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최영해]6·25 미군포로들 “우리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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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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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레이먼드 엉거 씨(80). 21세이던 1951년 8월 6·25전쟁에 일병으로 참전했다. 불행히도 참전 한 달 만에 북한군에게 생포됐다. 38선에서 북쪽으로 40마일 떨어진 곳인 868고지에서 1951년 9월 북한군에게 붙잡히고 만 것이다.

“큰 보름달이 고지를 환하게 비춘 밤이었습니다. 부상병을 부축해 언덕을 내려오는데 아래에 숨어 있던 북한군 2명이 나를 덮쳤습니다.”

그는 포로가 됐다. 평양으로 끌려갔다가 ‘옐로 리버(Yellow River)’ 수용소에 갇혔다. 중상을 입은 포로도 넘쳤지만 치료는 꿈도 꾸지 못했다. 부상한 포로가 더 걷지 못하고 죽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생생하다. 영양실조로 죽은 포로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세뇌작업은 집요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가 낫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하루는 중공군 장교가 당시 일병이던 엉거 씨를 불러 담배와 사탕을 주면서 “나중에 북한에 남으면 잘 대해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탕과 담배를 집어 던져버렸다. 그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 미국으로!”라고 외쳤다. 엉거 씨는 “그때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인 1953년 8월 18일 포로교환이 합의됨에 따라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 있던 때를 상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긋지긋한 포로생활 2년은 60년이 흐른 지금도 그를 가위눌리게 한다.

프레드 리델 씨(81)도 1951년 5월 강원 춘천에서 중공군에게 생포됐다.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순식간에 미군 3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당시 상사였던 그 역시 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로 전향하라는 사상교육을 매일 받아야 했다. 중공군은 포로가 졸지 못하도록 기립자세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도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에야 ‘생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말한다. “한국전쟁에서 우리는 옳은 일을 했습니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낸 것이 뿌듯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그는 한국을 두 번 방문했다. 황량한 전쟁터이던 한국의 변한 모습을 목격하고 그의 확신은 더욱 커졌다.

엉거 씨와 리델 씨는 3일(현지 시간) 미국 시카고 인근 오크브룩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전쟁포로 연례 모임’에서 만나 이처럼 끔찍했던 포로생활의 기억을 더듬었다. 1976년 발족한 비영리단체 한국전쟁포로협회가 주관한 이날 모임엔 6·25전쟁에서 포로로 붙잡혀 사선을 넘나든 225명의 참전용사가 자리를 같이했다. 가족들까지 합치면 500여 명이 모였다.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은 해마다 함께 만나 당시 기억을 되살리며 끈끈한 정을 나눈다. 내년에는 맥아더장군기념관이 있는 버지니아 주의 해군기지 노퍽에서 연례 모임을 갖는다. 6·25전쟁의 산증인인 이들의 얘기는 단 한 가지였다.

“우리가 한 일은 모두 옳았다.”

6·25전쟁에서 사망한 미군은 3만6568명이다. 부상자는 10만3284명. 아직까지 행방을 찾지 못한 실종자도 8177명이나 된다. 꽃다운 나이에 참전한 20대 미군들은 이제 80세를 훌쩍 넘겼다. 이들이 사망하면 6·25전쟁은 미국에서 더욱 ‘잊혀진 전쟁’이 될지 모른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혹독하게 치른 이들의 희생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닐까.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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