더 자면 소득이 단기적으로는 1.1%, 장기적으로는 5% 오른다는 연구도 있다. 혼자만 잘 자면 안 되고 주변 사람들 모두 잘 자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갈등지수가 내려가고 생산성은 높아진다. 지난해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활용한 국내 연구에서도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수면 시간이 길고 비만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잠을 충분히 못 자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고 위험도 높아진다. ‘수면 엘리트’ 유전자를 타고난 사람은 4시간만 자도 쌩쌩하지만 대개는 하루 8시간은 자야 한다. 잠은 빚쟁이다. ‘수면 부채’는 하루가 지났다고 사라지지 않고 빚처럼 쌓이므로 꼭 갚아야 한다. 주말에 몰아서 자는 건 수면 리듬이 깨지므로 금물. 평일 30분씩 낮잠 자는 것만으로 생산성이 2.3% 높아진다고 한다. 수면 부채는 일시불이 아닌 할부로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소설가 박민규는 새벽마다 곤한 잠을 뿌리치고 연탄불 갈러 나가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서울서 오빠와 자취하던 신경숙은 저녁마다 불붙은 연탄을 사러 긴 줄을 서면 ‘일하랴 학교 다니랴 애쓴다’며 맨 먼저 챙겨주던 구멍가게 아저씨를 떠올렸다. 연탄배달 하다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들켜 도망치던 골목길을 회상한 출판인도 있다. 명사 24명이 쓴 에세이집 ‘연탄’은 서민과 애환을 함께해 온 ‘국민 연료’의 추억을 일깨운다. 국내 1호 탄광 화순광업소가 30일 폐광한 데 이어 광주·전남 지역의 마지막 남은 연탄공장인 ‘남선연탄’이 곧 문을 닫는다. ▷연탄 때는 집이 대세가 된 건 1960년대다. 산림녹화 5개년 계획으로 벌목이 금지되고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땅속 무연탄을 캐다 기계에 넣고 찍어 내면 되니 값이 쌌다. 하루 두세 번 갈아주면 방은 하루 종일 따뜻했고 무연탄이라 연기도 나지 않았다. 여성들은 연탄 덕분에 부엌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아 불 때고 요리하는 노동에서 해방됐다. 1960년대 후반엔 연탄공장이 서울에만 150개, 전국엔 400개가 넘었다. ▷그래도 수요를 대기 어려웠다. ‘김장은 못 해도 굶어죽지 않지만 연탄은 없으면 얼어 죽는다’며 집집마다 연탄을 쟁여두던 시절이다. 통행금지 시간에도 연탄 수송은 예외를 인정받았다. 한파가 몰아친 60년대와 석유파동 이후인 70년대 ‘연탄 파동’이 닥치자 대통령은 “장관직 내놓을 각오하라”며 닦달했다. 당시 동아방송 연말 ‘10대 뉴스 맞히기’ 공모전의 1등 상품이 연탄 1000장이었다. ▷‘아궁이 혁명’을 일으킨 연탄 시대는 보건의료 위기의 시대다. 연탄가스 중독 사망률이 제1, 2종 전염병을 합친 것보다 높았다. 처음엔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던 정부는 ‘사회적 질병’으로 규정하고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연탄가스 마시면 김칫국을 마시던 시절이었는데 서울시가 제독제 발명 공모전에 상금 1000만 원을 내걸었다. 정부는 식당과 여관에 가스 경보기를 설치하고 보건소마다 산소호흡기를 비치했다. 가스에 중독된 남매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치료기는 하나. 자식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놓이는 부모가 적지 않았다. ▷남선연탄의 폐업으로 전국에 남은 연탄공장은 강원도 6곳을 포함해 24곳, 연탄 때는 집도 8만 가구밖에 안 된다. 초속 7m 엘리베이터로 수백 m 땅 밑에 내려가 석탄을 캐고, 연탄을 만들고, ‘소설과 대설과 동지를 가로질러 연탄불 갈았던 어머니’들 덕분에 산림녹화도 산업화도 성공했다. 탄광과 연탄공장의 연이은 폐업 소식에 새삼 ‘연탄으로 길러진 세대’였음을 깨닫는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킬러 문항’이 여러 사람 잡고 있다. 교육부 수능 담당 국장이 경질되고,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감사를 받게 되자 원장이 사임했다. 교육부 차관의 교체설도 나온다. 대통령이 6월 모의평가에서 킬러 문항을 50% 줄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대통령이 모평 킬러 문항 %까지 지시한 것, 본수능도 아닌 모평, 더구나 아직 결과도 안 나온 모평의 난이도 조절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 모두 초유의 일이다. 킬러 문항이란 학원가에서 만들어낸 마케팅 용어로 10명 중 1명이 정답을 맞힐까 말까 한 고난도 문제를 뜻한다. 킬러 문항에 대한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공정한 수능이 되려면 교육과정 내에서 출제해야 한다. 교육과정 밖의 킬러 문항 출제는 공정하지 않고 학원 배만 불리는 일이다. 킬러 문항이라는 ‘적폐’가 근절되지 않는 배경엔 교육 당국과 사교육 간의 ‘이권 카르텔’이 있다. 따라서 올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거의 없애 공정 수능을 실현하고 사교육비도 줄이겠다는 것이다. 킬러 문항으로 상징되는 수능 제도에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킬러 문항 적폐몰이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선 어떤 문항이 교육과정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통령은 ‘국어 비문학 지문’과 ‘과목 융합형 문제’를 킬러 문항이라고 했는데 수능에선 이런 문제 출제가 기본이다. 단편적 지식을 측정하는 학력고사와 달리 수능은 논리력과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킬러 문항의 효용도 생각해야 한다. 정답률 2%의 30번 킬러 문항으로 악명 높았던 2018학년도 수학 가형의 1등급 컷은 94점, ‘자기자본비율(BIS)’ 40번 문항이 출제돼 경제학자가 혀를 내둘렀던 2020학년도 국어 1등급 컷은 91점이었다. 킬러 문항 한두 개가 등급 간 정상분포 형성에 별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지적했듯 ‘공정한 변별력은 모든 시험의 본질’이다. 학생들 부담 덜어준다고 학습량까지 대폭 줄였는데 고난도 문항 아니면 최상위권 학생들은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킬러 문항이 문제여도 6월 모평 끝나서야 제기할 일은 아니었다. 고등교육법에 따라 대입 전형계획은 4년 전 공표하고, 매년 3월 수능 기본 출제방향을 발표한다. 수험생들은 6월 모평 보고 수시로 갈지 정시로 갈지 결정하는데 9월 모평에서 또 달라진다니 전체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대통령의 120개 국정과제와 후보 시절 공약집 어디에도 수능 출제 방향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3월도 아니고 이제 와서 새로운 출제 경향을 얘기하는 건 정부를 믿고 준비해 온 학생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입시에 변수가 생길수록 웃는 쪽은 사교육이다. 입시 전략 다시 짜러 학원 상담을 받고, 킬러 없앤다니 준킬러 배우러 학원으로 달려간다. 대학 잘 다니던 학생들도 ‘물수능’ 기대감에 반수학원을 찾는다. 의도와는 달리 현장은 사교육비를 늘리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카르텔 척결과 수능 대수술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올해 수능부터 무사히 치르는 것이 급선무다. 6월 모평으로 원장 목이 날아갔다. 부원장 대행 체제로 수능을 준비하는 건 턱도 없는 얘기다. 지난해 도입된 통합 수능의 선택과목 간 점수 차를 완화해 ‘문과침공’ 현상을 해소하는 문제로도 정신없던 평가원이다. 서둘러 새 원장부터 임명하고, 교육부 감사도 6월 모평 결과가 나오는 28일까지는 마무리해줘야 한다. 교육부는 킬러 문항 대신 ‘출제 기법 고도화’를 약속했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방식을 9월 모평에 딱 한 번 시험해보고 곧장 수능에 적용하는 건 ‘약자인 아이들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다. 올해 수능은 3월에 발표한 대로 치르는 것이 공정과 상식에 맞는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충남 금산군에는 16m 높이의 금산인삼이, 인천 소래포구에는 높이 20m의 새우 전망대가 있다. 강원 횡성군엔 한우, 강원 소양강 변엔 소양강 처녀상이 랜드마크 자리를 노린다.