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7>꽃싸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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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싸움
―김요일(1965∼)

달빛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당신을 안고 붉은 밤을 건너면,
곱디곱다는 화전(花田)엘 갈 수 있나요?

화전(花田)엘 가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 아래 누워
지독히도 달콤한 암내 맡으며
능청스레 꽃싸움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새벽 별보다 찬란하게 웃고
나는 밤새 문신(文身) 그려 넣으며
환장할
노래를 부를 테지요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아침가리 지나 곰배령이면 어떻고,
별꽃 피는 만항재면 또 어때요
잃을 것 뺏을 것도 없는 빈 들에 가서
꽃집 지어 벌 나비 들게 하고
수줍은 미소에도 찰랑거리는 도라지꽃처럼
속살속살 지저귀며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에로틱한 시다. 점잖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암내를 맡자고’ 노래한 시인이 누가 또 있는가. ‘밤새 문신 그려 넣으며’ 격렬한 쾌락에 탐닉하고도 여전히 몸이 달아 화자는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아요’ 유혹한다. 화전(花田)은 수색 근처 동네 이름인데, ‘당신’이 사는 곳인 듯하다. 아니면, ‘노랗고 파란 꽃그늘’이 ‘노랗고 파란 전등 빛’인 듯도 하니 홍등가를 뜻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홍등가인 화전, 즉 꽃밭의 한 꽃송이이겠다. 어쨌거나 ‘당신’은 화자와 쌍벽을 이루게 관능적인 사람이다. 보들레르가 잔 뒤발이라는 여인한테서 헤어나지 못했듯이, 화자도 ‘당신’에게 폭 빠져 있다. 그이의 뜨거운 몸을 빗대 ‘화전(花田)이면 어떻고, 화전(火田)이면 어때요’ 하다가 화자는 슬그머니 도시 한구석의 방에서 허허로운 자연으로 상상의 공간을 옮긴다.

김요일은 관능과 쾌락에의 순수한 탐닉이라는, 우리 시단에서는 드물고 귀한 개성을 가진 시인이다. 그가 앞으로의 시에서도 자기의 취향과 자질을 이 시만큼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 행여 가족이랄지 세간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지 말고, 퇴폐에 이르도록 치달았으면 좋겠다. 시인 김요일만이 가진 탐미적 힘을 본때 있게 펼치시기를!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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