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본 '무인시대']무인시대 100년…'영웅'은 없었다

  • 입력 2003년 8월 20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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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역사가들이 메우지 못하는 사실의 빈 공간을 채운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사진은 드라마 중 경대승(왼쪽.박용우 분 )과 이의방(서인석)이 맞서는 장면. -사진제공 KBS
역사드라마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역사가들이 메우지 못하는 사실의 빈 공간을 채운다는 강점을 갖고 있다. 사진은 드라마 중 경대승(왼쪽.박용우 분 )과 이의방(서인석)이 맞서는 장면. -사진제공 KBS
주변의 동료나 친지들은 심심찮게 요즘 KBS1 TV 사극 ‘무인시대’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오곤 한다. 이번만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고려시대 사극이 폭발적 인기 속에 방영되면서, 같은 질문에 반복된 답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귀찮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역사 대중화를 중요한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는 나로서는 역사 자체가 대중적 관심의 표적이 되어 역사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내심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역사 드라마에 대한 사람들의 감상법도 흥미롭다. 드라마 자체를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야말로 학교시절에 못다 한 역사공부를 하는 자세로 열심히 시청하는 사람도 있고, 사극 자체를 하나의 허구로 치부하고 그 속에서 극적인 요소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어느 감상법이 옳은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드라마의 특색은 어디까지나 픽션이 가미된 극적인 요소의 전개에 있으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극의 특성상 소재가 된 시대의 인물과 장소만 사실에 의존하게 된다. 그동안 우리는 항상 전자의 감상법에 의존하다 보니 역사를 오도한다느니 고증이 잘못되었다느니 해왔다. 근엄한 역사가들의 질책으로 작가들이 오금을 펴지 못한 채 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조미료 격인 상상력이 위축되어 결국 드라마도 딱딱한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남고 말았다.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닌 격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이고와 이의방 사이의 권력 쟁탈전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묘책을 찾지 못했는데, 그것을 금나라 정벌과 북방개척을 내세운 묘청의 정신을 적극 계승하려는 이고와 여기에 신중한 이의방 사이의 충돌로 처리한 작가의 해석에 부러움과 함께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낀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의 뒷받침이 없을 경우 역사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지만 작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얼마든지 사실처럼 구성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요즘 방송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역사 대중화에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의 재미에 취한 대중은 자연스럽게 관심 있는 부분을 알기 위해 역사책을 뒤지게 된다. 결국 사극과 역사학이 함께 살게 되는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윈-윈 게임’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역사는 점차 유리상자 속의 연구실을 빠져나와 우리에게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 드라마가 가진 치명적 약점은 ‘메시지’의 상실이다. 드라마 ‘무인시대’는 처음부터 난세를 살아간 ‘영웅’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이들이 과연 영웅일까. 100년 무인시대의 권력자 10여명을 추적하다 보면 하나같이 왕실과의 무리한 혼인, 백성의 혈세를 가로채는 탐욕, 권력을 이용한 부정부패, 여성 편력 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최근 정치적으로 파장이 컸던 어느 범죄행위에 가담했던 한 사람은 “현찰 수억원이 담긴 상자더미에 짓눌려 자동차 바퀴가 터질 지경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처럼 요즘 우리는 고려 무신시대 못지않게 정치윤리가 땅에 떨어진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시 그 자리에 있더라도 그러한 일을 서슴지 않겠다는 몰염치한 정치인도 있다. 이들이 무인 권력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역사는 현재적 관심의 투사(投射)이다. 공자는 나를 알게 하는 것도 역사요, 나에게 죄를 주는 것도 역사라 했다. 얼치기 정치인을 단죄하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역사 드라마는 최후에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작가의 훌륭한 상상력을 기대해 본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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