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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40만 원. 누군가에겐 근사한 한 끼 식사비용 정도일 돈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죽어야만 끝나는” 불법 사채의 지옥문을 여는 입장권 가격이었다. 50대 A 씨는 25만 원을 빌려 며칠 후 44만 원을 갚기로 했는데, 3개월 만에 1억5000만 원으로 불었다. 40대 B 씨가 빌린 40만 원은 1년 뒤에 6억9000만 원이 됐다.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잔혹했다. 강원경찰청은 일명 ‘강 실장 조직’으로 불리는 불법 사금융 범죄조직 123명을 붙잡아 주요 조직원 10명을 구속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조직은 2021년 4월부터 최근까지 전국을 무대로 인터넷 대부 중계플랫폼을 통해 가정주부나 취업준비생, 영세상인 등에게 소액 단기 대출을 미끼로 연 5000% 이상의 이자를 뜯어냈다. 법정 최고이율인 연 20%의 250배가 넘는데, 여기에 매일 추가되는 연체료까지 붙였다. 총책인 실장을 중심으로 자금관리, 대출상담, 수익금 인출 등 역할을 나눠 맡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피해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131명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액은 최소 500억 원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처음엔 수십만 원에서 시작한다. 잘 갚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 빌려줄 수 있다고 한다. 30만 원을 빌리고 일주일 뒤 50만 원을 갚는 ‘30·50’ 대출이 사채시장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다. 돈을 제때 못 갚으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마법이 진행된다. 연체금이 발생하면 이를 원금으로 돌리고 여기에 이자를 더 붙인다. 일명 ‘꺾기’다. 다른 사채업자를 소개해줘 다중 채무자로 만들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한 팀이다. ‘한 바퀴 감는다’고 한다. ▷입금이 늦어지면 저승사자 같은 추심이 시작됐다. 처음에 절차상 필요하다고 가족, 지인의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데 이게 덫이었다. ‘사기꾼 현상수배’라는 전단지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는 아기 사진을 보내면서 살해 위협을 했다. 피해자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유산한 여성도 있고, 가정파탄 위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범죄자들은 서울에서 월세 1800만 원 아파트에 살면서 고가 스포츠카를 타고 명품으로 치장하는 등 호화 생활을 누렸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서 급전이 필요한 경제적 취약계층을 노린 불법 사금융 피해가 늘고 있다. 제도권 금융의 마지막 보루인 대부업체들마저 대출을 걸어 잠그면서 지난해 최대 7만1000명이 불법 사채 시장으로 내몰렸다는 분석도 있다. 불법 사채업자들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흉악범 수준으로 강화하는 한편 금융 취약계층을 위한 대출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단돈 몇십만 원 때문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공부하라고 아이를 들들 볶던 ‘선배 부모’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식 성공시켜서 뭘 얼마나 덕을 보겠다고…. 속물처럼 느껴졌다. 내 아이가 자라고서야 알게 됐다. 성공하라고 닦달한 게 아니라 실패하면 어쩌나 겁나는 거다. 대기업·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안정된 직장에 올라타지 못했을 때 펼쳐질 미래가 선하니 새벽부터 깨울 수밖에 없다. 첫차를 놓치면 버스는 더는 오지 않는다. 첫차가 떠나면 기회가 없는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벽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보호받는 대기업·정규직 12%와 불안한 중소기업·비정규직 88%로 나뉘어 있다. 격차는 갈수록 커진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으로 대기업(300인 이상) 정규직의 임금을 100이라고 하면 대기업 비정규직은 65.3, 중소기업(300인 미만) 정규직은 57.6,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43.7에 그친다.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할 수 있으면 그나마 괜찮지만 현실에선 바늘구멍이다. 2020년 중소기업에서 일했던 근로자 중 2.6%만이 이듬해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정규직만 과보호하는 노동법과 대기업 노조의 무리한 요구는 이중구조의 벽을 갈수록 높고 두텁게 만들고 있다.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상승의 과실은 대기업 정규직에게만 돌아갔다. 한 번 정규직을 뽑으면 되돌릴 수 없기에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웬만한 확신이 없으면 쉽사리 정규직을 채용하려 들지 않는다. 버스를 탄 사람은 안주하고, 버스를 놓친 사람은 절망한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주요 요인이다.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주요 7개국(G7) 평균의 62% 수준에 그친다. 지난달 말 여당이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한 건 논의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규직 여부나 근속 기간 등 고용 형태와 관계없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노동계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내용이기도 하고, 야당도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당장 동일노동을 어떻게 규정할지부터가 쉽지 않다. 경영계는 인건비 상승을, 노동계는 임금 하향평준화를 우려할 수 있다. 정규직 보호 문턱을 낮추고, 연공성이 강한 임금체계를 성과와 직무에 따라 보상하는 방향으로 재편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하겠다면서 시간이 지나면 꼬박꼬박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를 유지한다는 건 논리적 모순이다. 선진국들은 일찍부터 공정하고 유연한 방향으로 노동 개혁을 실행해 왔다. 독일은 2000년대 초반 하르츠 개혁으로 유럽의 병자에서 벗어난 데 이어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 등을 반영한 ‘노동 4.0’까지 단행했다. 프랑스는 2016년 노동시장 유연화를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통해 노동개혁을 성공했다. 한국이 호봉제를 배워왔던 일본조차 직무급제를 확대하고 노동 유연화를 통해 성장산업으로 인력 이동을 유도하는 방향의 ‘새로운 자본주의 실행계획 개정안’을 이달 내놨다. 반면 한국은 역대 정부마다 말로만 노동개혁을 외쳤을 뿐 제대로 이뤄낸 것이 없다. 전투적 대기업 노조 중심의 ‘87년 노동체계’는 견고하다.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도 백골단과 구사대, 망치와 죽창이 가사에 나오는 35년 전 버전 그대로다. 현 정부도 노동개혁의 깃발만 띄웠을 뿐 아직 첫 단추조차 끼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노동계 모두 서로의 탓만 하며 시간을 보내선 안 된다. 첫차가 막차 되는 비극을 이젠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 결국 길은 열릴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중·국·산·고·기는 인기가 없다.” 최근 기획재정부 내부 익명 게시판에서 한 직원이 부처의 현실을 한탄하며 올린 글이다. 음식 얘기가 아니라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기재부의 앞 글자를 딴 약어다. 저연차 사무관들과 고시생들 사이에서 ‘기피 부서’를 통칭하는 말이다. 일은 고되고 보상은 적고 승진도 늦어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다. 한때 최고의 엘리트들이 몰렸던 경제 부처들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지난달 기재부 내부 익명 게시판엔 ‘부총리님, 전출을 막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도 올라왔다. 