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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가 옮긴 불상… “원래 고향 경주로”vs“권력상징 靑에 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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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가 옮긴 불상… “원래 고향 경주로”vs“권력상징 靑에 둬야”

김상운 기자 입력 2017-09-30 03:00수정 2017-09-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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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청와대 석조여래좌상 이전 논란 왜?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 ‘석조여래좌상’(사진[1]). 대통령 관저 뒤쪽에 있는 보호각 아래 안치돼 있다. [2]는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경성 왜성대(현 서울 남산 일대) 총독 관저로 옮겨졌을 당시 모습. [3]은 경주 남산에 있는 약수계 불상으로, 청와대 불상과 흡사해 같은 석공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DB·임영애 교수 제공
‘청와대 불상’으로 알려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은 말 그대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

청와대 앞 검문소와 연풍문(방문객 출입구)을 차례로 통과해 비서동 앞에 들어서면 춘추관(청와대 출입기자실)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외국 손님을 맞는 상춘재가 보이며, 여기서 다시 직진해 대통령 관저 뒤쪽으로 가면 한자로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서 청와대 유일의 정자인 오운정 건너편으로 나아가면 단청 지붕의 보호각 아래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불상을 볼 수 있다. 보안구역이라 청와대 관계자가 아닌 일반인이 가볼 수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부터 80년 가까이 이 자리를 지킨 청와대 불상을 둘러싸고 최근 이전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통일신라 당시 불상이 처음 들어선 천년고도(千年古都)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문화재계 일각과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청와대의 상징성을 감안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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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이 불상은 청와대가 갖는 상징성과 맞물려 해프닝을 빚었다. 김영삼(YS) 대통령 시절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서해 페리호 침몰,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등과 같은 대형 참사가 잇따르자 세간에는 “개신교 장로 출신 대통령이 청와대 불상을 치웠기 때문”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청와대는 1994년 보안구역 안으로 출입기자들을 데리고 가 불상을 전격 공개했다.

새 정부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올 6월부터 문화재청이 청와대 불상의 국가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불상 이전과 국가문화재 지정은 별개 사안이라고 말하지만 문화재계는 이르면 연말 불상이 보물로 지정되면 이전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고 있다. 청와대 불상은 기구한 내력만큼이나 탈(脫)권위와 일제 잔재 청산, 종교계 갈등의 복잡한 요소들이 잠복해 있다. 불상에 얽힌 사연을 하나씩 풀어본다.

‘미남 불상’ 어떻게 생겼나

8,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청와대 불상은 ‘미남불(美男佛)’로 불릴 정도로 용모가 수려하다. 시원한 이목구비와 떡 벌어진 어깨, 두툼한 팔과 손, 유연하게 흘러내린 법의(法衣) 자락 등이 석굴암 본존불을 닮았다. 이마에는 백호(白毫·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흔적도 남아 있다.

최근 청와대 경내에 들어가 불상을 조사한 임영애 경주대 교수(불교미술사학)는 “보통 이 시기 불상은 얼굴이 제대로 남아있는 게 별로 없는데 청와대 불상은 코끝이 살짝 깨졌지만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며 “잘 만든 수작으로 보물급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잘 보존된 몸체와 달리 불상을 떠받치는 받침대인 대좌(臺座)는 3분의 1만 남아있다. 이 시기 대좌는 위치에 따라 상·중·하대가 한 세트를 이루는데 청와대 불상은 현재 상대(上臺)만 있는 상태다. 그런데 최근 임 교수가 청와대 불상의 중대(中臺)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미술사학자 신영훈 씨가 1961년 논문에서 밝힌 청와대 불상 중대의 실측치가 춘천박물관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대가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청와대 불상과 함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대좌의 가장 아랫단을 구성하는 하대(下臺) 없이 불상을 상대와 중대 위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기는 힘들다. 이 때문에 중대를 따로 보관하던 중 어느 시점엔가 청와대 불상과 한 세트라는 사실이 잊혀진 것으로 보인다. 임 교수는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별도 보관된 중대를 옮긴 사실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하대는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총독부박물관 관계자가 경주에 내려가 여러 절터를 돌며 하대를 찾았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최고 권부(權府)로 오기까지

신라 왕경에 봉안된 불상이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를 거쳐 청와대까지 온 과정에는 암울한 한국 근현대사가 투영돼 있다. 이야기는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언론과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1912년 11월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 곳곳을 순시했다. 이때 데라우치는 지역 금융조합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정원에 놓인 불상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사업상 총독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던 고다이라는 눈치껏 불상을 경성 왜성대(倭城臺·현 서울 남산 일대)에 있던 총독 관저로 보냈다. 총독부는 1939년 총독 관저를 왜성대에서 지금의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광복 이후 불상이 청와대 경내에 머물게 된 연유다.

