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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여기도 봄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봄이. 쨍한 햇빛에 눈이 부신 날. 하지만 그곳은 화사한 날씨는 도통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마주 걸어오면 피해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 서로를 버텨주듯 다닥다닥 벽을 맞댄 집들이 왠지 세월에 지쳐 보였다. 군데군데 박힌 붉은 페인트의 동그라미들과 ‘위험’ ‘접근금지’란 큼직한 글씨들. 얼핏 대문 틈으로 보이는 찢어진 우산살마저 한참 등이 굽었다. 사람들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부르는 이곳. 노원구 중계본동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백사마을’은 그렇게 봄 아지랑이조차 먼지에 흩날려 지워졌다. 백사마을은 곧 사라질 운명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2일 2025년까지 이 일대에 대규모 주거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재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약 18만7000m²의 땅에 공동주택 1953가구와 임대주택 484가구를 짓는다고 한다. 2009년 주택재개발 정비사업구역으로 지정된 지 12년 만에 들려온 소식이다. 하지만 그동안 백사마을의 삶이 멈춰 있었던 건 아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 한구석에 쌓인 회색빛 연탄재. 어젯밤 누군가는 그 온기에 기대 또 하룻밤을 지냈으리라. 한때 1713가구 가까이 살았다던 이 마을엔 여전히 203가구가 남아 있다.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떠밀리듯 왔지만 이젠 고향이 되어 버린’ 백사마을 주민들을 만나봤다.○ 시절에 밀려 만들어진 달동네 꽃은 어디서 피어도 꽃이다. 철커덩 문이 열리자 마주한 수선화들. “좀 너절너절해도 사는 건 괜찮다”는 최선진 씨(88) 집 마당은 수줍은 미소만큼 꽃들이 만발했다. 할머니가 이곳에 정착한 건 서른 즈음이었던 1960년대. 50여 년 동안 겪은 풍파를 다 얘기하려면 몇 밤은 새워야 할 터. “하나하나 손수 심은 꽃들”이라며 바라보는 눈빛엔 자긍심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났다. “재개발이 된다, 된다 하더니만 이젠 진짜 나가려나 봐.” 샛노란 수선화 꽃잎이 살짝 바람에 떨리는 듯했다. “그때 동대문 막살이집촌에 살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집을 잃었지. 판자촌이니 순식간에 재가 됐어. 다른 이웃들과 80여 명이 여기로 흘러들었어. 나랑 남편도 4남매를 데리고 왔는데 천막 하나 내준 게 고작이었어.” 최 씨는 여기서 악착같이 4남매를 키워냈다. 마을 뒤쪽 불암산 자락에 있는 밭에서 배를 사서는 동대문시장까지 가서 과일 보따리 장사를 했다. 함께 이 집에 창호지를 발랐던 남편은 40여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래도 함께 지은 집만큼은 그대로 남은 거지. 지금도 셋째 딸이랑 여기서 잘 살고 있네”라고 했다. 김상윤 씨(83)가 백사마을에 들어온 것도 최 씨와 엇비슷한 그즈음이었다. 셈 빠른 할아버지는 “1967년 11월 3일”이라며 허리를 쫙 폈다. 용산에서 철거민으로 살던 그는 그해 집을 잃었고 살 곳을 찾아 여기로 왔다. “집 잃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다 여기로 밀어 넣었어. 살고 싶어서 온 데가 아니란 말이지. 시절에 떠밀려서 온 거야. 그렇게 이 마을에서 맨 처음 터를 닦았는데 결국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이 됐네.” 할아버지의 기억은 정확했다. 백사마을은 일명 ‘이주정착지’였다. 1967년 서울에 불어닥친 도심 개발. 용산과 영등포, 청계천 등지에 몰려 살던 빈민들은 갑작스레 거처를 빼앗긴 뒤 노원구 중계본동 산104번지에 내몰렸다. 백사마을은 그 번지수에서 딴 이름이었다. 엉성한 작명만큼이나 당시 그곳 사정은 열악했다. 개발보상금은 꿈도 못 꿨다. 한 가구당 8평 남짓 땅과 시멘트블록 200장, 텐트 1동이 지원받은 전부였다. 전기는커녕 연탄을 땔 아궁이도 없었다. ○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그렇게 하나둘씩 이뤄진 마을. 뒤늦게 들어온 이들도 저마다 사정은 애달팠다. 1983년 이곳에 터를 잡은 나춘환 씨(84)는 ‘자개장롱’ 하나만 이고지고 백사마을에 왔다. 번듯한 제지회사를 운영하다 ‘8·3 사채동결조치’에 부도를 맞고 모든 걸 잃은 그도 이곳만이 살길이었다. “어떻게든 그놈의 농 하나는 건지고 싶었어. 없는 살림에 그 큰 장롱 들어갈 집을 찾으니 구할 수가 있나. 마을 언덕을 얼마나 올라 다녔는지 몰라. 꼭대기까지 와서야 그나마 장롱 들어갈 집을 찾았지.” 그의 집 안방엔 여전히 그 자개장롱이 버티고 섰다. 40년이 넘게 흘렀는데 휜 곳 하나 없다. 나 씨 역시 그렇게 꼿꼿하게 이곳에서 처자식을 건사했다. “애들한테 당당하게 말했어. ‘결혼할 상대 있으면 언제든 여기 데려와 집을 보여주라’고.” 할아버지는 지난한 삶의 무게를 숨기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내 손때가 안 묻은 구석이 없지.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어.” 나 씨와 동갑내기인 탁윤균 씨(84)에겐 백사마을이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다. 경북 성주에서 온 탁 씨는 1971년 당시 거금 14만 원을 주고 땅 32평을 샀다. 그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합판을 잘라 작은 부엌 하나 딸린 단칸방을 넓혀나갔다. 