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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프리카’ 더위에 대구산 바나나 등장#2대구의 어느 주택 마당 한 켠에서 연두빛 활엽을 뽐내는 나무 한 그루. 커다란 꽃봉오리에 손가락 크기의 바나나 수십 개가 달렸습니다. #3지난해만 해도 9월에 잠시 꽃망울이 맺혔던 바나나 나무. 대구 도심 주택 마당으로 이식한 뒤 이렇게 6월 초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것은 처음이죠. “보통 9월에서 10월쯤에 한 번씩 (꽃이) 피기는 했는데 겨울오기 전에 다 죽어버리니까 한 번도 따 먹어 본 적은 없습니다.”(김덕규, 바나나 나무 주인)#4‘대프리카’는 대구와 아프리카를 합친 신조어인데요. 대구는 여름이 유난히 덥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죠.아스팔트 위에 날계란을 올리니 계란 후라이가 만들어질 정도입니다.#5한반도 기온이 올라가면서 열대 과일의 재배 한계선도 북상하고 있습니다.바나나 성장에 가장 좋은 기온은 27도.올해 5월 대구 낮 최고 기온이 30도 이상인 날이 지난해보다 두 배나 많아 바나나 개화가 빨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6이런 날씨가 이어진다면 특별한 재배 시설 없이도 대구에서 바나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죠. “지금 5월 말에서 6월에 꽃이 피면 생육기간이 90~100일 사이 올 겨울이 가기 전에 수확이 가능합니다.”(조재욱 / 경북도 농업기술원 연구사)#7대구 시민들도 바나나 수확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앞집에 있다보니 신기해서 자꾸 지나가면서 보게 된다. 이왕 저렇게 크고 있으니 잘 커서 맛있게 열렸으면 좋겠다.” (김범주 / 대구 동구)#8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한반도가 아열대기후로 바뀔 수도 있다는 학계의 전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기됐습니다. 아열대 작물을 연구하고 신품종 농작물을 개발하는 등 기후변화로 농업이 오히려 재도약을 할 수 있도록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이유종기자 pen@donga.com}

아프리카에서 냉동 수산물을 팔아 재벌 반열에 오른 나이지리아의 기업인 마이클 이브루가 2016년 9월 6일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그는 냉동 수산물 수입으로 성공해 팜오일 생산, 운수, 관광, 양조, 목재, 양계, 언론, 호텔, 은행, 해운, 보험 등을 아우르는 거대한 기업집단을 만들었다. 계열사만 20개를 웃돈다. 현지 매체인 부즈나이지리아는 이브루를 나이지리아에서 14번째 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브루는 1930년 12월 나이지리아 최대 도시인 라고스에서 순회 성직자였던 피터 이브루의 자녀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피터는 “교육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다”며 자녀들을 최대한 학교에 보냈다. 이브루는 중등학교인 이그보비칼리지의 6년 과정을 3년에 마칠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1951년 무역회사인 아프리카연합회사(UAC)에 입사했다. 당시 나이지리아의 고졸자가 UAC에 입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UAC에서 사회 초년병을 보내던 이브루는 1956년 영국인 지미 라지와 함께 회사를 세워 독립했고 사업 초기 건설업에 매달렸다. 현지 고교 등 여러 관급 공사를 맡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건설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공사 일정과 대금 지급 등이 지연될 때가 많았다. 이브루는 인근 국가인 가나에 여행을 갔다가 우연하게 냉동 수산물을 판매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냉동 수산물의 잠재력을 간파했다. 개발도상국인 나이지리아에는 식량이 많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소, 닭 등에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지만 육류의 가격은 너무 비쌌다. 근해에서 잡히는 수산물도 많지 않아서 물고기마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일당이 4실링8펜스였는데, 수산물 1파운드의 가격은 4실링이었다. 이브루는 해외에서 저렴하게 냉동 수산물을 들여오면 큰 이문이 생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선 냉공 수산물이 ‘죽은 물고기’로 여겨졌다. 사람들이 냉동 수산물을 먹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육류를 파는 상인들은 ‘냉동 수산물을 먹으면 사람들의 피가 썩는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여기에 대한 인식 전환이 매우 필요했다. 그는 새벽 4시 수산시장로 향해 물고기를 훈제해서 파는 여성들을 공략했다. 직접 냉동 수산물에 소금, 기름을 발라 훈제 물고기를 만들었고 ‘피가 썩는다’는 루머는 사실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또 단백질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저렴한 냉동 수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노력으로 시장에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서서히 일었다. 이브루는 냉동 수산물 판매량을 늘리며 유통망을 구축했고 다른 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자금까지 모았다. 1963년 일본 수산기업과 함께 냉동 어선 등을 확보해 수산업에도 진출했다. 1969년에는 글로벌 브랜드가 생산하는 자동차, 트랙터, 트럭 등을 수입해서 파는 회사도 설립했다. 1973년에는 양계 농장을 인수했고 이듬해에는 목재 생산에도 진출했다. 1990년대에는 은행도 설립했으며 남동생을 통해 언론에도 진출했다. 이브루는 2006년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따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저소득층 학생 교육, 미혼모 지원, 노인 보건, 교정시설 수감자 지원 등을 아우르는 사업을 하고 있다. 아내 세실리아의 가문에서 운영하던 사립 초등학교를 확대해서 대학까지 세웠다. 개발도상국 출신으로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은 셈이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1내각 ‘친문(친문재인)카드’ 꺼냈다-12명 중 정통관료는 1명 뿐#2문재인 대통령은 11일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을 지명하는 등 장관 5명에 대한 추가 인선을 단행했습니다. 지난달 30일 장관 인사 이후 12일 만으로 17개 부처 중 11곳의 장관 후보자가 발표됐죠. 국회 인사청문회가 문턱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후속 장관 인사로 인사 난국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3장관 후보자 5명은 모두 문 대통령과 가까운 ‘친문(친문재인)’ 인사들입니다. 김상곤 후보자는 이번 대선에서 문 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2012년 대선 당시 문 후보 캠프의 ‘새로운 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2012년 대선부터 문 후보의 안보 공약 수립에 관여했죠.#4‘비주류, 여성, 지역 안배’라는 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이번에도 두드러졌습니다.다만 친문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면서 내각의 ‘문재인 컬러’는 더욱 짙어졌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야권에서는 ‘코드 인사’라는 비판도 있고 인재의 풀을 넓히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5여기에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해 국회의원 출신 4명의 장관 후보자까지 포함하면 내각의 대다수가 캠프와 당 출신 인사들로 채워지게 됐습니다. 문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사람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정도죠.