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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배 씨(사업) 성익 대신증권 제주지점장 성봉 씨(사업) 부친상=8일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2리 복지회관, 발인 12일 오전 7시 010-9181-1602}

2003년 10월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인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했다. 종단 개혁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한 뒤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뒤였다. 자연스럽게 민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구촌 현실에 눈길이 갔다. 이에 앞서 강문규 서경석 목사 등이 찾아와 지구촌 차원의 나눔 운동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이 모임을 위한 행사에도 참여했지만 같이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다. 그러던 중 외국 방문길에 나서는 혜진 스님에게 현지 조사를 부탁했다. 뒤에 스님의 말과 사진으로 접한 일부 동남아 국가의 상황은 처참했다. 6·25전쟁 뒤 배부르게 한 끼 먹기도 힘들었던 과거 우리의 굶주림이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학교와 수도, 전기 등 최소한의 기반시설도 부족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캄보디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몽골 등을 현지 답사한 뒤 지구촌공생회 설립에 나섰다. 준비 기간을 포함하면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일단 시작하면 중단되지 않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체 설립은 쉬울 수 있지만 의미 있는 활동이 가능하기까지에는 적잖은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고희 회고록 출간을 위해 상좌들이 십시일반 모은 1억 원과 ‘인도성지순례기’ 출판을 위해 준비한 2억 원 등이 공생회 설립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 정련, 종상, 성타, 지홍, 정념(월정사), 혜자, 설송, 도영 스님 등이 이사로 참여하면서 기금을 보탰다. 정토회 법륜 스님의 한국JTS(Join Together Society)가 있기는 했지만 공생회는 불교계 인사들이 함께 참여해 만든 첫 번째 국제개발구호 단체였다. 내 기억으로 6·25전쟁 뒤 군사 원조를 뺀, 한국에 전달된 해외 원조액은 23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 원조는 국제기구를 통해 들어와 기아와 전후 복구를 위해 사용됐다. 지구촌공생회를 시작할 때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 정도였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도움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뀔 시기가 된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국가와 민족, 인종과 언어, 종교와 문화, 이념과 사상에 차이가 있더라도 이를 차별하지 않고 돕는 것이 우리 삶의 의무다. 불교적으로는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해소하도록 나눔을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보살행(菩薩行)이다. 그래서 지구촌공생회는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세상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모든 존재는 나와 더불어 하나)’라는 가르침의 실천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까지 나는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설립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와 함께 공동위원장을 맡은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활동을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북한 동포를 돕는 활동이 논란에 휩싸이고, 정부의 실업 문제에 대한 지원이 활발해진 뒤에는 공생회 활동에 힘을 집중했다. 공생회는 캄보디아 라오스 몽골 미얀마 네팔 케냐에 지부를 개설해 활동가를 파견하고, 식수 지원과 교육, 지역개발을 돕고 있다. 후원회원은 창립 뒤 3년 만에 1000명이 넘었고, 지금은 회원 7000여 명이 공생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 단체를 창립한 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활동을 통해 빈곤한 이들을 구하는 자비가 곧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실감했다. 공생회의 첫 지부를 세운 캄보디아는 물 사정이 나빴다. 일부 지역을 빼면 대부분 빗물과 웅덩이에 고인 물을 식수로 사용한다. 웅덩이 물은 오염 상태가 심해 각종 수인성 질환의 원인이 되고 있다. 마을에 우물이 생겼을 때 현지 주민들이 환호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마을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까지 찾아와 우물이 생긴 것을 축하했다. 작은 노력으로 현지인들이 감격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지구촌은 말 그대로 한 일가(一家)다. 너와 나, 그리고 세상이 하나임을 깨달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즐거움은 무척이나 크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도 송월주 스님은 지구촌 공생회에 얽힌 사연을 얘기합니다.}

“큰스님, 불 들어갑니다.” 6일 오후 1시 반 대한불교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다비식이 치러진 경남 합천 해인사 연화대. 진행을 맡은 승원 스님의 말이 떨어지자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순간 흰 연기와 함께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를 지켜보던 스님과 신도들은 “불, 법, 승(佛法僧)”을 외치며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나이 지긋한 신도들은 “아이고, 큰스님 정말 가시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연화대 주변 비탈에는 잔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이날은 춥기로 이름난 소한이었지만 해인사 주변은 스님의 미소를 닮은 봄 날씨처럼 훈훈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성철, 혜암 스님의 다비식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대전에서 온 여신도(법명 법지행·法智行·50)는 “평생 청렴한 삶과 끊임없는 공부로 불자들의 사표가 된 스님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11시 해인사 보경당에서는 영결식이 봉행됐다. 조계종의 전국 사찰에서도 같은 시간 추도하는 의미를 담아 5회의 타종을 했다. 행사는 종을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삼귀의, 헌다와 헌향, 지관 스님 행장 소개, 영결사와 법어, 조사,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국민문화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스님에게 추서된 금관문화훈장을 영전에 올렸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은 영결사에서 “스님이 총무원장 소임을 마친 뒤 ‘평생의 원력인 가산불교대사림에 매진할 수 있어 기쁘다’며 천진한 미소로 조계사 마당을 나섰는데 오늘 이렇게 세상과의 인연을 접으시니 후학들은 비탄의 심정을 억누를 길이 없다”며 “후학들이 (이를) 계승하여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종정 법전 스님은 법어를 통해 “비록 오고 감이 없고 생몰이 없다지만 종사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 크게 보인다”며 “종사는 일념정진으로 경률론(經律論)의 3장을 통달하고 교학의 지평을 넓혀 우리 종문을 빛냈다”고 애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 장관이 대독한 메시지를 통해 “지관 대종사는 종교가 다른 저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참으며 오직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면서 “스님은 한국 불교의 유구한 법맥을 이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학승이자 율사였다”고 회고했다. 문도대표인 세민 스님은 “은사 스님이 가산불교대사림이 완간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유훈을 남겼다”며 “남은 문도들은 화합하고, 유훈을 잇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조계종에 따르면 지관 스님은 지난해 6월 원고지 8장 분량의 유훈장을 남겼다. 유훈장에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를 것과 문도들의 화합, 가산불교대사림에 대한 당부, 고향 포항에 고향 방문탑과 부모님을 위한 보은탑을 세운 것을 알리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스님은 또 다비 사찰에 피해를 끼치지 말라며 비상금 1억 원을 맏상좌 세민 스님에게 맡겨 장례비에 보태도록 했다. 이에 따라 문도들은 영결식에서 생화가 아닌 지화와 조화 등을 사용했다. 보경당에서 연화대까지 4km 정도 이어진 장례 행렬은 만장 1500개를 앞세운 채 스님의 법구를 운구했으며 1만여 명이 참석했다. 영결식에는 불자의원 모임 정각회 회장인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 민주통합당 원혜영 공동대표, 김두관 경남도지사, 송영길 인천시장,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송석구 사회통합위원장, 고(故)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등이 참석했다. 대만 불광산사 주지 심배 스님은 “지혜의 등이 서쪽으로 갔다”고 애도했다.해인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내가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1년 대구에서 일어난 페놀 무단방류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 사건은 환경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것임을 보여줬다. 