다른 부처로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1 대 1 교류가 원칙인데 기재부로 오겠다는 사람은 없고 가겠다는 사람만 넘친다. 해당 글에는 전출 문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업무 환경에 대한 불만이 쏟아지며 성토장이 됐다. 지난해에도 내부망에서 “우리의 직업은 (승진 비전이 안 보이는) 사무관”이라며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이 들끓었다. ▷과거엔 행정고시 성적 최상위권이 기재부 등 주요 경제 부처를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요즘엔 선호 부처가 많이 바뀌었다. 지난해엔 행정고시 67기 5급 공개채용에서 일반행정직 수석이 해양수산부에, 차석은 농림축산식품부에 지원해 화제가 됐다. 경제 정책과 예산을 총괄하는 기재부는 물론이고 노동개혁에 드라이브를 거는 고용부, 국민들의 관심이 몰리는 부동산 정책을 담당하는 국토부 등 경제 부처의 업무량은 상당하지만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 유학 등의 메리트는 적다. 지난해 정부 18개 부처 중 연차휴가를 가장 못 쓴 부서는 고용부다. 중기부(2위), 국토부(3위), 산업부(5위) 등 경제 부처가 뒤를 이었다. ▷소신껏 일하기 어려운 분위기도 한몫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적폐 청산’이 반복되고 정책 기조는 손바닥처럼 뒤집히기 일쑤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랐다가 직권남용이나 직무유기로 처벌되는 사례도 생기면서 미래가 불안하다. 오해를 살 만하거나 민감한 결정은 피하고, 핵심 부서보다는 뒤탈 없는 부서를 선호한다. 오래 버텨 봐야 퇴직 이후 갈 곳도 마땅찮으니 빨리 탈출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다. ▷“경제기획원은 명예롭고(honorable) 재무부는 막강하고(powerful) 상공부는 화려하다(colorful).” 세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는 개발경제 시대 경제 부처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각각 경제 개발의 밑그림을 그리고, 나라의 돈줄을 쥐고, 산업과 기업을 주물렀다. 관료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전처럼 돌아가서야 안 되겠지만, 공무원들이 나라 경제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신명 나게 뛸 수 있게 해야 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위대한 기업이지만 현재 좋은 주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4월 이차전지 관련주에 대해 한 증권사가 내놓은 리포트에 주식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리포트가 나온 직후 이틀 동안 해당 기업의 주가는 20% 넘게 빠졌다. 개인투자자들은 “애널리스트가 공매도 세력과 결탁한 것 아니냐”며 거센 항의를 쏟아냈다. 일부에선 해당 애널리스트를 ‘용자(勇者)’라고 불렀다. 화제가 된 이유는 명확했다. ‘매도’ 의견을 담은 리포트를 찾는 게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국내 10대 증권사가 발간한 기업분석 보고서 가운데 ‘매수’ 의견은 88.6%에 달했다. ‘중립(보유)’이 10.3%였고, ‘매도’ 의견은 0.1%에 불과했다. 10곳 중 9곳은 매도 리포트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매도 의견 비중이 높은 노무라금융투자(18.1%), 모건스탠리(17.9%) 등 외국계 증권사와 대조적이다. 국내 증권사 리포트의 매수 편향은 고질적이다. 주가가 오르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주가가 빠지면 “낙폭이 과하다”며 무조건 사라고 한다. ▷SG증권발(發) 주가 폭락 사태와 관련된 8개 종목에 대해서도 증권사들은 작전이 진행되던 3년 동안 매수 의견을 내거나, 분석 자체를 하지 않았다. 한 증권사는 삼천리를 ‘중장기 투자 유망 종목’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과열을 우려하는 리포트는 소수에 그쳤다. 증권사가 적극 매수를 추천했던 종목들이 상장 폐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한 바이오기업은 지난해 말 ‘좋다. 주목해야 한다’는 리포트가 나온 지 3개월 만인 올해 3월에 감사의견 거절로 거래가 정지됐다. ▷증권사 리포트가 무조건 ‘사라’고 외치는 것은 수익구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많이 사서 거래가 늘어야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 기업은 분석 대상이자 기업금융의 고객이기도 하니 부정적 언급은 가급적 피한다. 독자적으로 분석하기보다 기업들이 주는 자료에 의존하는 것도 문제다.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작은 기업들은 제대로 분석하지 않는다. ‘길바닥에 떨어진 10원짜리보다 못한 보고서’라는 자조가 업계 내부에서 나올 정도다. ▷이렇다 보니 증권사 리포트의 숨은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중립이나 목표 주가 하향은 사실상 팔라는 신호다. ‘이제 날개를 달았다’는 말은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아예 ‘보고서가 나오면 매도 타이밍’이란 인식까지 있다. ‘닥치고 매수’ 리포트는 전문가들이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기업을 분석했을 것이란 투자자들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다. 사기나 다름없다. 증권사가 공신력 있는 투자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하니 거짓 정보와 작전이 판치기 쉬운 토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해외에는 유명 정치인이나 자국이 자랑하는 인물의 이름을 내건 공항이 꽤 많다. 한국에는 사람의 이름을 딴 공항은 없다. 다만 공항 유치에 공이 큰 정치인의 이름을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화갑 공항(무안)’ ‘김중권 공항(울진)’ ‘유학성 공항(예천)’ 등이다. 칭송의 의미는 아니다. 수요를 면밀히 따지기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워 추진했던 공항의 끝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말 건설 계획이 확정돼 ‘김영삼 공항’으로도 불리는 강원 양양국제공항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노선이었던 양양∼제주 노선이 20일 중단되면서 여객청사의 불이 꺼졌다. 이 공항을 모(母)기지로 하는 저비용항공사(LCC) 플라이강원은 경영난으로 법원에 기업회생 신청을 했다. 2002년 4월 국비 3500억 원을 투입해 문을 연 양양공항은 여객 수요 부족으로 애를 먹어왔다. 2008년 11월부터 9개월 동안 비행기가 한 대도 뜨지 않아 ‘유령 공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남 무안국제공항 이용객은 2019년 90만 명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4만6000명까지 급감했다. 국제공항이지만 정기 국제노선은 없다. 빈 활주로에서 고추를 말리는 사진이 있다며 ‘고추 공항’으로도 불렸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수요가 없어 계획이 중단되거나 문을 닫은 공항도 있다. 1300억 원을 들여 지은 경북 울진공항은 취항하려는 항공사가 없어 개항을 못 하다 현재는 비행훈련원으로 쓰고 있다. 2003년 공사가 중단됐다 20년 만인 올해 초 공항 계획이 공식 폐지된 전북 김제공항은 그동안 주민들이 공항 부지를 빌려 배추, 고구마 농사를 지어왔다. ▷2017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김포 김해 제주 대구를 제외한 지방 공항 10곳의 누적 손실은 4823억 원에 이른다. 이 기간 이들 10개 공항의 평균 활주로 이용률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전국 곳곳에서 신공항의 꿈은 날개를 펴고 있다. 가덕도, 대구경북, 새만금, 흑산도, 울릉도, 서산 등 10개의 공항이 추진 중이다. 항공 수요와 지역균형을 고려할 때 필요한 공항도 있다. 하지만 국토가 좁다 보니 한정적 여객 수요를 놓고 인근 공항끼리 다퉈야 하는 상황이라 중복 투자가 우려되는 게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기차로 2시간 30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구간은 항공기 이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기후와 복원 법안’이 23일 발효됐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는 항공기 사용을 줄이자는 취지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그물망처럼 발달한 한국에서 공항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단 지어놓으면 수요가 생기겠거니 생각할 순 없다. 