“지금 상황에서 청와대와 내각이 ‘탐색기’를 가질 여유가 없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잘 아는 인사들을 배치해 개혁을 흔들림 없이 진행하겠다는 의미다.” (한 여당 의원)#6반면 장관에서 정통관료 출신은 사실상 ‘전멸’입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총리·장관 후보자 12명 중 고시 출신의 정통관료는 단 한 명(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뿐이죠. 이는 ‘주류 파괴’라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차관은 18명 중 15명을 해당 부처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정통관료 출신들로 기용했습니다.#7총리 및 장관 후보자들의 출신 지역은 고르게 분포됐습니다. 12명의 출신 지역은 수도권 2명, 충청 3명, 영남 4명, 호남 3명이죠.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게 광주일고의 약진인데요. 이 총리는 김상곤 후보자와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의 광주일고 후배입니다.#8아직 장관 후보자가 발표되지 않은 곳은 미래창조과학부 등 6곳. 후속 인선도 외부 인사들이 중용될 가능성이 크지만 정통관료 출신들을 활용해야 할 경제 관련 부처가 많이 남았다는 점은 변수입니다. ‘여성 장관 30%’ 공약이 실현될 수 있을지도 관심사죠. 문재인 정부의 첫 내각이 국민만을 바라보는 인선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대합니다.원본 | 한상준 기자사진출처 | 동아일보DB·뉴시스·뉴스1기획·제작 | 이유종 기자·신슬기 인턴}

◆“민간의 연안 여객선 선장으로는 맞을지 모르지만, 전시에 대비할 항공모함 함장을 맡길 수는 없다.”(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 기자간담회에서 “외교부 수장은 비워둘 수 없는 중차대한 자리다. 자질과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분에게 대한민국 외교를 어떻게 맡기느냐”고 반문하며) ◆“국회 인사청문회는 과거 구태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3명(의 장관 후보자) 모두 (통과)해주기엔 야당으로 좀 부끄럽다는 인식은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정된 분들이 그 일을 수행하느냐 못하느냐다. 정책 검증에 집중해야 한다.”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 ‘청문회 정국에서 존재감이 약하다’는 기자들의 지적에 대해)◆“홍준표(전 자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신(新)보수면 파리가 새다. 한물 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자유한국당을 영남 전역에서 몰락시키고 바른정당을 보수의 대표정당으로 우뚝 세우겠다.”(하태경 바른정당 의원, 당 대표 출마 기자회견에서)◆“오늘 지명자 중 조대엽 노동부 장관 후보자는 음주운전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검증 과정에 파악됐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 후보자는 주민등록법 위반이 확인됐다. 이것은 군인 특성상 발생한 문제로 파악된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 일부 장·차관 인선 결과 발표 후)◆“야당으로부터 가장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지지선언이 지난 며칠간 계속됐다. 자유한국당 빼고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야당의 태도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심지어 한국당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자진사퇴하라’는 해괴한 주장까지 늘어놓는다. 존재감 과시를 위해 낙마시키려는 속내를 국민이 모를 리 없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 서면브리핑)◆“맞벌이 시대는 왔지만 맞돌봄 시대는 따라오지 않았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슈퍼우먼’이 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육아와 돌봄은 부모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을 제도화할 것이다. 사회와 국가의 지원으로 ‘가족 없는 노동’을 ‘가족과 함께 하는 노동’으로 변화시키겠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 대선 당시 자신의 1호 공약이었던 ‘슈퍼우먼 방지법’을 대표 발의하며)◆“자유한국당의 지도부는 혁신과 소통, 개혁과 개방으로 무장된 혁명전사로 채워져야 한다. 그래서 당을 실질적으로 해체하고 국민이 원하는 대로, 국민이 OK할 때까지 끊임없이 혁신해 재창당해야 한다.”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 페이스북에 당권 도전을 시사하며)이유종기자 pen@donga.com}

브루나이 국왕, 아랍 부호,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을 고객으로 둔 영국 런던의 대표적인 보석상 슐로모 무사이에프가 2015년 7월 1일 별세했다. 향년 90세. 그의 이름을 딴 최고급 귀금속 매장 무사이에프는 영국, 프랑스, 홍콩에 5곳의 매장을 운영하며 연간 1000억 원(약 8000만 파운드)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영국 더선데이타임스는 2011년 그의 재산을 2억2000만 파운드(약 3200억 원)로 추산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레드 다이아몬드인 5.11캐럿짜리 무사이에프 레드도 갖고 있다. 유대인 랍비(유대교 사제)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노숙자, 시온주의(유대인국가 건설) 무장단체 단원, 영국군 병사, 보석상, 골동품 수집가 등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실크로드 상인 가문 출신 도굴꾼 그는 1925년 7월 예루살렘의 보석상 레하비아 무사이에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사이에프 가문은 중앙아시아 부카란(현 우즈베키스탄 부카란) 출신으로 12대째 보석상을 이어온 실크로드의 상인 집안이다. 그 선조들은 대대로 이슬람 국가 부카란왕국(1785~1920년) 일대에서 비단, 보석 등을 팔았다. 무사이에프와 이름이 같은 할아버지는 페르시아만에서 잠수부들에게 직접 천연 진주를 구입해 인도 상인들이 가져온 보석과 바꿨다. 상재(商才)가 매우 좋았다. 중앙아시아에 러시아가 침입하자 1888년 금 40상자를 들고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부카란 출신 유대인을 모아 마을을 만들고 정착했다. 아버지 레하비아는 매우 엄격한 원칙론자였다. 아들이 랍비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12세의 아들이 난독증으로 글을 읽고 쓰지 못하며 학교 가기를 꺼리자 집에서 내쫓아 버렸다. 무사이에프는 유대교 회당, 버스, 길거리을 전전하며 노숙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예루살렘 북부 산헤드리아 마을에 들어가 목수 아래에서 일했다. 그는 산헤드리아 마을에서 고대 묘지로 사용되던 동굴에서 고대 동전을 발견했고 아르메니아 출신 상인에게 팔았다. 하지만 그의 절도 행각은 곧 들통이 났고 아랍인 경찰에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무사이에프는 9개월의 실형을 받아 툴카름(요르단 북부) 소재 소년원에 보내졌다. 그는 유대인 출신이지만 소년원에서 아랍 청소년들 틈에서 코란을 배우며 아랍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소년원에서 나온 뒤 그는 시온주의 무장단체에 합류했다. 이후 나치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영국군에 입대했다. 이집트 사막,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 등에 배치됐다. 그는 전선을 오갈 때 유대교 회당 등에서 고대 필사본, 랍비의 결혼 계약서 등 고대 문헌, 골동품 등을 구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뒤에는 다시 시온주의 무장단체에 들어갔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오일 달러’로 갑부 보석상에 올라 1950년대 그는 예수살렘 도심에서 가족이 운영하는 귀금속 가게에서 일하다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요르단에서 금, 골동품을 밀수해서 돈을 벌었다. 1954년 헤브루대에서 고대 동전 1000개와 골동품들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고 구금되기도 했다. 