당시 우리 사회는 대통령 직선제로 부분적인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사회민주화와 생존권 보장이 당면 과제였다. 페놀 사건이 사회의 큰 이슈가 됐지만 불교계에서 주도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문제의식을 가진 불자는 적지 않았지만 이를 제대로 다룰 그릇인 조직이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교수와 청년 불자를 중심으로 1992년 공해추방운동 불교인 모임을 조직했다. 이 모임은 부처님의 생명존중 사상과 공존공생의 연기 사상에 입각해 공해를 추방하고 자연보호를 위한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불교도환경 선언문’을 선포하고 ‘공해 없는 세상’이라는 제목의 소식지를 발행했다. 총무원장으로 있던 1995년에는 경부고속철도 경주 통과 백지화운동을 시작으로 사찰 주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96년에는 총무원 사회부 산하에 사찰환경위원회가 결성됐다. 최근 10여 년간 사회적 이슈가 된 환경문제를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새만금과 4대강 개발이다. 두 사업은 찬성과 반대로 국론 분열을 초래했고, 때로 물리적 충돌까지 일어나 큰 우려를 낳기도 했다. 정부의 국책사업은 충분한 검토와 합리적인 토론, 평가 속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그룹의 합의를 거쳐 진행하는 것이 최선이다. 당리당략이나 경제적 효과만을 의식한 개발도, 대안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도 배제해야 한다. 새만금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한창일 무렵 환경운동에 전념하던 수경 스님과 나의 상좌인 도법 스님이 찾아왔다. 두 스님은 개발을 막아야 하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정보도 없고 전문가가 아니니, 지금 뭐라고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다. 개발 찬성과 반대론이 맞서고 있는데 서로 충분히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뒤 다른 상좌인 도영 스님을 통해 새만금 사업과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찬성과 반대 양측의 주장을 경청했다. 나의 결론은 새로 조성할 담수호의 수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등 친환경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국책사업인 데다 도민 대다수가 원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게 고려했다. 정부는 앞으로 새만금 상류인 만경강 동진강의 수질 개선 등 환경적인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약 2조 원에 가까운 재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부가 이처럼 친환경 개발에 신경을 쓰는 것은 수경 스님 등 불교계와 환경단체 등이 노력한 공이 크다. 여러 국책사업에는 동전의 양면이 있다.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수렴해 부정적인 면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합법적인 주민 합의를 거쳐 상당 부분 진행된 사업을 무조건 중단하라는 것은 수술하다 말고 상처를 꿰매는 것과 같다. 4대강 개발은 불교계는 물론이고 국민 전체의 삶에 영향을 주는 프로젝트이기에 나 자신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럼에도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에 먼저 나서기보다는 누군가가 물을 때에만 내 생각을 밝혔다. 일부에서는 내가 4대강 사업과 관련해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다, 4대강 개발에 찬성해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나의 입장은 시종일관 바뀐 것이 없다. “한강 물을 낙동강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물을 거스르는 역수(逆水)이고 국토를 토막 내는 것이다. 그래서 4대강 운하는 반대한다. 그러나 흐르는 물을 바로잡아 가뭄을 극복하고 수해를 방지하는 4대강 개발에는 찬성한다. 단, 이 사업은 친환경적으로 대통령의 임기에 관계없이 지속가능하도록 진행되어야 한다.” 훈장과 관련한 주장은 사실과 다르기에 내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정부에서 밝힌 공적 사항은 네 가지다. 나눔의 집을 운영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위안부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 정립에 기여했다. 함께 일하는 재단을 통해 사회적 기업 지원과 일자리 창출 모델 사업, 빈곤 아동청소년 지원 사업을 추진했다. 지구촌공생회 대표로 캄보디아 라오스 몽골 등 7개 저개발국 빈민 구호 활동, 아동 교육지원사업, 위생교육사업 등을 전개했다. 끝으로 4대강 사업에 대해 국민들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기여했다. 환경사업은 무엇보다 친환경적이면서도 지속가능한 개발이 화두다. 그리고 그 평가도 5년, 10년 뒤 장기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지구촌 공생회를 통한 해외 구호사업에 대해 얘기합니다.}

2일 입적한 지관 스님과 나는 1950년대 후반 처음 만나 50여 년간 인연을 맺어왔다. 종단의 종회의원과 동국대 이사로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며 종단과 동국대의 대소사를 함께 논의하기도 했다.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팔십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 스님이 지난해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남긴 임종게(臨終偈)는 모습만 바뀔 뿐이지 정신은 영원하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초탈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스님은 선·교·율(禪敎律)을 겸비한 수행자들의 스승, 선지식(善知識)이었다. 특히 경학(經學)에 집중해 혜안을 얻었다. 일찍이 15세에 출가한 스님은 당대 고승들의 가르침을 받는 등 복이 많았다. 은사인 자운 스님은 대율사였다. 경학은 대강백인 운허 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선 수행은 해인사 방장과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의 영향이 컸다. 수행과 공부를 위주로 사는 스님들은 흔히 바깥세계에 어둡기 마련이지만 지관 스님은 달랐다. 해인사 주지 시절에는 불교문화재가 민족 전체의 것이라는 뜻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인사에 성보박물관을 짓고 사찰을 정비해 크게 중창했다. 스님은 수행과 종단 운영 등 이사(理事)를 겸비했지만 삶의 대부분은 경학 연구와 제자 육성에 바쳤다. 뛰어난 강사로 스님들에게 경전공부를 시켜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종립학교인 동국대에서도 수천 명의 후학을 양성했다. 스님은 1989년 동국대 총장으로 재임할 때 재단 내의 회계와 입시 문제로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했다. 검찰이 재단 이사장과 총장을 구속 수사하자 해인사 스님들이 시위를 벌이는 등 불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김태호 내무부 장관이 사태 수습을 논의하기 위해 영화사로 찾아왔고 나는 이들의 구속 해제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며칠 뒤 지관 스님이 석방됐다. 스님은 구속될 때도, 풀려날 때도 특유의 웃음을 잃지 않아 ‘총장의 미소’가 화제가 됐다. 불교백과사전인 가산불교대사림에 얽힌 스님과의 인연도 기억이 난다.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던 1980년 스님이 상좌와 함께 찾아와 서울 경국사 주지로 다시 발령해 줄 것을 요청했다. 스님은 이미 삼보사찰의 하나인 해인사 주지를 지낸 데다 사사로운 부탁이 없는 분이어서 뜻밖이었다. 스님은 앞으로 경국사를 평생의 주석처로 삼아 학문 연구와 교육의 거점 도량으로 키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스님을 경국사 주지로 발령했고 이후 경국사는 가산불교대사림을 편찬하는 터전이 됐다. 5년 전부터 사전 편찬을 위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미력이나마 완성될 때까지 보탤 계획이다. 2005년 칠순이 넘은 나이에 총무원장을 맡아 우려도 있었지만 스님은 종단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세웠다. 2008년 정부의 종교편향 문제로 서울광장에서 대규모의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했을 때 스님은 강력한 대응으로 정부와 공무원들에게 종교편향이 없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면서도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고수했다. 일부에서 주장한 대통령 퇴진 등 과격한 주장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스님은 외유내강의 성품이었다. 무엇보다 쉽게 말하지 않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는 분이었다. 삶은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니, 만나면 헤어지고 산 자는 죽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으면서 무상하고 허망하다. 총무원장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자리 중 하나다. 스님은 그런 총무원장으로 있으면서도 일정이 없을 때에는 어김없이 오후 3시경 경국사로 돌아가 늦은 밤까지 사전 편찬에 몰두했다고 한다. 스님의 생애는 남아있는 중생에게 귀감이 됐다. 갈 바를 모르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바세계로 속히 환생해 다하지 못한 중생구제사업을 다시 하시기 바란다. 스님에게 짧은 추모 게송을 바친다.‘가산지관대종사 각령전(伽山智冠大宗師 覺靈前)’작야추성낙강산(昨夜樞星落江山·간밤에 큰 별이 강산에 떨어지니)천통지비백수명(天慟地悲百獸鳴·하늘과 땅이 크게 슬퍼하고 만물이 슬피 우네)욕식종사회광처(欲識宗師廻光處·종사의 깨달음의 경지를 알고자 할진대)춘풍개화추엽락(春風開花秋葉落·봄바람에 꽃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소식이더라)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새만금 간척사업과 4대강 개발 등 환경문제에 얽힌 사연을 얘기합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2일 입적한 지관 스님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다고 4일 밝혔다. 조계종에 따르면 스님은 국민문화 향상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 추서가 결정됐다.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6일 오전 11시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열리는 영결식에서 훈장을 영전에 올린다.}