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공공 조형물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지만 “예산 낭비”라는 비판 속에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세계 최고’를 내세운 조형물들은 대개 실패로 끝난다. 충북 괴산군은 5억 원을 들여 지름 5.7m의 초대형 가마솥을 만들어 신기록에 도전했다가 더 큰 호주 질그릇에 밀렸다. 군민 4만 명이 한솥밥을 먹자고 만들었는데 아래는 타고 위는 설익는 3층밥이 됐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해도 이송 비용만 2억 원이 들어 포기한 상태. 광주 광산구에는 높이 7m의 세계 최대 우체통이 있지만 미국에 더 큰 우체통이 생기면서 타이틀을 잃고 사용도 중단됐다. ▷지역 특산물이나 유명인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충북 음성군이 고추 조형물을 설치하자 괴산군은 임꺽정이 ‘청결고추’를 들고 엄지척을 하는 조형물을 만들었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생가가 괴산이다. 경북 군위군엔 대추 모양의 7억 원짜리 대형 화장실이 있다. 원래 조형물을 만들려다 화장실로 바꿨는데 한적한 도로변이라 이용객이 없다. 강원 인제군 소양강 변엔 환풍구에 치마가 날리는 메릴린 먼로 동상이 생뚱맞다. 먼로가 6·25전쟁 직후 이곳에서 미군 위문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형 조형물이 보기도 안 좋고 안전에 방해만 된다는 민원이 쏟아지자 국민권익위원회가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다. 2019년 기준 전국의 공공 조형물은 6287점, 추정 제작비는 1조1254억 원. 상당수 지자체가 공공물 건립이나 관리에 관한 규정도, 주민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만들고 있었다. 비리 의혹이 제기된 사례도 있다. 경남도가 16억 원을 들인 거북선은 미국산 소나무를 국내산으로 속여 쓴 사실이 드러나 ‘짝퉁 거북선’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바닥에 물이 새 쓰지도 못하고 방치돼 있던 거북선은 최근 일반인에게 154만 원에 낙찰됐다. ▷성공적인 공공 조형물로 영국 소도시 게이츠헤드에 설치된 ‘북방의 천사’가 꼽힌다. 탄광산업과 제철공업으로 융성했다 쇠락한 이곳에 철을 이용해 키 20m에 양쪽 날개 길이가 50m인 단순한 디자인의 천사상을 세웠다. “쇳덩어리에 16억 원이나 쓰느냐”는 주민들을 설득하느라 1998년 완공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시장이 아닌 주민 모두의 프로젝트로 지역의 역사와 미래의 희망을 담은 천사상이 명물이 되면서 지역경제도 살아났다. 임기 내 업적 하나 남기겠다는 욕심만으론 오래도록 사랑받는 랜드마크를 기대하기 어렵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잔인한 폭탄테러범인가, 기술 문명의 위험을 경고한 선지자일까.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81세 남성이 10일 사망하며 남긴 질문이다. 1978∼1995년 과학기술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며 과학자를 포함한 다수에게 16차례 폭발물 소포를 보내 26명의 사상자를 낸 시어도어 카진스키. 암호명 ‘유너보머’로 불리는 그는 1996년 체포될 때까지 17년간 미국인들이 우편물을 받을 때마다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의 주인공이다. ▷그의 악명을 드높인 건 천재적 두뇌다. 평범한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지능지수(IQ) 167로 태어난 카진스키는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고 25세에 미시간대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최연소 교수로 부임한다. 대학원 시절 동료 학생들은 “우리가 간신히 문법을 배우는 동안 카진스키는 시를 쓰는 식이었다”고 회고했고, 박사 논문을 심사한 교수들은 “이 논문을 이해할 수 있는 수학자는 10명 정도일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2년 후 교수직을 내던지고 몬태나주 외딴곳에 오두막을 지어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카진스키는 살인을 상상하고 폭발물을 만들며 모든 과정을 암호화된 숫자로 일기장에 남겼는데 이를 분석한 심리학자들은 그에게 조현병 증세와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고 진단했다. 젖먹이 시절 병원에 장기 입원하면서 어머니와의 유대를 형성하지 못해 도덕 기준과 공감 능력을 상실했다는 분석이다. 천재성도 소외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는 “너무 외롭다. 아무도 날 아껴주지 않는다”고 썼고, 뉴욕타임스는 그가 거쳐 갔던 7개 주를 취재했는데 그의 친구를 한 명도 찾지 못했다. ▷카진스키가 현대문명을 거부한 예지자로 부각된 건 1995년 검거 직전 신문에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게재하면서다. 그는 ‘환경 파괴와 기술로 인한 소외가 극에 달했으니 현대 생활의 사회적 산업적 토대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국내에도 번역본으로 출간됐고, 2018년 두 번째 책 ‘반기술 혁명’이 나왔다. 출판사의 홍보 문구는 이렇다. ‘박사학위를 받은 수학 천재가 광기 어린 테러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기후위기가 가속화하고 인터넷의 폐해가 커지면서 카진스키를 ‘사상가’로 추앙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일론 머스크는 그의 사망 소식에 “그가 옳았을지 모른다”는 트윗을 남겼다. 하지만 카진스키 스스로도 “난 인류를 위해 행동하는 이타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개인적 복수심에서 행동할 뿐”이라고 했다. 천재로 태어나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연쇄 살인을 하고 ‘기술은 인류의 재앙’이라 썼던 그의 다면적 삶은 현대 사회가 갖게 될 병적인 징후들을 앞서 보여주었던 건지도 모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나이 들면 낙상을 조심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매년 65세 이상 노인 4명 중 1명이 넘어져 300만 명이 응급실을 찾는다. 미국 최고령 대통령인 조 바이든(80)도 자주 넘어지는 편이다. 취임 첫해인 2021년 전용기 에어포스원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고, 이듬해엔 자전거 페달 클립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얼마 전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프롬프터를 지지하던 바닥의 모래주머니에 걸려 꽈당 했다. ▷대통령의 낙상이 드물진 않다. 대학 미식축구 선수였던 제럴드 포드는 에어포스원 계단을 내려오다 고꾸라져 슬랩스틱 코미디 단골 소재가 됐다. 조지 W 부시는 전동 킥보드를 타다 넘어졌고, 골프광인 빌 클린턴은 프로골퍼 그레그 노먼에게 레슨을 받고 나오다 발을 헛디뎌 무릎힘줄이 끊어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2020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 후 “하이힐을 처음 신은 소녀처럼” 연단을 엉금엉금 내려와 건강 이상설에 시달렸다. ▷그래도 재선 도전을 선언한 최고령 대통령의 잦은 낙상은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4일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손주가 몇 명인지 헷갈리고, 말더듬이 증세가 재발되기도 하며, 연설할 땐 “시선이 멍하다. 사고의 맥락을 잃어버린 듯하다”는 평가가 나온다는 것이다. 오후 6시 이후 공식 일정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절반 수준이고, 언론 인터뷰는 오바마의 5분의 1, 트럼프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고 한다. ▷참모들은 바이든이 젊었을 때도 ‘실언 제조기’라 불릴 정도로 원래 말실수가 잦았고, 해외 순방은 오바마보다 더 많이 다니고 있다고 반박한다. 트럼프가 운동도 않고 치즈버거 위주의 식사를 한 반면 바이든은 주 5회 운동하고 건강식을 챙겨 먹는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대통령직을 수행할 만큼 건강하다”는 여론은 33%로 트럼프의 절반밖에 안 된다. 