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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쉬는 평일, 잠시 병원에 다녀오기로 한 남편이 한 시간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했더니 “아, 나 오늘부터 친구랑 매주 만나 공부하기로 해서 옆 동네 왔는데” 한다. 그러고 보니 신랑 일정표에 ‘○○○ 오전 10시’라고 써있었다. “공부를 한다고? 매주?” “응.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럼 점심도 먹고 와?” “그건 봐서.” 그렇게 답했지만, 친구와 오전 10시에 만나 공부를 한 남편이 식사도 하지 않고 돌아올 리 만무했다.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에 이틀 쉬는데 그 중 하루 3시간여, 반나절을 매번 나가서 친구와 보내겠다니.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그런 걸 나와 한 마디 상의 없이 결정하는 건지. 요즘 송년회다, 지인 상(喪)이다, 뭐다 해서 안 그래도 툭하면 밤늦게 귀가하고 있는 남편이었다. 그 주만 해도 사흘 내리 늦거나 일이 있어 나 혼자 아이들을 돌봤다. 전날은 학교 동창 모임, 그 전날은 오후 10시까지 근무, 또 그 전날은 몸이 아프다며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만 씻겨놓고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쯤은 아기를 같이 돌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새벽에도 칭얼대는 막내를 혼자 달래느라 잠을 설친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물론 남편이 항상 이런 것은 아니다. 남편은 평소 육아도 많이 하고 아이들도 굉장히 잘 돌보는 좋은 아빠다. 거의 매일 아이 넷 목욕도 도맡아 하고 휴일 아침에는 늦게까지 늦잠 자는 나를 위해 아이들 밥을 챙겨 먹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엄마보다 살가운 아빠를 더 따른다. 친정 엄마도 “○서방 같은 아빠 없다”며 엄지를 추켜세우실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육아에 대한 인식 차이는 느껴진다. 책임의식의 차이랄까. 예를 들어 앞선 상황에서 나라면 일단 약속을 잡기에 앞서 당연히 신랑에게 의사를 물었을 것이다. ‘친구와 매주 만나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하루 반나절만 아이를 혼자 볼 수 있겠느냐’고. 아니, 애초에 공부 같은 것은 시작할 생각도 안했겠지. 회사에 다닐 때도 분기별로 돌아오는 팀 회식이나 아주 중요한 취재원 약속 같이 매우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고 개인적인 일정을 잡아본 일이 없다. 연말연시 모임도 그렇다. 나라면 아마 대부분 참석하지 못했을 터다. 12월 들어 휴직 중인 나에게도 대학 동문, 회사 동기, 팀으로부터 송년회 참석 여부를 묻는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모두 갈 수 없다고 고사했다. 따져볼 것도 없이 아이들 때문이다. 남편에게 ‘나 대학 동아리 모임에 다녀올 테니 아이들 넷 좀 봐줄 수 있어?’ 같은 질문은 언감생심 해볼 생각조차 못했다. 반면 남편은 대학 동아리, 동창 모임, 직원 회식 거의 모두 참석했다. 그런 모임들은 ‘웬만해서는 가지 못한다’고 전제하는 나와 달리 ‘웬만하면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단 일정표에 적어놓고 “이날 모임 있어. 장모님 계시지?” 하고 물었다. 한 동창 모임에 다녀와서는 “한 친구가 자신에게 ‘아이 넷인데도 동창회에 나오다니 용감한 남편’이라고 했다”며 멋쩍어 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그때뿐, 모임은 모임대로 이어졌다. 지난 주말엔 편도만 4시간 걸리는 지방의 친구 결혼식까지 가겠다고 나섰다. 나는 고작 40분 거리의 회사동기 결혼식도 참석하지 못하는데…. 갓난쟁이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의 결혼식도 지방이란 이유로 축하문자만 날려야 했다. 그 친구는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 문자에 대수롭지 않은 듯 답했다. ‘아기 엄마니까 못 오는 게 당연하지, 괜찮아!’ 그래, 아기 엄마에겐 당연한 이 통상적인 일들이 왜 아기 아빠에겐 당연하지 않은 걸까. 어느 날인가 아이들 프로그램을 찾아 채널을 돌리다 근로시간 단축과 관련한 정부의 공익광고를 보게 됐다. 퇴근이 빨라진 덕에 여자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직접 데려올 수 있고, 남자는 취미생활을 즐기게 됐다는 식의 장면이 이어졌다. 심사가 뒤틀렸다. 아니, 왜 이른 퇴근으로 생긴 여유시간에 남자는 취미생활을 즐기는 반면 여자는 그저 아이를 찾으며 행복해 해야 한다는 말인가. 엄마도 드럼 치고 동아리 모임 좀 나가고 친구 결혼식에도 다녀오면 안 되나? 결국 지난 주말 남편에게 한 마디를 날렸다. “이대로는 너무 힘들다. 늦을 거면 아가씨(시누이)라도 불러 달라.” 멀지 않은 거리에 살지만 평일 늦게까지 일하는 시누이였다. 그 사정을 나라고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다음 주 남편 일정표에는 또 저녁 모임이 2건이나 적혀있었다. 또 아이들을 혼자 봐야 한다니 버거운 것도 버거운 것이지만 나 혼자 모든 것을 떠맡아야 하는 현실이, 그게 당연한 듯 온갖 약속이 적혀있는 남편의 일정표가 밉고 화가 나 시위를 하고 싶었다. 남편은 두 일정 중 하나는 가지 않아도 된다며 다른 하나만 참석하겠다고 했다. 일과 관련한 남편 일정까지 막을 순 없어서 그 정도로 타협을 봤다. 친정엄마께서는 “남자가 당연히 그런 모임도 나가고 사람도 만나야지” 하며 오히려 나를 나무라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특히 남편 일은 그 성격상 동기·동창 모임에서 듣는 정보가 적잖았다. 다만 남편의 ‘당연히’와 나의 ‘당연히’ 사이가 한없이 멀다는 게 씁쓸했다. 또 한 주가 시작되고 출근한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올해 크리스마스, 쉬려고 했는데 일해야 할 것 같아.’ 어찌됐거나 현실은 아빠든 엄마든 여유시간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해보면 남편에게 (육아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을 함양할 시간이 있었는가 싶다. 육아휴직이라도 해본 나와 달리 자영업자인 남편은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내년, 내후년 연말엔 상황이 좀 달라져 있을까?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아기가 언제쯤 스스로 뒤집더라?” 퇴근한 남편이 누워서 버둥대는 막내를 보며 물었다. 아이 넷 아빠가 그것도 몰라? 아니 가만… 4개월 때였나? 5개월인가? 아니다, 이유식 먹을 때 지나면 뒤집던가? “글쎄,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흔히들 아이 넷 부모라고 하면 ‘걸어 다니는 임신·육아 백과사전’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지 않은가. 불과 몇 년 지났다고 기본적인 발달과정조차 가물가물하다. 평범하게 키웠다면 어련히 겪었을 것들―배밀이, 기어가기를 시작하는 시기나 월령별 수면시간, 수유량 같은 것들―이 벌써부터 까마득하다. 일반적인 것도 이럴진대 돌발적인 상황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이 “아기가 갑자기 밥을 거부한다”며 상담을 청했다. 나 역시 잘 안 먹는 아이를 셋이나 키워본지라 어지간해선 안 써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선뜻 조언하기 어려웠다. 이미 몇 년이 지나 기억도 잘 안 나고 아이들마다 상황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 집 넷째만 해도 내겐 새로운 세계다. 다들 “넷째는 ‘발’로 키우겠네?” 라고들 하는데 발로 키우기는커녕 손발을 다 써도 답답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일례로 이제 갓 백일을 넘긴 넷째는 요즘 모유수유에 앞서 자주 칭얼거린다. 한 번에 젖을 물지 않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울다가 배고픔이 극에 달할 때쯤 젖을 문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칭얼거리기는커녕 가슴을 갖다대면 자동인형처럼 척척 무는 아기들만 키워본 탓에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어르기도 하고, 강제로 물려도 보고, 한참 배를 곯려 보기도 했다. 6년여의 육아노하우를 모두 적용해봤지만 먹히질 않았다.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맘(mom)카페에 질문을 올렸다. ‘모유를 잘 먹던 아가가 갑자기 젖만 보면 우는데 왜 그럴까요?’ 글을 쓰며 스스로도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아이 넷을 키웠다는 엄마가 다른 부모들의 조언을 구하고 있다니…. 하긴, 아무리 내 새끼라도 가끔 정말 같은 배에서 나온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다르니 나라고 별 수 있나. 첫째에게 통한 방법이 동생들에게 통하지 않고, 그 반대일 때도 부지기수다. ‘이것만은 진리!’라고 믿었던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도 많다. 셋째의 배변훈련도 그랬다. 첫 번째,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기저귀 떼기 아닌가. 둘째는 첫째에게 했던 방법대로 해서 쉽게 기저귀를 뗐다. 셋째 때도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이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듯 처음엔 셋째도 첫째, 둘째와 마찬가지로 수월하게 기저귀를 뗐다. ‘역시 그동안의 방법대로 하면 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데 넷째를 낳고나서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셋째가 다시 밤에 오줌을 지리기 시작한 것이다. 몇 달간 스스로 잘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잘 보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도로 이불에 쉬를 했다. “나 다시 기저귀 찰래!” 하며 떼를 쓰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퇴행행동’이었다. 시기도 그렇고, 기저귀를 차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을 볼 때 보나마나 동생이 생긴 데 따른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앞서 두 아이도 있었지만 정작 퇴행은 처음 경험해보는 터라 당황스러웠다. 첫째 둘째가 잘 지나갔기에 그저 ‘우리 애들은 동생앓이가 없나보다’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육아서적에 나오듯 셋째에게 더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주려 애썼다. 좋은 말로 타일렀고 쉬를 하지 않은 날 아침에는 사탕이라는 ‘인센티브’를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수가 계속되자 지친 마음에 아이를 무섭게 혼내봤다. 그 옛날 키를 쓰고 동네를 돌 듯 “복도를 돌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래도 오줌 지리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첫째, 둘째 때도 찾아보지 않았던 ‘밤 기저귀 떼는 법’을 셋째에 이르러 수소문하게 될 줄이야. 육아의 세계는 정말 끝이 없다.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생각도 얼마나 큰 착각인지. 올 초 어린이집 상담을 갔다가 둘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겨울에도 여름옷을 입겠다고 고집해 걸핏하면 나와 실랑이를 벌이고, 양말 한 짝도 성에 안 차면 신었다 벗기를 6번씩 반복하는 예민한 아이, 그게 내가 아는 둘째였다. 필시 어린이집에서도 까다롭게 굴거나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 걸,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둘째가 “모범적이고 사교적인 아이라 반에서 ‘반장’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모에게 웬만해선 아이 칭찬을 하겠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사교적인 아이’라니 무척 의외였다. 이후 둘째를 가만히 지켜보니 고집은 셀지언정 정말 친구들 사이에서 밝고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내가 알던 모습은 아이의 반쪽에 불과했다. 키우면 키울수록 아이들은 각기 다른 우주 같다는 느낌이다. 