이후 직접 굴착기를 몰고 만든 지하공간에 양말 공장을 차렸다. 함께 내려가 본 공장 지하실. 이젠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한 그곳엔 “한때 미싱이 20대도 넘게 돌아갔다”고 한다. 저쪽 구석에 놓인 망가진 미싱 한 대가 탁 씨의 과거를 뒷받침했다. 할아버지에게 공장은 꿈이자 자랑거리였다. 공장을 세울 때만 해도 무허가였지만 구청은 그에게 ‘무허가 건물 확인서’를 발급해줬다. 토지 소유주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에게 권리를 인정해주는 문서라고 한다. 탁 씨에게 확인서는 자신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증서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모여든 백사마을이었지만 이웃은 서로를 보듬으며 삶을 이어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끌벅적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백사마을 6통 통장을 지냈던 김상윤 씨는 “우리 통에만 80가구가 모여 살았어.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나이대도 엇비슷해 잘 어울렸지”라고 떠올렸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1년에 몇 번씩 동네 사람끼리 관광버스 빌려 여기저기 놀러 다녔어. 힘들어도 함께 즐겁게 재밌게 살았어. 아직도 남은 사람들끼린 그때 얘기를 해. 이젠 많이들 마을을 떠났거나 세상을 등졌지만.” 짹짹. 청량한 울음소리. 이웃이 떠난 김 씨네 집 처마엔 올해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대못 2개를 구해 둥지 아래에 나무판자를 고정시켜 뒀다. “지들도 살아야지. 무너지지 말라고 받쳐뒀어.”○ 내년 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밀려들어 닦았던 마지막 터전. 그곳마저 잃는 게 두렵진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남은 백사마을 사람들은 재개발 뒤에도 계속 이곳에 머물 수 있다. 서울시와 노원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2017년 10월부터 33번의 회의를 거쳐 ‘보존 재개발 원칙’을 세웠다. 낡은 저층 주거지를 개발하되 백사마을의 특성과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방식으로 개발하겠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재개발에 떠밀려 가지 않도록 주거권도 보장하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1960년대부터 자생적으로 형성된 마을의 역사를 보전하고 원주민들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능한 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왠지 할아버지 할머니는 마음 한쪽이 쓸쓸하다. 내쫓길 걱정은 안 하지만 그들이 세우고 닦은 ‘백사마을’은 이게 마지막인 게 아닐까. 왠지 자꾸만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기분이다. “요즘 매일 이 텅 빈 공장을 찾아와. 동네 한 바퀴 돌아본 뒤에 사무실에 들어와서 커피 마시고 TV도 보고…. 하루도 빠짐없이 와. 괜히 아쉬워서 그런가. 재개발 끝나면, 그래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지.”(탁윤균 씨) “나랑 마누라랑 둘 다 여든다섯이야. 재개발이 한 사오 년은 걸리겠지? 그럼 아흔 살이 되는 거네. 우리가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올해 떠나면 이젠 마지막인 거지. 그간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한사코 뿌리쳤는데, 이젠 거기 가서 살아야지. 지금이라도 털고 일어날 수 있지만…. 하루가 아쉬워서, 이렇게 남아 있네.”(나춘환 씨) 취재가 끝나고 백사마을을 떠날 무렵. 이 마을에서 53년 동안 살아온 윤석분 씨(83)는 작은 부탁을 해왔다. 이제 곧 떠날 마을. 사진 좀 찍어 줄 수 있느냐고. “4통에 살던 주민들 다 떠났어. 나랑 요기 앞집, 동생네만 남아있지. 나중에라도 여기 모습 좀 간직하고 싶은데, 여기저기 다 담아줄 수 있을까.” 찰칵찰칵. 어딘가로 흩어져 보이지 않던 봄 아지랑이 냄새가 코끝을 스쳐간다. 할머니의 수줍은 옅은 미소를 따라. 내년 봄, 제비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둥지를 틀까.김수현 newsoo@donga.com·이소연 기자}
서울 노원구에서 스토킹하던 여성의 집에 침입해 어머니와 여동생 등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태현(25)에게 경찰이 현행법상 스토킹을 일컫는 ‘지속적 괴롭힘’ 혐의를 추가로 적용했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김태현에게 경범죄처벌법 위반(지속적 괴롭힘)과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정보통신망침해 등) 혐의를 적용해 추가 입건했다”고 8일 밝혔다. 경찰이 김태현의 스토킹과 관련해 경범죄처벌법을 적용한 것은 현재 스토킹을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은 김 씨가 범행을 저지른 다음 날인 지난달 24일 국회를 통과해 9월부터 시행된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스토킹처벌법 시행 전이라 법적으로 ‘스토킹 혐의’라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 대신 현행법상 스토킹을 의미하는 지속적 괴롭힘 혐의를 적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태현은 그동안 진행된 4차례의 경찰 조사 과정에서 변호인 입회 없이 혼자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4일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국선변호인이 선임됐지만, 경찰 조사에서 모두 변호인 입회 없이 조사를 받고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김태현은 상당수 혐의를 이미 시인하고 있어 변호인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는 것 같다”고 전했다. 