무사이에프는 1963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하이드파크 옆 힐튼호텔 1층에 귀금속 가게를 열었다. 1960년대 중동 산유국들은 오일 달러가 넘쳤다. 중동 국왕, 귀족들은 금융도시 런던에서 사치품을 구입했다. 5성급 호텔에 입주한 무사이에프의 귀금속점은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더군다나 무사이에프는 아랍어를 매우 잘했다. 중동 고객들은 신의 가호를 외치는 그를 신뢰했다. 또 유럽 고객들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아내가 맡았다. 보석 디자인은 무사이에프가 직접 책임졌다. 그는 다이아몬드, 천연진주뿐만 아니라 골동품 경매에서 사들인 보석을 토대로 새로운 방식으로 보석 디자인을 해서 팔았다. 명사들에게 그의 가게가 알려졌다. 그의 고객은 사치로 유명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를 비롯해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이란 팔레비 왕의 누나 아슈라프 공주 등 글로벌 명사들이 대부분이었다. ● 보석으로 돈 벌어 골동품 수집 무사이에프는 성경, 고대 근동 지역과 관련된 유물을 대거 모은 대표적인 개인 수집가다. 고대 필사본, 도장, 개인 문서 등 6만 점 이상을 가지고 있다. 도굴꾼에서 시작된 고대 문화재와 관련된 관심은 평생동안 이어졌다. 그는 “할아버지도 고대 문화재를 모았다. 나는 성경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관련 자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짜 유물, 도굴 문화재 구입 등과 관련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라크 정부는 1990년대 무사이에프 소장품 중 일부가 고대 아시리아제국의 수도인 니네베(니느웨) 유적에서 도굴된 것이라며 그를 기소했다. 무사이에프는 “그들은 나를 문화재 도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전 세계 박물관들은 자신들이 직접 발굴한 것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의 귀금속 매장은 아내와 딸이 운영한다. 그의 수집품은 고고학계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성경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들을 고대 자료로 확인하던 장인(匠人)이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1 러브라인 추리게임 ‘하트시그널’연애세포를 깨운다-채널A 금요일 밤 11시 11분#2남녀 6명이 짜릿한 동거를 한다.무한 썸을 타는 공간 ‘시그널 하우스’.한 달 동안 밀실 연애를 한다.#3#4웃음 유발자 강성욱슈트 입는 남자 장천스피드 즐기는 서주원남심(男心) 재단하는 배윤경반전 매력의 김세린수지 닮은 꼴 서지혜#5야릇한 눈빛과 본능적인 몸짓. 은밀하게 오가는 하트시그널!‘몸의 심리학’으로 감춰진 러브라인을 추리하라! #6이들을 훔쳐보는 연애탐정 6명.윤종신 이상민 신동 김이나 심소영 양재웅의 추리 입담도 더했다.#7#8#9첫 인상 승자는 몰표녀 서지혜이제 0표녀들의 반격!그리고 밝혀지는 남녀 6인의 직업!#10흔들리는 남심 여심여러분도 추리하시라!#11채널A 러브라인 추리게임 하트시그널 매주 금요일 밤 11시 11분 본방 사수! 기획·제작| 이유종 기자·김유정 인턴}

홍콩 중심가인 센트럴역 D2 출구에서 나와 남서 방향으로 50m 정도 걸으면 1923년 프랑스 보자르 건축양식으로 지은 9층 높이의 페더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에는 벤브라운, 사이먼리, 마시모데카를로(3층) 리먼모핀(4층) 한아트TZ, 펄램(6층) 가고시안(7층) 등 유명 화랑들이 빼곡하게 입주해 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서 한 층씩 내려오면서 모든 전시를 훑어볼 수 있을 정도다. ‘갤러리 빌딩’이라고도 불린다. 250홍콩달러(약 3만6000원)짜리 ‘페더빌딩 갤러리 투어’라는 관광 가이드 상품도 출시됐다. 3.3m²당 월 임차료가 수백만 원을 웃돌아 금융회사들도 버티기 어려운 이곳에 화상((화,획)商)들이 대거 몰린 이유는 뭘까. ‘상업 도시’ 홍콩은 오랫동안 예술에 소홀했다. 1997년 7월 중국에 반환된 뒤 중국 베이징, 상하이와 경쟁해야만 했다. 결국 사람, 돈을 유입할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해결책 중 하나로 ‘예술’을 선택했다. 1999년 주룽(九龍)반도 서쪽 끝 40만 m² 터에 28억 달러(약 3조13600억 원)를 들여 미술관, 공연장 등 17개 문화시설이 들어서는 시주룽 문화지구(WKCD)를 짓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1996년 비영리 전시공간 ‘파라 사이트’를 개설해 서로 활동을 독려했다. 화랑 등 미술계 인사들은 2000년 3만4000개 이상의 작품을 정리한 비영리 단체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미술계 인사들이 교류하는 ‘스프링 워크숍’도 세워졌다. 중국 본토와 달리 미술품 거래에서 면세정책을 유지했다. 그러자 홍콩의 중심 금융지구에서 기업 사무실로 쓰이던 페더빌딩까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중국의 ‘큰손’들이 대거 홍콩에 몰렸다. 유럽 화랑들은 홍콩의 성장 잠재력에 주목했다. 2009년 영국계 화랑 벤브라운을 시작으로 서구 화랑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이 건물뿐 아니라 센트럴역 일대에는 미국의 페이스, 영국 화이트큐브, 프랑스 페로탱 등 유명 화랑의 지점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국제미술시장인 스위스의 아트바젤은 2008년 출범한 ‘홍콩 아트페어’를 인수해 2013년부터 ‘아트바젤 홍콩’으로 재탄생시켰다. 아트바젤 홍콩은 출범 5년 만에 동서양 미술품을 함께 거래하는 대표적인 미술품 장터로 급성장했다. 올 3월에만 8만 명이 다녀갔다. 세계 미술시장은 지난해 566억 달러(약 63조 원)로 추산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반면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지난해 5000억 원 정도로 국내총생산(GDP)을 고려할 때 작은 편이다. ‘후발주자’ 홍콩은 최근 20년 동안 꾸준히 판을 키우면서 지정학적 위치, 유명 해외 브랜드 유치(아트바젤) 등을 활용해 중국 본토는 물론이고 인도 호주 일본 한국의 고객까지 끌어들였다. ‘국내 작가의 작품도 홍콩에서 팔아야 더 비싸게 팔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술도 경제 성장 엔진 중 하나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 국내 상황은 일부 화랑들을 빼면 대부분 임차료 내기도 버거울 정도로 영세하다. 문화의 힘은 도시,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다. 미술은 금융 등 다른 산업에도 파급효과가 큰 콘텐츠 산업이어서다. 이제 우리도 ‘아트마켓’에 대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이유종 디지털통합뉴스센터 기자 pen@donga.com}

채널A의 주말 뉴스 프로그램 ‘토요랭킹쇼’의 진행자인 박소윤 국제부 기자. 2002년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박 앵커는 정치부, 사회부 등을 두루 거친 채널A의 베테랑 여기자다. 지적인 이미지와 차분하고 조리 있는 진행 실력을 갖춘 그는 동아일보의 ‘D스타 인터뷰’에서 “내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해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가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박 앵커와 나눈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전격 공개한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이틀 사이에 1만 통의 문자를 받았다. 정확하게 세어 보진 않았지만 80~90%는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욕설, 비하, 협박까지 이뤄지는 것은 명백하게 형사 범죄다.” (이언주 국민의당 의원,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최근 문자폭탄으로 전화번호를 바꾼 사연을 설명하며)◆“제가 마케팅을 오랫동안 했던 사람으로 대중이 칭찬하고 또는 화를 내고 행동을 하고 할 때는 그 연유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납득이 되지 않고 분하기만 하다는 생각은 자기성찰 부족이 아니냐.”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라디오 인터뷰에서 문자폭탄에 대해)◆“5대 비리 원천 배제 기준에 모두 해당하며 ‘불공정위원장’이라는 닉네임을 얻을 수 있다.” (김선동 자유한국당 의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재벌 개혁의 상징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과도한 공세가 되풀이되고 있다. 