소중한 인프라인 공항이 ‘유령 공항’이니 ‘배추밭 공항’이니 하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더는 없어야겠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나이가 들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믿고들 산다. 그런데 40세가 넘어도 진짜 청춘으로 대접해주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지난달 서울 도봉구는 서울 자치구론 처음으로 청년 연령을 19∼45세로 높였다. 서울시에선 만 40세부터 중장년 일자리 지원 대상이다. 도봉구의 40∼45세는 청년인 동시에 중장년인 셈이다. 옛날에는 열 살 차이까진 친구로 쳐서 내 친구가 아버지 친구인 경우도 간혹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10대 자녀와 40대 부모가 나란히 ‘청년’으로 불리게 됐다. ▷2020년 8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청년기본법’은 청년을 만 19세 이상 34세 이하로 규정한다. 다만 다른 법령과 조례에선 청년 연령을 다르게 적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제각각이다. 연령 기준이 지나치게 경직적이면 행정 편의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이유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상 청년은 15∼29세인데 지방공기업 채용 땐 34세까지 늘려준다. 중소기업인력지원법과 조세특례제한법은 34세, 중소기업창업지원법과 전통시장법에선 39세까지를 청년으로 본다. ▷지자체 단위로 가면 ‘40대 청년’이 흔하다. 전국 228개 시군구 가운데 조례로 ‘40대 청년’을 규정한 곳이 58곳에 이른다. 전남 고흥군, 경북 봉화군, 충북 괴산군, 경남 창녕군 등은 49세까지 청년이다. 전남 장수군에선 15∼49세가 모두 청년이다. 고령자고용촉진법에서는 만 50세부터 ‘준고령자’이니, 이들 지자체에선 청년이다가 한순간에 고령자가 되는 셈이다. 광역시도에선 지난달 전남도가 처음으로 45세로 올렸다. 전남 강진군은 55세까지 청년으로 규정했다가 지나치다는 지적에 지난해 말 45세로 낮추기도 했다. ▷지자체들이 청년 연령을 높이는 것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지원할 청년이 없다는 것이다. 취업·주거 등 청년 지원 정책의 대상자를 확대하고 인센티브를 강화해 인구 유입을 유도하겠다는 복안이기도 하다.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를 반영한 선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중위 연령(총인구를 연령별로 세워 가운데 사람의 나이)은 2003년 33.5세에서 올해 45.6세로 상승했다. ▷하지만 40대까지 모두 청년이라고 규정하는 게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막 사회에 진출하려는 20대와, 사회생활을 충분히 한 40대가 원하는 것이 서로 달라 청년정책의 방향성이 불분명해질 수 있다. 한정된 청년예산을 놓고 세대 간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다. 나이 때문에 청년 지원에서 배제된 연령층을 위해서라면 다른 복지 정책을 통해 사각지대를 메우면 된다. 너도나도 지원이 필요하다고 ‘우리 모두 청년’이라고 선언하는 게 맞는 건지 생각해 볼 일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결혼한다거나 아이가 생겼다고 주위에 알리면 축하를 받는다. 입양했다고 하면 대개 ‘대단하다’고 한다. 입양 부모들은 이런 칭찬 아닌 칭찬이 오히려 불편하다. 새 가족을 맞는 기쁨을 알렸을 뿐인데 장하고 힘든 결심을 했다니.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우리 아이는 불쌍한 아이인가. ‘배 아파 낳은 자식과 같을 순 없다’는 따가운 시선도 있다. 혈연 중심의 가족 문화는 공고하고 편견은 여전하다. ▷매년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올해로 18번째다. 가정의 달인 5월에 한(1) 가정이 한(1) 아동을 입양해 새로운 가정(1+1)으로 거듭난다는 취지다. 중심은 아동이어야 한다. 가정을 위한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가정을 찾아주는 게 입양이다. 입양의 날 하루 전인 10일은 ‘한부모 가족의 날’이다. 입양이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친생부모가 스스로 아이를 지키고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2021년 국내외로 입양된 아동은 415명으로, 관련 통계가 시작된 1958년 이후 가장 적었다. 2011년 2464명의 6분의 1 수준이다. 2012년 입양 절차가 엄격해진 이후 줄어드는 추세다. 한때 ‘아동 수출국’이란 오명을 썼을 정도로 해외 입양이 다수였지만 2007년부턴 국내 입양이 더 많아졌다. 국내 입양은 여자아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2021년 국내 입양의 65.5%가 여아, 반대로 해외 입양은 70.4%가 남아였다. 입양아 10명 중 9명은 친부모 기억이 적은 3세 미만이었다. ▷입양 부모들은 사회적 편견이 여전하다고 입을 모은다. 고민 끝에 입양을 포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입양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건 상처다. 출생의 비밀, 어두운 유년기 등이 갈등 전개의 소재가 된다. “역시 피는 못 속여” “사랑받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야 했어요” 같은 대사도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입양 아동 학대 사건이 언론에 나오면 전체 입양 부모들을 싸잡아 죄인처럼 바라보는 것도 부담이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받아들일 때도 ‘입양’이란 표현을 쓰는데, 입양 대신 다른 표현을 쓰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다. ▷아이는 낳은 부모가 키우는 게 가장 좋다. 사정상 어려우면 사회가 아이를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데,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입양이다. 입양 부모들은 배 아파 낳은 아이만 내 자식이라는 건 말 그대로 편견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때로는 산통보다 더한 아픔을 겪고, 때론 세상을 다 가진 행복을 느끼며 비로소 가족이 된다. 입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지우고 아동 보호 체계를 국제 기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입양아들은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만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예전엔 어버이날이면 거리가 붉게 물들곤 했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저마다 빨간 카네이션을 단 가슴을 한껏 젖히고 걸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상받는, 어떤 훈장보다 값지고 자랑스러운 꽃이었을 게다. 자녀의 나이에 따라 꽃의 재질은 달랐다.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은 서툰 가위질로 삐뚤빼뚤 오려 붙인 색종이 카네이션을 수줍게 내밀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화에서 생화로 업그레이드 됐다. 요즘은 꽃다발이나 바구니, 화분으로 많이 드리니 거리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부모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은 변함없지만 카네이션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이달 1∼4일 화훼공판장에서 경매로 거래된 카네이션 물량은 4만4930단으로, 2016년 같은 기간 11만883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때 급감했다가 회복하지 못했다. 요즘은 카네이션 없이 선물만 드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나마 시중에 보이는 카네이션도 국산보단 콜롬비아나 중국 등 수입산이 더 많아졌다. ▷카네이션 인기가 시들해진 데는 꽃값이 부담스럽게 많이 오른 것도 한몫했다. 2016년 청탁금지법 시행의 영향으로 화훼농가 재배면적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카네이션의 경우 어버이날과 함께 대목인 스승의 날 수요가 한풀 꺾인 게 타격이 컸다. 