당내에선 러닝메이트라도 건장해야 한다는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59)은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이중 소수자인 데다 ‘남한’을 ‘북한’이라 하는 등 잦은 말실수로 지지율이 낮은 상태다. ▷미 대통령은 재임 기간 일반인보다 두 배 빨리 늙는다는 연구가 있다. 하버드대 의대 연구진이 1722∼2015년 미국을 포함한 서방 17개국 대통령과 총리 279명의 수명을 계산한 결과 낙선자보다 2년 8개월 이상 짧았다. 반면 자연사한 미 대통령으로 한정하면 평균 수명이 일반인보다 길다는 반박도 있다. 자주 넘어졌던 포드는 93세, 일본 방문 도중 총리 바지에 토하며 졸도했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4세를 누렸다. 넘어졌다가도 곧장 일어서는 바이든이 역대 최고령 대통령이라는 자신의 기록을 경신할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여성운동가 달력의 기념일은 다르다. 1월 16일은 영국 BBC가 미인대회 중계를 거부한 날(1984년), 3월 2일은 호주제 폐지 법안 통과일(2005년), 4월 22일은 여성 은행원 결혼 퇴직 각서제가 폐지된 날(1976년), 그리고 1983년 6월 11일은 국내 첫 진보 여성단체가 창립한 날이다. 올해로 40주년을 맞는 한국여성의전화다. 창립식 축사에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개탄했듯 “남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몹쓸 짓이라도 모르는 척하는 게 미덕”이던 시절 매 맞는 여성을 위한 전화 상담에서 시작해 1987년 국내 최초의 가정폭력 긴급피난처인 ‘쉼터’를 개설했고 성폭력, 스토킹, 데이트폭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40년간 전화 상담이 114만 건(연간 2만8500건), 쉼터를 거쳐 간 여성이 74만6000명이다. 2003년 여성의전화에 합류한 송란희 공동대표는 “40년 역사가 자랑스러우면서도 똑같은 폭력이 되풀이되고 있어 무력감을 느낀다”고 했다. ―여성의전화가 도운 피해자 중엔 한국 여성운동사에 기록될 이들이 많다. “1988년 주부가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자른 사건이 있었다. 성폭력 정당방위를 처음으로 인정받아 무죄가 됐다. 1991년엔 9세 때 성폭력당한 여성이 성인이 되어 가해자를 살해한 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는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됐다. 같은 해 10년간 폭행해온 남편을 죽인 여성이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1997년 가정폭력특별법이 제정됐다.”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피해자도 있다. 여성의전화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피해자 지원에 앞장서 박 시장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들었다. “피해자를 돕는 것이 우리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된다고 믿었다. 다행히 후원금이 줄지 않았다. 시민들이 지지 의사를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긴 다큐 영화가 다음 달 개봉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의전화는 “당장 멈추라”는 성명을 냈다. “막무가내 ‘성폭력 부정주의’는 민주도 진보도 아니다. 의리도 아니다. 패악질일 뿐이다.” ―여성의전화 출신 중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가 드물다. “내부 규정에 따라 정계 및 공직에 진출하려면 조직 내 합의를 거쳐야 하고, 공천 신청 전 사퇴해야 하며, 공천을 못 받거나 낙선했을 때 1년 안에 조직에 돌아올 수 없고, 돌아와서도 총회의 의결을 거친 뒤 활동할 수 있다. 배우자가 출마하면 두 달 전 휴직해야 한다. 2000년대 초반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할 때 만든 규정이다. 정치 바람을 타면 피해자 보호에 지장이 있을까봐 엄격하게 선을 그어놓았다.” ―시민단체를 운영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재정적인 독립이다. 상담소와 쉼터 운영에 정부 보조금을 받는데 그 비중을 총수입의 30% 이하로 낮추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야 조직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나갈 수 있다.” ―40년간 별 탈 없이 운영해온 비결이 무엇인가. “피해자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었던 것, 그게 정신 차리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여성의전화가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분석한 결과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이 86명, 살인 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이 225명이다. 폭력으로 삶이 부서지는 위기의 여성들 곁을 지키며 안전한 세상을 위해 헌신해온 한국여성의전화 40돌을 축하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좋은 ‘이모님’ 만나는 건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일이다. 워킹맘에겐 ‘이모님 복이 오복 중 으뜸’이라고 한다. 가사도우미 얘기다. 미덥기는 친정엄마 같은 한국인 이모님이 최고지만 조선족 도움을 받는 집이 많다. 싸고, 입맛 비슷하고, 중국어 조기교육이 가능하며, 육아와 살림에 이것저것 ‘조언’을 삼가기 때문에 편하다. 올 하반기에는 서울에서 동남아 출신 이모님들을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는 방문취업(H2) 비자로 들어온 중국동포만 가사도우미 일을 할 수 있다. 자녀 영어 교육을 위해 알음알음 필리핀 도우미를 고용하는 집도 있는데 불법이다. 고용노동부와 서울시는 ‘의사소통이 쉽거나’ ‘정서적 거부감이 적은’ 나라 출신을 가사도우미로 시범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월 100만 원 이하” “싱가포르에선 월 38만∼76만 원” 등의 주장이 있지만 최저임금법이 적용되면 급여는 월 210만 원 수준이 된다. 한국인의 경우 주5일 출퇴근 도우미가 250만∼300만 원, 입주는 350만∼400만 원이다. ▷조선족 이모님에겐 익숙해도 동남아 이모님에 대해선 걱정들이 많다. 말도 문화도 달라 서로 불안과 불편을 호소할 가능성이 높다. 근무 여건이 좋은 다른 일자리로 이탈해 불법 체류자가 될 우려도 있다. 정부가 참고하는 나라가 싱가포르 홍콩 대만 일본인데, 제도 시행의 역사가 긴 싱가포르 홍콩 대만은 도우미 인권침해 사건이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4개국 모두 제도 도입 후 출산율에 큰 변화가 없었다. ▷해외 이모님 모시기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돌봄 공백은 심각하다. 워킹맘들은 육아휴직이 끝나면 첫 번째 퇴사 위기를 맞는다. 국공립 어린이집은 1년 넘게 기약 없는 대기 줄을 타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 두 번째 위기다. 등하교 시간에 정부의 ‘아이 돌봄 서비스’를 쓸 수 있지만 역시 대기 줄이 길고 맞벌이 부부는 소득 기준에 걸려 신청도 못 한다. 등하교 이모님을 쓰면 월 120만∼150만 원이다. 이렇게 육아와 가사 고비를 못 넘기고 집에 들어앉은 여성이 698만 명이다. ▷돌봄 공백은 정책 한두 개로 메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기존 돌봄 체계를 업그레이드하고 선택지도 넓혀야 한다. 조선족 이모님을 더 모셔오거나, 국내 건강한 고령층을 돌봄 인구로 흡수하는 방법도 있다. 필리핀은 해외에 나가 가사도우미 하려면 국가자격증을 따야 한단다. 신뢰할 만한 인력송출제도를 갖춘 나라를 대상으로 가사도우미 도입을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이 남다른 복을 타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됐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하이테크 업계 거물들의 자녀교육 방식은 ‘로테크(low-tech)’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는 아들의 유튜브 이용 시간을 정해 놓았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도 딸이 13세가 될 때까지 페북을 금지하겠다고 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집안은 ‘테크 프리’ 지대였다. 