후보자 지명 후 지금까지 무려 18건이나 되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대부분 문제없는 내용이거나 사실관계가 달랐다. 오늘 청문회가 근거 없는 신상 털기와 흠집 내기가 아닌 재벌 개혁의 적임자인지에 대한 후보자의 역량과 의지를 시험하는 청문회가 되기를 바란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안보 무능 라인을 만들어 국가 전체에 혼란을 가져온 사태다. 안보에 자해 행위가 이뤄져선 안 된다. 국방부와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진실공방을 했다는 게 코미디다.”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사드 발사대 추가 반입을 둘러싼 청와대와 국방부의 진실공방을 겨냥해)◆“국내 정치는 소통을 하며 풀면 되지만 외교 문제는 걱정이고, 또 당면 과제이니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님께서 경험과 지혜를 빌려 주셨으면 좋겠다.”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에서 당선 이후 처음으로 반 전 총장과 오찬 회동을 갖고) ◆“정중하면서도 당당하게 임하는 것이 좋다. 한미 동맹이 초석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북핵에 대한 한미 간의 공통분모를 잘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북핵문제를 포괄적, 단계적, 근원적으로 풀어가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철학은 미국과 같은 입장이다.” (반 전 총장, 문 대통령에게 향후 한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조언하며)이유종기자 pen@donga.com}

#1“테니스로 한계를 날렸어요.”소리에 집중하는 시각장애인 테니스#2‘딸랑.’온통 뿌연 황토색 시야 너머로 작은 구슬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시 ‘딸랑’ 하는 두 번째 구슬 소리와 함께 작은 형광색 점 하나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죠. 구슬이 들어있는 시각장애인테니스용 스펀지공. 라켓을 재빨리 점에 가져다 댑니다. “게임!”(승리를 의미하는 테니스 용어)#36~13일 스페인 알리칸테에서 열린 제1회 세계 시각장애인 테니스대회.소병인 씨(21·우석대 특수교육과 재학)가 저시력 부문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입문 3년 만에 영국, 스페인, 멕시코 등 13개국 62명의 시각장애인이 참가한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둔 것이죠. #4시각장애인 테니스는 1990년 일본의 한 장애인 재활센터에서 처음 개발돼 2007년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일반 테니스 코트보다 길이가 약 5m 짧은 코트에서 구슬이 들어있는 직경 9cm 크기의 스펀지공을 이용해 경기를 진행합니다. 일반 테니스는 공이 바닥에 한 번 튀기는 것까지만 허용되지만 시각장애인 테니스는 최대 3번까지 가능하죠. #5“시각장애인이 테니스를 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놀라요. 전 선천적 저 시력자라 소리를 따라다니다 희미하게 공의 색이 보이면 라켓을 휘둘러요. 전맹인(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은 100% 소리에 의존해 테니스를 하죠. 스펀지공이라 바닥에 공이 닿아도 빠르게 튀어 오르지 않아 연습만 잘하면 어느 정도 쳐낼 수는 있습니다.”소병인 씨#6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세상은 뿌옇고 흐린 덩어리의 합이었습니다. 자신의 세상과 남들이 보는 세상이 다르다는 걸 안 건 초등학교 1학년 때였죠. 담임 선생님이 그를 교무실로 불러 점자표를 건넬 때 그는 울며 첫 번째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윤곽과 색만 겨우 구분할 수 있지만 한계를 이겨내려 최대한 노력하며 살았어요. 저처럼 장애를 겪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특수교육과에 입학했죠.”#7그는 국내 대회 우승 경험은 없지만 매 경기 몸을 날리며 경기한 적극성을 인정받아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6명의 한국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대회는 시각장애 등급에 따라 B1(전맹), B2(시력 0.03 미만), B3(0.03 이상)으로 구분돼 경기를 치르며 소 씨는 B2 부문에 출전했죠. 비록 결승에서 아깝게 우승은 놓쳤지만 세계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이 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습니다.#8그는 테니스를 계속할 계획입니다. 아직 시각장애인테니스는 패럴림픽의 정식 종목이 아니지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 언제든지 패럴림픽에 나갈 수 있도록 실력을 갈고 닦겠다는 것이죠. “패럴림픽에 출전한다는 건 저 개인에게도 영광이지만 제가 학교 선생님이 된 뒤 만날 학생들에게도 큰 희망이 될 수 있어요. 제 학생들이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힘을 저에게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 같습니다.”원본 송충현 기자기획·제작 이유종 기자·김유정 인턴}

인도 농부들이 농작물 생산량을 늘릴 수 있도록 도운 세계 2위 미량 관개 기업 ‘자인관개시스템’의 창업주 바발랄 자인(Bhavarlal Jain). 그가 2016년 2월 25일 뭄바이 자스록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농작물이 잘 자라려면 물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 미량관개는 파이프를 통해 물방울, 연무를 뿌려 농작물의 생육을 돕는 방법 중 하나다. 임직원 1만 명 이상의 자인시스템은 2015년 9억7000만 달러(약 1조 880억 원)의 매출액을 올린 인도 대기업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터키 이스라엘 등 10여개 국가에 연구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자인은 1937년 12월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트라 주 잘가언에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1년 봄베이대(현재 뭄바이대)에서 상학, 1962년 봄베이정부법학대(현재 뭄바이정부법학대)에서 법학 학사학위를 받은 엘리트다. 그는 지방 공무원으로 선발됐으나 창업을 선택했다. 그는 1963년 미국의 석유회사의 현지 영업권을 따내며 석유 유통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등유는 잘 팔리지 못했다. 농장, 집을 모두 찾아다니며 등유를 팔아야 했다. 그는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방식으로 매출을 키웠고 디젤 액화석유가스(LPG) 등의 사업권까지 확보했다. 자인은 사업 규모를 더 키웠다. 등유, 석유 등 고객 대부분이 농부들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오토바이 트랙터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타이어, 배터리 등도 팔았고 농업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농기계 농약 비료 종자까지 취급하기 시작했다. 1980년 당시 시장이 막 커지던 폴리염화비닐(PVC) 파이프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자인은 후발주자였다. 기존 경쟁 기업들은 정부, 중간 대리점 등을 고객으로 삼고 영업했다. 반면 자인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틈새시장을 노렸다. 일반 농부 등 독립적인 수요가 큰 고객을 겨냥했다. 1980년대 말 자인의 시장 점유율은 25%까지 오르며 업계 1위에 올라섰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관개 시스템에 도전했다.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하는 PVC 파이프를 이용해서 농작물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자인은 농작물 수확량이 평균 이하를 밑도는 땅을 구입해 관개 시스템을 통해 비옥한 땅으로 바꿨다. 그가 가꾼 옥토가 늘면서 농부들의 신뢰도 쌓였고 관개 시스템의 판매량은 늘었다. 그는 어느 덧 인도에서 미량 관개 분야의 선두 주자로 자리잡았다. . 