얼핏 나선형, 타원형으로 비슷해 보이는 은하도 실은 그 안에 수천만 개의 다른 별들을 품고 있듯이 말이다.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도 그 안에 전혀 다른 별과 성운과 블랙홀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아직 그 중 반의 반도 탐험하지 못했다. 넷째에 대해선 여전히 초보 엄마다. 엄마는 영원한 여정인가보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거지 같이 산다는 소리를 길게도 써놨네.’ 한 포탈사이트 게시판 다자녀 가족의 글에 달린 댓글이다. 넉넉지 않은 벌이에도 세 자녀를 포함한 다섯 식구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훈훈한 글이었지만 댓글은 훈훈하지 않았다. ‘애들은 돈으로 키우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 키우는 거라고들 말하는데, 사랑은 기본이고 거기에 돈이 얹어지는 거다.’ ‘비행기는 타봤나, 제주도는 가봤나.’ ‘애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등의 댓글이 많았다. 비단 이 글만 유별난 것이 아니다. 다자녀 관련한 글이나 기사를 보면 이런 류의 댓글을 쉽게, 또 많이 찾을 수 있다. 올 여름 7남매를 키우는 한 다자녀 가족은 자신들의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을 참다못해 일부 누리꾼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댓글 내용은 대부분 기사와 관계없는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짐승이다’ ‘햄스터냐’ ‘애들이 불쌍하다’ 등. “난 하나 키우기도 버거운데 넌 어떻게 넷이나 키워?” 어쩌면 내가 자주 듣는 이런 말에도 ‘하나도 잘 키우기 힘든데 넷이나 낳아 잘 키울 수 있겠느냐’는 뜻이 담겨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조차 우리 가족을 보면 “부모가 힘들겠다”며 혀를 끌끌 차시니 말이다. 본인 역시 다자녀 부모셨을 텐데…. 다자녀인 게 그렇게 힘들고 옹색해 보이는 걸까? 하긴 육아는 물론이고 결혼도 힘들다고 기피하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인터넷, 서점에는 독박육아니, 워킹맘 제2의 출근이니, 육아우울증 같은 ‘힘든 육아’ 이야기가 넘쳐난다. 비관적인 기사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사회조사’에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응답이 조사 이래 처음으로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특히 결혼적령기인 20~30대의 경우 응답자 중 ‘결혼을 해야 한다’고 답한 이는 3명 중 1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기사들을 여러번 써왔던지라 그리 놀라운 결과는 아니지만, 새삼 나와 내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확실히 육아는 힘들다. 다자녀 육아는 더 힘들다. ‘거지 같이’ 사는 수준은 아니지만 아이들 하나하나 넉넉하게 해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뭘 하든 남들 보다 2~4배의 돈이 들기 때문에 먹을 거 하나 살 때도 가격표부터 보게 된다. 하지만 다자녀 부모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후회는커녕 평소 서로 돕고 의지하는 애들을 보면 오히려 언감생심 형제를 힘닿는 데까지 더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첫째가 동생들 외투를 찾아오고 둘째가 셋째 양말을 신겨주는 모습은 이제 우리 집에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언젠가 키즈카페에서 셋째가 울면서 엄마를 찾아서 직원이 “아이 보호자를 찾습니다”고 방송을 했는데, 언니들이 가서 “저희가 보호자예요”하며 동생을 찾아온 일도 있다(내가 잠시 나간 새 벌어진 일인데 나중에 직원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셋째도 이제는 동생이 생겼다고 제법 큰 척을 한다. 아기가 울면 “토했나봐. 내가 가서 볼게”하고 가제수건을 챙겨오고 울지 말라고 ‘까꿍’하며 어르기도 한다. 저희들끼리 잘 어울려 노는 모습은 또 얼마나 예쁜지. 사춘기 아이들은 말똥만 굴러가도 웃는다고 했던가. 영·유아들은 수고스럽게 말똥 굴릴 필요도 없이 “똥” 한마디만 해도 배를 잡고 뒤집어진다. 뭐가 그리들 좋은지 한참 깔깔대다 지치면 “내 엉덩이 봐라”하며 서로 엉덩이를 까보이곤 웃고, “발 냄새도 맡아봐” 하더니 또 한참을 웃는다. 지저분한 유머는 딱 질색인 나조차 이런 아이들을 보면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덕에 힘들지언정 구질구질하고 ‘거지 같이’ 산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아마 대부분의 다자녀 부모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한데 요새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육아가 힘들고 아이는 버겁다는 이야기밖에 없어 안타깝다. 하나 키우기도 어렵다는 이야기들 천지인데 다자녀 가구는 오죽 답답하고 부담스러워 보였을까. 하지만 막상 키워 보면 자녀가 여럿이라 상쇄되는 일도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육아를 어렵게끔 하는 여러 불합리한 현실들이 존재한다. 본인의 신념에 따라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DINK·결혼 후 의도적으로 자녀 없이 생활하는 맞벌이 부부)족도 있다.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육아를 너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육아 포비아’는 없었으면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잃는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다. 엄마가 애를 평생 낳을 것처럼 보였는지 아이들은 종종 “엄마, 다음 동생은 언제 나와?” 하고 묻는다. “이제 없어”하면 금세 실망스러운 얼굴로 “왜?”라고 말한다. 엄마의 사랑이 분산되는 것이 영 미안했는데 그래도 아이들은 형제가 많은 게 싫지 않은가 보다. 더 만들어주긴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준 형제들만으로도 난 아이들에게 큰 선물을 했다고 믿는다. 내 인생에도 가장 큰 선물임은 물론이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엄마, 그거 말고 저 뒤에 있는 요구르트 주세요.” 아차, 재빠르게 반찬 뒤로 숨긴다는 게 그만 첫째 눈에 딱 걸리고 말았다. “그건 엄마 건데…” 하는 말은 당연히 소용없었다. 첫째를 보고 둘째, 셋째도 “나도 그거” “나도”하며 모두 같은 요구르트를 가리켰다. “너희들 먹을 걸로는 다른 요구르트를 사두었는데 그거 먹으면 안 될까?” 아이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엄마의 간식은 순식간에 세 아이들 입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평소 식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먹고 싶은 게 생기면 사다놓고 아이들이 잘 때까지 기다린다. 아이들과 함께 먹어도 좋겠지만 그러려면 배로 많이 사야 하는 데다, 같이 먹다보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간식거리를 숨겨놓은 날이면 그게 뭐라고 ‘아이들 얼른 재우고 먹어야지’하는 생각에 저녁 내내 행복하다. 나름의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랄까. 한데 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사라졌을 때 그 낭패감이란. ‘제 새끼가 먹는 건데 엄마가 뭐 그리 아쉬우냐’고 의아할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란 자고로 그 맛난 자장면도 싫다고 마다하며 자식에게 다 양보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최근 한 패스트푸드점 광고에서 나오는 어머니처럼 자장면보다 햄버거를 더 좋아해서 ‘어머니는 자장면을 쳐다도 안 봤어(광고 카피)’면 모를까, 엄마라고 마냥 양보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엄마도 맛있는 게 있고 혼자만 먹고픈 것도 있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종종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는 헌신적 모성애를 잠시 접어 두고 싶다. 한데 아이들이 크면서 아이들과 나의 공동‘식이’구역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엄마와 아이들 먹을거리는 전혀 별개의 구역이었는데, 갈수록 그 교집합이 커진다.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 애의 경우 어른 음식 중 못 먹는 것이라곤 커피, 술, 그리고 아주 매운 반찬에 불과할 정도다. 여기에 아이들 식욕까지 나날이 왕성해지니 ‘내 식사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넷째를 출산하기 전 애들 셋을 데리고 복합쇼핑몰에 놀러간 적이 있다. 구경을 마치고 지하 푸드코트에 내려가 아이들과 내 점심용으로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3개와 캘리포니아롤 1줄을 샀다. 오니기리는 아이들을 주고, 캘리포니아롤은 내가 먹을 생각이었다. 롤 포장을 뜯고 있는데 첫째가 “엄마, 그 롤 내가 먹으면 안돼요?”하고 물었다. 서너 쪽이나 먹겠지 싶어 흔쾌히 “그래” 했건만 웬 걸. 첫째는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새 롤 한 줄을 뚝딱 먹어치우고 말았다. 오히려 그것으로는 배가 덜 찼는지 남은 오니기리까지 넘봤다. 하긴, 벌써 몸무게가 28kg를 육박하는 어린이인데 서너 쪽만 먹을 거라 기대한 내가 바보지. 결국 첫째에게 오니기리 반쪽마저 내주고 만삭인 나는 과일 스무디 한 컵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첫째에겐 못 미치지만 둘째와 셋째도 과거와 비교하면 먹는 양이 크게 늘었다. 특히 연년생인 이 녀석들은 뭐든 서로 경쟁을 하듯 먹는다. 둘째에게 요구르트를 주면 셋째도 “나도 요구르트 줘!”하고, 셋째가 치즈를 달라 하면 둘째도 “나도 치즈 먹을래!” 한다. 엄마가 무언가 먹으려고 꺼내 놓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나도” “나도” 하며 달려온다. 이러니 가공식품 같은 것은 4개들이를 사놔도 단숨에 사라지기 일쑤다. 오죽하면 내가 간식거리를 반찬통 뒤에 숨기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물론 아이들이 잘 먹는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특히 입 짧은 아이를 키우며 맘고생 해본 부모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나만해도 불과 얼마 전까지 식사 때면 아이들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걸복걸 하며 쫓아다녀야 했다. 어릴 적 첫째는 얼마나 작고 말랐던지 “마치 마이크 같다”고들 했다. 막대기 같이 마른 몸에 동그랗고 커다란 머리가 붙은 모습이 꼭 음향기기인 마이크 모양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잘 먹기만 한다면야 내 간식은 물론 간(肝)까지 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입에 넣는 것 없이, 옥수수를 쪄도 고구마를 구워도 애들 입에 넣기 바빴다. 나도 찐 옥수수와 군고구마를 무척 좋아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옥수수 한 쪽, 고구마 반 개 덜 먹는다고 크게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왜 내 입에 들어가는 건 그리 아깝고 사치처럼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괜찮아” “너희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이런 말들로 엄마는 마냥 이렇게 포기하고 희생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오히려 내 아이들에게 더 나쁜 양분을 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가 잘 먹고 건강해야 육아도 행복하고 즐거울 테다. 요즘은 옥수수 두 개를 찌면 네 쪽으로 나눈 뒤 “이 한 쪽은 엄마 거야” 하고 빼놓는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가사에도 일침을 날리고 싶다. “어머니, 한 젓가락 먹는다고 큰 차이 없어요. 어머니도 드세요.”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요 며칠 몸이 많이 아팠다. ‘젖몸살’이었다. 수유기간 가슴에 문제가 생기거나 아기가 잘 먹지 않으면 유선이 막히면서 젖몸살에 걸린다. 