2006년 7월 대북정책의 진로를 토론하는 모임에서 한 나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큰 논란이 불거졌다. 강문규 손봉호 이세중 박세일 이각범 씨 등 30여 명이 모여 대북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했지만 북한은 미사일 발사 뒤 핵을 갖겠다고 하고 있었다. 국제 사회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북한은 오히려 이산가족 상봉을 중단하고 관광객의 개성 시내 출입 금지 방침도 밝혔다.나는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창립한 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념에 관계없이 남북의 갈등을 해소해야 이산가족과 기아에 시달리는 동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을 보면서 대북정책이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모임을 통해 대북정책의 전환을 촉구했다.“김일성이 김구 선생에게 그런 것처럼 김정일이 DJ를 이용했습니다. 인도적인 지원은 계속해야 하지만 이 도움이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닌지 국제기구를 통한 감시가 필요합니다. 대북정책의 일대 전환이 요구됩니다.”한 참석자는 “박정희의 군사독재를 비판하면서 군을 앞세운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내 발언이 논란이 된 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용선 사무총장 등이 면담을 요청했다. 이 사무총장은 시민운동 단체를 거쳐 지난해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구성된 ‘시민평화포럼’의 공동 대표를 맡은 데 이어 현재 민주통합당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스님, 우리는 북한을 돕는 단체이고, 북한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속았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이래서는 앞으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과 같이 일할 수 없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의견입니다.”(이 사무총장)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북쪽의 심각한 인권 문제도 언급해야 합니다. 남쪽 역대 대통령의 잘잘못을 시시콜콜 모두 따지면서 북쪽에 대해 이 정도도 말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입니다.”서로 같은 얘기가 반복됐다. 결국 이런 갈등이 불거진 뒤 10월 임기가 만료되면서 창립 때부터 10년간 공동대표와 이사장을 지냈던 그 단체를 떠났다.지금도 내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동포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한 책무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평화통일을 위한 것이지 잘못된 체제를 지탱하고 군사적 도발을 돕기 위한 것은 아니다.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대북지원을 위해 노력해 왔다. 불교계 교류와 인도적 지원을 위해 북한에 10여 차례 다녀왔다. 문화 교류를 통해 화해를 조성하고 신뢰를 회복해야만 국가와 사회의 통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특히 문화의 밑뿌리인 종교의 교류가 중요하다. 북한에는 60여 개의 전통 사찰이 보존돼 있고 스님도 300여 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므로 불교 교류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1995년 2월 조선불교도연맹 박태호 위원장과 중국 베이징에서 만나 남북불교대표자 회담을 개최했다. 여러 차례 접촉한 끝에 1997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에서는 남북 불교도 공동발원문을 박 위원장과 나의 공동명의로 발표했다.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1996년 ‘이웃과 민족을 위한 자비의 탁발 행사’를 개최한 데 이어 1997년에는 대북 민간 곡물지원이 허용된 뒤 민간 차원에서는 최초로 옥수수 1380t을 전달했다.방북 중 그쪽 책임자와 얘기를 나누다 서로 얼굴을 붉힌 경험이 있다. 내가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늘리고 긴장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하자, 그 책임자는 “전쟁은 미국 놈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초청하고, 만나주고, 악수해 주고 한 번 만났으니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최근 북측에서는 유례없는 3대째 세습이 진행되고 있다. 착잡하다. 북측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애써 도움을 주고, 그것을 총알로 받아서는 안 된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2일 입적한 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회고합니다. 두 스님은 각별한 인연을 맺어 왔습니다.}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팔십 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팔십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 2일 입적한 지관 스님은 지난해 9월 입원 직전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원고지에 친필로 ‘사세(辭世)를 앞두고’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스님은 2009년 총무원장 임기를 마칠 때에는 “40리 가는 표를 샀는데 가다 보니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내리는 것뿐”이라며 “팥을 솥에 넣고 삶으면 팥죽도 되고 앙꼬도 되지만 팥은 그 솥에 그대로 있고 모양만 변하는 것일 뿐이듯이, 슬플 것도 없고 기쁠 것도 없다”고 했다. 조계종의 대표적 학승(學僧)이자 명리에 연연하지 않아 종단 안팎에서 신망이 높았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5세 때인 1947년 당대 최고 율사(律師)였던 자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평생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은 불교계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혀 왔다. 그러면서도 최연소 본사 주지와 최초의 비구 대학 총장에 이어 종단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총무원장에 올라 불교계에서는 “복을 타고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수행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출가 초반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전에서 경(經) 율(律) 선(禪)이라고 쓴 석 장의 종이를 놓고 매일 108배를 올리며 무엇을 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기도 끝에 마음을 다잡고 종이 한 장을 뽑았을 때 손에 잡힌 것은 ‘선’이었다. 그럼에도 스님은 공부가 좋아 이후에도 ‘경’의 길을 걸어 종단의 대표적인 학승이 됐다. 금석문에 조예가 깊어 한국불교와 관련한 비는 대부분 스님이 역주했으며 직접 조성한 비도 20개가 넘는다. 총무원장에 재임하고 있을 때 주석처인 서울 경국사에서 승용차 없이 버스나 도보로 출퇴근하며 고승들의 행적을 밝힌 ‘역대고승비문총서’ ‘한국불교문화사상사’를 출간했다. 스님은 해인사 강원과 동국대 선학과 교수 등을 지내면서 많은 제자를 육성했다. 해인사 강주 시절 길러낸 학인이 수백 명, 동국대 교수 시절 제자도 수천 명에 이른다. 학승이면서도 스님은 해인사 주지와 중앙종회 부의장을 지내는 등 이른바 종단의 행정을 담당하는 ‘사판(事判)’의 세계에도 밝았다. 1994년 개혁 종단 출범 이후 4년의 임기를 채우고 평화롭게 종권을 이양한 첫 번째 총무원장이었다. 당시 조계종은 1994, 98년 종권을 둘러싼 잇따른 폭력 사태로 위신이 땅에 떨어진 가운데 총무원장을 지낸 정대 스님과 현직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잇따라 입적하는 바람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지관 스님은 1998년 ‘원융화합(圓融和合)’ 정신에 따라 분규 과정에서 승적을 박탈당했던 스님들을 사면하고 임기를 큰 잡음 없이 마쳐 종단 화합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개관에 이어 남북 불교 화합의 상징인 금강산 신계사 복원과 불교의 사회적 관계 강화를 위한 공익법인 아름다운 동행을 창립해 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2008년 정부의 종교 편향 시비가 이는 가운데 서울광장에서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해 불교계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 무렵 ‘인평불어 수평불류(人平不語 水平不流·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면 사람도 말이 없고, 물도 평탄함을 만나면 조용히 머문다)’라는 스님의 말은 세간에 화제가 됐다. 2009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명(碑銘)을 직접 쓰기도 했다. 스님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1982년부터 시작한 불교대백과사전인 ‘가산불교대사림(伽山佛敎大辭林)’ 출간이다. 사전 조사만 10여 년이 걸렸고 현재 12권까지 출간됐다. 