미량 관개는 물 사용량을 절반까지 줄이는 반면 생산량은 절반 가까이 늘릴 수 있다. 그의 도움을 받은 농부들은 생산량이 늘고 수입도 크게 증가했다. 그의 성공담은 해외에서도 주목했다. 1997년 미국관개학회는 그에게 관개 농업의 성과를 인정해 ‘크로포드 레이드상’을 수여했다. 그는 이 상을 아시아인 중 두 번째로 받았다. 그는 말년에 간디연구재단을 후원하며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의 정신 유산 보급에도 기여했다. ‘인도의 제2차 녹색혁명가’로 불리는 자인의 도전 정신이 빛나는 이유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1‘적폐청산’ 자리엔 코드 인사문재인 정부 인사 대해부#2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취임한 이후 28일까지 공식 임명하거나 내정한 청와대와 내각 인사는 모두 41명. 호남 출신인 이낙연 전 전남지사(65)를 국무총리에 지명하고 임종석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51)을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했습니다. 이번 인사는 ‘호남 중용’의 약속을 이행하면서 개혁적이고 안정감을 주는 인물을 발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3상고, 야간대에 다니며 행정고시에 합격한 김동연 경제부총리 후보자(60)와 외교부 70년 역사상 첫 여성 장관 후보자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62)는 각각 ‘개인 스토리’를 갖춘 인사로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적폐 청산 등을 밀고 가야 하는 핵심 자리에는 친(親)문(친 문재인) 인사나 코드가 맞는 인물을 배치했죠.#4청와대는 개혁 과제를 힘 있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젊은 참모진으로 꾸렸죠. 수석비서관급 이상 참모진 12명 중 절반인 6명의 나이가 50대. 장하성 정책실장(64)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71) 및 이상철 안보실 제1차장(60)과 김기정 안보실 제2차장(61) 등 정책실과 국가안보실을 제외한 대통령비서실은 대부분 50대 수석비서관으로 채워졌습니다. #5그 대신 청와대 비서관급(1급)에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문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백원우 민정비서관, 윤건영 국정상황실장(48), 송인배 제1부속비서관(49) 등은 모두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죠. 대선 캠프인 이른바 ‘광흥창팀’도 대부분 청와대에 입성했습니다. #6외교안보 라인 인선에는 ‘파격’이 이어지고 있죠. 외무고시 출신이 아닌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순혈 조직’인 외교부를 개혁할 카드로 발탁됐습니다. 군 출신이 장악했던 국가안보실장도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 의장 등을 지낸 통상전문가인 정의용 전 주이스라엘 대사가 맡았습니다. 외교, 안보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죠.#7경제정책의 ‘투 톱’은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와 장하성 정책실장이 맡습니다. 민생경제 안정과 일자리 창출, 재벌개혁을 핵심 경제과제로 꼽고 있는 문 대통령이 개혁과 안정을 염두에 두고 인선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 후보자는 관료사회에서 손꼽히는 ‘예산통’이며 장 실장은 국내의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입니다. #8현직 국회의원 중 최대 5명이 입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의원(해양수산부), 김부겸 의원(행정자치부), 도종환 의원(문화체육관광부)이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죠. 민심을 반영한 합리적인 인사로 문재인 정부의 순조로운 출항을 기대합니다. 원본: 동아일보 정치부기획·제작: 이유종 기자·김한솔 인턴}

◆“노무현 정권 2기(문재인 정부)에 들어 좌파들은 더 세련된 모습으로 우파 궤멸 작전에 돌입할 것이다. 바른정당을 위성 정당으로 만들어서 우파를 분열시키고 앞으로 사정을 매개로 자유한국당을 흔들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서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고 그 힘으로 당을 쇄신해야 한국당이 다시 산다.”(홍준표 전 경남지사, 지난 대선 과정에서 강성 이미지를 각인한 자신이 당 대표에 적임이라는 것을 암시하며)◆“인선 문제는 문재인 후보 본인이 후보 시절에 분명히 공직배제 5대 원칙을 국민 앞에 약속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본인 입으로 스스로 말하셨고 본인이 임명하신 분들이 아니냐. 임명할 때마다 직접 나와서 했다. 그래서 그걸 지키지 못한 부분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말하는 게 맞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등 문재인 정부 내각 후보자들의 자격 논란과 관련해)◆“이익을 위한 위장전입이 있을 수 있고 생활형 위장전입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구분해서 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여야간 논의가 가능하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인사청문 대상자들이 위장전입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에 대해)◆“외세에 빌붙으며 동족을 해쳐달라고 구걸과 청탁으로 날과 달을 보낸 이런 매국노들 때문에 북남관계가 파괴되고 조선반도(한반도)의 긴장상태는 극도로 고조되었다. 남조선 당국은 박근혜 패당의 어리석은 외세 의존 책동과 그것이 초래한 파국적 후과(결과)에 대해 심각히 돌이켜보아야 한다.” (북한 노동신문, 문재인 정부의 특사외교를 또다시 비난하며) ◆“감사원이 갖고 있는 기능은 크게 볼 때 두 가지로 회계 감사와 직무감찰 기능이다. 다른 나라 사례를 보면 회계감사 기능은 사실 국회와 관련이 많고 직무감찰은 행정부와 관련이 많다. 내년에 개헌 문제가 얘기되면 두 기능의 분리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정해구 국정기획위원회 정치행정분과 자문위원, 감사원 업무보고에서)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영국계 보험회사 ‘히스콕스’가 이달 초 런던 유럽본부를 룩셈부르크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히스콕스는 “친기업 정책, 합리적인 금융규제를 고려했다”고 설명했으나 실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고려한 조치였다. 경쟁회사 ‘AIG’ ‘푸르덴셜’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브렉시트 이후 시장 접근성 하락을 우려한 금융회사들이 런던 금융가를 떠나고 있다. ‘포스트 런던’을 노린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런 가운데 룩셈부르크가 단연 돋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룩셈부르크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가 넘는 유럽의 대표적인 강소국이다. 19세기 중반만 해도 가난한 나라였으나 1850년대 프랑스 국경을 따라 철강석이 발견되면서 철강산업에 몰입했고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철광석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면서 철강의 GDP 비중은 1970년 30%, 1985년 10%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룩셈부르크는 1950년대부터 일찌감치 대안을 찾았다. 독일 프랑스 벨기에 등과 국경을 접한 지리적인 입지를 고려해 금융산업에 주목했다. 사실 룩셈부르크는 1856년에야 첫 은행을 세울 정도로 미국 독일 스위스와 비교해 금융 산업이 100년 이상 뒤처졌다. 그 대신 남보다 빨리 시장을 열었다. 룩셈부르크 증권거래소는 1963년 통화국 밖에서 해당 통화국의 화폐로 표시된 채권을 발행하는 ‘유로본드’를 처음으로 거래했다. 그러자 돈이 몰렸다. 1978년 기독교 국가가 대부분인 유럽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금융기관 설립을 허락했다. 1988년 유럽 최초로 ‘유럽의 공모펀드 투자 기준(UCITS)’을 도입해 각종 투자기금을 모았다. 이 기준대로 EU의 한 회원국에 펀드를 등록하면 다른 국가에서도 등록 없이 펀드를 팔 수 있다. 