가슴이 딱딱해지고 열이 나고 온몸이 마치 몸살에 걸린 듯 욱신거려서 젖몸살이라 부른다. 심하면 막힌 부위가 유선(乳腺)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내게도 유선염이 생기고 말았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얼마 안돼 피부가 붓고 후끈후끈 열이 나기 시작했다. 찌릿하게 아프고 쓰린 느낌이 딱 봐도 염증이 생긴 것 같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 전체가 얼얼했고 곧 등까지 찌릿찌릿 아파졌다. 온몸에 열도 올랐다. 다자녀 엄마라면 각종 육아 관련 질환에 통달했을 것 같지만, 정작 나는 건강체질이라 육아를 하며 병을 앓아본 일이 거의 없다. 세 아이 수유를 했건만 유선염에 걸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더구나 보통 젖몸살이나 유선염은 모유량이 많거나 아기에게 직접 수유하지 않고 유축기를 이용해 모유를 빼는 초산모가 걸릴 확률이 높다. 나는 모유량도 많지 않고 늘 아기에게 직수(直授)했다. 초산모이긴커녕 무려 넷째 산모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유선염이라니…. 우물쭈물하는 새 저녁이 되어 병원은 다음날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 네 아이를 두고 응급실을 가기도 어려웠다. 하룻밤만 버티면 아이 셋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한층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병원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있는 날이라 갓난아기는 남편에게 맡겼다. 하지만 큰 애들까지 맡길 손은 부족했다. 저녁식사까지는 아이돌보미 선생님이 해결해주셨지만, 문제는 돌보미 선생님이 퇴근한 이후였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어야 하고 목욕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 했다. 이들 중 영유아들이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필 다음날 첫째와 둘째의 소풍날이라 이런저런 준비물까지 필요했다. 엄마가 아픈 걸 아는지 모르는지 두 딸은 천연덕스럽게 다가와 “엄마, 내일 우리 소풍인 거 알죠? 맛있는 간식 싸주셔야 해요”라고 했다. 아차, 간식을 못 샀다. 큰 애 두 명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부모에게 ‘소풍 도시락의 짐’을 지우지 않는 대신 식사 후 아이들끼리 나눠먹을 간식을 사오게끔 했다. 처음에 멋모르고 과일을 싸 보냈다가 물정 모르는 엄마가 되고 말았다. “친구들은 모두 아기곰젤리나 새우과자 같은 걸 사와서 나눠먹는데 내 간식만 인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엄마표 도시락 대신 간식이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이후 소풍 전날이면 꼭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 간식을 샀다. 이날도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면 의견을 물어 간식을 사올 참이었는데 예기치 않게 몸이 아파 준비를 하지 못했다. 아이들 체육복과 수저통도 챙겨야 하는데….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해야 할 집안일도 산더미 같았다. 아이들 셋이 먹은 저녁 그릇 설거지, 여기저기 던져진 장난감 정리, 청소, 빨래도 해야 했다. 매일 저녁 반복되는 ‘엄마의 일’이었다. “하루쯤 안 하면 되지” 할 수 있지만 그건 다자녀 집 사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아이가 넷인 집에선 설거지나 빨래가 하루라도 밀리면 다음날 처리해야 할 일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당장 막내를 돌보고 있거니와 아이스크림가게놀이 장난감은 어디 넣어야 하는지, 갓난아기 빨래와 큰애들 빨래는 어떻게 달리 해야 하는지 남편은 몰랐다. 그걸 일일이 설명하는 품이 더 들 것 같았다. 이렇게 속은 답답한데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건강체질에 웬만한 통증은 잘 견디는 편이라고 자부했지만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특히 부은 가슴으로 수유를 할 때면 고통을 참느라 진이 빠졌다. 결국 늘 쓰는 ‘찬스’를 쓸 수밖에 없었다. “엄마, 오늘 밤 큰 애들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친정엄마에게 연락했다. 아픈 엄마가 결국 도움을 청할 곳이 또 (친정)엄마 뿐이라니 서글픈 일이었지만 어쩌랴. 한데 엄마도 다음날 새벽 일정 때문에 일찍 돌아가셔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큰 애들 3명을 재우러 들어가면 밤새 갓난아기 수유와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된단 뜻이다. 온몸에 오한이 나서 손가락 마디마디가 시릴 정도인데 아기를 돌보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고 남편에게 갓난아기를 어르면서 아이 셋을 재워 달라 할 수도 없고…. ‘엄마는 앓아누울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구나.’ 그러고 보면 친정엄마도 앓아누워 계신 걸 본 기억이 없는 듯하다. 엄마도 사람인데 아프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아파도 움직여야 했던 거다. 딱 한 번 수술 때문에 입원해 하루 누워계신 걸 본적이 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도 수술을 미루고 미루다가 나와 내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자 하신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되고 보니 이제야 알겠다. 엄마는 마음대로 앓아누울 수도 없다는 걸. 엄마의 자리는 비우기엔 너무 크다. 나는 그동안 내가 비교적 아이들을 풀어주고 손을 많이 대지 않아 ‘방임형 엄마’라 생각했는데 막상 아프고 보니 내가 방임해두고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큰일부터 표 나지 않는 작은 일까지 육아 구석구석에 내 손이 닿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결국 아픈 몸으로 아기를 어르고 수유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병원을 찾아 며칠분의 약을 받아왔다. ‘최대한 빨리 낫겠다’는 필사적 각오를 한 덕인지 다행히 염증이 사흘 만에 가라앉았다. 언젠가 회사 선배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건강해야 해. 부모가 되고 보니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더라고.” 정말 그랬다. 내 건강 증진의 목적이 육아라니 조금 씁쓸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아이들 덕에 건강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을 쓰게 된다면 나쁠 건 없지 않겠나.이미지기자 image@donga.com}

“띠링~” 메신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듯 쏟아지는 정오의 찬란한 햇살 사진이었다. 큰 애들과 함께 한강둔치 나들이를 간 남편이 보낸 것이었다. 아침 일찍 텐트와 야영의자까지 잔뜩 챙겨 나가더니 다행히 나무 그늘 아래 상석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부럽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기나긴 폭염이 언제였냐는 듯 공기도 선선했다. ‘세상에 이 좋은 날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니.’ 기운이 쭉 빠졌다. 물론 남편이 나간 건 나와 갓난아기를 위해서였다. 큰 애들이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막내를 온전히 돌보기 어렵고 아기도 깊게 잠을 잘 수 없다.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속상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도 이 화창한 날 아이들과 함께 바깥나들이 나가고 싶었다. 신생아 엄마의 매일은 반강제 감금생활과 다름없다. 물론 아이를 남에게 맡긴다면 잠깐씩 나갔다 오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시한부 외출이다. 생후 한두 달까지 아기는 수시로 엄마 젖을 찾기 때문이다. 특히나 ‘완모(분유는 주지 않고 모유만 주는 것)’를 할 경우에는 1~2시간에 한 번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 잠깐 아기를 맡기고 바깥일을 보고 오려 해도 시간 잡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 평일에 하루 쉬는 남편과 바람이라도 쐴 겸 집 앞 식당에 외식을 하러 나갔다. 아기는 잠시 산후조리사님께 맡겼다. 가급적 정오까지 수유를 하고 아기가 자는 1~2시간 내 식사를 할 작정이었지만, 수유시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다소 애매한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나마도 먹는 내내 조리사님으로부터 “아기가 깼다”는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식사를 즐길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남편은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자 한 판을 다 먹은 뒤 “어니언링(양파튀김)도 하나 시켜 먹을까?”고 했다. “그러든가”하고 답은 했지만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 불편한 기색을 느꼈는지 결국 신랑은 추가 메뉴를 시키지 않고 일어섰다. 이런 생활의 반복에 많은 여성들은 산후우울증에 걸린다. 나 역시 첫 아이 때는 종일 아이에 묶인 삶이 무척 당황스럽고 견디기 어려웠다. 낯선 동네에서 딱히 나갈 데도 없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고 ‘방콕(방에 콕 박힌)’ 생활이 한가한 것도 아니었다. 2시간에 한 번씩 수유하고 아기 기저귀를 갈고 토한 옷을 갈아입히고 칭얼대는 아기를 안아주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됐다. 아기 목욕을 시키고 다시 젖을 물리면 어느덧 밤이었다. 별로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루가 어찌나 훌렁 가는지. 특히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남편도 바빴던 시기였다. 육아를 분담하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신혼집도 친정에서 멀어 친정엄마나 친구가 찾아오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운전 초보라 친정집(약 1시간 거리)까지 아기를 데려가는 것도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독박육아’였다. 자칫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상황에서 나는 나 나름의 해법을 찾았다. 비록 집에만 있을지언정 뭔가 몸과 마음이 바쁠 일들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좋은 건 집안일이었다. 나이 들었을 때 산후풍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꼼짝 말아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난 ‘정신적 산후풍’을 극복하기 위해 청소와 정리, 요리를 시작했다. 매일 같이 방을 쓸고 닦고, 집안 인테리어도 이렇게 저렇게 바꿔봤다. 인터넷에서 각종 요리법을 찾아 생전 해본 적 없는 제과제빵에도 도전했다. 그러다 보면 은근히 시간이 잘 갔다. 두 번째 방법은 독서였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매주 책 서너 권을 빌렸다. 주로 수유 중간 중간 졸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류였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더불어 뭔가 정신이 충만해지고 있다는 만족감도 들었다. 2~3일에 한 권을 독파했다. 아이가 잘 자줄 때는 하루 한 권씩 읽을 때도 있었다. 단언컨대 첫째 육아휴직 기간은 살면서 내가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시간이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이란 것도 처음 시작했다. 이전에는 아기 엄마들이 이른바 ‘맘 카페’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 수시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왜 저런 쓸 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까’ 싶었다. 