곧 13권이 출간될 예정이며, 스님은 총 20권을 계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총무원장 퇴임 무렵 조계사 경내에 조성한 8각10층 세존사리탑 발원문은 그 염원을 잘 보여 준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아끼고 섬기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진행하는 가산불교대사림이 생전에 완간되어 부처님께 헌상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의 뜻은 이제 후학의 손을 기다리게 됐다.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최근 종교 간 갈등과 정부의 종교 편향 시비가 불거졌지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던 시절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을 갓 넘긴 1993년 4월에는 한 부대의 지휘관이 자신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부대 내 법당과 성당을 철거하고 불상을 불태웠다. 1995년에는 YS가 국군중앙교회 예배에 참석하면서 과잉 경호로 불자들의 법회를 방해해 물의를 빚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종교 편향 시비가 계속된 가운데 2008년 서울광장에서 불교 종단들이 대거 참여한 범불교도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종교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자세다. 이들이 이웃 종교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신자들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다종교국가인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종교들이 공존해온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세계 각지에서 폭력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청담 스님(불교), 노기남 대주교(가톨릭), 한경직 목사(개신교)는 종교 간 화합의 상징이었다. 이 만남은 나를 포함한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로 이어졌다. 정부의 태도와 역할도 종교평화의 정착을 위해 중요하다. 양자는 모두 헌법상의 가치인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정치가 종교를, 종교가 정치를 이용하면 불행한 일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가깝게는 조계종 종단사가 대표적 사례이고, 중세 서구 교회의 부패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 총무원장으로 불교계를 대표할 때 각 정당의 총재나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나를 만날 필요가 있으면 총무원 청사를 방문하도록 했다. 불교와 관련된 일 때문에 만날 일이 있을 때에는 공개적으로 만났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적인 이유나 개별적인 만남은 사양했다. 포용력이 큰 불교는 종교평화에 기여할 요소가 많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1996년 10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를 창립해 2년간 공동 대표의장 겸 이사장을 지냈다. 기존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는 종교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기에 아쉬움이 있어 창립을 결정했다. 당시 최근덕 성균관장과 조정근 원불교 교정원장, 김광욱 천도교 교령,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 등이 참여했다. 종교인들이 힘을 모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대표적인 분야가 인도적 지원을 통한 평화통일 기반 만들기와 국민화합,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등이다. 외환위기와 대북 식량난, 동남아 등지의 자연재해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여러 종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위기 극복에 일조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이웃 종교계 지도자와 시민운동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됐다. 서영훈 전 적십자사 총재는 개신교 신자이지만 불교 천도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학도병 징집을 피하기 위해 묘향산의 암자에 숨어 지냈고 천도교 교리에도 밝다. 최 관장은 유학자이자 문필가로 유교 현대화를 위해 노력해 왔고, 한양원 회장은 친화력이 뛰어나고 겸손이 몸에 배어 있다. 대한성공회 김성수 주교는 진보적인 신앙관을 갖고 있지만 다른 성향의 목소리에도 귀를 열어 놓고 있고,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인 손봉호 교수는 청렴하고 원칙을 지키는 삶으로 존경을 받는다. 이세중 변호사는 환경과 통일 등 여러 분야에서 나와 함께 활동했다. 그는 “공직도 의미가 있지만 시민운동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법무장관과 국무총리직 제안을 사양하기도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제 만나도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종교, 내 신앙이 옳다 그르다 하는 불필요하고도 비생산적인 시비보다는 전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비와 사랑, 인의 등 각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게 표현되지만 그것은 다른 길이 아니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모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한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10여 차례 방북했던 북한과 대북정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지켜본 시민운동은 민주주의를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1988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 그해 6월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았다.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와 작고한 김지길 목사가 함께 활동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1노(盧) 3김(金)’이 후보로 나서 대한민국의 좁은 땅은 다시 지역색에 의해 갈라졌다. 지역감정 극복은 현재 진행형의 과제이지만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그 폐해가 컸다. 대선 뒤 상황은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강력하게 분출하던 시기였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도 커졌다. 1989년 7월 변 교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황인철 변호사 등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로 취임했다. 이에 앞서 서경석 목사 등이 찾아와 시민운동을 통해 경제적인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대안 있는 비판과 평화적이면서 합법적인 추진, 제도화 등의 목표를 얘기했다. 일부 단체와 달리 대안 제시와 평화적으로 활동한다는 원칙이 맘에 들어 흔쾌히 합류를 결정했다. 나는 8년간 경실련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이 기간 시민운동의 ‘ABC’를 처음부터 배우면서 적지 않은 일을 했다. 경실련의 가장 큰 목표였던 금융실명제가 YS(김영삼 전 대통령) 정권에서 제도화에 성공했다. 임대주택법을 개정해 임차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임대주택 건설을 늘리도록 해 주택문제의 해결에 기여했다. 경실련의 대안이 정책에 반영되면서 시민운동의 새로운 미래가 열렸다. 이 무렵 환경과 통일, 공명선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단체들의 활동이 활성화됐다.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자 그 영역이 계속 넓어졌다.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1990∼1995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 공동대표 겸 이사장(1996∼2006년),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1998∼2003년) 등을 맡았다. 시민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경험을 다시 불교계에 도입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불교계의 경우 시민단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던 상황이었다. 우리 불교가 지나치게 개인적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을 전해 올바른 지혜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사회와 시대 속에서 생기는 고민을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현대판 보살행이다. 나는 경실련에 참여하면서 공명선거추진 불교도 시민운동연합, 경실련 불교시민연합, 공해추방운동 불교인 모임, 불교인권위원회 등을 결성하거나 주요 직책을 맡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주거할 수 있는 ‘나눔의 집’ 건립 추진위원장도 맡았다. 나눔의 집은 처음에는 서울 서교동 전셋집으로 시작해 혜화동으로 옮겼다가 경기 광주시 퇴촌에 건립했다. 최근 시민운동과 정치권의 관계가 논란이 되고 있다. 멀리는 서영훈 서경석 씨 등이 정계에서 활동했고, 가깝게는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모두 가까운 분들이지만 시민운동의 미래를 위해 쓴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운동의 ‘생명줄’은 도덕성이다. 특히 정치권, 재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시민운동가 출신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변명은 대체로 두 가지다. “정부의 힘을 빌려 제대로 하고 싶다”와 “정부가 못해 나섰다”. 둘 다 틀렸다. 시민운동 자체가 애초 한꺼번에 목표에 도달하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다. 힘들고 더딘 게 맞다. 그렇게 땀 흘리며 올라가야 주변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고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관변 단체나 기업 사외이사 자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다해야 한다. 눈앞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치권과 결합해 걸핏하면 거리로 나가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시민운동은 국론이 분열될 때 이를 조정할 수 있는 균형추다. 여와 야에 관계없이 한쪽으로 쏠려 있다고 간주되면 누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나. 대안 제시를 통한 법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 거리와 인터넷에서 다수의 힘에 의지한다면 그 단체는 시민운동의 관점에서는 ‘자격상실’이다. 개인적으로 정치권에 진출한 시민운동가 출신들이 잘하기를 바랐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들은 다시 돌아와 시민운동가를 자처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 시민운동이 더 이상 정치권으로 가는 ‘주차장’이 돼서는 안 된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교평화와 교류에 관해 얘기합니다.}