미국 공중보건정책 수장이 모든 미성년자의 소셜미디어(SNS) 사용을 엄격히 규제하자는 권고 보고서를 냈다. 흡연, 에이즈, 마약, 총기에 이어 SNS가 청소년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진단이다. ▷비벡 머시 미 공중보건단장이 어제 발표한 보고서에는 104개 각주와 함께 미성년자의 SNS 이용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주요 연구 결과가 망라돼 있다. SNS는 13세부터 가입할 수 있지만 미국 8∼12세의 40%가 SNS를 사용한다. SNS를 통해 표현력을 기르고 다양한 집단과 교류하는 장점을 소개한 연구도 있지만, 또래집단의 압력에 취약한 성장기에 지나친 SNS 사용은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연구들이 훨씬 많다. ▷SNS 이용 시간이 하루 3시간을 넘어가면 우울이나 불안 증세가 두 배로 늘어나고,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겪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특히 10대 소녀들이 취약하다. SNS를 쓸수록 자존감이 떨어지고 외모에 대한 불만이 많아지며 섭식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인스타그램 출시 이후 미국 영국을 포함한 17개국 10대 여성의 극단적 선택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비디오게임에 빠져 있는 10대 남성과 달리 우울감을 유발하는 SNS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콘텐츠의 유해성도 문제다. 자해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면 모방 행동을 초래할 위험이 높다. 최근 서울에서도 10대 여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모습을 SNS로 생중계한 후 관련 신고가 30% 늘었다. 머시 단장은 장난감 제조회사나 자동차회사가 신상품 출시 전 안전성 검사를 받고, 어린이 카시트 이용을 의무화하듯 SNS도 미성년자용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이용 규제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유타주는 올 3월 미국에선 처음으로 18세 미만은 SNS 가입 시 부모의 동의를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SNS를 쓰는 아이들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SNS가 인간관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예전엔 관심과 애정이란 가족과 몇 안 되는 친구로부터 받는 것이었으나 SNS 도입 후엔 먼 곳에서 폭넓게 받는 변덕스러운 것으로 바뀌어 정서적 불안감을 느낀다는 설명이다. 자녀가 부모나 가까운 친구와 안정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단단한 심지를 갖도록 돕는 것이 SNS 역병 시대 최대 면역이 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모든 세대는 그 세대만의 저널리즘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소셜미디어 시대는 바이럴(viral)과 곤조(gonzo) 저널리즘의 시대다. 그런데 가볍고 말랑한 기사로 입소문을 유도하는 바이럴의 대명사 ‘버즈피드’가 뉴스 부문을 폐업한 데 이어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의견을 앞세우는 곤조의 ‘바이스 미디어’마저 파산 신청을 했다. ▷전 세계 온라인 방문자 1위였던 버즈피드가 뉴스 사업을 접은 게 지난달 20일.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몰락한 바이스는 버즈피드보다 서너 배 큰 온라인 미디어 그룹이다. 한때 기업 가치가 57억 달러(약 7조6000억 원)였으나 고작 2억2500만 달러에 팔릴 전망이다. 두 회사 모두 소셜미디어 광고에만 매달리다 재정난에 빠졌다. “전통 언론을 읽지 않는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은 대성공 사례”라더니 충성도 낮은 뜨내기 독자들만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바이스 성공 비결의 핵심이 곤조 저널리즘이었다. 곤조의 어원에 대해선 ‘바보’를 뜻하는 이탈리아어(gónzo)나 ‘미련하다’는 의미의 스페인어(ganso)에서 유래했다는 설까지 분분한데 놀라울 만큼 주관적이고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2013년 북한에 거액을 주고 성사시킨 데니스 로드먼의 방북 보도와 2014년 테러단체 IS 동행 취재기가 대표적이다. 바이스는 “우리의 에토스인 주관성이 북한과 IS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했지만 위험한 ‘스턴트 저널리즘’으로 극단 세력에 이용만 당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통 언론의 객관적 보도에 도전장을 내미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주관을 배제한 보도는 불가능할뿐더러 문제 해결도 못 한다는 생각에서다. 주의 주장을 앞세우는 ‘주창주의(advocacy)’나 ‘단언적(assertive)’ 저널리즘, 방관자가 아닌 실천자가 되자는 ‘시민(civic)’ 저널리즘이 그런 시도인데 곤조 저널리즘처럼 오래가지는 못했다. 객관주의에 대한 건전한 반성에서 벗어나 사실을 무시하고 정파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줄줄이 외면받았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에서 큰 목소리를 내던 폭스뉴스와 CNN 간판 앵커가 얼마 전 나란히 퇴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년간의 미디어 연구를 통해 검증된 사실이 있다. 언론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생각거리를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학자 톰 로젠스틸이 객관주의 보도원칙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객관적 보도는 ‘입장이 없는 관점(view from nowhere)’을 지향한다. 기자 개인의 주관에서 출발하더라도 이를 배제하고 다양한 시각을 담아내며 종착점에 이르자는 것이다. 모든 세대가 새로운 저널리즘 실험으로 반짝 주의를 끌다 사라지는 동안 지금껏 살아남은 건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애가 탄 사람의 똥은 매우 쓰다는 뜻에서 유래한 속담으로 한 사람이 여러 학생을 지도해야 하는 선생 노릇이 그만큼 고되다는 의미다. 요즘 교사들도 다양한 이유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안정적이고 처우가 괜찮은 직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62세 정년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나는 교사가 많다. ▷교사노동조합연맹이 스승의 날을 맞아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 교사 1만여 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교사들의 사기 저하가 심각한 수준이다. 10명 중 7명은 교직 생활이 불만족스럽고, 4명 중 1명은 최근 5년 내 정신과 치료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최근 1년 새 학교를 그만둘까 고민한 응답자도 87%나 됐다. 실제로 정년퇴임식을 본 지 오래됐다는 교사들이 많다. 중고교 퇴직 교사의 50∼60%는 명예퇴직자들이다. ▷어느 나라든 교사는 스트레스 많은 직업이지만 원인은 다르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48개국 초중고 교사들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교사들은 학부모 민원 응대와 학생의 신체·언어 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 정도가 유독 높다. 요즘 교사들이 담임 맡기를 꺼리는 이유도 업무량과 책임에 비해 담임수당이 턱없이 적은 데다 학생과 학부모의 교권 침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3D’ 직종이라 자조한다. 