한데 같은 아기 엄마가 되고 보니 이해가 갔다. 그곳은 집에 갇힌 엄마들에게 소통의 장, ‘아고라(agora)’ 같은 곳이었다. 당시 나는 주변 친구들이나 회사 선후배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일찍 출산을 한 편이라 육아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맘 카페에 들어가 남들의 고민을 보고 댓글을 달다 보면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들 고충 글을 읽으면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하고 위안도 받았다. 이런 나만의 ‘산후조리’ 덕에 우울증 없이 세 번의 육아를 잘 치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도 든다. 왜 이런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엄마 스스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을까? 산전 임신부나 산후 영·유아를 지원하는 정책들은 많다. 그런데 정작 임신과 출산의 주인공인 산모들의 산후 건강에 대한 지원책은 무엇이 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소임을 다한 순간부터 국가의 관심 밖이 되는 것일까. 아이들과 나들이를 나갔던 남편은 저녁이 되어서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힘들다”며 털썩 주저앉는 남편을 보니 그도 자기 나름의 산후풍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남편도 자기만의 해소법을 찾았을지 궁금해졌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드디어 본격적인 ‘포(four)에버 육아’가 시작됐다. 2주간의 산후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한 자녀(막내) 엄마’로서 누렸던 호사(?!)는 이제 안녕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은 설렘 반, 우려 반이었다. 특히 어린이집에서 귀가한 아이들 반응이 어떨지 걱정됐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새 식구를 ‘격하게’ 환영했다. 오래간만에 본 엄마보다도 새로 온 아가가 더 반가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3명 모두 첫날부터 아기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아가를 둘러싸고 앉아 “귀여워”를 연발했고, “엄마 수유하게 잠깐들 나가 있어”하면 우르르 나갔다가 아가가 “엥”하는 소리라도 내면 언제 들었는지 또 우르르 달려왔다. 혹시 엄마가 아가에게만 관심을 가진다고 질투하지 않을까, 새로운 동생에게 무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문제는 큰 애들이 아니라 나였다. 셋째 출산 때까지는 조리원 퇴소 후 곧바로 남의 도움 없이 육아는 물론 가사까지 도맡아 해도 아무 문제없이 거뜬했다. 6년 전 SNS를 보면 갓난아기인 첫째를 슬링(갓난아기를 안을 때 쓰는 침낭형 아기띠)에 넣어 두르고 요리며 설거지를 했다는 일기가 남아있을 정도다. 그땐 그렇게 해도 크게 힘든 줄 몰랐는데, 웬 걸. 이번엔 돌아온 날 몇 시간 아기용품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좀 했다고 당장 저녁부터 삭신이 쑤시기 시작했다. 다음 날부터 부른 산후도우미가 아니었다면 아기 뒤치다꺼리는 물론 내 밥 한 그릇 챙겨먹기조차 어려울 뻔했다. 허리가 아파 거동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자녀 가정의 경우 시·구(광역·기초지방자치단체) 중복지원이 가능하다고 해서 처음으로 산후도우미를 신청했는데, 이후 며칠간 도우미 분께 아기를 맡기고 한의원을 다녀야 했다. 자연히 큰 애들 돌볼 손이 모자라 본의 아니게 큰 소리가 늘었다. 안방에서 막내에게 수유를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무언가 떨어지거나 부서지는 소리가 나면 당장 달려갈 수 없으니 목소리만 커졌다. “뭐한 거야! 누구야! 너희들 엄마한테 혼난다!!” 아이들이 재깍 말을 듣지 않을 때도 피곤하고 급한 마음에 자꾸 호통을 치게 됐다. 남편도 산후도우미도 없는 토요일, 배고프다는 막내를 안고 세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면서 또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첫 주말이 지나기도 전에 결국 목이 쉬고 말았다. 이런 ‘고난의 행군’은 생후 한 달도 안 된 막내가 감기에 걸리면서 정점을 찍었다. 산후조리원을 나온 지 일주일여가 지난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가 몸이 전에 없이 따끈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체온계를 대어 보니 체온이 37도를 넘었다. 열이 나는 것이다. 신생아는, 특히 모유를 먹는 신생아는 웬만해서는 잘 안 아프다. 엄마에게서 태생적으로 물려받는 면역력이 있는 데다 모유도 그런 역할을 하는 성분을 일부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신생아는 어딜 나가거나 외부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감염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래서 앞선 세 아이도 신생아 때는 모두 건강했는데 이게 웬 일인가. 아무래도 막내의 경우 태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게 화근인 듯싶었다. 다름 아니라 어린이집에서 온갖 병균을 안고 귀가하는 제 누나들이다. 신생아 옆에서 잠깐씩 들여다보는 게 전부인데 설마 뭔가 옮으랴, 방심했던 게 탈이었다. 신생아는 열이 올라도 함부로 해열제를 쓸 수 없다. 그렇다고 고열도 아닌데 괜히 병원을 간다고 나섰다가 상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결국 나와 한의사인 남편은 일단 하루 이틀 상황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아기의 체온은 37도 1~9부를 오가는 미열 상태였다. 미온수 마사지를 하면 37도 1, 2부로 떨어졌다가 젖을 먹으면 그 열로 7~9부까지 올라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수시로 미온수로 마사지를 하고, 칭얼대면 안아주고, 열이 오르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지내기를 며칠, 내 몸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기가 잘 먹지 않아 모유가 꽉 차면서 가슴 통증이 시작됐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 얼굴은 전에 없이 퀭해졌다. 하루는 귀가한 남편이 내 머리 냄새를 맡더니 “오늘 머리 안 감았어?”하고 물었다. 오늘은 무슨, 사흘째 머리를 감지 못한 상황. “내가 머리 감을 정신이 어디 있어? 머리 감기는커녕 세수하는 것도 까먹었구만.” 그렇게 말하곤 새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불과 한 달 전까지 회사 다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구질구질했다. ‘그래도 첫 한 달 치고 잘 버텼잖아.’ 거울에 비친 나를 애써 위로했다. 그래, 그러고 보면 정말 한 달이 훌쩍 가지 않았나. 갓 출산했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할 15개월이란 기간이 마냥 긴 시간인 것 같았는데, 벌써 그 중 한 달이 훌렁 사라져버렸다. 아프고, 소리 지르면서 어영부영하다가. 그렇게 생각하니 남은 14개월도 긴 시간이 아니었다. 출산 전에는 기왕에 주어진 15개월의 육아 시간을 정말 알차게 쓰고 복귀하자고 다짐했었는데.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너무 헛되이 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부랴부랴 휴대전화를 켜고 미술놀이 주문 사이트에 들어갔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디 나갈 수는 없으니, 큰 애들이 집에서 갖고 놀 수 있도록 점토나 만들기 도구라도 주문할까 해서다. 요 몇 주간 애들은 막내 아가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주말마다 방콕(방에서 콕 박혀 지내다) 생활을 해야 했다. 이번 주말에는 큰 애들에게 “뛰지 말아라” 하는 잔소리 대신 새로운 점토 장난감이라도 선물해야겠다. 아이들 작품마다 ‘특급칭찬’도 날려줘야지. 지금은 하루하루가 고생스러워도 나중에 복직해서 돌아보면 그 모든 나날이 얼마나 돌아가고픈 추억이겠나.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적성 등 고려해 어렵게 선택한 직업… 색안경 대신 응원을 “아이고, 남자가 간호사셔? 어쩌다 간호사가 되셨어? 난 당연히 의사일 줄 알았지.” 오늘도 제게 증상을 설명하시던 한 환자분께서 실망한 듯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네, 이제 익숙해요.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듣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처음 간호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그러셨죠. “간호대를 간다고? 남자가 의사를 해야지 어떻게 간호사를 하냐?” 친구들 중에는 “여자 만나려고 간호대 가는 거 아니냐”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심지어 제가 지원한 한 간호대 면접에서조차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자가 일반적인 회사를 두고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죠?” 전 제 적성과 직업의 전문성을 고려해 간호사란 직업을 택했을 뿐이에요.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인 게 좋았고, 고령화 시대에 맞는 전도유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외국에는 남자 간호사도 많잖아요. 무거운 환자를 부축하거나 의료장비를 옮기고 발버둥치는 환자를 제압할 때는 확실히 남자의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직도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 하고 색안경을 끼는 분이 많아 씁쓸해요. 저를 ‘남자’ 간호사가 아닌 그냥 간호사로 봐주실 순 없는 걸까요. ■ 男요리사, 女전투기 조종사… 男女직업 따로없죠각 소방서에서 체력과 구조능력이 뛰어난 소방관들만 출전하는 ‘최강 소방관 뽑기 대회’. 6월 열린 올해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출전했다. 경기 송탄소방서 김현아 소방교(30·여)다. 무게가 70kg인 마네킹을 옮기고 11층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등 험난한 경기 방식 때문에 최강 소방관 대회는 그간 남자 소방관들만 출전해 왔다. 첫 여성 참가자인 김 소방교는 “키가 177cm로 어릴 때부터 체격과 체력이라면 남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11층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전 뒤 생각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응원을 보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억세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기사에는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불나면 여자 소방관은 오지 마라’란 댓글도 달렸다. 김 소방교는 “급박한 현장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현장에 따라 여자 소방관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남자 요리사, 여자 전투기 조종사 등 성 고정 관념을 깬 직업인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특정 직업들에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꿈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교육부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희망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이 원하는 직업 1∼3위는 교사, 기계공학자 및 연구원, 군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학생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순이었다. 