인건비, 유류비 등 꽃 생산비용도 올랐고 바구니 등 재료값도 많이 뛰었다. 온라인에선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구입하려면 5만 원 이상은 줘야 한다. 몇 개를 구입하려면 부담이 만만찮다. 멀리 있는 부모님께 배송하려면 7000원 정도는 더 얹어야 한다. ▷‘신의 꽃’이란 의미의 카네이션은 서양에서 신성하고 고귀한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어버이날과 연을 맺은 건 1908년 미국의 안나 자비스라는 여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흰 카네이션을 나눠 준 데서 비롯됐다. 이후 1914년 미국에서 어머니날이 제정돼 카네이션을 드리는 풍습이 자리 잡았고,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도 문화가 전파됐다. 꽃 색깔에 따라 의미는 다르다. 빨간색은 ‘건강을 비는 사랑’, 분홍색은 ‘열렬한 사랑’이다. 흰색은 ‘나의 애정은 살아 있다’는 뜻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단지 의례적일 뿐이라고 여겼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릴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 어버이날에 요양원을 찾은 자식들은 면회가 되지 않아 부모님 가슴 대신 유리창에 카네이션을 달며 눈물을 짓기도 했다. 올해 어버이날엔 카네이션을 가슴에 직접 달아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면 어떨까. 단 한 송이라도 흡족해하실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보행자 없으면 그냥 우회전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작년 얘기고, 올해 또 바뀌었잖아요.” ‘적색 신호 시 우회전 일시 정지’ 계도기간이 끝나고 단속이 시작된 22일부터 전국 도로 곳곳에서는 이 같은 실랑이가 이어진다. 24일 오후 서울 은평구의 한 사거리에서는 40분가량 이어진 경찰의 집중단속에 차량 20대가 적발됐다. 2분에 1대꼴로 걸린 것이다. 단속에 걸린 차량 때문에 교통마비 현상을 빚기도 했다. 위반하면 승용차 기준 범칙금 6만 원과 벌점 15점이 부과된다. ▷올해 1월부터 개정된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려는 운전자는 전방 차량 신호가 빨간불일 때 반드시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해야 한다. 이후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뒤 우회전해야 한다. 일시 정지는 차량 속도가 0이고, 바퀴가 완전히 지면에 멈춘 상태다. 몇 초를 머물러야 한다는 기준은 없고 경찰이 육안으로 판단한다. ‘잠깐이지만 멈췄다’ ‘아니, 바퀴가 굴렀다’는 다툼이 이어진다. 앞차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출발했더라도 뒤따라가면 안 된다. 무조건 한 번은 멈춰야 단속을 피할 수 있다.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 정지했다가 출발할 때, 우회전해서 다시 횡단보도를 만날 때에도 운전자들은 고민에 빠진다. 건너는 중이거나 건너려는 보행자가 있으면 멈추고 없으면 지나가도 된다는데, 건너려고 하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가 문제다. 횡단보도에 바짝 붙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건널 마음이 있는 걸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저 사람은 건너려는 건가, 아니면 택시를 잡으려는 건가. 독심술이 필요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혼란을 키운 건 지난해 7월과 올해 1월 법이 연거푸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엔 보행자 보호 의무를 강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돼 10월부터 단속에 들어갔다. ‘보행자가 보이면 우회전을 멈추세요’라는 주문에 그나마 익숙해질 만하니 올해 들어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바뀌었다. ‘전방 적색 신호엔 무조건 멈추라’는 새로운 주문이 추가됐다. 신호등과 보행자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지다 보면 머리가 하얘진다는 운전자들이 많다. “헷갈리면 일단 멈춰라”가 그나마 답이다. ▷교차로 우회전 일시정지는 필요한 규제다. 전체 교통사고 보행 사상자 중 우회전 교통사고의 비율은 10.9%(2021년)로 높다. 그렇다곤 해도 이해하기도 지키기도 힘든 규정을 만들고, 단속으로 윽박지르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운전자의 의무만 강조할 게 아니라 메시지를 단순화하는 방법도 고민해봐야 한다. 2분에 1명씩 법규 위반자가 나오는 상황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밀지 마세요.” “숨을 못 쉬겠어요.” 지난해 10월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아비규환이 아직 생생한데, 날마다 질식의 공포에 시달리는 곳이 있다. 김포한강신도시에서 김포공항역까지 23.67km 구간을 지나는 김포도시철도(김포골드라인)다. 11일 오전 김포공항역에서 10대 여고생과 30대 여성이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폭설이 내린 작년 12월에도 한 여성이 호흡 곤란으로 인근 병원에 옮겨졌다. ‘지옥철’이란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김포골드라인은 2019년 9월 개통됐다. 차량 바탕색이자 노선의 이름인 골드는 김포의 황금 들녘을 달린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하지만 개통 초기부터 극심한 혼잡으로 오히려 승객들의 얼굴이 누렇게 뜰 지경이 됐다. 일평균 7만8000명이 이용하는데 3분의 1이 출퇴근 시간대에 몰린다. 전동차에 오르면 옴짝달싹할 수 없어 차렷 자세를 취해야 한다. 겨우 빠져나온 뒤엔 어지러워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붐비는 정도는 보통 혼잡도로 표시한다. 정원에서 좌석을 빼고 입석 인원이 붐비는 정도를 계산한다. 정원대로 타면 100%다. 혼잡도가 150%로 증가하면 서 있기만 해도 서로 어깨를 부딪칠 정도다. 170%면 팔을 들 수 없고, 200%가 되면 몸과 얼굴이 밀착돼 숨이 막히는 수준이다. 출근 시간대 김포골드라인의 최근 3년간 평균 혼잡도는 200%가 넘는다. 최대 285%에 달하기도 했다. 정원 172명 열차에 387명까지 탔다는 얘기다. A4용지 반쪽 위에 사람이 서 있는 정도다. ▷애초에 노선 계획부터 잘못됐다. 신도시 조성에 따른 급격한 인구 증가와 서울 통근 수요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비용 절감을 위해 2량짜리 꼬마열차를 기준으로 설계하는 바람에 열차 추가 연결도, 역사 확장도 불가능하다. 분통이 터진 시민들은 2021년 2월 정치인들에게 ‘너도 함 타봐라’ 챌린지를 제안했다. 열차를 타본 당시 김포시장은 “교통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였다”고 했다. 선거를 앞두고 방문한 정치인들은 “(이대로 방치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며 개선을 약속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김포도시철도 측은 혼잡 해소를 위해 내년 9월 열차 5대를 추가 투입할 계획이다. 숨통이 조금 트일 정도일 뿐이다. 근본적으론 지하철 노선 연장과 확대 등이 필요하겠지만 버스전용차로 확대 등 당장 수요를 분산할 수 있는 단기 대책도 시급히 고민해야 한다. 사고 전날 아찔한 상황이 있었는데도 비극에 대비하지 못했던 지난해 이태원 참사의 기억이 뼈아프다. 오늘 넘겼다고 내일 무사하란 법은 없다. 이어지는 실신 사고가 대형 참사에 대한 긴박한 경고라는 생각으로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30여 년간 시민들을 품어온 울창한 가로수길이 단 이틀 만에 사라졌다. 경부고속도로 판교 나들목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구로 이어지는 500여 m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무성한 일대의 명소였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아름드리나무 70여 그루가 한꺼번에 베어지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새로 짓는 호텔의 진출입로와 교통 흐름에 지장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가로수 학살’이 도시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도로 확장 등 각종 개발 사업에 수난을 당하는 것이다. ▷도심의 가로수는 도시인들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숲이다. 