금융회사들은 룩셈부르크에 속속 지점을 열었다. UCITS에 따른 투자는 현재 67%가 룩셈부르크에서 거래된다. 핀테크(정보기술과 금융을 결합한 서비스)에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유럽의회가 2009년 전자결제 규제안을 내놓자 EU 회원국 중 처음으로 적용했다. ‘아마존’ ‘페이팔’ ‘라쿠텐’ ‘알리페이’ 등 유명 전자결제 관련 회사들이 몰렸다. 1970년 37곳에 불과하던 은행은 2015년 현재 28개 국가, 144개 은행으로 늘었다. 이 중 룩셈부르크 현지 은행은 5곳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가. 노무현 정부 당시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는 금융 산업을 GDP의 1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금융허브’ 구상은 여전히 초보 수준이다. 서울과 부산은 금융허브를 지향하지만, 도쿄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 등에 견주면 비교 우위를 보일 만한 요소는 찾기 힘들다. EU에서는 동일한 금융 규제가 적용된다. 룩셈부르크는 차별화를 위해 감독권 행사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규제나 감독보다 금융 컨설턴트 역할에 전념했다. 이런 노력으로 히스콕스 AIG 푸르덴셜은 룩셈부르크의 법인세율(29.22%)이 아일랜드(12.5%) 등과 비교할 때 높은 수준이었으나 룩셈부르크를 결국 선택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금융허브를 위해 서울 부산의 차별화, 틈새 전략을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유종 디지털통합뉴스센터 기자 pen@donga.com}

◆“현재 대한민국 검찰의 가장 중요한 현안은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된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수사와 공소유지라고 생각한다. 그 점을 확실하게 해낼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한다.”(문재인 대통령,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윤석열 대전고등검찰청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한 배경에 대해)◆“청와대가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추가 수사 등에 만전을 기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을 통해 구체적인 사건을 지휘할 수 있는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윤석열 검사장(서울중앙지검장)에게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직접 수사를 지휘한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정준길 자유한국당 대변인, 윤 지검장 인선과 관련 성명에서)◆“초재선 의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지금이야 말로 사실 정상적인 당이면 초재선 의원들이 정풍운동을 들고 나와야 할 때다.”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당 혁신을 해야한다며) ◆“사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 외우지 못했다. 전날 밤을 새워 두 시간 밖에 못자면서 열심히 외웠는데 잘 안 외워졌다. 마침 스크린에 가사가 올라왔다.”(피우진 국가보훈처장, 처장 임명 후 하루 뒤 5·18 민주운동기념식에 참석해 ‘임을…’을 따라 불러 화제가 된 것에 대해)◆“(일선 검찰청에 대한 인사와 예산 권한을 갖고 있는) 법무부 검찰국 과장들이 (이영렬 전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받은 (돈을) 다음 날 돌려줬다. 이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이 돈을 돌려줬다면 문제가 있는 돈이라는 걸 알고서 돌려줬다는 얘기다. 이거야말로 심각한 일 아니냐.”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 본부장을 지낸 이 전 지검장이 휘하 간부 검사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및 검찰국 1·2과장과 함께 지난달 21일 만찬을 하며 돈 봉투를 주고 받은 것을 비판하며)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지난해 10월부터 채널A 이슈투데이(월~금 오전 10시 30분~11시 50분)의 진행을 맡고 있는 천상철 채널A 정치부 차장. 그는 저널리즘의 기본 구성요소인 ‘5W1H’에 맞춰 방송 당일 오전에 발생한 뉴스, 이슈를 발 빠르게 전하고 있다. 천 차장은 정치, 경제부 등을 두루 거친 민완기자다. 2012년부터 ‘뉴스쇼 A타임’, ‘뉴스 10’ 등 채널A의 대표적인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신뢰감 있는 앵커로 자리 잡았다. 그는 “매일 오전의 뉴스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목표”라며 “프로야구 중계를 하는 것처럼 실시간 뉴스를 전달하는 캐스터, 해설자의 역할을 하겠다. 뉴스계의 허구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의 단독 인터뷰 영상을 공개한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중고 화물선 한 척으로 글로벌 수송제국을 일군 대만(臺灣) 에버그린그룹(長榮集團)의 창업주 창융파(張榮發)가 2016년 1월 20일 타계했다. 향년 88세. 선장 출신의 창융파는 1968년 자신이 직접 해운사를 세워 에버그린을 해운, 항공, 숙박을 아우르는 기업집단으로 키웠다. 그는 대만에서 한진의 창업주 조중훈과 비슷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에버그린 그룹은 현재 세계 4위의 해운사인 에버그린 해운을 비롯해 대만의 첫 민항사인 에바항공, 에버그린 호텔 등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2월 한진해운이 파산할 때도 에버그린 해운은 건재했다. 창융파는 2012년 2월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1년 창융파의 재산을 500억 대만 달러(약 1조8000억 원)로 추산했다. 그는 1985년 재단법인 창융파기금회를 설립해 사회사업을 시작했고 자신의 재산을 이 재단에 맡기기로 했다.● 대만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다 창융파는 1927년 10월 일제 강점기 당시 타이완 북동부의 작은 항구 쑤아오(蘇澳)에서 태어났다. 타이베이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해운사의 타이베이사무소에 들어갔다. 밤에는 직업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을 이어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현지 해운사에 3등 항해사로 입사했다. 그는 해외로 부지런히 화물을 실어 날랐고 선장 자리에 올랐다. 1961년 지인들과 함께 첫 해운회사를 설립하고 해운 경영에 뛰어들었다. 1968년 9월 선령(船齡) 20년을 넘긴 1만5000t급 중고 화물선 ‘센트럴 트러스트’를 구입해 자신의 회사인 에버그린 해운을 출범시켰다. 대만의 대표 항구인 기륭(基隆)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크게 파괴됐다. 1950년대 대만은 수출 제품도 많지 않아서 해운업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원조가 줄어드는 대신 미국과 대만의 무역이 크게 증가하면서 운송 일감이 늘었다. 석탄, 가스, 석유, 반조립 전자제품 등이 대만에 들어왔다. 1960년대는 사실 대만 경제 발전의 황금기였다. 1960~1973년 공업은 연평균 17%, 농업 4.2%, 무역 25%씩 성장했다. 창융파는 창업 4년 만에 선박을 12대까지 늘렸다. 그는 해운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과의 약속이라고 보고 배를 규칙적으로 운영하고 신뢰를 확보했다. 고객과의 약속 때문에 빈 배를 운항하기도 할 정도였다.● 변화의 흐름을 읽는 동물적인 감각 그는 거시적인 변화를 읽는 촉을 지녔다. 세계 해운업계가 컨테이너 선박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견했다. 화물을 일정 크기의 컨테이너에 채우는 시스템은 화물 선적 비용을 크게 줄인다. 과거와 비교하면 전체 운송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인 것. 1956년 4월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항에서 첫 컨테이너 선박이 출항한 이후 세계 해운업계는 컨테이너 선박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창융파는 2005년 언론 인터뷰에서 “초창기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컨테이너의 물결’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움직임을 읽었다”고 했다. 