흥미로운 건 일제강점기에도 최고 권부에 좌정한 불상의 거취가 논란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 즐풍욕우(櫛風浴雨) 참아가며 총독 관저 대수하(大樹下)에’ 제목의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이 불상은 경주 골짜기에 안치돼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해 견딜 수가 없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이어 “박물관에서는 불상을 가져왔으면 하고 있으나 이미 총독 관저의 물건이 된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총독의 허가를 얻어 박물관에 진열해 보려고 희망하는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전문기관이 아닌 총독 관저에 있다 보니 불상에 대한 보존 조치가 미흡했지만 총독 눈치를 보느라 박물관이 속만 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불상 원래 자리는 어디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내력과 연관돼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정확히 어느 사찰에 봉안돼 있었는지를 알아야 이전 위치를 확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불상이 경주에서 온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인 사찰 터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삼국사기 등 사료와 일제강점기 기록들에 따르면 청와대 불상의 출처는 경주 남산이나 이거사(移車寺)터, 유덕사(有德寺)터 중 한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모두 흔적만 남아있는 이른바 폐사지(廢寺址·절터)들이다. 이 때문에 보존 관리를 위해 전문 인력이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문화재는 제자리에 두는 게 원칙”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경주 남산설은 앞서 언급한 1934년 3월 29일자 매일신보 기사 중 “(청와대 불상이) 총독부박물관 홀에 진열돼 있는 약사여래와 같은 골짜기에 안치돼 있었다”는 총독부박물관 관계자의 발언에 근거한다. 여기서 언급된 약사여래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주 남산 삼릉곡 석조약사여래좌상’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청와대 불상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남산에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해당 불상이 경주 유덕사터에서 왔다는 총독부박물관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최고위 관료였던 최유덕이 자기 집을 내놓아 유덕사를 세웠다”는 내용이 전한다. 일각에서는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유덕사를 이거사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닮은 불상이 경주 남산에 있다는 임영애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를 주목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왼팔과 왼쪽 무릎 위에 새겨진 길쭉한 물방울 모양의 옷 주름이나 상대(上臺)의 연꽃무늬, 중대(中臺)의 신장상 조각 등 전반적인 형태에서 두 불상이 꼭 빼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청와대 불상의 출처가 남산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같은 석공이 만든 불상이라도 각기 다른 사찰에 봉안될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전을 둘러싼 논란

문화재계 일각에서는 경주 이전이 문화재 제자리 찾기와 더불어 총독부의 강압적인 문화재 침탈을 바로잡는 조치임을 강조한다. 일제강점기에 함부로 옮겨진 불상을 원위치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는 논리다. 총독부는 1915년 9, 10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제102호)’ 등 전국 각지의 석탑들을 경성으로 옮겨놓기도 했다. 당시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청사와 관저가 들어섰다.

보안상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청와대를 벗어나 많은 사람이 감상할 수 있는 곳에 불상을 둬야 한다는 명분도 있다. 이와 관련해 광복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청와대 불상은 정밀 학술조사나 국가문화재 지정이 지금껏 이뤄지지 못했다. 최근 대통령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문화재청과 서울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됐다.

그러나 불상의 정확한 출처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전부터 추진하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 폐사지에 뒀을 때 관리 부실 우려도 간과할 수 없다.

불교계 입장도 변수다. 조계종은 최근 “불교계와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통해 제대로 된 정책이 수립되고 이에 따라 보존 환경이 마련되는 게 우선”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즉각적인 불상 이전에 사실상 반대한 셈이다. 앞서 조계종은 이명박 정부 때 일부 개신교 단체가 종교적 편향성을 이유로 불상 이전을 요구한 데 대해서도 반대했다.


▼청와대 안 문화재 또 무엇이 있나▼

靑 관저뒤 바위엔 ‘天下第一福地’ 조선시대 글씨 남아… 대한제국 시절 침류각도 문화재


대통령 관저 뒤쪽에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바위(위쪽 사진)는 이곳이 예부터 최고의 길지로 꼽혔음을 보여준다. 현 관저 자리에서 상춘재 근처로 옮긴 침류각(아래쪽 사진)은 1905년 고종 때 건립됐다. 청와대 제공
청와대 경내에는 석조여래좌상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재들도 남아있다. 조선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과 연접해 있다보니 조선시대 유물이나 유구가 대부분이다.

2007년 대통령경호실이 발간한 ‘청와대와 주변 역사 문화유산’에 따르면 관저 뒤쪽에 있는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세상에서 가장 길한 명당)’가 새겨진 바위는 300∼400년 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부터 청와대 일대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였음을 알 수 있다. 글자 왼쪽에 ‘延陵吳据(연릉오거)’라는 관지(款識·그림이나 글씨 뒤에 작가 이름이나 날짜를 표기한 것)가 새겨져 있는데, 중국 남송시대 연릉에 살던 오거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침류각(枕流閣·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3호)은 1905년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진 전각이다.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짓는 과정에서 상춘재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각 이름인 ‘침류(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보인다. 침류각은 고종 당시 신무문 밖 후원에 건립한 전각들 가운데 청와대에 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팔작지붕을 이은 정면 4칸, 측면 2칸짜리 몸채에 좌우 한 칸씩 돌출시킨 구조다.

이 밖에 비서동 근처에는 조선왕실이 경복궁 후원에 관상용으로 둔 괴석(怪石)들이 남아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석조여래좌상#청와대#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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