◇병무청△입영동원국장 박희관 △광주전남지방병무청장 임재하 △인천경기〃 김종호 △대전충남〃 김노운 △경남〃 김덕기 △제주〃 신현삼 △병무민원상담소장 김철수 △기획조정관 장갑수 △기획재정담당관 황평연 △행정관리〃 이성수 △규제개혁법무〃 남재우 △병역자원과장 김기룡 △징병검사〃 최영래 △정보관리〃 김영재 △현역입영〃 박우신 △현역모집〃 박명규 △사회교육복무〃 유광현 △고객지원〃 강상현 △운영지원〃 이상훈 △서울지방병무청 징병관 차명주 △부산〃〃 김중겸 △대구경북〃 〃 박정환 △인천경기〃 〃 오세완 △광주전남〃 〃 조영기 ▽부이사관 △대변인실 홍승미 △사회복무국 이동환}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동영 씨(재미) 부친상=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4일 오전 8시 반 02-3410-6916}

1982년 10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리 수행자라고 해도 1980년 10·27 법난 뒤 1년 동안은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출가한 뒤 처음으로 종단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 포부를 펴려고 했지만 타의에 의해 7개월 만에 물러났으니 그 상처를 달랠 길이 없었다. 법난 과정에서 개인적인 불명예뿐 아니라 전체 불교계가 비리의 온상으로 치부됐다. 사필귀정으로 당시 발표가 허위였음이 속속 드러났지만 불교계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니 법난의 상처들이 기억 속에는 있으되 그 미움은 엷어졌다. 혜정 스님의 제자이자 조카 상좌인 지명 스님의 초청으로 미국행을 결심했다. 어차피 총무원장에서 내쫓기면서 2년간 공적인 일을 맡지 못하게 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말처럼 자의 반 타의 반 떠난 길이었는데 예상보다 길어져 3년 가깝게 해외에서 지낸다. 당시 미국에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에 한국 사찰 100여 곳이 있었다. 숭산, 법안, 도안 스님과 같은 분들이 교포들을 상대로 포교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그곳 사찰들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순회하며 200여 회의 법문을 했다. 지명 스님이 있던 로스앤젤레스 반야사에서는 회주를 맡았다. 그곳을 중심으로 설법도 하고, 교포 가정을 방문해 신앙상담도 했다. 내친 김에 캐나다와 남미를 두루 돌며 설법 여행을 하기도 했다. 1984년 6월에는 유럽 여행을 떠났다. 영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네덜란드, 모나코 등지를 돌며 각국 문화와 생활상을 살펴봤다. 그해 말에는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대만 등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일본 불교계도 둘러봤다. 긴 여행 끝에 1985년 봄, 그리운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이 시간 동안 나는 자신의 내면은 물론이고 해외 문명과 불교를 살필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 한국 불교와 조국은 생각보다 작고, 안타깝게도 초라했다. 우리 불교는 전통적으로 참선 위주의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왔다. 맞는 얘기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세상과 떨어져 있는 ‘초세간(超世間)’주의에 빠져 대중의 고통과 멀리해 왔다는 아픈 현실이 눈에 들어 왔다. 제대로 된 수행 전통의 부족과 대처(帶妻)를 이유로 얕잡아 보던 일본 불교조차도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랜 시간 관계를 맺는 생활 불교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걸음마 단계에 있던 미국 내 불교 사찰들도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반면 우리 불교는 산중에 머문 채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지나친 풍요와 물신화는 문제였지만 무질서한 속에서도 분명한 룰이 존재했다. 어떤 모임에 가도 대가 없이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주장이 달라도 법의 틀을 지키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가치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 광활한 세계를 돌며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인연을 기다리는 안목과 여유도 갖게 됐다. 출가한 뒤 30년 가깝게 종단 일에 쫓겨 자신을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해외에서의 3년은 내게 아주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시간을 쪼개 매일 화두를 들었고, 경전을 포함해 300여 권의 책을 정독했다. 출가 초기를 빼면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돌이켜 보면 정화운동과 종단 개혁에 참여하면서 그 성과와는 별도로 마음의 상처도 깊었고 아픔도 컸다. 나는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면서 성숙해졌고, 기다림의 지혜도 얻었다. 종단 중흥과 개혁을 향한 나의 신념이나 원력은 큰 변화가 없지만 사물을 보는 눈과 추진하는 자세에는 차이가 생긴 것이다. 갑자기 주어진 ‘삶의 쉼표’, 그것은 이후 깨달음의 사회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큰 힘을 주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부터 송월주 스님은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1956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출가했을 때 바깥세상은 궁핍과 대립, 혼돈의 연속이었다. 세상의 번뇌를 끊을 진리를 찾아 나섰지만 그 길은 쉬운 게 아니었다. 자연을 벗 삼아 여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의 삶에 이끌려 출가했지만 막상 발을 들여놓고 보니 출가 생활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바깥세상이 어려우면 절집도 가난한 법이다. 더욱이 대처승(帶妻僧)을 상대로 한 정화운동이 본격화하던 시기라 산중도 조용할 수는 없었다. 수행과 계율에 철저했던 은사 금오 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월산·범행·월남·탄성·이두·혜정·월서·월탄 스님 등 50명에 가깝다. 앞서 밝힌 대로 ‘월’자를 딴 제자가 많아 불교계에서는 ‘월자문중(月字門中)’이라는 말이 나왔다. 나는 호랑이 스승 아래 큰 뜻을 품은 사형제들 사이에서 열심히 수행했다. 부모의 정을 뿌리치고 나선 길이기에 목숨을 걸고 공부했다. 은사가 준 화두는 ‘이 뭐꼬’였다. 20대 후반 한때 건강이 나빠 잠을 청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다. 백약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화두삼매(話頭三昧)에 빠졌고, 그 순간 병이 사라지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면서 나의 수행 근기(根氣)는 참선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선 위주로 수행하기에는 몸이 체질적으로 약한 데다 정화운동 중 은사를 도와 여러 소임을 맡아 사찰 내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개인적 수행뿐 아니라 종단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원력(願力)도 더 강해졌다. 맏사형 월산 스님은 나이 차가 많아 은사 같은 분이었다. 일찍이 봉암사 결사에도 참여한 선승(禪僧)이었다. 그러면서도 갑사와 신흥사, 법주사 주지와 총무원장을 지내는 등 행정력도 뛰어났다. 언제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주곤 했다. 범행 스님은 선학원 이사장과 동화사, 불국사 주지를 지냈다. ‘효(孝) 상좌’인 탄성 스님은 덕이 뛰어나 문중 내의 대소사를 챙겨주는 장형 같은 존재였다. 스님은 종단의 위기를 수습하는 역할을 무리 없이 처리했다. 1980년 법난 때 나는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총무원장 권한을 당시 정화중흥회의에 참여했던 탄성 스님에게 넘겼다. 1994년에는 반대였다.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개혁세력에 의해 물러난 뒤 탄성 스님이 사태 수습을 맡았다. 그 뒤 내가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뒤 업무를 인수했다. 법난 때도 종단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선 탄성 스님의 속뜻을 알기에 오해는 없었다. 혜정 스님과의 인연은 필설로 쉽게 담을 수 없다. 고향 친구이자 사형이자 평생 도반이었다. 지난해 혜정 스님이 주석하던 충북 괴산군 각연사에 갔다. 스님은 무의식 상태였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멸한다며 위로하자 마치 의식이 돌아온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적 하루 전이었다. 젊은 날 그이와 주고받은 편지에서 내가 애국(愛國)과 위민(爲民)의 삶을 얘기하면, 그는 불법의 즐거움을 담아 화답했다. 