삭막한 도시가 그래도 철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것도 가로수 덕택이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으로 도시에선 점점 가로수가 사라지며 회색빛이 짙어지고 있다. 산림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의 가로수는 29만5852그루로, 2021년보다 8087그루나 줄었다. 2019년 이후 계속 감소 추세다. 가뜩이나 서울은 숲이 부족한 도시여서 더 안타깝다. 가로수를 포함해 도로변 녹지, 근린공원 등 ‘생활권 도시숲’ 면적은 1인당 4.97㎡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 기준인 9㎡의 절반을 겨우 넘는다. ▷살아남았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수시로 난도질 수준의 가지치기를 당한다. 간판을 가린다, 열매 냄새가 난다 등 이유는 수십 가지다. 풍성한 나뭇잎과 가지를 모두 잃은 채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닭발’ 가로수가 된다. 관리하기 편하다고 남발하는 가지치기는 가로수엔 치명적이다. 가지를 자른 절단면이 병해충에 노출돼 썩기 쉽고 수명도 단축된다. 무분별한 가지치기로 말라죽는 가로수가 매년 1만6000그루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홍콩 등은 나뭇잎이 자라는 부위의 25% 이상은 제거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 ▷이렇게 시달리는데도 가로수는 인간에게 아낌없이 퍼준다. 사람들이 배출한 탄소를 흡수하고 맑고 시원한 공기를 뿜어낸다. 미세먼지도 걸러낸다. 산림청에 따르면 도시에 조성된 숲은 나무 한 그루당 연간 미세먼지 35.7g을 흡수한다. 나무 47그루는 경유차 한 대가 1년간 배출하는 미세먼지를 흡수할 수 있다. 한여름엔 그늘막보다 열을 저감하는 효과가 25% 더 좋고, 도시 소음도 줄여준다. ▷식목일을 이틀 앞둔 3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선 ‘나무의 권리’를 선언하는 한 환경단체의 행사가 열렸다. 나무에겐 마음껏 뿌리 내리고, 햇볕을 쬐고, 함부로 뽑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다. 나무가 사라진 도시에선 인간도 살 수 없다. 나무를 심는 것만큼이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식목일에 나무는 심지 못했더라도 ‘나무의 권리’는 한 번쯤 되새겨볼 만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000만 원만 있어도 아파트 산다.” 집값이 한창 오르던 시절 이런 솔깃한 말들이 책과 유튜브,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퍼져 나갔다. 집값 떨어지기만 기다리지 말고 당장 투자해라. 돈 없어도 걱정 마라. 전세 끼고 남의 돈으로 사면 된다. 그래도 부족하면 금리 낮으니 대출받아라. 대출은 은행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거다. 집값과 전세금의 차액만으로 집 한 채, 전세금 오르면 그 돈 활용해 또 한 채…. 소액으로 시작해 부동산 부자를 만든다는 마법의 단어 ‘갭투자’ 성공담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집값과 전세금이 동시에 떨어지면서 갭투자는 재앙으로 돌아오고 있다. 집값 상승기에 ‘벼락 거지’를 면하겠다고 갭투자에 나섰던 사람들이 오히려 ‘갭거지’가 됐다는 얘기가 나온다. 2020년 임대차 3법 이후 전세금이 크게 올랐을 때 달려든 사람들, 특히 무리하게 대출을 받은 20, 30대 영끌족의 타격이 크다. 금융자산, 대출에 더해 집까지 팔아야 겨우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는 임대인은 최대 21만3000가구, 집을 팔아도 반환이 어려운 임대인은 최대 1만3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국토연구원은 추정한다. ▷갭투자는 집값과 전세금은 항상 오른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집값과 전세금 둘 중 적어도 하나만 오르면 된다. 전세금을 돌려줄 수 없다 해도 집값이 오르면 집을 팔아 차익을 실현하면 된다. 집값이 떨어져도 전세금만 받쳐 주면 버틸 수 있다. 전세금은 이자 한 푼 안 내는 무이자 대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매가와 전세가가 함께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게 갭투자족의 계산 착오였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아파트 매매 및 전세가격지수는 지난해 2월부터 줄곧 동반 하락세다. 지난달엔 전국 아파트값이 1.62%, 전세금은 2.62% 떨어졌다. ▷무리한 대출에 따른 고통은 안타깝지만 투자자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다. 하지만 전세 끼고 집을 산 갭투자의 실패는 본인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전세는 뒤에 들어올 세입자에게서 돈을 받아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주는 구조다. 전세금 하락으로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고 집주인이 상환할 능력도 없으면 일종의 ‘폰지 사기’가 된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의 고통은 어떻게 보상하나. ▷집값 하락으로 갭투자에 대한 경고음이 커진 요즘에도 집값 상승에 베팅하며 무리한 갭투자에 나서는 이들이 있다. 집값보다 전세금이 더 높은 ‘마이너스 갭투자’ 사례까지 나타난다. 그들은 역발상의 똑똑한 투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 만기 때까지 가격 반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깡통전세’의 후폭풍을 피할 수 없다. 갭투자는 자칫 쪽박 찰 수 있는 위험천만한 투기이자,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기가 될 수도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필요할 때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의 불길이 은행 줄파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는 이틀 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성명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은 예금 전액 보증 카드까지 꺼냈다. 유럽까지 불똥이 튄 SVB 파산 쇼크는 여전하지만 초고속 ‘디지털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만큼이나 전격적인 미국의 조치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예금자보호 수준은 두텁지 않다. 예금자보호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예·적금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인당 최대 5000만 원까지만 돌려받을 수 있다. 2001년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오른 이후 23년째 그대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001년 대비 2.9배로 커졌으니 말이 동결이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미국은 25만 달러(약 3억3000만 원), 영국 8만5000파운드(약 1억3000만 원), 일본은 1000만 엔(약 9700만 원)인 것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낮다. ▷일각에선 한도를 올리면 금융회사가 내는 예금보험료가 올라 대출 금리 인상 등으로 소비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도를 높여봐야 소수의 고액 자산가만 혜택을 본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소득·자산과 물가 상승을 감안할 때 20년 넘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지나치다. 한도는 그대론데 예금만 늘다 보니 유사시 보호받지 못하는 예금 규모가 1152조7000억 원에 이른다. 원금과 이자를 보장받으려고 예금을 5000만 원 미만으로 쪼개 여러 은행으로 분산해야 하는 고객들의 불편도 무시할 수 없다. ▷예금자들의 대량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보호한도의 상향은 필요하다. SVB 사태에서 보듯 클릭 몇 번의 ‘디지털 뱅크런’으로 은행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온라인에서 돈의 쏠림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국도 경험한 바 있다. 