학생과 학부모 대하기가 힘들고(Difficult), 때로는 폭력이나 소송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며(Dangerous), 근무환경이 일반 회사보다 열악하다(Dirty)는 뜻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교사는 비인기 직종이다. 일본은 교사 연봉이 일반 회사원보다 높지만 학교는 ‘블랙 직장’으로 꼽힌다. 과중한 업무 부담과 극성스러운 ‘몬스터 학부모’ 등쌀에 못 이겨 정신질환을 이유로 휴직한 공립학교 교사가 2021년 5897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교사가 없어 학급당 학생 수를 늘릴 지경이다. 미국에선 만성적 교사 부족난이 코로나로 악화하자 주 4일 수업을 하고, 학사 학위도 없는 퇴역 군인을 교사로 임용하는 주가 생겨나고 있다. ▷독일은 초등 교사 연봉이 1억 원으로 룩셈부르크 다음으로 높은데도 교사 구인난이 심각하다. 승진과 자기계발의 기회가 적어 진취적인 젊은이들이 매력을 못 느낀다고 한다. 한국도 5년 차 이하 교사들이 “늦기 전에 로스쿨 가겠다”며 퇴직하고, 최고 인재들이 몰려들던 교대에서 자퇴생들이 나오고 있다. 교권을 보호하고 잡무를 줄이는 동시에 새로운 시도와 열정이 보상받는 교직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면서도 사람 키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인재가 많아야 공교육이 산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는 법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의사는 처음부터 의사였지만 간호사는 간호원에서 시작했다. 1903년 국내 최초의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면서 ‘nurse’를 ‘간호원(員)’이라 번역했다. 일제강점기 때 여성은 ‘간호부(婦)’ 남성은 ‘간호사(士)’라 했고, 광복 후 남녀 모두 ‘간호원’이 됐다가 1987년 의료법 개정으로 ‘간호사(師)’로 바뀌었다. 의사(醫師) ‘선생님’처럼 간호사 ‘선생님’이 된 것이다. 간호계는 “간호 전문직의 위상을 바로 세운 이정표”라며 환호했다. 그리고 드디어 간호법 제정이다. 의료법에서 독립해 별도의 법을 갖는 건 간호계의 47년 숙원이었다. 하지만 간호법이 간호사의 끝 자를 ‘스승 사(師)’로 바꾼 것 이상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현행 의료법과 보건의료인력지원법에서 간호 관련 조항만 떼어 엮어놓았기 때문이다. 간호법이 발효돼도 간호사는 여전히 ‘의사의 지도하에 진료의 보조’를 하는 존재다. 현상유지법이라고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모든 의료인(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조산사 간호사)과 간호조무사와 안마사는 의료법 적용을 받는다. 모든 보건의료인들은 보건의료인력지원법의 지원을 받는다. 그런데 왜 간호사만 두 개의 법에서 떼어내 별도 법으로 대우해야 하나. 이는 13개 직역단체들이 간호법에 반대하며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의료법 변호사법 같은 전문직 관련법은 그 직역이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의료법은 의료인의 결격 사유, 병원이 갖춰야 할 요건, 의료광고에 관한 촘촘한 규제 조항을 담고 있다. 의료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간호법은 간호사의 일·가정 양립지원과 정부 지원 의무까지 규정하고 있어 간호사처우개선법에 가깝다. 전문직 위상 정립을 위한 47년 숙원이라면서 전문직법으로서 기본 모양새도 갖추지 못한 법을 만든 것이다. 흠투성이 간호법이지만 고령화 시대를 맞아 요양과 돌봄 수요 증가에 대비해야 한다는 입법 취지는 귀 기울일 만하다. 급성환자 전문치료만으로도 바쁜 의사들에게 원상회복이 어려운 고령자와 만성질환자 케어까지 책임지라 할 수는 없다. 미국과 유럽에선 간호사나 물리치료사들이 간단한 처방권을 가지고 전문요양원(Skilled Nursing Facility)을 단독 개원해 의사 부족난을 해소하고 의료비 지출 증가를 막고 있다. 환자들로서도 비용 부담이 덜한 선택지가 추가되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간호사 단독 개원 방안에 대해 의사들은 의료사고 위험을 얘기하지만 간호사의 업무는 이미 돌봄의 영역을 넘어섰다. 무의촌 지역 보건진료소에서는 간호사들이 의사 역할을 대신한다. 의료 현장에는 외국의 PA(Physician Assistant) 역할을 하는 간호사들이 외과처럼 전공의 지원자가 적은 진료 과목의 의사 공백을 메워 주고 있다. “PA 없으면 수술실 마비된다”는 말까지 나오는데 언제까지 간호사 업무 영역을 진료 보조에만 가둬둘 수는 없는 일이다. 2004년에도 간호법이 추진돼 의사단체가 반대하고 간호조무사협회는 ‘간호법 제정 반대 자결 선언’까지 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그동안 시대 변화에 맞춰 의료법을 개정하고 간호사를 포함한 보건의료 직역의 업무 영역을 재조정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대란은 없었을 것이다. 정부가 10여 개 단체의 이견 조율에 엄두를 못 내고 낡은 법규정을 방치하는 사이 직역 간 다툼만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커졌다. 덕 보는 사람은 없고 분란만 키운 빈껍데기 간호법 대신 고령사회의 의료 요양 돌봄 체계를 든든히 받쳐주는 보건의료인력 활용 방안을 마련해 직역 단체들을 설득해야 한다. 의료계의 맏이인 의사들이 직역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양보와 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해 주길 기대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지난해 독일에서 대박 난 특가 상품이 ‘9유로 티켓’이다. 한 달간 9유로(약 1만3000원)를 내면 독일 내 거의 모든 열차와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상품이다. 독일 시내 대중교통 기본요금이 3유로이니 세 번만 타면 본전 뽑는 셈이다. 지난해 6∼8월 시범적으로 한정 판매됐는데 5000만 장 넘게 나갔다. 9유로 티켓의 흥행에 힘입어 1일에는 정규 상품인 49유로짜리 ‘도이칠란트 티켓’이 등장했다. ▷월 49유로(약 7만2000원)인 이 티켓이 있으면 고속열차(ICE), 도시 간 특급열차(IC), 고속버스를 제외한 모든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탈 수 있다. 지자체별 월 정액권(100유로)의 절반도 안 되는 값에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독일 전국을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는 열차 3번을 갈아타면 8시간 30분 만에 갈 수 있다.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300만 장이 나갔고, 외국인도 구매 가능해 배낭여행족의 필수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에선 9유로 티켓이 등장하기 전에도 ‘1일 1유로 티켓’이나 ‘무상교통’ 실험이 이어져 왔다. 대중교통 이용을 늘려 기후위기를 막자는 취지에서다. 1km 이동 시 탄소배출량이 승용차는 210g인 데 비해 버스는 27.7g, 지하철은 1.53g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에너지 위기에 물가가 폭등하자 서민들 교통비 부담을 덜어줄 겸 전국 단위의 월정액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9유로 티켓 시범 운영 결과 물가상승률이 0.7% 감소하고, 대중교통 이용률은 25% 증가했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80만 t 줄었다고 한다. ▷무상교통을 도입하는 나라는 늘어나고 있다. 룩셈부르크가 2020년 세계 최초로 대중교통 요금을 폐지했다. 미국 캔자스시티, 프랑스 됭케르크, 에스토니아 탈린시는 무상교통을, 오스트리아는 월정액 제도를 부분 시행 중이다. 정책 효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룩셈부르크는 무상교통 시행 후로도 자동차 이용량이 줄지 않았다. 독일 9유로 티켓 도입으로 걷거나 자전거 타던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기존 대중교통 이용자들의 이동 거리가 늘었을 뿐 자동차에서 대중교통으로 갈아탄 수요는 미미하다고 한다. 재정적 지속 가능성도 따져봐야 한다. ▷국내에선 세종시가 처음으로 2025년 무상버스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버스 이용을 장려해 서울의 두 배 수준인 승용차 수송 분담률을 줄인다는 계획이다. 한국은 대중교통 수송 분담률이 33%로 답보 상태이고, 대도시의 경우 교통 혼잡으로 인한 비용이 연간 43조 원으로 증가 추세다. 