그가 언급한 무상송은 사실상 나의 출가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삼계는 마치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도니 백천만겁의 많은 세월을 겪은 티끌이로다) 차신불향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이제 이 몸이 금생에서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사제 월서 스님은 종회의장과 호계원장을 지낸 뒤 원로회의 의원으로 있다. 정화운동 중 할복을 시도했던 ‘육(六)비구’의 한 명인 사제 월탄 스님은 1994년 총무원장 선거에서 경합하는 등 얄궂은 인연을 맺었다. 한 스승 아래서 배운 뒤 50여 년이 흘렀다. 이미 세상을 뜬 사형제도 적지 않다. 우리들은 출가 뒤 자신이 정한 뜻에 따라 그 길을 걸었다. 때로 같은 길에서 만났고, 어느 때는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다. 쌓은 정보다 미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이하랴. 세월을 이기는 장사 없다는 말이 맞다. 내가 옳다고, 그걸 다음 생에 지고 갈 것도 아니다. 세월을 이기는 것은 없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1980년 10·27법난 뒤 자의반타의반 해외로 떠나 미국과 유럽 속의 불교와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1953년 말 서울에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셋째 형의 서울 집에 기거했다. 6·25전쟁은 끝났지만 도시 곳곳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미처 복구하지 못한 건물의 잔해도 그대로였다. 먹을 것이며 입을 것이며 모든 것이 부족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지만,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던 궁핍한 시기였다. 그 시절 서울 조계사에 들렀다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그는 두 살 위였지만 내가 월반해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놀랍게도 삭발하고 잿빛 가사를 입은 스님이 돼 있었다. 고향 친구이자 평생 도반으로 지낸 혜정 스님(1933∼2011)이다. 그 만남은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실로 묘한 것이었다. 고향과 어린 시절, 스님의 삶 등 둘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1954년 초 혜정 스님이 수행하던 법주사로 향했다. 한 달 정도 쉬고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숨을 쉴 때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처음 한 달만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곳 생활이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출가하겠다고 발심(發心)했다. 얼마 뒤 셋째 형이 아버지 편지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출가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시골집으로 증명을 떼러 보낸 통에 내가 법주사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불교는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다. 나라와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고 위국위민(爲國爲民)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그것이 어렵다면 부모 곁에서 고향을 지키는 필부(匹夫)로 살기를 바란다. 매일 해가 뜨는 동창을 보며 너를 기다리겠다.” 나이 든 아버지의 편지에는 구구절절 막내아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다시 은사인 금오 스님과 형님이 얘기를 나눴다. 은사는 다짜고짜 “동생, 데려가시오”라고 했다. 이에 형님은 “새 떼도 나무에 모였다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제 갈 길을 갑니다. 형제지만 뜻이 다른 듯합니다”고 말했다. 그랬다. 작심하고 새 세상을 찾아 떠난 나로서는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1956년 3월 지리산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2년 뒤 금산사에서 총무스님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출가한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어머니가 왔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30분 이상 늦게 나갔다. 기도를 하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나섰다. 오동나무 그늘에 계셨다. 어머니는 대뜸 “막둥이 보러 왔는데 왜 빨리 나오지 않았냐”고 했다. 제 아무리 큰 뜻을 품은 출가자도 어머니에게는 그냥 막둥이였다. 어머니는 하루 저녁 주무시고 가셨다. 몇 년 뒤 교편을 잡고 있던 넷째 형이 찾아왔다. 당시 나는 화엄사에서 교무스님으로 주지인 은사를 모시고 있었다. 은사는 이번에도 “데려가시오”라고 했다. 형님은 “제갈공명은 민심수습과 치국평천하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그 형인 제갈근은 누에를 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고향을 지키며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제 길이고, 동생의 길은 따로 있습니다”고 했다. 그 넷째 형은 뒤늦게 한학을 배워 아버지를 즐겁게 했고, 형제 중 줄곧 부모 곁을 지키며 살았다. 은사의 입버릇인 ‘데려가시오’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계속 수행할 근기가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그러나 은사는 수행에는 엄격했지만 제자들이 잠시 다른 곳에 가게 되면 눈물을 보일 정도로 속정이 많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나중 일심화(一心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매년 부처님오신날이면 금산사에 오셨다. 훗날 나이가 들어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를 잘 모시려고 노력했다. 나의 뜻이 세속의 정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어지기도 했고, 출가를 이유로 부모를 몰라라 하는 것도 사람의 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젊은 시절 왜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았으랴.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월산 범행 탄성 혜정 월서 월탄 등 종단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형제간에 대해 얘기합니다.}

내 고향은 전북 정주시 산외면(山外面)이다.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시에 속한다. 타지 사람들은 이곳을 풍수적으로 모래펄에 기러기가 내려앉는 모양새, 평사낙안(平沙落雁) 형의 명당 터라고 했다. 노령산맥의 줄기인 575m의 상두산(象頭山)도 있다. 부처님이 설법을 펼친 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어린 시절에는 쌀농사도 제법 했지만 지금은 토종 콩과 한우 산지로 유명하다. 나는 1935년 5남 4녀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현섭이다. 남자 형제 중 막내였다. 아버지(송영조)는 자수성가한 대농으로 사서삼경에 능통했고 운(韻)이 떨어지면 시를 척척 지을 정도로 한학에 밝았다. 집안은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아버지는 유교적 사상과 예법에 관해 자주 얘기했다. 실제 생활과 관련한 구체적인 주의를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근검절약은 물론이고 술과 노름, 여성과의 관계를 엄격히 절제하라고 했다. 어머니(최종을)는 엄격했던 부친과 달리 막내아들의 어리광을 항상 잘 받아주던 분이다. “남을 욕하지 마라” “싸움판에 끼지 마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욕하다 보면 싸우고, 싸움 속에 쉽게 보이는 것이 욕이다. 어머니는 어쩌면 아들이 세상 시비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면서 여유 있게 살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나를 서울 중동중학교에 진학시켰다. 농지개혁 등의 이유로 가산이 기울기는 했지만 월반(越班)할 정도로 성적이 괜찮았던 막내아들의 총기를 그냥 썩히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중학시절은 연극과 영화에 흠뻑 빠져 지냈다. 이순신 장군, 사육신과 단종, 김구 선생…. 지금 기준으로는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처음 접하는 연극이며 영화는 새로운 세계였다. 위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이 많았다. 로맨스를 다룬 작품보다는 교훈적이고 영웅적인 작품들이 좋았다. 학교는 마칠 수가 없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둘째 형이 선거에 나서자, 나도 형을 돕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는데 곧 6·25가 터졌다. 10대 중반에 접한 전쟁은 내 인생 전체에 어쩔 수 없이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 통에 육친이 죽는 아픔을 겪지는 않았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내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전에는 마을 전체가 한 가족처럼 지냈지만 전쟁이 나자 이념갈등으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나는 중학교 때만 해도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식객(食客)을 마다하지 않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리 집은 재주꾼들이 모여 문학적 재능을 뽐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이었다. 둘째, 셋째 형이 잇달아 정치적 포부를 가지면서 선거 얘기가 주가 됐다. 나도 형들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지만 체질적으로 기가 약했다. 6·25가 터지자 가산 몰수를 당하고, 포격으로 화염이 치솟거나 흉흉한 분위기를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정치가 내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이 끝났지만 다시 서울로 갈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고 난리를 겪은 부모님은 나를 다시 서울로 보내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셨다. 