여러 세대에 거쳐 이런 인식이 만연하다 보니 ‘독특한’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접하기 일쑤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남자 교사 이현직 씨(26)는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고 하자 친척들조차 ‘남자답지 못하다’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교사가 된 뒤에도 불편한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여자아이의 부모로부터 “선생님이 아이 엉덩이를 닦는 게 불쾌하다”는 취지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씨는 “여교사가 남자아이의 대소변을 닦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교사에 앞서 남자로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아이돌보미로 활동하는 공영철 씨(56)도 여성가족부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이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냐”며 숙덕대는 중년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껄끄러운 열흘을 보내야 했다. 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한번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매체와 보호자”라고 강조했다. 실제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직업에 대한 성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진흥원이 일주일간 6개 방송사의 시청률 상위 드라마 22편을 분석한 결과 회사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역할은 대부분 남자(73%)였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 직업군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많았다. 반대로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은 ‘셰프(전문 요리사)’뿐 아니라 집밥을 만드는 사람도 남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대중매체에서 성평등 인식을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부모들에 대한 교육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성평등 교육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는데, 아이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부모 교육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다”며 “우리도 학교나 직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성인들이 성평등 교육과 시민 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 당신이 제안하는 이 시대의 ‘신예기’는 무엇인가요. ‘newmanner@donga.com’이나 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이 느낀 불합리한 예법을 제보해 주세요. 카카오톡에서는 상단의 돋보기 표시를 클릭한 뒤 ‘동아일보’를 검색, 친구 추가하면 일대일 채팅창을 통해 제보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남자가 간호사셔? 어쩌다 간호사가 되셨어? 난 당연히 의사일 줄 알았지.” 오늘도 제게 증상을 설명하시던 한 환자분께서 실망한 듯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네, 이제 익숙해요.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듣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처음 간호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그러셨죠. “간호대를 간다고? 남자가 의사를 해야지 어떻게 간호사를 하냐?” 친구들 중에는 “여자 만나려고 간호대 가는 거 아니냐”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심지어 제가 지원한 한 간호대 면접에서조차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자가 일반적인 회사를 두고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죠?” 전 제 적성과 직업의 전문성을 고려해 간호사란 직업을 택했을 뿐이에요.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인 게 좋았고, 고령화 시대에 맞는 전도유망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죠. 외국에는 남자 간호사도 많잖아요. 무거운 환자를 부축하거나 의료장비를 옮기고 발버둥치는 환자를 제압할 때는 확실히 남자의 힘이 필요하죠. 그런데 아직도 ‘남자가 오죽 못났으면’하고 색안경을 끼는 분들이 많아 씁쓸해요. 저를 ‘남자’ 간호사가 아닌 그냥 간호사로 봐주실 순 없는 걸까요. 각 소방서에서 체력과 구조능력이 뛰어난 소방관들만 출전하는 ‘최강 소방관 뽑기 대회’. 6월 열린 올해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출전했다. 경기 송탄소방서 김현아 소방교(30·여)다. 무게가 70kg인 마네킹을 옮기고 11층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등 험난한 경기 방식 때문에 최강 소방관 대회는 그간 남자 소방관들만 출전해 왔다. 첫 여성 참가자인 김 소방교는 “키가 177cm로 어릴 때부터 체격과 체력이라면 남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11층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전 뒤 생각하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응원을 보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억세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기사에는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불나면 여자 소방관은 오지 마라’란 댓글도 달렸다. 김 소방교는 “급박한 현장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현장에 따라 여자 소방관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남자 요리사, 여자 전투기 조종사 등 성 고정 관념을 깬 직업인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특정 직업들에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꿈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교육부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희망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이 원하는 직업 1~3위는 교사, 기계공학자 및 연구원, 군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학생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순이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이런 인식이 만연하다 보니 ‘독특한’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접하기 일쑤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남자 교사 이현직 씨(26)는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고 하자 친척들조차 ‘남자답지 못하다’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군대에서도 ‘남자가 그렇게 할 게 없느냐’며 비웃음을 샀다”고 털어놨다. 교사가 된 뒤에도 불편한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여자아이의 부모로부터 “선생님이 아이 엉덩이를 닦는 게 불쾌하다”는 취지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씨는 “여교사가 남자아이의 대소변을 닦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교사에 앞서 남자로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아이돌보미로 활동하는 공영철 씨(56)도 여성가족부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이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냐”며 숙덕대는 중년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껄끄러운 열흘을 보내야 했다. 공 씨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며 “그저 아이들이 좋아 지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한번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매체와 보호자”라고 강조했다.실제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직업에 대한 성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진흥원이 일주일간 6개 방송사의 시청률 상위 드라마 22편을 분석한 결과 회사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역할은 대부분 남자(73%)였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 직업군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많았다. 반대로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은 ‘셰프(전문 요리사)’뿐 아니라 집밥을 만드는 사람도 남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대중매체에서 성평등 인식을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부모들에 대한 교육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성평등 교육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는데, 아이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부모 교육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다”며 “우리도 학교나 직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성인들이 성평등 교육과 시민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지금 신생아실에 산모님 아기랑 다른 아기 둘뿐이에요.” 신생아실 간호사가 말했다. 출산한 날 밤부터 2시간에 한 번 신생아실 옆 수유실에서 수유를 시작했는데, 통 다른 산모를 볼 수 없어 의아했다. 알고 보니 산모가 나랑 다른 산모 달랑 둘 뿐이라는 거다. 다음날, 병원을 찾은 가족들과 신생아 면회실에 들어가 보니 정말 그 넓은 신생아실에 대부분이 빈 침대였다. 생각해보면 출산했던 날 분만실도 텅 비어 있었다. 검사를 받고 아기를 낳은 뒤 후처리를 끝내고 나갈 때까지 다른 산모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모두 합쳐 4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 걸 감안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내 출산 병원이 2차병원급의 작은 동네병원이긴 했다. 그래도 그동안 둘째, 셋째를 모두 이 병원에서 낳으면서 그처럼 사람이 없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때 다른 산모들로 가득했던 4인실, 6인실 등 다인병실도 이제 다른 부인과 환자들의 차지가 돼있었다. 한 번은 다인실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신생아는 병원 원칙상 다인실에 머물 수 없다) “신생아는 아니고 그보다 큰 아기 환자 울음소리”라고 했다. 부인과 환자로도 병실이 다 차지 않아 소아청소년과 환자까지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후조리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조리원 역시 내가 둘째, 셋째 때 모두 산후조리를 한 곳이다. 당시 내가 머무는 동안에만 10~20명의 산모들이 들고 나며 북적댔던 기억이 있다. 한데 이번에 와서 보니 산모 수가 나를 포함해 4명에 불과했다. 일주일 뒤 2명이 추가로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봐야 6명. 산모방은 총 4개층에 걸쳐있는데 층마다 사람이 한둘뿐이라 밤이 되면 빈 건물처럼 괴괴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신생아 40만 명 선 붕괴’ ‘합계출산율 1.0 미만 눈앞.’ 