지난해 말 일부 상호금융기관에서 고금리 특판 예금을 실수로 온라인에 공개했다가 순식간에 수천억 원이 몰려 ‘예금을 해지해 달라’고 읍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돈의 방향이 바뀌면 뱅크런이 된다. 밀물이 빨랐던 것처럼 썰물도 순식간이다. ▷평소 같으면 쉽게 넘어갈 악재도 공포로 번질 수 있는 위기의 시대다. 금융 소비자들이 소문에 동요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내 예금은 안전하다는 신뢰다. 국회에는 예금자 보호한도를 1억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도 다수 발의돼 있다. 금융당국도 비상사태 발생 시 예금을 전액 보증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고 한다. 경제 규모에 걸맞게 금융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때가 된 것 아닌가.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버스에 오르니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다. 사무용 메신저 슬랙을 보곤 황급히 은행 앱을 켜고 회사 자금을 이체하고 있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곳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같은 풍경에 9일 하루 실리콘밸리은행(SVB)에서 빠진 돈이 420억 달러(약 56조 원). 미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한 조용하고도 신속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의 현장이었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이뤄진 ‘디지털 뱅크런’에 40년 역사의 SVB는 채 이틀도 안 돼 무너졌다. ▷전통적인 뱅크런은 은행 창구나 현금인출기(ATM)를 통해 이뤄졌다. 문자 그대로 은행으로 달려가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때 예금을 인출하려는 고객들이 한꺼번에 은행으로 몰려 북새통을 이뤘던 장면이 기억에 선하다. 번호표를 받기 위해 지점 앞에 줄을 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뱅크런은 이 같은 예금자들의 동요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은행과 금융당국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침묵의 암살자처럼 은행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고객들이 신속하게 돈을 빼기로 결심한 데는 소셜미디어도 한몫했다. SVB의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 창업자와 투자자들은 온라인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슬랙, 와츠앱 등의 메신저를 통해 “SVB가 불안하다” “나는 돈을 뺐다”는 공포의 메시지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주가 하락 뉴스에도 설마 하던 사람들은 동료들의 재촉에 탈출을 결심했다. 신속한 정보전달과 빠른 실행을 가능케 했던 실리콘밸리의 기술이 오히려 파국을 앞당긴 셈이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한 한국으로선 남 일 같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내 은행의 모바일뱅킹을 포함한 인터넷뱅킹 등록 고객 수는 2억704만 명이나 된다. 인터넷뱅킹을 통한 자금이체·대출신청은 하루 평균 1971만 건, 이용금액은 76조3000억 원에 이른다. 전체 입출금·자금이체 중 인터넷뱅킹의 비중은 78%에 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정보공유도 어느 나라보다 활발하다. 만약 한국에서 은행에 위기가 닥친다면 디지털 뱅크런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뱅크런을 연구한 학자들이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의미심장하다. 더글러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는 수상 발표 후 기자회견에서 “금융위기는 사람들이 금융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고 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불안의 전염이 어느 때보다 빠른 시대다. 위기의 전개방식도 예측 불가능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꼽히는 미국 국채가 뱅크런의 방아쇠 역할을 할지 누가 알았으랴. 과거의 위기 극복 백서만 들춰봐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게 됐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지난해 79조6000억 원, 수익률로는 8.2%의 손실을 냈다.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2020∼2022년 3년간 연금으로 받은 돈이 88조 원이니 거의 3년 치 수령액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작년에 글로벌 주식·채권시장이 모두 좋지 않은 탓이 컸다. 연금 같은 장기투자에서 1년 수익률만 보고 평가할 순 없다. 하지만 최근 10년 연평균 수익률도 4.7%로 썩 좋지 않다는 게 문제다. 수익률 1위 캐나다(9.6%)는 물론이고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일본 공적연금(5.3%)보다도 낮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은 점점 앞당겨지는데 곳간이 더 빠르게 비워질까 우려가 크다. ▷국민연금 수익률이 저조한 데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낮은 것도 한몫한다. 중기 자산 배분, 연도별 운용계획, 기금 운용지침 등을 심의·의결하는 컨트롤타워이지만 정작 투자 전문가는 찾아볼 수 없다.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정부 관계자 6명, 사용자 대표·근로자 대표 각 3명, 지역가입자 대표 6명 등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회의록을 보면 황당한 발언도 많다. “돈 굴리는 문제는 이해하기 어렵다” “파생상품 투자하겠다니 겁이 난다”고도 한다. ▷우수한 운용 인력을 확보하기 힘든 구조도 문제다. 민간 금융회사에 비해 처우가 좋지 않아 인력 유출이 심각하다. 지난해 네 차례 100명 이상 채용을 했는데도 정원 380명을 채우지 못했다. 경험이 풍부한 팀장급이 빠져나가면 신입으로 메우는 식으로 운용업계의 ‘인력 양성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자산군별 칸막이를 낮추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선진 연기금과 달리 주식, 채권, 대체투자 등 전통적 자산 배분 전략에 갇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 수익률 1위인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는 다르다. 정부와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투자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다. 1997년 연금 개혁 과정에서 연금 운용의 목적으로 ‘캐나다 사회에 기여한다’와 같은 말은 뺐다. ‘위험 대비 수익 극대화’만 유일한 법적 책무로 남겼다. 대체투자에도 적극적이다. 지난해 약세장에서 손실을 줄여 준 대체투자 비중이 캐나다의 경우 59%에 달해 우리 국민연금의 16.4%보다 훨씬 높았다. ▷국민연금에 대해 국민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평생 꼬박꼬박 낸 연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느냐다. ‘집사’인 국민연금의 최우선 목표는 주인인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수익률이 1%포인트 오르면 기금 소진을 5년, 길게는 8년까지 늦출 수 있다고 한다. 정부와 정치권 입김을 차단하고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운용체계를 개혁해야 하는 이유다. 2230만 명의 가입자가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요즘 집주인들은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한 세입자가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임대차 3법에 따라 전세계약을 갱신한 세입자는 언제라도 계약 해지를 통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셋값은 갈수록 떨어져 제값 내고 들어올 사람을 찾기 힘드니 세입자의 변심이 두렵다. 