독일의 49유로 티켓, 세종시의 무상버스 실험이 혼잡도를 줄이고 기후위기도 막을 대안이 될지 주목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은 인구 대비 성형 건수가 가장 많은 나라다. 성인 남녀 10명 중 1명, 30대 여성은 10명 중 3명이 성형수술 유경험자다. 눈 코 입을 포함한 15개 신체 부위에 134개 시술이 이뤄지고 있다. 부위별 시술법과 보형물의 종류에 따라 세분하면 시술 방법은 940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자기 몸을 맡기면서 의사가 성형외과 전문의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성형수술 부작용으로 의사를 고소한 최모 씨(44)도 그런 사례다. ▷최 씨는 올해 초 서울 강남 A병원에서 성형수술을 받은 후 안면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원래 코 수술을 하러 갔는데 눈과 팔자주름 수술까지 같이 하면 효과가 좋다는 말에 그리했다가 부작용이 생겼다. 알고 보니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니었다. 병원 내부에 ‘○○○ 성형외과’로 돼 있어 전문의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의료법에 따라 병·의원 외부 간판은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으면 ‘홍길동 성형외과 의원’, 없으면 ‘홍길동의원 진료과목 성형외과’로 표시해야 한다. 그런데 병원 내부 표기에 대해선 따로 규정이 없다.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는 의원은 약 1100곳, 없는 의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 우선 산부인과 비뇨기과 등 다른 분야 전문의를 따고도 전공과목 간판을 포기하고 일반의처럼 ‘홍길동의원’으로 피부과나 성형외과 등 다른 과 진료를 보는 의원이 6000곳이다. 이 중 절반만 잡아도 성형외과 전문의 없는 의원이 3000곳이 된다. 여기에 일반의 신분으로 성형외과 진료를 하는 의원들까지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의료계에선 서울 강남 성형외과 중 절반은 전문의 없는 의원으로 본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따르면 성형외과는 25개 진료과목 중 분쟁조정 신청이 5번째로 많다. 흉터, 염증, 신경 손상, 비대칭 등을 호소하는 내용들이다. 성형외과 전문의들은 전문의가 아닌 경우 부작용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1년에 70명 남짓 배출되는 성형외과 전문의라야 얼굴 구조와 해부학에 익숙해 믿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고, 꼭 성형외과 전문의가 아니어도 손기술이 좋은 의사가 많다는 반론도 있다. ▷국내 의사 10명 중 8명은 전문의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의사들은 4, 5년 고생해서 전문의 자격을 따는 대신 미용 성형 분야에 일찌감치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 올해 전문의 합격자는 2807명으로 10년 전보다 500명이나 줄었다. 성형외과 전문의 아닌 성형하는 의사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의원 외부 간판만 잘 봐도 전문의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명찰로 확인해도 된다. 의료법에 따라 의사는 명찰을 달아야 하는데 ‘성형외과 의사 홍길동’은 성형외과 전문의만 달 수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에선 퍼스트레이디 지지율 조사도 정기적으로 한다. 여러모로 이례적이었던 트럼프 시대를 제외하면 역대 영부인들은 임기 말에도 대통령 인기와 무관하게 높은 지지율을 누렸다. CNN과 갤럽이 닉슨 대통령 집권기 이후 역대 영부인들의 임기 말 지지율을 집계했더니 평균 50%였다. 유일한 예외가 힐러리 클린턴으로 고작 13%다. 백악관을 나와 국무장관으로, 유력한 대선 후보로 승승장구했던 그가 왜 영부인 시절 인기는 없었을까. 답은 잠시 접어두고 김건희 여사 얘기부터 해보자. ‘조용한 내조’를 하겠다던 김 여사가 요즘 대통령 못지않은 강행군을 하고 있다. 이달 들어 17일간 공개 일정만 15개다. 같은 기간 대통령 공개 일정은 24개였다. 대통령실이 공개한 ‘사진뉴스’를 보면 김 여사 사진이 229컷으로 대통령 사진(203컷)보다 많다.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물보호단체 관계자들과 비공개 오찬을 하며 “개 식용을 정부 임기 내에 종식하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저의 본분”이라고 했고, 납북자와 억류자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선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에 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김 여사의 대학원 최고위과정 동기가 의전비서관으로 기용됐다. 개고기 식용 금지는 대통령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의견 수렴을 하는 중이다. 민감한 정책과 인사 문제에서 김 여사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실에선 “대통령이 방미 준비 등으로 챙기지 못하는 일정을 김 여사가 대신 챙겨 주길 요청했다”거나 “국정 파트너로서 적극적 역할을 당부했다”는 해명이 나온다. 대통령의 업무가 대통령 개인기로만 수행되는 것은 아니며 영부인 역할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부란 한쪽의 존재감이 크면 다른 쪽은 작아지는 제로섬 관계다. 닉슨 대통령은 클린턴 부부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부인이 너무 강하고 똑똑하면 남편이 무기력해 보이기 마련이다.” 영부인의 정책 관여는 ‘선’을 넘는 일이어서 리스크가 훨씬 크다. 선출된 자리도 아니면서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건 ‘민주주의를 우롱하는 것’이라는 게 민심이다(프랑스 정치학자 피에르마리 루아조). 힐러리 여사가 주요 국정과제였던 의료보험 개혁을 직접 챙기다 실패하자 대통령 지지율까지 추락했다. 대선에 처음 도전하며 똑똑한 힐러리를 앞세워 ‘하나 사면 하나는 공짜’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에 나설 때는 ‘빌러리(빌+힐러리)’의 ‘ㅂ’자도 못 나오게 했다. 힐러리 여사에 대한 여론이 가장 우호적이었을 때는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다. 그는 “어떤 결혼이든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며 남편 곁을 지켰고, 대통령의 지지율도 거짓말처럼 올랐다. 시대착오적 여성관 아니냐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니라 힘 있는 남자에 기대어 영향력을 갖는 영부인 제도가 굴욕적이라며 아예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로펌 변호사 시절 오바마 대통령의 멘토였던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에 들어간 뒤론 건강 전도사 역할에 머물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민주화 동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로 한국의 영부인들 중 남편과 가장 동등한 관계였던 이희호 여사도 “대통령 부인이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는 데 부정적인 시각이 많더라”라며 조심스러워했다. 영부인은 대통령의 자산이자 위험 요소다. 대통령보다 한두 걸음 뒤에서 조용히 내조하면 자산이 되고, 대통령 앞에 서려 할수록 리스크가 된다. 힐러리 여사처럼 남편 임기 이후의 개인적 기획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면 정치 전문가들이 조언하듯 “이미지 메이킹엔 협조하되, 권력은 나눠 갖지 말아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인천 미추홀구 구도심의 나홀로 아파트와 신축 빌라에는 2030세대가 많이 산다. 인근 대규모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1억 원 미만의 전세보증금으로 새집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은 여기 말고는 없다. 그런데 최근 이곳에서 20, 30대 젊은이 3명이 줄줄이 숨진 채 발견됐다. 