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79년 줄루족 왕 영국군에 생포

  • 입력 2006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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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 따위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 장군을 데려와라.”

1879년 8월 28일 줄루 왕국의 케츠와요 왕은 영국군에게 잡혀가는 순간까지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영국군이 대령한 말도 사양한 채 감옥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는 언덕에 서서 한때 자신이 다스리던 왕국을 내려다봤다. 19세기 남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한 그의 왕국. 그러나 최신식 병기로 무장한 영국군 앞에서는 줄루족의 용맹도 빛을 잃었다. 독립 국가로서의 줄루 왕국의 역사는 그렇게 끝났다.

케츠와요는 1872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국의 기반을 세운 샤카 왕의 조카였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여러 면에서 샤카 왕과 비슷했다. 그는 각 부족의 불만을 잠재우며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그가 조직한 4만여 명의 정예군은 주변국들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정작 위협적인 적(敵)은 백인들이었다. 당시 식민 영토를 넓혀 나가던 영국은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영국군은 1879년 1월 줄루전쟁을 일으켰다.

초반 영국군은 대담무쌍한 줄루족 전사들 앞에서 당황했다.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영국군은 총 한번 제대로 쏴 보지 못하고 참패했다.

그러나 창을 휘두르며 정면 승부에만 의존하는 줄루족의 전통적인 싸움 방식은 많은 사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몇 달 후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군은 울룬디 전투에서 줄루 전사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다.

왕국의 몰락 후 13개 소국으로 분할돼 영국 보호령이 된 줄루는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분할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영국 정부는 케츠와요를 다시 복위시키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소국들 간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그는 1884년 독살당했다.

그는 죽기 2년 전 왕권 복귀를 청원하기 위해 영국을 찾았다. 그의 방문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최대 뉴스였다. 영국인들은 ‘식인종 야만인’을 상상했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예의바르고 침착한 흑인 신사였다. 케츠와요가 마차를 타고 런던 도심에 나타나자 영국인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버킹엄 궁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여왕에게 말했다.

“나는 영국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 나라의 왕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습니다. 국민은 지도력을 잃은 통치자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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