이런 기사들을 써왔던 나에게도 막상 맞닥뜨린 이런 저출산의 현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셋째를 출산한 것이 불과 3년 전인데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정말 이렇게 출생아가 줄었단 말인가. 전문가들이 ‘이르면 내년 출생아 수가 20만명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다’고 할 때마다 머리로는 ‘그럴 수 있겠다’ 싶어도 솔직히 ‘설마…’했는데. 혹시 한여름이라 출산율이 다소 떨어진 건 아닐까? 조리원 직원들은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달뿐만이 아니에요. 요새 정말 아기를 안 낳는다니까요.” 생각해보면 얼마전 산부인과의 대명사로 알려진 서울 제일병원도 ‘저출산으로 인한 경영난’을 호소하다 임금을 체불해 파업사태에 이르지 않았던가. 한때 자리가 없어 못 들어갔다던 제일병원 연계 산후조리원도 폐쇄한지 벌써 1년이 됐단다. 대형병원도 그럴진대 내가 다닌 곳을 비롯해 중소규모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은 오죽했을까 싶긴 하다. 출산 전 기획기사용으로 산부인과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는데, 도서지역 산부인과와 분만병원들도 상황이 갈수록 더 녹록찮다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산부인과 시설이 부족한 지역에 산부인과·분만병원을 지원하는 ‘분만취약지 사업’을 몇 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다. 한데 정부의 자금, 인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병원들이 나오는 상황이란다. 도서지역 산모들조차 출산횟수가 줄고 노산(老産)이 많아지다 보니 기왕 한 번 출산할 거 가까운 작은 병원보다 멀지만 큰 병원에서 진료받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사실 조리원 산모들 이야기만 들어봐도 답이 나왔다. “아이를 키울 돈이 부족해서” “맞벌이 부부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시부모님은 일하시고 친정엄마는 몸이 안 좋으시다보니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등. 그러고 보면 나를 둘러싼 여러 보육의 제반상황은 무척 좋은 편이다. 가계소득도 중산층 수준이고, 친정이 바로 코앞이라 언제든 급할 때면 아이를 맡길 수 있다. 더구나 ‘맞벌이+다자녀’라는 조건 덕에 정부의 각종 보육 서비스(어린이집, 아이돌보미 등)는 최우선으로 이용하고 있다. 양가 부모님들도 모두 건강하시고, 우리 부부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셔야 하는 분도 없다. 실상 나는 최근 저출산을 일으키는 각종 보육의 장애요소들을 대부분 겪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자녀 엄마라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보육 전문가란 소리를 듣고 있지만, 나는 보육을 잘 한 게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셈이다. 만약 내가 가진 조건들 중 하나라도 삐걱댔다면, 예를 들어 친정엄마가 몸이 불편하셔서 아이를 봐주실 수 없는 처지였다면, 시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매달 돈을 보태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린이집이나 아이돌보미를 이용할 수 없었다면, 과연 내가 지금처럼 아이를 4명이나 낳을 수 있었을까? 지난 한 주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새삼 나의 ‘좋은 운’을 깨닫고 겸허해졌다. 남들이 ‘애국자’니 ‘천연기념물’이니 추켜 세워주니 나도 모르게 잠깐 대단한 투사라도 된 양 우쭐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은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나도 당신 같은 처지면 아이를 낳았을 거예요’라고. 어찌 보면 이번 육아휴직은 잠시 현실과 동떨어져 숫자로만 저출산을 바라봤던 내게 다시 현실을 면밀히 들여다보라고 하늘이 준 기회일지 모르겠다. 또 일을 쉬게 됐다며 한탄했었는데, 기왕에 하는 일 더 잘 하라고 ‘복덩이(태명)’가 온 것일지도.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넷째가 태어났다. 열 달 간 배 안에 품었던 아이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단풍잎 같은 손, 인형 같은 발, 해사한 얼굴이 드디어 내 품에 안겼다. 세상에! 이제 난 진짜 네 아이의 엄마다. 매 임신마다 출산일 직전까지 근무했던 나는 넷째가 나오던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38주에 들어서면서 배는 정말 산만해졌다. 한 남자 기자는 “여자들 말이 배가 커지다 못해 ‘터지겠다’ 싶으면 애가 나온다던데 네 배가 그렇다”고 말했다. 나도 슬슬 때가 다가온단 느낌을 받았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묵직한 느낌이 좀 더 묵직해질 때, 혹은 아래로 더 쏠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출산이 임박했단 신호다. 이날 점심약속을 마치고 회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어쩐지 배에서 그런 느낌이 났다. 회사 앞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고민할 겨를 없이 곧장 동네 병원으로 가는 차에 올라탔다. 병원으로 가는 새 진통이 살살 시작됐다. 지방에서 근무 중인 남편에게 ‘나 진통 오는 것 같아’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몇 분 간격이야?’라는 남편 질문에 시간을 재어 봤다. 오 이런! 벌써 10분 간격이었다. 경산모(두 번 이상 출산한 산모)에게 10분 간격 진통이란 출산 과정이 시작됐음을 의미했다. 외래진료도 들르지 않고 곧장 분만실로 향했다. 분만실 간호사들은 멀쩡하게 화장을 하고 회사원 복장에 백팩을 메고 걸어 들어오는 산모를 처음에는 의아하게 바라봤다. “저 경산모인데요, 진통이 10분 간격이라 곧장 이리로 왔어요” 하자 “네?”하고 놀라며 그제야 부랴부랴 나를 침대로 안내했다. 태동검사를 하고 경부가 얼마나 열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질 안을 만져보는 ‘내진’을 한 간호사는 갸우뚱했다. “아직 경부가 열리진 않았는데 경산모이니 조금 지켜보게 누워 계세요.” 간호사의 말은 ‘오늘은 출산하지 않으실 테니 좀 누워있다 집에 가세요’라는 뜻 같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달랐다. 뭔가 ‘촉’이 왔다. ‘어쩐지 수 시간 내로 아이가 나올 것 같다’는 넷째 엄마의 촉이었다. 오후 일정 참석이 힘들겠다고 회사에 연락을 하는 사이 아니나 다를까, 진통의 강도가 강해졌다. 간격도 재어보니 6분 사이로 짧아졌다. 급히 간호사를 불러 다시 내진을 부탁했다. 30여 분 새 경부가 2cm 넘게 벌어져있었다. 간호사는 놀라며 “어머, 무슨 진행이 이렇게 빨라? (산부인과 전문의) 선생님께 연락 드릴게요”하고 사라졌다. 그 사이 나는 남편에게 ‘오늘 아이가 나올 것 같다’고 연락하고 친정엄마에게도 당장 와주십사 전화를 걸었다. 그 다음부터는 뭐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르겠다. 진통의 간격이 급격히 짧아져 친정엄마가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2~4분 간격이 돼있었다. 지방에 근무하는 남편이 ‘KTX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고 보낸 문자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분만실로 이동했다. 그 사이 진통은 2분 간격으로 더 짧아졌다. 남편 대신 엄마의 손을 부여잡으며 “아파요, 아파”하고 버텼다. 간간히 간호사가 옆에서 “산모님, 진행이 빠르니 조금만 힘내세요”하는 말이 들렸다. 남편은 출산 30분 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이미 내가 출산 자세를 하고 힘을 주고 있을 때라 남편은 수술복을 입을 새도 없이 겨우 손만 씻고 분만실로 들어왔다. 내 입에서는 “아파”, “무서워”라는 말이 쉴 새 없이 나왔다. 보다 못한 엄마가 “애를 네 번이나 낳아놓고 뭐가 그리 무섭냐”고 핀잔을 주셨지만, 네 번 낳아도 아픈 건 아픈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오후 7시 43분, 병원 온지 4시간도 채 안돼 아이가 내 손에 안겼다. 세 아이를 낳는 동안 한 번도 감동적이라고 느끼거나 눈물 흘린 적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갓 나온 넷째를 보자 눈물이 났다. ‘마지막 아기’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감성이 예민해졌던 것 같다. 처치를 위해 신생아실로 떠나기 전 잠시 품에 안았는데, 가슴 속에서 울컥 하는 것이 올라왔다. 이 작고 섬세한 것이 나의 새로운 아기라니. 새삼 놀랍고 경이로웠다. 아기가 신생아실로 옮겨지고, 나는 나머지 처치를 위해 조금 더 분만실에서 머문 뒤 병실로 이동했다.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새삼 내가 처한 현실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여느 때처럼 가방을 메고 출근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환자복을 입고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이라니. 더구나 이제 세 아이의 엄마에서 네 아이의 엄마라니.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상전벽해란 게 이런 느낌일까. 남편도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이제 내가 네 아이의 아빠라니, 참.” 한동안 나도 신랑도 병실 한 구석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잘 키우자.” “그래, 잘 키워야지.” 아이 셋 부모임에도 여전히 잘 키운단 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그렇게 다짐하는 것으로 서로의 감상을 대신했다. 그래, 이제부터야말로 진짜 포(four)에버(ever) 육아 시작이다. 힘내자! 이미지기자 image@donga.com}

현재 하루 12시간인 어린이집 운영 시간을 둘로 쪼갠 뒤 늦은 오후 보육을 전담하는 교사를 따로 운영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늦게까지 아이를 맡겨야 하는 맞벌이 부모들을 위한 조치다. ○ 어린이집 운영, 어떻게 달라지나 보건복지부는 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현 맞춤형 보육제도 개편 방안을 처음 공개했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까지 1년간 정부와 민간 전문가 14명이 TF를 결성해 논의한 결과다. 복지부는 이 안을 바탕으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조만간 최종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2016년 7월부터 시행된 맞춤형 보육은 부모의 취업 상태나 소득, 자녀수에 따라 어린이집 이용 자격을 종일형과 맞춤형으로 나눠 필요한 경우 어린이집을 더 오래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하지만 이용자 자격만 나눴을 뿐 정작 어린이집 입장에선 늦게까지 운영해도 인센티브가 없어 운영 시간에 큰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TF는 어린이집 운영 시간인 기존 12시간을 둘로 쪼개는 방안을 제시했다. 모든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제공받는 ‘기본보육시간’(7∼8시간)과 이후 ‘추가보육시간’을 나누는 것이다. 추가보육시간은 오후 7시 반까지 운영하는 저녁반, 오후 10시까지 운영하는 야간반 등으로 세분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추가보육시간에는 별도의 전담교사를 두고, 이들의 인건비도 따로 지원할 계획이다. 오후 2시까지 공통 수업을 진행하고 이후 일부 아동을 대상으로 방과 후 과정을 운영하는 유치원과 비슷하게 운영되는 셈이다.○ 양질의 보육교사 5만 명, 어떻게 확충하나 정작 중요한 세부 운영 방안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특히 추가보육시간 이용 가정을 어떻게 선별할지가 문제다. 기존처럼 이용 자격을 나누는 대신 추가보육시간에 아이를 보내면 부모가 추가 비용을 부담하는 방안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추가보육시간을 전담할 보육교사 5만2000명의 충원 방법도 문제다. 