경찰은 김태현에 대한 2차례 프로파일러 면담 결과를 바탕으로 조만간 ‘사이코패스 검사’도 진행할 예정이다. 경찰은 9일 김태현을 서울 도봉경찰서 유치장에서 검찰로 송치하면서 얼굴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실물을 공개할 방침이다. 다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김수현 newsoo@donga.com·조응형 기자}

서울 노원구에서 스토킹하던 여성의 집에 침입해 어머니와 여동생 등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태현(25)이 여성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성년자에게 성적인 음성메시지를 수차례 보내 벌금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10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통신매체 이용 음란) 혐의로 김태현에게 벌금 2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신음소리를 휴대전화로 녹음한 뒤 여고생에게 수차례 파일을 전송한 혐의다. 당시 김태현에게 약식명령 결정문이 담긴 우편물이 송달됐으나 7일 이내 정식 재판을 청구하지 않아 지난달 30일 벌금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약식명령은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는 공판 절차 없이 서면 심리만으로 벌금이나 과료 등의 처분을 내리는 재판 절차다. 김태현은 지난해에도 성범죄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2019년 11월 서울 강남구의 한 건물 여성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훔쳐본 혐의(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약식 재판에 넘겨져 지난해 4월 24일 2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 9월에는 모욕죄로 벌금 30만 원의 약식명령이 내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김태현의 휴대전화를 디지털 포렌식한 결과 다수의 음란사이트에 반복해 접속한 기록도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경찰청은 6일 김태현이 수감된 서울 도봉경찰서 유치장에 과학수사대 소속 프로파일러 4명을 투입해 면담을 진행했다. 경찰 관계자는 “범행 동기와 성장 배경 등에 대한 분석을 진행 중”이라며 “필요하면 사이코패스 검사도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9일 오전 8시경 김태현을 검찰로 송치하는 과정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는 방식으로 실물을 공개할 예정이다.김수현 newsoo@donga.com·박상준·이소연 기자}

서울 노원구에서 스토킹 하던 여성의 집에 침입해 어머니와 여동생 등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태현(25)이 여성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지난달에는 미성년자에게 성적인 음성메시지를 수차례 보내 벌금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10일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통신매체 이용 음란) 혐의로 김태현에게 벌금 2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신음소리를 휴대전화로 녹음한 뒤 여고생에게 수차례 녹취 파일을 전송한 혐의다.당시 김태현에게 약식명령 결정문이 담긴 우편물이 송달됐으나 7일 이내 정식 재판을 청구하지 않아 지난달 30일 벌금형이 그대로 확정됐다. 약식명령은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는 공판 절차 없이 서면 심리만으로 벌금이나 과료 등의 처분을 내리는 재판 절차다. 김태현은 지난해에도 성범죄로 벌금형에 처해진 전력이 있다. 2019년 11월 공공장소에서 여성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훔쳐본 혐의(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로 약식 재판에 넘겨져 지난해 4월 24일 2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 9월에는 모욕죄로 벌금 30만 원의 약식명령이 내려졌다.경찰에 따르면 김태현의 휴대전화를 디지털 포렌식한 결과 다수 음란사이트에 반복해서 접속한 기록이 발견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서울경찰청은 6일 김태현이 수감돼있는 서울 도봉경찰서 유치장에 과학수사대 소속 프로파일러 4명을 투입해 면담을 진행했다. 경찰 관계자는 “면담을 통해 범행 동기와 성장 배경 등에 심도 깊은 분석을 진행하고 있다”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김태현을 상대로 사이코패스 검사도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김수현기자 newsoo@donga.com박상준 기자speakup@donga.com}