이어 “일반 화물선을 사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컨테이너 선박 4척을 주문했다. 이런 주문 변경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에버그린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에버그린 해운은 1975년 대만과 미국 동부를 잇는 노선을 운항하다 15개월 이후에는 서부까지 영역을 넓힐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당시 세계 해운업계는 여러 해운회사들끼리 몇 개의 크고 작은 동맹을 맺으며 일감을 공유했다. 이들은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해 신생 해운사가 쉽게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다행스럽게 미국에선 동맹 시스템이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약했다. 독립 해운사들이 그나마 도전장을 내고 일부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에버그린 해운도 그런 독립 해운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과 달랐다. 해운동맹이 매우 배타적이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일감은 대부분 다국적의 극동화물동맹(FEFC)가 장악했다. 이 카르텔은 1879년 설립됐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화주(화물의 주인)들도 FEFC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였다. 화주들이 독립 해운사를 한번 이용하면 다음에는 FEFC의 배를 다시 사용하지 못하게 막았다. 화주들은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독립 해운사들이 등장해도 FEFC에 찍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해운동맹의 선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웃사이더에게 내려지는 벌칙은 매우 가혹했다. ● “비즈니스는 결국 두 사람의 문제” 에버그린 해운은 해운동맹의 힘을 빌리지 않고 1979년 유럽에 진출했다. 창융파는 가격 단합을 위한 해운동맹에는 오랜 반대자였다. 점차 해운동맹이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대신 직접 화주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는 1980년 프랑스 파리 리츠호텔 카페에서 타이어제작회사인 미쉘린의 운송 담당자를 만났다. 장장 4시간 동안 고객의 눈을 마주치며 설득했다. 화주는 아무리 저렴한 운임을 제시해도 계약을 맺은 해운사가 갑작스럽게 망한다면 낭패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운영의 지속성을 요구했다. 창융파는 “우리는 고객과 하나”라며 인간적인 설득을 이어갔다. 결국 고객은 ‘두려워 말라’는 창융파의 말을 믿었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그는 이런 담판으로 에버그린 해운이 유럽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다른 굵직한 화주들을 찾으며 해운동맹에 균열을 냈다. 창융파는 저렴한 운임 이외에도 차별화 전략을 추구했다. 저렴한 중고 선박 대신 ‘신상’ 선박을 구매했다. 창융파의 과도한 투자는 성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했지만 신형 선박이 회사의 정체성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80년대 에버그린 해운은 세계 최대 컨테이너 해운사에 올랐다. 현재 150대 이상의 에버랜드해운 선박이 80개국, 240곳 이상의 항구를 오가고 있다. 창융파는 1989년 대만의 첫 민영 항공사인 에버항공을 세워 항공업에도 진출하는 등 에버그린 그룹을 중공업, 항공, 호텔, 리조트 등을 아우르는 30여개 계열사를 가진 기업집단으로 키웠다. 전세계 220곳에 사무실을 운영하며 2만 7000여 명을 고용하고 있다. ● 전 재산 사회에 환원 창융파는 ‘부의 사회 환원’을 주장해왔다. 그는 평소 “다음 세대에 더 좋은 세상을 남겨야 한다. 개인적인 목표는 재산을 사회로 되돌리는 것”이라며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손을 좀 더 자주 잡는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창융파기금회를 세워 의료, 교육, 문화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 창융파는 캘리포니아주립대 등 6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중고 화물선 한 척의 기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1문재인 정부 나흘 만에 북한 또 도발 왜?#2북한이 14일 오전 5시 27분 평안북도 구성시 인근에서KN-17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습니다.미사일은 최대 2000km 고도까지 치솟으며 약 700km를 날아가 동해상에 낙하했죠.#3다음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새로 개발한 지상대지상 중장거리 전략탄도로켓 ‘화성-12’형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은 이번 미사일 발사를 직접 참관했습니다.#4한국군은 이번 미사일의 최대 사거리를 약 5000km로 추정했습니다.북한이 지금까지 발사한 중거리탄도미사일 중 사거리가 가장 길죠.평양 인근에서 쏘면 괌의 미군기지(약 3400km)가 사정권에 들어갑니다.#5일본 민방 TBS는 북한이 지난달 18일 중국에 “이틀 뒤 핵실험을 하겠다”고 통보했다가중국이 “국경을 모두 봉쇄하겠다”고 경고해 핵실험 계획을 중단했다고 14일 보도했습니다.중국은 북-중 접경 지역 공안에 핵실험에 대비하라고 지시했고 미국에는 북한의 핵실험 계획을 알렸습니다.#6북한의 도발 이유는 무엇일까요?먼저 한국, 미국과의 대화를 앞두고 ‘몸값’을 올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됩니다.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반응을 떠보려는 ‘탐색용 카드’라는 분석도 나오죠.이와 무관하게 북한이 미사일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마이웨이’를 걷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7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强) 국가와 유럽연합(EU)에 특사를 급파합니다.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한반도 긴장 수위가 한층 높아진 가운데 외교 공백을 조속히 수습하기 위한 조치죠.특사단은 새 정부의 외교 정책과 북핵 대응 기조 등을 상대국에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입니다.#8유엔은 16일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열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합니다.안보리는 대북제재의 수위를 올리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되죠.안보리는 북한의 도발이 계속된다면, 필요할 경우 ‘중대한 추가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언해왔습니다.북한의 도발, 과연 언제쯤 중단될까요? 2017. 5. 15 (월)기획·제작 이유종 기자·신슬기 인턴}