대신 집에서 가까운 정읍농고로 진학했다. 40여 년이 지난 1998년 나는 뒤늦게 중동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산외초등학교 시절 추억이 있다. 40리 길을 걸어 금산사로 소풍을 가곤 했다.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다. 제법 먼 길이지만 힘든 기색도 없이 절에 도착해 법당의 부처님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들이 난다. 처음 만난 부처님은 무섭기보다는 우람하고 웅장했다. 상춘객도 적지 않았고 지프를 탄 미군도 여럿 있었다. 금산사 전체에 벚꽃이 만개했었다. 벚꽃이야 지금도 볼 수 있지만, 어린 눈에 비친 그 벚꽃의 자태와 향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출가에 얽힌 이야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역대 총무원장 선거 중 1999년 11월 치러진 제30대 총무원장 선거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경우는 드물었다. 앞서 고산 스님이 제29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됐지만 선거 공고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법원의 판결로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선거는 지난번처럼 고산 스님과 지선 스님의 경합 구도가 됐다. 그러나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나를 지지해온 개혁그룹 주류의 지지를 받아온 고산 스님이 “상좌뻘인 사람(지선 스님)과 경쟁하지 않겠다”며 불출마를 고집한 것이다. 고산 스님은 탄성, 월서 스님과 상좌인 영담 스님의 간곡한 설득도 뿌리치고 급기야 지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고산 스님을 추대하려던 지지자들은 ‘장수’를 잃은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게다가 지난 선거에서 진 지선 스님 그룹은 총무원장과 동국학원 이사장을 지낸 녹원 스님을 따르던 이른바 ‘직지사단’과 제휴했다. 녹원 스님이 경북 김천시 직지사를 근거로 활동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직지사단에는 법등 정휴 종광 스님 등이 있었고 정대 법장 스님도 가까운 관계였다. 종단 내부의 이념적 지형도에서 볼 때 진보적인 지선 스님 그룹과 가장 보수적인 세력이 종권(宗權)을 위해 결합했다는 의미에서 ‘불교판 DJP 연합’이라고도 불렸다. 정대 스님도 지선 스님 캠프에서 역할을 맡아 선거는 이미 끝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개혁그룹 주류는 지선 스님 지지자들이 종권을 잡을 경우 그 성향을 감안할 때 종단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후보등록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정대 스님이 아침 공양 무렵 영화사로 찾아왔다. 전날 저녁 개혁그룹 주류 쪽에서 만나러 왔다는 것이다. “간밤에 여럿이 와서 저를 후보로 추대하겠다고 하네요. 그래서 답을 미루고 영화사 회주 스님 말씀을 들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스님 생각은 어떠신지요?”(정대 스님) 나는 “할 때가 되셨죠”라고 답했다. 그 뒤 지선 스님 쪽으로 기울었던 선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정대 스님이 출마하는 바람에 불교판 DJP 연합은 무너졌고, 나름의 세가 있었던 법장 스님도 정대 스님을 지지했다. 개표 결과 정대 스님이 재적 과반수인 166표를 얻어 경쟁자인 지선 스님을 32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정대 스님이 ‘자다가 총무원장이 됐다’고 하는 사연의 전말이다. 현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은사인 정대 스님은 승가대 이전과 현재의 총무원이 있는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사(佛事) 등 종단 발전을 위해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정대 스님은 25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출가해 총무원 간부직을 두루 지냈고, 종회 의원을 일곱 차례나 하는 등 종단 행정에 밝았다. 스님은 격식과 체면에 얽매이지 않는 편으로, 총무원장 재임 때 민감한 정치적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1년 1월에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해 “그 사람이 집권하면 단군 이래 희대의 보복정치가 난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말해 종단 안팎을 벌컥 뒤집어 놓았다. 그 뒤 내가 이 얘기를 화제로 꺼내려 하자 정대 스님은 먼저 “진의가 왜곡됐다”며 길게 해명하면서 내 말문을 막기도 했다. 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사에 관한 정대 스님의 원력(願力)은 대단했다. 옛 청사는 몇 차례의 폭력적인 종단 분규를 겪으면서 ‘흉가’의 이미지가 크게 남아 새로운 불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 계획은 내가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불교박물관으로 시작해 정대 스님이 건축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한 뒤 나중에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을 때 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완공됐다. 종단 행정을 염두에 둔 스님의 대외적 행보는 논란이 많았지만 넉넉한 인간미에 관해서는 시비가 없었다. 총무원장이 되고 난 뒤 과거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마저 품을 정도로 인간관계의 그릇이 넓었다. 정대 스님은 젊은 시절 건강을 해친 탓에 2003년 66세의 아까운 나이에 입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종단 발전을 위해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4년 이후 종단개혁을 둘러싼 허물을 털어놓았다. 이는 남 탓이 아니라 종단개혁의 인과(因果)를 밝히기 위함이다. 지금의 종단 역시 한순간이 아니라 오랜 노력과 갈등 속에 이뤄진 것이다. 남에 대한 ‘허물 타령’으로 시간을 축내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다. 이제 공심(空心)으로 돌아가 불교 발전을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출가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1998년 12월 29일 제29대 총무원장 선거가 치러졌다. 새로운 총무원장의 과제는 정화개혁회의의 폭력 점거로 얼룩진 종단 수습과 94년 출범한 개혁종단의 개혁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당시 종단 내에는 범종추에 이어 종단의 핵심을 담당한 개혁그룹 외에도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다. 우선 스승을 중심으로 문도가 형성되는 우리 불교의 오랜 전통에 따라 여러 문중(門中)이 있다. 여기에 바깥 사회의 행정부라고 할 수 있는 총무원과 이를 견제하는 국회 격인 중앙종회, 종단 원로들의 모임인 원로회의, 각 지역에는 25개 교구의 본사 주지들이 있었다. 종단사를 보면 우여곡절이 있지만 94년을 기점으로 총무원장 중심제가 정착된다. 이를 뒤집으려고 한 것이 98년 종단사태의 본질이다. 이후 종정(宗正)은 종단의 법통을 잇는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된다. 총무원장이 사실상 종단을 이끌기 때문에 종단 내 여러 그룹은 자신의 정책을 반영하기 위해 선거에 큰 힘을 쏟는다. 세속정치와 비슷하다는 비판도 있겠지만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된 시스템이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 1인에게 힘이 집중됐을 때 생기는 폐해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98년 선거를 앞두고 개혁그룹은 의견이 나뉘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시작으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청화 법안 효림 성관 스님 등이 지선 스님을 지지한 반면 다수는 고산 스님 쪽으로 돌아섰다. 조계사 대웅전에서 거행된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재적 반수 이상인 167표를 얻어 1차 투표에서 당선됐다. 지선 스님은 115표였다. 한쪽에서는 지선 스님이 종권을 잡아야 진정한 개혁이고, 개혁완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는 고산 스님을 선택한 것이다. 율사이자 강사로 명성이 높은 고산 스님은 개혁종단에서 호계원장을 지냈다. 고산 스님은 나를 지지했던 개혁그룹 주류와 문중, 본사 주지 등 다양한 그룹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는 김대중(DJ) 대통령 시절이었다. 일각에서는 지선 스님이 전남 장성 백양사 주지를 지낸 데다 DJ 측근과 가깝다며 유리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권력은 선거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본다. 94년 이후 종단의 자주성이 강화됐고 8년간 권력에 의지했던 의현 스님 체제의 폐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표가 고산 스님 쪽으로 몰린 것은 상대적으로 젊은 지선 스님보다는 고산 스님의 경륜과 안정감이 신뢰감을 줬기 때문이다. 1999년 1월 취임한 고산 스님은 “종단 안정과 개혁을 바라는 전 종도와 사부대중이 역할을 준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원로 대덕 중진스님들의 공의를 결집해 하루속히 종단을 정상화하는 데 진력하겠다”고 밝혔다. 그 뒤 4월 혜암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9월에는 총무원 청사 신축 등 조계사 성역화 불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종단이 안정을 되찾아갈 무렵 예상 밖의 사건이 터졌다. 그해 10월 법원이 정화개혁회의가 제기한 소송과 관련해 “고산 총무원장은 자격이 없다”고 판결한 뒤 직무대행자로 정화개혁회의 측이 추천한 도견 스님을 지명한 것이다. 