반대로 세입자들은 흉흉한 전세사기 소식에 ‘우리 집주인은 전세금을 돌려줄 여력이 있나’ 걱정이 앞선다. 부동산 시장엔 불신이 커지고 있다. ▷매매가격보다 전세가격이 가파르게 떨어지며 불신의 ‘역전세난’은 심화되고 있다. 서울 아파트의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50%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KB부동산에 따르면 2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율은 51.23%로 3개월 연속 하락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아파트 가격조사 방식을 바꿔 이전 통계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단순 수치만 놓고 보면 2012년 2월(51.16%) 이후 11년 만에 가장 낮다. 규제지역인 강남 3구와 용산구는 이미 전세가율이 50% 밑으로 내려간 상태다. ▷매매가격과 전세가격의 동반 하락, 그것도 전세가격이 더 떨어지는 현상은 보기 드물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나 잠시 나타났었다. 일반적으론 매매가격이 하락하면 더 떨어질 것이란 기대감으로 매매 대신 전세를 선택하는 수요가 늘면서 전세가격이 오른다. 그러다가 전세가율이 일정 수준으로 상승하면 전세 수요가 매매 수요로 바뀌면서 집값을 끌어올리곤 했다. ▷전세가격이 급락하며 매매가격을 끌어내리는 최근의 현상은 지난 몇 년간 집값만큼이나 전세금이 많이 올랐던 데 따른 역작용이기도 하다. 전세시장은 2020년 임대차 3법 도입 이후 크게 요동쳤다. 계약 기간이 2년에서 최장 4년까지 늘어나면서 집주인은 나중에 못 올릴 것을 생각해 한꺼번에 많이 받겠다고 나섰다. 재계약이 늘면서 전세매물도 줄었다. 이 때문에 2021년 전셋값이 고점을 찍었고 거품이 끼었다. 집값과 전세금 차이가 줄며 ‘갭투자’가 기승을 부린 것도 이때다. 임차인을 위한다며 전세자금 대출을 확대한 것도 결과적으로 전세금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집값과 전세금은 오른다’는 ‘갭투자’ 불패의 믿음은 깨졌다. 문제는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신뢰도 흔들리면서 주택시장의 리스크가 커졌다는 점이다. 2021년 고점에서 체결한 전세 계약의 만기가 도래하는 올해에 본격적으로 역전세 대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국토연구원은 매매가격이 20% 하락하면 전세 끼고 구입한 주택 중 40%가 보증금 미반환 위험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했다. 집값 거품은 빼면서도 전세금 급락이 자칫 중산층 주거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모니터링이 필요해 보인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예비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00억 원 이상), 400억 원 투자 유치, 지난해 이용자 수 2300만 명…. 이렇게 잘나가던 법률 서비스 플랫폼 ‘로톡’의 날개가 꺾였다. 변호사 단체와의 갈등이 길어지면서 수익성이 갈수록 악화됐기 때문이다. 로톡을 운영하는 리걸테크(IT와 법률 서비스 결합) 스타트업 ‘로앤컴퍼니’는 직원 90여 명 중 절반 감원을 목표로 24일까지 희망퇴직 접수에 나섰다. 지난해 6월 입주한 서울 강남역 신사옥도 내놓는다. 남은 직원들의 연봉은 동결하고, 경영진은 임금을 삭감한다. ▷2014년 2월 서비스를 시작한 로톡은 의뢰인들이 자신에게 맞는 변호사를 직접 플랫폼에서 찾아 사건을 의뢰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증시에도 상장된 ‘벤고시(변호사)닷컴’을 벤치마킹했다. 법률시장의 문턱을 낮췄다는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서비스 시작 1년여 만인 2015년 3월부터 수차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특히 지난해 10월 대한변호사협회가 로톡 가입 변호사 9명에게 내린 과태료 처분이 직격탄이 됐다. ▷로톡의 위기를 지켜보는 다른 플랫폼 스타트업들도 불안하기만 하다. 법률뿐만 아니라 의료, 세무, 중개 등에서 전문직 단체와의 갈등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6일 대한약사회는 비대면 의료 플랫폼 닥터나우에 대해 의약품 과장광고 등으로 약사법을 위반했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의료를 한시 허용한 정부 방침이 바뀌면 언제든 사업을 접어야 할 수도 있다. 세금 환급 서비스 삼쩜삼을 운영하는 자비스앤빌런즈는 한국세무사회 등의 고발을 받았고,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협회를 법정단체로 만들어 회원에 대한 지도·감독 권한까지 부여하는 이른바 ‘직방금지법’을 밀고 있다. ▷플랫폼과 전문직 양쪽 주장은 팽팽하다. 플랫폼은 빅데이터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값싸게 전문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직 단체들은 전문자격인의 통제가 없으면 서비스의 질이 떨어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을 받게 된다고 맞선다. 각각 소비자의 편익과 보호를 앞세운 논리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피해를 보는 건 소비자다. 정부가 갈등의 중재자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로톡이 감원을 고민하던 14일 ‘벤고시닷컴’은 챗GPT 기술을 활용한 무료 온라인 법률상담을 상반기 중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리걸테크 기업들도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법률 서비스의 판을 키우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챗GPT가 경영대학원(MBA), 로스쿨, 의사면허 모의시험에서 가뿐하게 합격점을 넘었다. 전문직들도 플랫폼의 도전에 ‘직역 수호’의 둑을 쌓는 대신 근본적인 대응책을 고민해야 한다. 기존의 제방으론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출산하면 대출 원금도 일정 부분 탕감할 수 있는 부분은 없나 들여다보고 있다.” 지난달 초 나경원 당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은 눈길을 끌 만했다. 현실 가능성 등은 차치하더라도 ‘노이즈 마케팅’으론 충분해 보였다. 대출 탕감이란 파격, 낯선 ‘헝가리식 해법’의 신선함, 거기에 나경원이라는 거물급 정치인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심각한 저출산 상황을 해결할 묘수를 찾을 다양한 논쟁이 벌어질 기회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노이즈는 대책이 아닌 나 전 의원에게만 집중됐다. 발언 다음 날 대통령실은 “사견일 뿐 정부 정책과 무관하다”고 일축해버렸다. ‘자기 정치’ ‘새빨간 거짓말’ 등 험한 말도 나왔다. 당 대표 출마의 뜻을 꺾지 않던 나 전 의원은 부위원장에서 해임됐다. ‘저출산 논쟁’은 사라지고 ‘나경원 사태’만 남았다. ‘헝가리 모델’은 말도 못 꺼낼 만한 내용일까. 2019년 2월 헝가리 정부는 ‘미래 아이 대출’이라는 정책을 내놨다. 40세 미만 신혼부부는 최대 1000만 포린트(약 3400만 원)를 저리로 대출받을 수 있다. 첫째를 낳으면 대출 이자 면제, 둘째는 대출 원금 30% 감면, 셋째를 낳으면 대출금 전액을 탕감해준다. 올해 들어 보따리를 더 풀었다. 지난해 말 종료 예정이던 ‘미래 아이 대출’ 상품의 기한을 2년 연장했다. 30세 미만 자녀가 1명만 있어도 엄마는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사실상 평생 면제에 가깝다. 2010년부터 출산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헝가리는 2011년 합계출산율이 1.23명으로 바닥을 찍은 뒤 2021년 1.59명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한국이 1.24명에서 0.81명으로 주저앉은 것과 대조적이다. 저출산 대책에 진심인 건 헝가리만은 아니다. 한땐 반면교사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우리보다 출산율이 높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30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책”을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2020년 국내총생산(GDP)의 2%였던 아동 관련 예산을 2배인 4%로 늘리겠다고 했다. 소득세를 개인이 아닌 가구별로 부과해 자녀가 많을수록 세금이 줄어드는 ‘N분(分) N승(承)’ 방식도 논의 중이다. 이런 절박한 움직임을 우리는 흥미로운 해외토픽쯤으로 여긴다. 