수도권 일대에 주택 2700채를 갖고 전세사기를 벌이다 구속된 ‘미추홀구 빌라왕’ 남모 씨(61) 피해자들이다. ▷17일 새벽 31세 여성 박모 씨가 집 안에서 유서를 남기고 쓰러진 채 남자친구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박 씨는 전세보증금 7200만 원에 사기범의 아파트로 입주했고, 2021년 9000만 원으로 올려줬는데 아파트가 통째 경매에 넘어가면서 보증금을 날리게 됐다. 박 씨가 숨지기 50일 전인 2월 28일에는 전세금 7000만 원을 떼인 38세 남성이 대출 상환일이 다가오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은행 대출로 마련한 빌라가 경매로 넘어간 것이다. 그는 유서에 “더는 못 버티겠다”고 썼다. ▷14일 숨진 채 발견된 임모 씨는 고작 스물여섯이다. 고교 졸업 후 인천 남동공단에 다니며 6800만 원짜리 빌라 전셋집을 마련했다. 2021년에는 전세금을 9000만 원으로 올렸으나 경매에 넘어가 5600만 원을 날렸다. 매매가 2억 원도 안 되는 집에 1억8120만 원의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었다고 한다. 신용불량자가 될까 무서워 7년간 일한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았지만 대출금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숨지기 닷새 전 어머니에게 전화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미안해요 엄마, 2만 원만 보내주세요.” ▷‘깡통 전세’나 갭 투기로 인한 전세사기가 늘면서 지난해 전세보증 사고액은 약 1조2000억 원으로 전년도의 2배로 급증했다. 피해자 10명 중 7명이 2030세대다. 전세사기 매물들이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들이 겨우 감당할 수 있는 금액대인 탓이다. 피해자 커뮤니티에는 “대출금 못 갚아 신용카드 거래가 정지됐다” “아이가 곧 태어날 텐데 한 푼도 못 건지고 거리로 나앉게 생겼다”는 피 말리는 사연들이 가득하다. ▷‘너희는 재산증식 우리는 보금자리’ ‘당신들은 기회겠지만 우리들은 삶의 꿈!!’. 어제 숨진 박 씨 아파트 현관문에 붙어 있는 전세사기 피해 호소문들이다. 숨지기 전날까지 피해 구제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같은 피해자들에겐 “버텨보자”며 웃어 보였다고 한다. 임 씨도 어떻게든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피해를 만회하려 보험회사에 재취업도 했지만 수도요금조차 못 낼 처지가 됐다.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에게 벼랑 끝으로 내몰리면서도 애써 당차고 의젓했던 청춘들이라 더 마음이 아프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들은 가벼운 우울감인 ‘메리지 블루’를 겪기 마련이다. 익숙했던 일상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위기를 이겨내고 결혼 성수기를 맞은 요즘 커플들의 우울감은 더하다고 한다. 예식장부터 ‘스드메’(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 비용까지 왕창 오른 ‘웨딩플레이션’ 탓이다. “차라리 코로나 때 결혼할걸” 하고 후회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신랑 예복을 포함한 스드메 가격은 500만∼600만 원으로 코로나 전보다 2배로 뛰었다. 서울 강남권 호텔에서 하객 300명을 초대해 결혼할 경우 5600만 원이 넘게 든다. 1년도 되지 않아 30%가 오른 것이다. 하루 이틀 망설이는 사이에도 값이 올라 “오늘이 가장 싸다”는 말까지 나온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매년 신혼부부 1000명을 설문조사해 발표하는 ‘결혼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결혼한 커플이 신혼집, 혼수, 예식, 신혼여행 등 결혼에 쓴 총비용은 평균 3억3050만 원으로 1년 전보다 15% 증가했다. ▷결혼 시장은 원래 반복 구매가 없어 공급자 우위 시장이다. 여기에 코로나로 미뤄둔 결혼 수요는 급증한 반면 코로나 불황을 못 견디고 상당수 업체가 폐업하는 바람에 공급 자체가 줄면서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 돼 버렸다. 수천만 원짜리 ‘마통’으로도 감당이 어려운 예비부부들은 다른 커플들과 같은 날 웨딩 촬영을 해 할인받거나, 관련 업체 후기를 소셜미디어에 부지런히 써 올려 적립한 마일리지를 현금화하고 있다. 하객들의 부담도 커져 축의금만 내면 5만∼10만 원, 식사를 할 경우 10만∼20만 원을 내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도 웨딩플레이션이 덮쳤다. CNBC 보도에 따르면 올해 결혼식 평균 비용은 2만9000달러(약 3800만 원)로 코로나 이전보다 17% 올랐다. 다들 예식 규모를 줄이느라 평균 하객 수가 2019년 131명에서 2021년엔 105명으로 줄었다. 청첩장을 돌렸다가 취소하고 줌으로 결혼식을 중계하거나, 값이 싸고 하객 수도 줄일 수 있는 주중이나 일요일 아침에 식을 올리고, 생화 대신 조화를 쓰며, 중고 마켓에서 결혼용품을 고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국내외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결혼비용 절감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여름과 겨울 같은 비수기를 노린다. 웨딩플래너 대신 스스로 손품 발품을 팔아 계획을 짠다. 하객 수 오차를 최소화한다. 웨딩 촬영이나 신혼여행 등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에 집중하되 나머지는 과감히 줄인다. 마지막으로 결혼을 미루지 않는다. 내년이면 웨딩플레이션이 더 심해져 “차라리 작년에 할걸” 하고 후회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른이 넘은 여배우에겐 ‘동안’ 수식어가 붙기 마련이다. 문근영(36)은 ‘절대 동안’, 송혜교(42)는 ‘동안의 정석’, 고현정(52)은 ‘명품 동안’, 장미희(66)는 ‘미친 동안’이다. 의사들은 ‘여배우 주사’라며 샤넬주사와 한방 동안침을 홍보한다. 노화를 예방한다는 ‘안티에이징’에 이어 아예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주장하는 ‘디에이징’ 제품까지 나왔다. 모두가 기를 쓰고 젊어지려는 ‘동안 강박’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늙고 싶다”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선언이 신선하다. ▷영화 ‘타이타닉’(1998년)의 케이트 윈즐릿(48)은 사진 보정을 하지 않는다. 잔주름을 싹 지운 홍보 포스터는 “내 눈가의 주름을 전부 돌려 달라”며 반려하고, 늘어진 뱃살을 후보정으로 잘라내겠다는 제안에 “절대 자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변하고 달라지는 얼굴이 아름답다”며 “젊은 세대는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왜 포기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에마 톰슨(64), 레이철 바이스(53)와 ‘영국 성형 반대모임’을 꾸려 활동 중이다. ▷미국에선 메릴 스트립(74)이 얼굴에 칼 대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그는 “나이 먹는 건 억울하지만 성형으로 얼굴을 굳히는 건 우스운 일”이라며 “성형은 사람 간 소통을 가로막는 방해꾼”이라고 했다. 제인 폰다(86)는 “나이가 들어도 삶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 찬 왕국”이라며 시술을 거부하고, 드루 배리모어(47)는 두 딸이 외모 강박을 갖게 될까 봐 성형하지 않는다. 아역 배우 출신 저스틴 베이트먼(57)은 “폭삭 늙었다”는 악플에 “모든 나이엔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내가 멋지다”고 반박했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년)에서 숱 많은 갈색 곱슬머리가 아름다웠던 앤디 맥다월(65)은 요즘 반백의 머리로 다닌다. 예순이 넘어서도 “세월이 비켜간 미모”라며 찬사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이제는 “왜 염색 안 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젊어 보이려면 많은 노력이 든다. 이제 그러기엔 지쳤다”고 했다. “늙어가는 일에 왜 그렇게 수치심을 느껴야 하나. 우린 끝을 향해 가는데 수치심을 느끼느라 낭비할 시간이 없다.” ▷그래도 대세는 안티에이징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젊어지기 위해 아기 오줌 받아 목욕했듯, 샌드라 불럭과 케이트 블란쳇은 신생아의 포경 수술에서 나온 음경 꺼풀 추출물로 피부 재생 시술을 받는다. 전 세계 안티에이징 시장이 매년 5%씩 성장해 2027년엔 75조 원이 될 전망이다. 