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남자가 정장을 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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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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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패션업계에는 신사복 정장이 가장 경기를 탄다는 속설이 있다. 경기가 좋아지면 아동복이 가장 먼저 팔리고, 다음에는 여성복, 그 다음에는 애완동물용품, 맨 나중에 신사복 순으로 매출이 오른다고 한다. 경기가 나빠질 때는 반대 순서다. 이 속설이 호사가들의 근거 없는 입방아인지, 현실에 뿌리를 둔 이야기인지 한 백화점의 매출을 통해 간단히 검증해 봤다.

지난해 신세계백화점의 매출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을 보면 아동복이 14.5%로 가장 높았고 이어 여성복 10.4%, 신사복 6.2% 순이었다. 올해 1∼10월 매출을 보면 소비경기가 내리막에 접어든 와중에도 아동복과 여성복은 6.7%와 2.2%씩 늘었다. 유독 신사복만 매출이 3.0% 줄었다.

신사복 정장이 불황을 심하게 타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식님-일식씨-이식군-삼식놈(집에서 하루 한 끼도 안 먹으면 ‘님’, 한 끼 먹으면 ‘씨’, 두 끼 먹으면 ‘군’, 세 끼 먹으면 ‘놈’으로 불린다는 뜻)으로 압축되는 부권(父權) 추락현상이 소비생활에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일까. 물론 그런 점도 없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부권이 땅에 떨어졌기로서니 신사복 한 벌 못 얻어 입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 Y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경우, 정장은 내년에도 입을 일이 있을지(잘리지 않고 회사에 붙어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뒤 ‘예스’라는 답이 나올 때만 사 입는다.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처럼 언제 잘릴지 모르는 살얼음 경기에 누가 무슨 배짱으로 정장을 사 입겠나.”

설령 자신이 구조조정 대상 0순위일지언정, 사실 그대로 가족에게 말할 만큼 무신경한 한국의 가장(家長)은 없을 것이다. 십중팔구는 가족에게 괜한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 “내가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나가”라고 일단 큰소리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부인이나 자식들은 남편 또는 아버지가 얼마나 위험한 벼랑 끝에 서 있는지 알 턱이 없고, 지갑 끈은 상대적으로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아동복-여성복-신사복의 경기 민감도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됐을 터다.

신사복의 심각한 매출 부진이 시사하듯, 최근 기업 현장의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 등 경제 각료들이 “지금이 바닥”이라며 사그라지는 경기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지만 별무신통이다. 기업들은 “지금이 바닥인 것은 맞지만 내년은 바닥 아래 지하실”이라며 ‘경기바닥론’을 일축한다.

구조조정 태풍은 발달 중인 열대성저기압 단계다. SK커뮤니케이션즈 같은 대기업 계열사, 한국씨티은행 같은 글로벌 기업에서까지 희망퇴직 이야기가 나온다. 세계 1위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마저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다. 또 삼성, SK, LG의 주요 계열사들은 올해 예정했던 신규 투자의 규모를 줄이거나 집행시기를 늦추고 있다. 투자 축소는 대개 기업들이 감원에 앞서 하는 조치다. 중견·중소기업들의 사정은 대기업들보다 훨씬 절박하다.

그런데도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수십조 원이 드는 무상복지 공약과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增稅) 공약을 무더기로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경제민주화로 포장된 반(反)기업 정서 조장과 기업 때리기에도 열심이다.

빛바랜 양복 안주머니에 사표 꽂고 다니는 아버지의 지갑을 털어 명품 옷과 백을 사겠다는 자식들. 그러면서도 “아버지 인생은 반칙 인생”이라고 삿대질하는 아들딸의 모습이 우리 정치권에 ‘오버랩’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P.S. 남편이나 아버지가 잠재적 구조조정 대상인지 구별하는 방법: 이번 주말에 백화점에 가서 근사한 신사복 한 벌 장만하자고 권해 본다.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경기#패션#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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