◆“찡찡이(문재인 대통령의 반려묘)가 (청와대 관저에) 입주했는데, 걱정이 생겼다. 관저 구석의 유리창문과 미닫이 한지창문 사이의 좁은 틈에 딱새가 새끼 5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제가 당선된 날 부화했다고 한다. 찡찡이는 양산집에서 때때로 새를 잡아와서 기겁하게 했었다.”(문 대통령, 청와대 관저에 입주한 뒤 처음으로 트위터에 띄운 메시지)◆“대통령도 그렇고 여러분(청와대 출입 기자)도 그렇고 쉴 팔자가 아닌 것 같다. 정말 몇 달 만에 (문 대통령의) 공식일정을 처음으로 뺐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일하실 팔자인 것 같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14일 공식 일정이 없던 문 대통령이 이날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의 긴급 소집을 지시한 것과 관련해)◆“부모를 잘 만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돈으로 유학을 가 그럴 듯한 학위를 하나 따와 세습으로 지역구를 물려받고 정치권에 들어와 서민 코스프레를 하는 패션 좌파들이 한국 정치권에는 참 많다. (이들이) 같은 당에 있을 때 역겨움을 느꼈다. 따뜻한 보수, 좌파 정책을 내세우면서 밤에는 강남 룸싸롱을 전전하고 낮에는 서민인 척 했다. 이들이 위선의 탈을 쓰고 정치를 부업쯤으로 여기는 그릇된 행태는 다음 지방선거, 총선에서는 반듯이 도태돼야 할 것이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페이스북에 당의 쇄신을 추진하겠다며)◆“정권교체를 함께 땀 흘려 만든 동지들에게 ‘경질’이란 단어를 쓰지 말아 달라. 당 대표로 신속히 집권여당으로 체질강화와 역량강화를 약속드렸고 이를 통해 새 정부를 제대로 뒷받침하는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최근 당직 개편 작업과 관련해서)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혁신적인 ‘드럼 머신(드럼 소리를 내는 전자 악기)’을 개발해 현대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 전자악기 제조기업 롤랜드의 창업주 카케하시 이쿠타로(梯郁 太郞)가 4월 1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드럼 머신은 러시아 음향물리학자 레온 테레민 등이 1930년대부터 개발했다. 하지만 일렉트로니카, 댄스, 힙합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계기가 되는 드럼 머신은 롤랜드가 1980년 개발한 드림머신 ‘TR-808’이다. 직원 3000명의 롤랜드는 디지털 피아노, 신디사이저, 키보드, 전기 드럼, 전자 기타 등을 제조하는 대표적인 악기 제조기업이다. TR-808은 시판 초창기 찬밥 신세였으나 미국의 유명 가수 휘트니 휘스턴, 마돈나 등이 음악에 사용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 초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힙합장르 중 하나인 트랩 음악(Trap music)은 TR-808의 극저음 베이스 드럼이 없으면 만들기 어려울 정도다. 기존 드럼머신은 설정된 리듬을 단순하게 재생했다. 반면 TR-808은 직접 리듬과 사운드를 조작할 수 있어 이후 음악 제작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IBM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매킨토시, 콤팩트 디스크, 모토로라의 최초 소비자 휴대전화 ‘DynaTAC 8000X’ 등과 함께 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전자기기로도 분류된다. ● 문외한(門外漢)도 다룰 수 있는 악기 1930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카케하시는 어릴 때 양친이 결핵으로 숨져 조부모의 손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기술학교에 다녔던 그는 2차 세계대전 말 오사카의 히타치조선소에서 견습 학생으로 일하며 군함 건조 등을 볼 수 있었다. 선반 사용, 용접, 조립 등을 경험하면서 제조 분야에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 미군의 폭격으로 오사카 집이 파괴되자 할머니는 친정이 있는 큐슈(九州) 남부로 이사했다. 1946년 그는 오사카현립대에 합격했으나 건강을 이유로 불합격 처리됐다. 1947년에는 규슈에서 시계 수리점을 열었으나 결핵에 걸려 7년 동안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다. 카케하시는 오사카로 돌아와 1954년 라디오, 전자 음악기기 등 전자기기 수리점을 열었다.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한편 전자 기기 개발에 매달렸다. 라디오를 수리하며 방송을 자주 들었는데,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매료됐다. 당시에는 라디오 방송도 통제가 심할 때였다. 1958년 그는 이상적인 전자 악기를 개발하는데 투신하기로 했다. 카케하시는 단 한번도 정규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가격이 비싸지 않고 아마추어들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며 작고 간단한 전자 악기를 추구했다. 이런 생각은 훗날 롤랜드의 기억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1959년 49개 조(調)를 가지며 하나의 음만 내는 첫 악기를 개발했다.● 끊임없는 악기 개발 1960년 카케하시는 음향기기 기업 에이스전기산업을 세우고 전기 드럼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4년 손으로 조작하는 전기 드럼 ‘R1 리듬 에이스’을 내놓았다. 이 악기는 같은 해 라스베이거스국제음악박람회(NAMM Show)에도 출품했으나 상업 생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67년 그는 자동으로 리듬이 연주되는 전기 드럼을 개발하는 등 혁신적인 전자 악기 개발에 매진했고 지난 반세기 동안 수백 개의 음악 관련 혁신 전자기기를 만들었다. 엔지니어 출신인 카케하시는 기업 경영에는 밝지 못했다. 결국 에이스전기산업의 경영권을 잃었다. 그럼에도 지인들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1972년 롤랜드를 세웠고 1980년 TR-808 개발을 마쳤다. 1973년에는 음향기기 제조기업인 보스를 설립했고 롤랜드에서 회장, 특임 고문 등을 맡다 2013년 은퇴했다. 이듬해에는 전자악기 회사인 ATV를 세웠다. 그는 전자 악기의 기술 표준화에도 기여했다. 1970년대까지 전자악기 제조 기업들은 각기 전자 악기를 개발했다. 문제는 제조기업들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 전자 악기를 제작해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엔지니어 데이브 스미스는 1981년 열린 국제오디오공학회에서 범용적인 통신 표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카케하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소니와 파나소닉은 수년에 걸쳐 비디오의 표준 기술을 만들려고 경쟁했다. 그 결과 소니가 경쟁에서 밀렸고 사람들은 표준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카케하시는 스미스의 경쟁자였지만 1980년대 전자악기와 컴퓨터의 연주 데이터 전송 규격인 ‘미디(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를 개발했다.● “기존 분야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도한다면 새로운 영역” 카케하시는 확고한 창업 철학을 지녔다. 전통 분야에서 새로운 기업을 일으키는 게 창업이라고 판단했다. 새로운 분야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벤처 기업이라고 봤다. 그는 음악은 벤처 기업의 가능성이 크다고 믿었다. 전자 등을 이용한 기기로 음악가들에게 새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공하는 기업의 요건으로 3가지를 꼽았다. 일단 창업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서 시도해야 한다는 것. 기존 분야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도한다면 새로운 영역으로 판단했다. 대신 인건비 비중이 큰 사업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봤다. 부가 가치가 높은 분야에서 특히 기회가 많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재고가 적은 분야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전자악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봤다. 특히 산업에서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음악의 가능성을 믿었다. 대중음악에 대한 카케하시의 기여는 컸다. 2000년 2월 그는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 록 워크에 자신의 손바닥 자국과 서명을 남겼다. 할리우드 록 워크는 로큰롤을 예술로 승화시킨 음악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중심부에 설치된 바닥 동판이다.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 ‘싱어송라이터’ 에릭 클랩튼 등이 여기에 입성했다. 카케하시는 또 미국의 실용음악 명문학교인 버클리음악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음악은 ‘팬 파이프(길이가 다른 관으로 구성된 전통 악기)’를 가진 양치기처럼 오래된 분야다. 그러나 지금은 우주 시대처럼 새롭다”고 말했다. 카케하시의 기술 혁신은 전통 분야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