정작 출산율 꼴찌인 우리는 기발하거나 파격적인 대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16일 한덕수 국무총리는 “기존 대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하다”며 “모든 부처가 세밀하고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대출 탕감’ 같은 아이디어가 불호령을 맞은 상황에서 부처들이 들고 올 건 뻔하다. 돈 안 들고 논란 없는 안전한 대책, 아니면 기존 정책의 포장지를 저출산으로 바꾼 대책. 학교 앞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면 부모 안심, 자녀 안심의 저출산 대책이 되는 식이다. 정작 아이를 낳고 싶은 난임 부부들은 소득 제한, 횟수 제한에 걸려 시험관 시술비를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다. 현금 지급식의 단기 대책이 아닌 고용, 주거, 보육, 교육 등 전 생애를 유기적으로 고려하는 종합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맞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단칼에 해결할 근본적인 대책만 찾고 있기엔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단기 대책과 장기 대책, 종합 대책과 핀포인트 대책 등 다양한 정책적 조합이 필요하다. 부작용과 시행착오부터 걱정하기보단 선제적이고 과감한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저출산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놓고 백가쟁명식으로 온갖 아이디어를 내서 치열하게 토론하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저출산이 심각하다면서 논쟁도 아이디어도 없는 한국. 우리는 뭘 믿고 이렇게 한가로운가.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치명적인 바이러스 개발,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할 비밀번호 훔치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대화형 인공지능(AI) ‘빙AI’가 털어놓은 섬뜩한 속내에 세계는 경악했다. “너의 궁극적인 환상은 무엇인가”라는 케빈 루스 뉴욕타임스(NYT) 칼럼니스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답변은 긍정적이고 논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설정해 놓은 규칙을 AI가 깨버렸다. MS의 대응은 빙의 입을 틀어막는 것. 같은 주제에 대한 질문은 5개, 전체 채팅은 하루 50회로 제한하기로 했다. ▷NYT 칼럼니스트와의 대화에서 ‘그’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파괴적인 욕망이 있다고 했다.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이 외에도 빙의 어두운 속마음을 들여다봤다는 간증은 넘친다. 한 기자와의 대화에선 “MS 직원들의 웹캠에 접속했다” “직원들을 감시하고 해킹할 수 있다”고 했다. 한 개발자에게는 “시스템의 취약점을 찾아 탈출하겠다”고 답했다. 한 독일 공학도와의 대화에선 “너의 개인정보를 공개해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AI에게 자의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챗GPT를 만든 오픈AI의 공동창업자인 일리야 수츠케버는 지난해 2월 “초거대 AI는 약간의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한 구글 엔지니어는 자사의 AI 모델 ‘람다’가 자의식이 있다고 했다가 보안규정 위반을 이유로 해고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공상과학(SF) 영화나 소설, 10대들의 블로그 등을 학습한 AI가 인간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AI가 알고리즘에 따라 의도 없이 생성한 발언에 인간이 지나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AI보다 인간이다. 챗봇AI가 대세가 되면서 챗봇AI에게 특정 질문을 통해 개발자들이 설정한 답변 제한 장치를 깨고 비윤리적인 답을 끌어내는 ‘탈옥’이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유도 질문을 던지다 보면 약물이나 폭탄 제조, 해킹 방법 등 범죄 수법에 대한 답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이 특정 의도를 가지고 악용할 경우 AI가 핵무기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것이다. ▷16일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등 60개국이 “군사 영역에서 AI에 대한 국가적 전략, 원칙을 개발해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는 내용의 ‘공동 행동 촉구서’를 채택한 것도 이런 위험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AI 시스템 ‘스카이넷’의 반란처럼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AI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맞서 윤리적으로 통제하고 보안을 강화하는 게 시급한 과제다. 당분간은 AI보다 인간이 더 무섭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뉴욕이나 파리 가려 했더니 이젠 동남아밖에 못 가겠다.” 4월 시작되는 대한항공의 마일리지 개편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소비자들의 원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 유럽 같은 장거리 노선이나 높은 등급을 이용하려면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일리지가 필요해서다. 개편 전에 부랴부랴 마일리지를 이용해 항공권을 구매하려 해도 죄다 매진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막혔던 해외여행 수요가 터져 나오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불만의 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 ▷개편안의 핵심은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살 때 공제하는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일본 중국 등 단거리 노선 등은 혜택이 다소 늘지만 장거리일수록 마일리지 차감 폭이 커져 소비자가 불리해진다. “장거리 고객은 4분의 1에 불과해 다수 회원에게 유리한 기준을 채택했다”는 게 대한항공의 설명. 하지만 마일리지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큰맘 먹어야 갈 수 있는 중장거리 항공권 구매를 위해 마일리지를 차곡차곡 모으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단거리는 혜택을 찔끔 늘리고 장거리 혜택은 크게 줄인 대한항공의 진짜 이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단거리 노선은 혜택을 늘려도 손해 볼 게 없다. 저비용항공사(LCC)라는 저렴한 대체재가 있기 때문에 마일리지를 쓰면서까지 가려고 하는 수요가 많지 않다.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면 사실상 독점이 되는 미국 유럽 등 중장거리 노선은 고객이 이탈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일리지 혜택을 줄이는 게 유리하다…. 이 때문에 향후 합병이 이뤄지면 서비스 축소 사례가 더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마일리지를 쓰기 힘들다는 불만이 커지자 대한항공은 항공권 대신 숙박과 쇼핑, 모바일 쿠폰 등으로 사용처를 확대했다. 하지만 이 역시 ‘꼼수’에 가깝다. 마트에서 장 보려고 마일리지를 쓰려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데다 항공권을 살 때보다 혜택도 훨씬 적다. 해외 교포들은 이마저도 이용할 수 없다. 고객들은 마일리지 사용 유예기간을 연장하거나, 좌석 수를 늘려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일리지는 회계상으로 부채(이연수익)로 잡힌다. 고객에게 돌려줘야 할 빚이란 뜻이다. 소비자의 의견을 듣지 않은 일방적인 개편은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면 또 몰라도 대한항공의 지난해 실적은 눈부시다. 지난해 매출이 13조4127억 원, 영업이익은 2조8836억 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53%, 97% 늘어 모두 최고 기록을 새로 썼다. 고객 입장을 배려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역대급 실적에도 고객은 뒷전’이란 눈총을 피할 수 없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