권병기 복지부 보육정책과장은 “보육교사 2만5000명 충원 논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며 “나머지 인원은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질의 교사를 단기간에 5만 명 넘게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 대부분 ‘워킹맘’인 보육교사들이 늦은 오후나 밤까지 근무해야 하는 추가보육시간 교사를 선택할지도 의문이다. 정부는 교사 충원 상황 등을 감안해 내년 초부터 어린이집 운영 시간을 이원화해 운영할 방침이다. 기존 맞춤형 이용 가정이 급할 때 추가 보육을 위해 쓰던 긴급보육바우처(15시간) 폐지를 두고도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복지부는 ‘긴급할 때 쓰라’는 바우처의 취지와 달리 과다 이용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어 개편안대로 가면 사실상 바우처가 폐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민단체인 ‘정치하는 엄마들’의 조성실 공동대표는 “부모들의 직업이나 보육 형태에 따라 이용 시간이 다양할 텐데 일부 부작용으로 어린이집 이용의 탄력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가선 안 된다”고 말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는 것일까? 첫째를 낳은 것은 2012년. 넷째를 품고 있는 지금과 불과 6년 차인데도 그 사이 임신부를 대하는 인심이 많이 각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서울에서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을 타면 양보 받는 일이 거의 없다. 첫째를 가졌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봐도 확연히 배가 나온 만삭 임신부에게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열에 한두 명 수준이다. 물론 ‘나는 임신부니 당연히 자리를 양보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양보는 어디까지나 배려지 의무가 아님을 안다. 나도 얼마 전까지 임신부처럼 안 보이도록 펑퍼짐한 옷을 입거나 지하철에서는 문 앞에 서 있는 식으로 불편한 상황을 피했다. 양보를 강요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 정도 서 있을 체력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삭에 들어서면서 대중교통 안에서 서 있는 게 버거울 때가 많다. 더구나 누가 봐도 임신부인 게 테가 나면서 남들의 시선도 불편해졌다. ‘누군가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데….’ 다들 말은 안 해도 나를 그런 시선으로 흘끔흘끔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계속 신경 쓰이는 대상이 되느니 누가 자리를 양보해 얼른 앉았으면 싶다. 그런데 불행히도 양보를 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얼마 전 지방 출장을 다녀와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택시를 탈 수도 있었지만 삼복더위에 기차역을 나와 택시정류장까지 걷느니 바로 연결된 지하철을 타는 편이 나아보였다. 퇴근시간을 약간 지나 지하철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분명 나를 다 보았을 텐데, 바로 앞에 앉은 두 청년을 비롯해 누구 하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솔직히 힘든 것을 떠나 조금 놀랐다. 특히 앞에 앉은 두 청년은 직장 선후배 사이인 듯했는데 내 배를 한 번 흘낏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본인들 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연애는 해?” “아니, 아직 만나는 사람 없어.” 남편에게 이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의외로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요새는 어르신들에게도 양보 잘 안 해. 다들 본인 삶이 힘들거든. 더구나 남들 도와봐야 득 될 게 없고 오히려 도우려다 해를 당했다는 뉴스도 많이 나오잖아.” 나도 직업이 직업인만큼 늘 흉흉한 소식을 들으며 살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람들의 팍팍한 삶이 이토록 인심을 삭게 하는가 싶어 새삼 놀라웠다. 생각해보면 임신부에 대한 인심만 사라지는 건 아닌 거 같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쇼핑몰이나 실내 놀이시설로 놀러 가면 사람들 사이에 배려가 많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쇼핑몰 입구는 보통 크고 무거운 유리문이다. 내가 낑낑대며 문을 열고 2인용 유모차를 밀어 넣는 동안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은 뒤에 유모차가 따라 들어오는 것을 빤히 보면서 오히려 문을 그대로 놓고 가버려 유모차가 문에 치일 뻔한 적도 있다. 유모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새치기를 당한 적도 여러 번이다. 조금만 걸으면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가 있는데도 굳이 ‘유모차 우선’이라고 써 있는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들어와 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바쁜 일정과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 이동 방법이 있는 그들과 달리 유모차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다. 한 번 새치기를 당한 뒤 10여 분을 기다리다가 결국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급한 나머지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유모차를 들쳐 업고 남은 손으로 아이들을 줄줄이 잡으니 마치 피난민 같았다. 씁쓸한 것은 엄마들 카페에 가보면 이런 경험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점이다. 엊그제에도 자주 가는 맘(mom)카페에 한 다자녀 가정의 이야기가 올라왔다. ‘다자녀 엄마인데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택시를 타려 하자 택시기사가 대놓고 핀잔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애들과 가까운 쇼핑몰에 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5분여 동안 빈차 3대가 그냥 지나쳐갔다. 누가 봐도 먼 거리를 갈 모양새가 아니고, 애들 여럿은 물론이고 유모차까지 실어야 하는 품새를 보고 차를 세우지 않는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을 멀찌감치 세워놓고 혼자 택시를 잡자 금세 한 대가 와서 섰다. “이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옆 건물로 가면 지하 주차장으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유모차를 태울 수 있을 거예요.” 어제 지방의 한 과학관으로 가족나들이를 갔다가 한 아주머니께서 베푼 ‘작은 배려’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는데, 유모차를 끌고 온 것을 보고 선뜻 먼저 다가와 말씀해주셨다. 이분의 한 마디가 없었다면 더운 날 아이들과 유모차까지 들쳐 메고 낑낑거리며 계단으로 내려갈 뻔했다. 별 것 아니지만 받는 입장에서 그런 배려는 큰 힘이 된다. 누군가는 ‘오지랖’이라고 비아냥댈지 모르지만, 내 아이들만큼은 꼭 그런 배려를 상시 실천하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배려란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거니까.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3일 오후 대구의 공기는 후끈하다 못해 뜨거웠다. KTX 동대구역을 나서자 시민들이 물안개를 뿜는 전봇대 같은 구조물 아래 모여 너나 할 것 없이 “살 것 같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구조물은 대구시가 세운 ‘쿨링포그’다. 물안개를 맞으면 당장 시원하기도 하지만 물이 마르면서 체온을 더 낮출 수 있다. 대구시는 시내 버스정류장 4곳과 시내 보행로 곳곳에 이 쿨링포그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는 여름철 폭염일수가 30일 이상인 대한민국 대표 극서(極暑)지다. 그런 만큼 전국에서 폭염 대비책을 가장 잘 갖춘 도시이기도 하다. 분지 지형이라는 폭염 취약요소를 극복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머리를 맞대면 이겨내지 못할 환경은 없다. 극서지 대구의 더위 극복법을 알아봤다.○ 버리는 지하수로 ‘폭염도로’ 식혀 이날 오후 2시 반 대구 중심을 가로지르는 달구벌대로 중앙로 부근에서 느닷없이 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지하 상수도관이 터진 게 아니었다. 도로 표지석 같은 작은 철제노즐에서 일제히 물이 뿜어져 나왔다. 대구시가 2011년 도심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도로가에 수로를 매설해 만든 ‘클린로드’ 시설이다. 여름철에는 도로를 식히기 위해 매일 4회(오전 4시 반과 10시, 오후 2시 반과 7시) 운영된다. 변명희 대구시청 환경정책과 기후변화팀 전문관은 “깨끗한 물을 끌어 쓰는 게 아니라 어차피 버리는 물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9.1km 도심대로에 매일 4회 물을 뿌리려면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하다. 대구시는 수돗물 대신 달구벌대로 아래 대구지하철 2호선의 지하수를 생각해냈다. 이 지하수는 지하철 시설물을 손상시킬 수 있어 어차피 모이는 대로 빼내야 하는 물이다. 노즐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자 주변 온도는 순식간에 떨어졌다. 차량 밖 기온을 나타내는 온도계의 숫자가 금세 41도에서 39도로 바뀌었다. 변 전문관은 “물만 뿌려도 아스팔트 온도가 최대 20도까지 떨어진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고 했다. 폐지하수의 마법인 셈이다. 대구의 도로에선 또 하나의 실험이 진행 중이다. 차열(遮熱)재가 그것이다. 차열재란 일반 아스팔트보다 햇빛을 더 많이 반사하고 흡수한 열을 빠르게 아래로 전달해 주변 기온을 상대적으로 낮추는 도료다. 서울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대구시도 지난해부터 시청 앞 도로를 포함한 1600여 m² 구간에 이 차열재를 시범적으로 깔았다. 차열재를 바른 대구시청 본관 앞 도로는 주변 도로보다 밝은 회색을 띠었다. 손을 대자 미지근했다. 오후 2시 반 대구 기온은 37.8도. 일반 아스팔트는 펄펄 끓는 프라이팬이었지만 차열재 도로는 확연히 달랐다. 변 전문관은 “차열재 도로 위 기온을 모니터링한 결과 일반도로보다 3, 4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도시계획에 ‘바람길’ 반영해야 아스팔트 도로와 함께 도시 열섬화의 주범인 시멘트 건물도 변하고 있다. 대구시는 지난해 ‘쿨루프(cool roof) 특공대’라는 자원봉사단을 조직해 저소득가구 10곳을 비롯해 일부 건물의 옥상을 밝게 도색했다. 옥상 색깔만 바뀌었을 뿐인데 빛반사율이 15%에서 80%로 크게 높아지면서 건물 실내 기온이 2∼4도 떨어지는 효과가 났다. 옥상에 텃밭을 가꿔 온도를 떨어뜨리는 녹화사업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엔 옥상녹화 콘테스트를 열기도 했다. 시가 참가자에게 일부 보조금을 주면 자비를 더해 옥상에 텃밭을 꾸미고 그 결과에 따라 상금을 주는 대회였다. 올해도 이런 유인책을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녹화 작업을 계속 독려해 나갈 예정이다. 옥상뿐 아니라 도시 전체 녹화사업도 진행 중이다. 이미 1996년 1000만 그루를 달성한 대구시 가로수는 2018년 현재 3300만 그루에 이른다. 시는 새로 ‘1000만 그루 더 심기’ 운동을 하고 있다. 도시 대부분의 보행로 가로수가 한 줄인 것과 달리 대구 중심가의 많은 보행로의 가로수는 두세 줄로 겹겹이 있다. 덕분에 보행로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 한낮에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신천(川)에는 ‘도시 바람길숲’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 신천 주변에 신규 건축물을 제한해 바람길을 내고 나무를 심어 바람 온도를 낮추는 사업이다. 