법원은 종단이 총무원장 선거를 종단 기관지인 불교신문과 조계사 게시판에 공고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 이에 종단은 종단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부당한 판결이라며 조계사에서 1만2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자주권과 법통수호를 위한 사부대중 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종단 외곽에 있던 정화개혁회의 측은 종권 인수를 이유로 조계사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종단은 시비를 피하기 위해 다시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해 11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서는 정대 스님이 재적 반수가 넘는 166표를 얻어 지선 스님을 32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정대 스님은 11월 23일 제30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자다가 총무원장 됐다’는 정대 스님 당선에 얽힌 사연을 얘기합니다. 정대 스님은 스스로 ‘창종(創宗) 이래 정치중 1번’이라고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 12월 23일 조계종 총무원 청사에 경찰 5000여 명이 투입됐다. 청사를 불법으로 점거하던 정화개혁회의가 해산된 뒤 종단 집행부는 43일 만에 청사로 복귀했다. 1998년 사태를 회고하면서 혜암 스님과 월하 스님, 두 어른과의 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혜암 스님은 종단 사태로 월하 스님이 불신임된 뒤 1999년 4월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됐다. 깡마른 체격에 단호한 눈빛을 지닌 혜암 스님은 출가 후 평생 참선에 전념해온 선승(禪僧)이다. 1946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인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효봉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의 수행은 남달랐다. 스님은 성철 청담 향곡 스님 등 20여 명과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고 이후 선방에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수행에 전념했다. 깨달음을 주제로 혜암 스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깨달으셨냐”고 묻자 스님은 “수행으로 유명한 도인 스님(금오 스님)으로부터 공부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만 했다. 종단을 대표하는 선승이지만 함부로 깨달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혜암 스님은 다른 선승들과 달리 종단이 위기에 빠지자 일신의 안일(安逸)을 접은 채 산중을 나섰다. 1994년 총무원장 의현 스님 측과 ‘범종단개혁추진위원회’(범종추)가 대립하고 있을 때에도 종단개혁에 동참했다. 스님은 원로 의원들과 서울 대각사에서 모임을 열고 의현 스님의 3선이 이뤄진 종회 무효화, 총무원장 즉각 사퇴, 전국승려대회 소집 결의 등을 주도했다. 이후 단식 정진하며 산속에서 수행하던 수좌들의 개혁 참여를 이끌어냈다. 스님은 1998년 정화개혁회의의 청사 점거와 폭력 사태 속에서도 원로회의 의장으로 종헌, 종법의 수호를 위해 앞장섰다. 두 차례 종단 사태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원로 스님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던 혜암 스님의 거취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약 스님이 그때 다른 입장을 취했다면 종단이 어디로 갔을지 실로 예측하기 어렵다. 스님은 중요한 고비마다 빠르게 결단을 내렸고, 일단 결정하면 단호했다. “배사자립(背師自立), 스승이라도 그르다면 따를 수 없습니다. (개혁의 내용을 담은) 종헌, 종법은 ‘밥’입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종단이) 생명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평소 몸이 약했던 스님은 2001년 12월 31일 해인사 원당암에서 입적했다. 종단 개혁을 되돌리려는 세력에 맞선 스님의 사자후(獅子吼)가 귓가에 생생하다. 이에 앞서 언급했지만 월하 스님과의 좋은 인연은 종단 사태를 겪으면서 악연으로 치달았다.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고승인 경봉, 구하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고 불보사찰인 통도사를 60여 년간 지켰다. 선교(禪敎)를 겸비했고 80세가 넘어서도 방청소와 빨래를 직접 하고 대중과 함께 공양하고, 경내 청소 등 울력(공동 일)에도 빠지지 않았다. 스님은 정화운동과 종단개혁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1950년대 효봉 청담 인곡 경산 스님과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했고, 1979년 조계사와 개운사 측이 갈등할 때는 총무원장으로 분규 종식에 기여했다. 1994년에는 의현 스님의 3선을 반대하는 개혁회를 적극 지지했다. 내가 총무원장 후보 사퇴를 발표할 당시 월하 스님을 만나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다. 그때 “아직은 갈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 종단 사태 이후 왕래가 없었다. 그러면서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2003년 12월 덕명 스님이 입적하자 조문하기 위해 범어사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건강이 좋지 않던 월하 스님의 문병을 가겠다고 마음먹고 떠난 길이었다. 조문한 뒤 통도사로 향했는데 도착하니 월하 스님의 장례를 위한 상청이 차려지고 있었다. 문병길이 조문길이 돼 버렸다. 월파 스님, 초우 스님, 경우 스님, 정우 스님 등 문도들을 만나 조의를 표했다. 피차 무슨 허물을 말하랴. 다만 남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단 사태의 수습 과정과 고산, 정대 스님이 잇따라 선출된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싼 종단 안팎의 사연을 말합니다.}

1998년 11월 12일 제29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상황은 급박하게 흘렀다. 4일 서울 조계사에서 종정 교시 봉행 정진대회가 열린 데 이어 11일 250여 명이 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중앙종회 해산, 총무원장의 해임과 징계, 선거 유보와 이른바 ‘정화개혁회의’ 출범을 결의하고, 나의 3선(選) 저지를 명분으로 총무원 청사를 불법으로 점거했다. 1980년 초법적 존재였던 ‘국보위’를 연상시켰다.당시 총무원장 후보는 나와 월탄, 지선, 설조 스님 등이었다. 정화개혁회의의 점거로 선거는 불가능했다. 종단은 16일 봉은사에서 중앙종회를 열어 총무원 청사 즉각 반환을 촉구하고 후보자 전원 사퇴, 전국승려대회를 통한 사태 수습을 결의했다.불법 점거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종회의장인 법등 스님과 영담, 정휴, 명진 스님을 한 호텔에서 만났다. 이들은 나를 지지하지만 분규 확산을 막고 종단을 지키기 위해서라며 후보에서 사퇴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말없이 그 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종헌·종법을 지켜야 한다, 총무원 청사 강점을 풀어야 한다, 사태 수습을 위해 백의종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원로회의 의장 혜암 스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 사실을 밝혔더니 스님은 “종단을 위해 큰 불사(佛事)를 했다”고 말했다. 이어 ‘후보 사퇴는 개혁을 위해 같은 배를 탄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던 학담, 지홍 스님 등을 간곡하게 설득한 뒤 임기가 끝나기 하루 전인 19일 영화사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가졌다.나의 사퇴로 정화개혁회의가 존재할 명분 자체가 사라졌지만 총무원 점거는 계속됐다. 3선 저지를 구호로 내세웠지만 목적은 다른 것이었음이 명백해졌다.이에 앞서 17일경 당시 총무부장 도법 스님을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발령했다. 지하, 지상, 원우, 학담 스님 등 7, 8명에게 대행을 맡을 것을 제안했지만 모두 고사했다. 그 뒤 도법 스님이 찾아왔다.“의견이 모였습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제가 권한대행을 맡겠습니다.”(도법 스님)나는 “한번 해 볼랑가” 했다.종단 집행부와 중앙종회 등은 30일 서울 조계사 앞 우정로에서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승려대회를 개최했다. 종헌·종법 수호, 정화개혁회의의 즉각 해산, 총무원 청사 반환, 종정의 탄핵, 해종 행위자의 중징계를 결의했다. 다시 총무원 반환을 시도했지만 정화개혁회의 측에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폭력으로 맞서 큰 충돌이 일어났다. 총무원 청사는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도 있었다. 우정로 대회를 앞두고 한 호텔에서 총무원 집행부와 정화개혁회의, 본사주지 모임에 소속된 스님 등 3개 그룹이 모여 의견을 나눴다. 난상토론 끝에 합의안이 나와 종정 스님의 재가를 받기 위해 통도사로 향했지만 거부됐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신을 통해서도 보도된 정화개혁회의의 점거는 법원이 퇴거 가처분소송을 받아들인 뒤 12월 23일 경찰이 점거자들을 해산하면서 끝이 났다. 불법 점거당한 뒤 43일 만의 총무원 청사 복귀였다. 외유 중이던 DJ(김대중 대통령)가 귀국한 뒤 폭력이 난무한 조계종 사태와 관련해 “청와대 앞에서 무슨 꼴이냐”며 화를 크게 냈다는 얘기도 들렸다.후보 사퇴 기자회견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덕이 출중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면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역량이 부족한 탓 아니겠는가. 수행자들의 싸움과 다툼이 안타깝다. 나의 사퇴로 종단이 빨리 안정되기를 바란다.”어처구니없어 맞서고 싶지 않아도 싸움에 말려들 때가 있다. 1998년 종단사태 때가 그랬다. 종단개혁의 후퇴를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개혁의 대의(大義)는 가까스로 구했지만 국민 앞에 모두가 패자(敗者)가 됐다. 유일한 소득은 비폭력과 민주주의적 제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혜암 스님 종정 추대와 고산, 정대 스님의 총무원장 선출에 얽힌 사연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