코코 샤넬은 “어려 보이려고 기를 쓸수록 나이 들어 보인다”며 “스타일은 애티튜드”라고 했다. 많이 웃고 살았다는 증표인 주름을 싹 지운 ‘충격 동안’보다 “젊어 봤으니 이젠 늙고 싶다”는 당당함이 아름다워 보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4·19혁명 51주년이던 2011년 이승만 전 대통령 유족이 4·19묘지에 참배하려다 4·19단체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이승만과의 화해는 4·19정신 폄훼라는 것이었다. 12년이 흐른 지난 26일 이번에는 4·19 주역들이 이 대통령의 148번째 생일을 맞아 그의 묘역을 찾았다. 대학 시절 “이승만은 하야하라”고 외치던 이들이 백발이 되어 “이승만의 공은 인정하자”고 했다. 참배객 중 한 명인 이택휘 전 서울교대 총장(85)에게 단체 참배의 배경을 물었다. 그는 4·19 때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이었다. “이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들었을 땐 민주주의를 살려냈다는 환희를 느꼈다. 하지만 살면서 그가 아니면 이 나라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늦었지만 우리가 (이승만 재평가에) 솔선수범하자고 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뀐 계기는…. “솔직히 진짜 하야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국민이 원하면 내려가야지’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더라. 내심 그를 다시 봤다. 그 후 한국정치사를 연구하며 서울시 인구가 200만 명이던 해방정국에 정치 단체가 600개였고 그중 약 80%는 좌파 성향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대로 뒀으면 공산화됐을 것이다. 이 대통령의 리더십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해 막아낸 것이다.” ―그의 공을 인정하는 건 4·19정신을 부정하는 것 아닌가. “4·19세대의 정치 이상과 이승만의 이상이 다르지 않다.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켰기에 4·19도 가능했다. 우리의 참배가 4·19정신 중 지금 가장 절실한 관용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4·19 주역들이 이 대통령 묘역을 찾던 즈음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했던 6·3세대가 이를 재평가하는 칼럼을 일간지에 게재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국가안보보좌관과 주일 대사를 지낸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83)는 국교 정상화에 찬성했던 부친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인 백봉 라용균 선생으로 당시 야당 몫의 국회 부의장이었다. ―1960년대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석헌 선생은 ‘이 나라의 政府냐, 일본의 情婦냐’라고 규탄했고, 야당 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지지를 표했다가 ‘왕사쿠라’ 소리를 들었다. “부친에게 정부 편을 드는 이유를 따져 물었더니 ‘우리나라가 농업만으로는 살 수 없는데, 다른 선진국들은 한국 산업화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유일한 기회가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전두환 정부 경제수석을 지낸) 김재익 수석과 학생 시절 친했는데 그땐 김 수석도 ‘우린 능력도 자본도 시장도 없어 자동차 공업 같은 건 못 한다’고 하던 시절이다. 결국 부친의 정치인생은 그걸로 끝이 났다.” ―언제 부친이 옳았음을 깨달았나. “6·3항쟁 20여 년 후 미국 외교문서를 연구하며 알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 3만 달러로 인하공대를 설립했는데, 당시 미 외교관들은 ‘벼 품종 개량에나 쓸 일이지’ ‘가당찮은 야심’이라고 했다. 우리가 산업화하는 길은 일본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친은 정치인이면 ‘지금 여기서(hic et nunc)’ 가장 요긴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적이 쳐들어오는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은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얘기해도 정치인은 일단 맞서 싸우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4·19세대와 6·3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 정치인들을 생각했다. 그런 인물이라면 더더욱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뿐 아니라 저것 또한’이라는 원칙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나.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대학마다 봄방학 신설해 연애 장려, 정자 기증받아 난임 여성들에게 제공, 아이 셋 낳으면 대출금 전액 탕감,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 저출산 현상으로 고민이 깊은 나라들이 생애주기별로 내놓은 각종 출산 장려 대책들이다. 정부는 16년간 280조 원을 쓰고도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자 새로운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인데 최근 여당이 내놓은 대책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30세 전에 아이 셋을 낳은 아빠의 병역을 면제하자는 아이디어는 국민의힘 정책위원회에서 나왔다. 이번 주 대대적인 저출산 고령화 대책 발표를 앞두고 대통령이 “과감한 대책”을 주문하자 자녀 1인당 2억 원이 넘는 수당을 지급하는 방안과 함께 문제의 대책을 대통령실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된 후 국민의힘은 “공식 제안한 바 없으며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여진은 이어지고 있다. ▷우선 현실성의 문제다. 서른 전에 아이 셋을 낳으려면 20대 초반에 결혼해야 한다. 한국 남성이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는 평균 입직(入職) 나이는 26세가 넘고, 초혼 나이는 33.7세다. 20대 초에 결혼해 아이 셋을 키울 정도의 경제력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금수저 병역 면제법’이라는 조롱이 나온다. 군 복무 기간이 1년 6개월로 짧아져 셋 낳는 조건으로 면제받으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설사 서둘러 결혼해 부지런히 낳아도 셋째를 보기 전에 서른이 되면 아이 둘을 남겨두고 뒤늦게 입대해야 하는 황당한 일이 생긴다. ▷출산을 병역 문제와 연계하자 남녀 간 논쟁도 달아올랐다. “애는 여자가 낳는데 왜 혜택은 남자가 보느냐”는 주장에 “아이 셋을 둔 아빠가 군에 안 가고 일하면 가족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냐”는 반박이 이어졌다. 여성에게도 병역 의무를 지운 뒤 첫째를 낳으면 엄마, 둘째를 낳으면 아빠의 병역 의무를 면제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기쁘게 감당해야 할 출산의 의무를 군 면제를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발상이 불편하다는 지적에는 의견이 모아진다. ▷예전에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이 휴학이나 연수로 늦게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채용 시 불이익을 주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불필요하게 스펙 쌓으면서 결혼 시장에 늦게 들어오는 현상을 막자”는 취지였다. 모 국회의원은 “여성이 출산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몸매 변화에 대한 우려”라며 출산한 여성의 유방 수술에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을 추진했다가 중단하기도 했다. 아님 말고 식 황당한 저출산 대책은 “이런 나라에서 애 낳고 싶겠나”라는 냉소주의만 부추기게 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