“벌써 졸업한 지 6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하루에 두 번씩 공황장애 약을 먹어야만 버텨요.” 2015년 2월 졸업한 이모 씨(25)는 지금도 고교 시절을 떠올리면 온몸이 떨려온다. 처음엔 잘 어울렸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상대로 ‘공기놀이’를 시작했다. 공기놀이란 집단따돌림(왕따)의 최악 단계를 일컫는 속어. 아무도 곁에 오지 않았고,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단지 “튀어서 같이 다니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이 씨는 지금도 시내로 나갈 땐 몇 번씩 심호흡을 한다. 당시 가해자였던 ‘한때’ 친구를 마주칠까 봐 불안해서다. 얼핏 닮은 사람만 봐도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해진다. 이 씨는 “이젠 나도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화상 자국처럼 지울 수가 없다”며 “이번에 배구 선수들의 ‘학폭(학교폭력) 미투’를 보며 피해자들에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이어져온 학폭 미투가 최근 프로배구 선수들에 대한 폭로를 계기로 다시 한번 거센 불길로 번지고 있다. 지금까진 연예인이나 프로선수 등 공인들이 주 대상이었지만, 최근엔 일반인 학폭에 대한 폭로도 쏟아지고 있다. 15, 16일에도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운동선수나 가수는 물론 현직 교육감의 자녀와 ○○항공 직원, 현직 경찰 등이 학폭을 저질렀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아직 진실 여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은 길게는 약 20년 전 기억도 끄집어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유사 경험을 가진 피해자들을 만나 보니, 이들은 “결코 때늦게 딴죽을 거는 게 아니다. 당한 사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처가 낫기는커녕 더 곪아터지고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현재의 폭로 러시를 “오랫동안 혼자 혹은 가족 등만 괴로워하다가 같은 처지인 누군가의 용기를 보고 힘을 얻어 펜을 드는 것”이라고 했다. 전문가들도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청소년기에 학폭을 겪으면 그 상흔이 평생을 갈 수 있다고 짚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학폭으로 인해 피해자는 무력과 모멸감, 수치심 등이 깊이 새겨져 성인이 돼서도 심리적 후유증을 안고 간다”며 “환자 사례를 살펴봐도 20년, 30년씩 정신적 장애를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용기 얻었다” 일반인으로 번지는 ‘학폭 미투’ 피해자들의 트라우마일반인에 대한 학폭 폭로는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고교 2학년 때 따돌림을 당했다. 가해자는 ○○항공에 다닌다”며 신원 일부를 특정한 글이 올라왔다. “아버지가 현직 교육감인 가해자는 중학교 때 쉬는 시간마다 괴롭혔다”는 글도 16일 반향을 일으켰다. 또 다른 커뮤니티에선 “20년 전 괴롭혔던 가해자가 지금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근무한다”는 폭로도 나왔다. 피해자들은 모두 학폭을 당한 뒤 학교가 감옥으로 변했다고 했다. 안에서도 고통받았지만, 벗어나도 마음에 ‘빨간 줄’이 그어진 건 오히려 피해자들이었다고 한다. 조만간 다니는 대학을 관둘 예정인 A 씨(19). 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학교에서는 숨통이 막히기만 했다. 중학교 시절 학폭 때문이다. 어머니가 일본인이란 이유로 시작된 집단괴롭힘은 이후에도 줄곧 발목을 잡았다. 가해자들과 떨어진 고교에 가면 족쇄에서 벗어날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다시 과거가 그를 옭아매며 학교에 앉아 있기만 해도 고통스러웠다. 결국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자퇴한 뒤 마음을 잡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학교였다. “제가 문제인가 싶어 대인관계를 다룬 책들까지 읽어봤어요. 하지만 몸부림쳐도 바뀌는 건 없었죠. 내 잘못이 아니란 걸 받아들이는 데만 몇 년이 걸렸어요. 하지만 그새 전 ‘학교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 돼 버렸죠.” 초등학교 때 학폭을 당했던 대학생 김모 씨(22)는 지난해 학교에서 가장 원치 않았던 순간을 맞닥뜨렸다. 당시 가해자가 같은 과에 후배로 입학한 것이다. 10년 가까이 잊으려 애썼던 상처가 고스란히 터져 버렸다. 한동안 지원단체에서 상담을 받은 뒤에야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김 씨는 “다 지나서 왜 그러냐는 시선도 있다는 걸 안다.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함부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학폭 피해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당사자와 가족에게 자기 인생을 위해서라도 잊으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최근 학폭 미투처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가해자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해야 그나마 마음을 연다”고 말했다. 김태성 kts5710@donga.com·김수현·이상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