대구 바람길을 연구해온 김해동 계명대 대기환경학과 교수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밤새 차가워진 공기는 천을 따라 흐르며 도시를 식히는데, 이 바람길이 막히면 공기가 정체되고 대기오염이 악화된다”며 “바람길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모든 건축과 재개발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기차 타러 왔는데 물이 넘쳐서 바닥에 발을 디딜 수가 없어요.” 6일 오후 고속철도(KTX) 강릉역 대합실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던 승객 이모 씨(27)는 의자 위로 두 발을 모은 채 쪼그려 앉아있었다. 이날 강릉지역에 내린 폭우로 대합실이 빗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이 씨는 “바다를 보며 휴가를 보내려고 강릉에 왔는데 기차역에서까지 물바다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강릉시에는 이날 오전 2시 반부터 1시간 동안 93mm의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며 도심 여러 곳이 물에 잠겼고 일부 도로는 차량 통행이 통제됐다. 1시간 동안 강릉에 내린 비로는 2002년 8월 태풍 루사 때의 시간당 100.5mm에 이어 역대 두 번째 많은 양이다. 강릉시 포남1동 사거리는 아침부터 황톳빛 물바다가 됐다. 승용차 바퀴가 절반가량 물에 잠길 정도여서 출근길 차량들은 엉금엉금 거북운행을 했다. 일부 차량들이 우회로를 찾기 위해 방향을 트는 바람에 차량 여러 대가 뒤엉켰다. 같은 시간 경포해수욕장 인근 진안상가에서는 상인들이 침수를 막기 위해 출입문에 모래주머니를 쌓는 등 사투를 벌였다. 일부 점포에는 이미 물이 차 상인들이 물을 퍼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한 상인은 “아무리 퍼내도 계속 물이 들어온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져 태풍 루사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오후 10시 30분까지 강릉 강문 282mm, 속초 224.4mm의 비가 내렸다. 강원도 연간 평균 강수량의 5분의 1에 달하는 양이다. 5일 속초는 한낮 기온이 38.7도, 북강릉(강릉시 사천면에 위치한 공식관측소)은 37.1도를 기록해 근대 기상관측 이래 최고기온을 경신했는데 하루 만에 폭염 대신 폭우가 찾아온 것이다. 양양군(182mm)과 고성군 현내면(177mm) 등지에도 많은 비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집중호우로 피해가 속출했다. 강원도가 잠정 집계한 피해는 224건으로 대부분 도로 및 주택, 상가 침수다.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정동119지역대 인근 도로가 산사태로 통제됐고, 설악산국립공원은 이날 오전 5시 반부터 모든 탐방로 출입이 금지됐다. 속초에서는 아남프라자 앞, 금강아파트 일원, 영랑호 일원 등 3곳의 도로가 침수돼 교통이 통제됐다. 또 비닐하우스 20동 등 농경지 3.5ha가 물에 잠겼다. 기상청은 전날인 5일 오후까지 강원도 전역에 5∼50mm의 비가 내릴 것으로 내다봤지만 실제론 최고 280mm가 넘는 물폭탄이 쏟아졌다. 기상청은 “우리나라 북동쪽에 위치한 고기압과 남동쪽의 저기압에서 동시에 불어온 습한 동풍이 태백산맥과 충돌하면서 많은 비를 뿌렸다”고 설명했다. 예상 강수량보다 훨씬 많은 비가 내린 건 구름이 당초 전망보다 더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강릉=이인모 imlee@donga.com / 이미지 기자}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도시에 살면서 대구 사람들의 ‘더위 내성’은 강해졌다. ‘대폭염’이 있던 1994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재민 씨는 최근 라오스를 여행하다 의외로 선선한 날씨에 놀랐다. 이 씨는 “대구가 엄청 덥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같은 해 태어난 ‘대폭염둥이’ 문창록 씨도 경북 포항에서 군 복무할 때 일을 소개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동기들은 모두 덥다고 난리였지만 저는 ‘포항이 참 시원하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낸 강명훈 씨(33)는 “대구가 연고지인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가 더위에 강한 덕분에 한여름 좋은 성적을 낸다”며 “‘매미가 울 때면 삼성이 치고 올라갈 때’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실제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인’들은 더위에 강할까? 국립기상과학원은 지난해 8월 25일 대구와 서울에서 5년 이상 거주한 20∼40대 남성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당시 대구의 상대온도(사람이 체감하는 더위 수준)가 서울보다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거주자 93%가 ‘덥다’ 혹은 ‘매우 덥다’고 답한 반면 대구 거주자는 69%만이 ‘덥다’고 답했다. ‘평소 나는 더위에 강하다고 느낀다’는 응답도 서울은 17%, 대구는 25%로 차이가 났다. 동아일보가 취재한 대구 젊은이 13명은 하나같이 더위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이 전한 한여름 더위 나기 비법을 소개한다. ①쿨웨어: 청바지는 절대 금물이다. 통이 큰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땀이 잘 마르는 스포츠웨어를 입는다. 박수현 씨(22·여)는 “뜨거운 햇볕을 막으려면 얇은 소재의 긴 치마가 좋다”고 했다. 쿨 토시, 스카프, 아이스두건 등 아이디어 상품을 이용하는 이들도 많았다. ②아이스팩: 대폭염둥이인 박상현 씨는 평소 아이스팩을 여러 개 얼려 집 여기저기 놓아둔다. 박 씨는 “잘 때 수건에 싸서 안고 자면 정말 시원하다”고 했다. 대구토박이 양재훈 씨(22)는 “매트 형태의 아이스팩을 집 바닥에 깔아둔다”고 말했다. ③식냉(食冷)치열: 대구 사람들은 “이열치열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홍태양 씨는 “아침에 차가운 우유, 점심에 냉면, 저녁에 냉국수 등 여름에는 매 끼니 차가운 음식을 먹는다”고 했다. 대프리카인들은 이 밖에도 잦은 샤워나 교외 나들이 등을 즐겼다. 강명훈 씨는 “이제 다른 지역이 대구보다 덥다고 하면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 ‘덥부심(덥다+자부심)’이 생겼을 정도로 더위에 의연해졌다”고 전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조소진 인턴기자 고려대 북한학과 4학년}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이틀 연속 이어졌다. 3일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이 30.4도를 기록한 것. 서울의 밤사이(오후 9시∼오전 6시) 기온이 이틀 연속 30도를 넘겨 ‘초열대야’를 나타낸 것은 1907년 근대 기상관측 이래 처음이다. 2일 낮 기온(최고 37.9도)이 전날(최고 39.6도)보다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기상청은 “구름이 복사냉각(밤새 열이 반사되며 지면의 기온이 떨어지는 현상)을 막았고 대기 중 습도가 높았던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인천과 강원 홍천, 충북 청주 등도 역대 최고 최저기온보다 높은 아침 기온을 나타냈다. 서울과 인천에서는 한때 고농도 미세먼지가 나타났다. 이날 낮 12시 초미세먼지(PM2.5) 일평균 농도는 서울이 m³당 35μg, 인천은 40μg을 기록해 나쁨 수준(36μg 이상)에 근접하거나 초과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오존주의보도 이어졌다. 주말인 4, 5일에는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낮 최고기온이 35도 이상 오르면서 무더위가 이어지겠다. 특히 4일은 경북 내륙을 중심으로 38도 이상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2일 전국 곳곳이 역대 가장 ‘뜨거운 아침’을 맞았다. 이날 서울의 아침 최저기온은 30.3도로 1907년 관측 이래 111년 만에 가장 높은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전날 한낮 최고기온이 39.6도를 나타내 역대 최고기온 기록을 새로 쓴 서울은 하루 만에 ‘초열대야’(전날 오후 6시∼당일 오전 9시 최저기온이 30도 이상)로 또 하나의 신기록을 세웠다. 이번 기록은 2013년 8월 8일 강원 강릉이 기록한 30.9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2일 인천(29.1도)과 경기 동두천(26.9도) 등도 역대 가장 높은 최저기온 기록을 세웠다. 이날 한낮 기온은 기상청 예보보다 1, 2도가량 떨어졌다. 구름이 많이 낀 데다 화염에 가까운 열기를 내뿜는 동풍이 다소 주춤해진 결과다. 다만 자동관측기기(AWS)로 측정한 비공식 최고기온이 가장 높은 곳은 경북 영천시 신녕면으로 40.2도였다. 기상청은 최소 12일까지 전국에 비가 오지 않는 가운데 폭염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111년 만에 최악의 폭염이 한반도를 덮쳤다. 1일 오후 4시 강원 홍천의 기온은 41.0도를 기록해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1907년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을 나타냈다. 1942년 8월 1일 대구가 기록한 역대 최고기온(40.0도)이 76년 만에 깨진 것이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기온도 39.6도를 기록해 종전 서울 최고기록(1994년 7월 24일 38.4도)을 갈아 치웠다. 경북 의성(40.4도), 경기 양평(40.1도), 충북 충주(40.0도), 강원 춘천(39.5도), 경기 수원(39.3도), 대전(38.9도) 등 기상청 공식 관측소가 있는 95곳 중 35곳에서 최고기온 기록을 경신했다. 이는 역대 최다 기록이다. 이날 자동관측기기(AWS)가 측정한 비공식 최고기온 기록은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로 41.9도에 달했다. 이어 서울 강북구 41.8도, 경기 가평군 청평면 41.6도, 강원 횡성군 횡성읍 41.3도를 기록했다.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비공식 기록이 41도를 넘은 것도 처음이다. 8월 첫날 최고기온 기록이 무더기로 쏟아진 만큼 올해 폭염 일수, 열대야 일수 등 더위 지표가 1994년 ‘대폭염’을 넘어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1994년 폭염, 열대야 일수는 각각 31.1일과 17.7일로 1972년 현대적 관측이 시작된 이래 압도적 1위다. 올해 폭염, 열대야 일수는 지난달까지 각각 17.2일, 7.8일이다. 앞으로도 폭염은 열흘 이상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상청은 2일에도 서울과 홍천 등 다수 지역의 한낮 기온이 39도를 넘을 것이라고 예보했다.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이르면 11월부터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에서 일회용비닐봉투 사용이 전면 금지된다. 현재 비닐봉투를 공짜로 주는 제과점에서는 돈을 내야 비닐봉투를 구매할 수 있다. 환경부는 이 같은 내용의 ‘자원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 하위법령 개정안을 2일부터 40일간 입법 예고한다고 1일 밝혔다. 개정안은 세계 최고 수준(1인당 연간 414장)인 한국의 일회용비닐봉투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현재 일회용비닐봉투를 장당 20원 안팎에 판매하는 마트와 슈퍼마켓(165m² 이상)은 앞으로 유상 제공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일회용비닐봉투 사용이 전면 금지되는 곳은 전국적으로 마트 2000곳, 슈퍼마켓 1만1000곳에 달한다. 그 대신 재사용 종량제 봉투나 빈 박스, 장바구니 등만 이용할 수 있다. 일회용비닐봉투를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유상 판매하다 적발되면 최고 2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제과점에서는 앞으로 비닐봉투를 공짜로 제공할 수 없게 된다. 전국 1만8000여 개 제과점에서는 비닐봉투를 판매하거나 종이백을 대신 제공해야 한다.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등 주요 프랜차이즈 2곳의 연간 비닐봉투 사용량은 2억3000만 장에 달했다. 우산, 세탁소, 운송용 에어캡(뽁뽁이) 비닐과 일회용 비닐장갑, 식품포장용 랩 등 5개 품목 생산자는 앞으로 폐비닐 재활용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법령 개정에 따라 이들 품목이 새로 생산자책임재활용(EPR)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EPR란 제품 폐기물 비용을 생산자에게 일부 부담하는 제도다. 개정안은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르면 11월부터 시행된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