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만나는 순간, 걱정은 기우였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종화 전 현대캐피탈 감독(48)과 도로공사 하혜진(21)의 ‘배구 부녀(父女)’가 만나는 순간은, 마치 한국시리즈 우승 투수와 포수의 포옹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흔히 아빠와 다 큰 딸 사이에 있을 법한 어색함은 없었다. “하 전 감독이 내성적이라 인터뷰를 고사할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도 들었는데, 딸과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취지를 전하자 흔쾌히 경남 진주에서 경북 김천의 도로공사 베이스캠프까지 올라왔다. 직접 만나본 하 전 감독은 의외로 차분한 달변이었다. 그리고 딸 앞에서는 한 시절, 한국배구를 주름잡았던 천하의 하종화도 어쩔 수 없는 한명의 아빠였다. 하 전 감독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하혜진은 둘째딸이다. 하혜진의 남동생과 여동생은 쌍둥이라고 한다. 나뭇잎만 봐도 생글생글 미소가 번지는 나이의 혜진이와 그런 딸을 바라보기만 해도 ‘아빠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하 전 감독의 속마음을 들여다봤다.
● 전설적 스파이커? 딸에게는 그냥 아빠
기자 : 생각했던 것보다 혜진이가 아빠를 좋아합니다.(웃음)
딸 혜진(이하 딸) : 어색하고 그런 거 없어요. 지금도 아빠 보면 달려가 안겨요. 아빠 보면 애교가 생겨요.(웃음)
아빠 종화(이하 아빠) : (지도자로 일하느라) 딸이 어릴 때부터 같이 생활 못하다보니, 가끔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는 것 같네요. 가족이 많았으니 집사람이 고생했을 겁니다. 딸 : 어렸을 때 엄마 얼굴이 많이 기억나긴 해요. 그래도 놀아줄 땐 아빠가 ‘짱’이에요. 아빠는 오랜만에 집에 오면 피곤해도 누워 있지 않고 놀아주려고 애썼어요.
기자 : 아빠가 지금으로 치면 문성민(현대캐피탈)급의 배구선수였는데요.
딸 : 나한테는 그냥 아빠에요.(웃음) 얘기는 많이 듣고 영상도 많이 봤어요. (그거 보면) ‘역시 레전드’구나 싶죠. (하 전 감독을 슬쩍 훑어보더니) 그런데 지금은 몸부터 달라졌어요.(웃음)
기자 : 혜진이 성격은 어때요?
아빠 : 혜진이는 조용한 성격인데 가끔 다른 지도자 얘기 들어보면 활달하고, 밝은 면도 있다고 들었어요. 하여튼 예쁘게 커줘 고마워요. 지도자 분들한테도 감사해요. 선수 생활은 자기가 고른 길이니까 잘 걸어갔으면 해요.”
기자 : 혜진이가 배구 시작한 계기는요?
아빠 : 진주에서 살았을 때, 마침 초등학교에 배구부가 있었어요. 아빠 따라서 배구장도 가고, 친근감이 있었을 거예요. 제대로 배구시키려고 여자배구 쪽에서 전문적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통영의 학교로 보냈어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걸어왔네요. ‘하고 싶으면 해봐라’ 했죠. 다만 ‘운동이라는 길이 쉽지 않은데 하다가 포기하고 이러진 말아라. 가다보면 힘든 일도 있다. 왜 배구 했을까 절망감도 가질 수 있는데 극복할 자신 있으면 해봐라. 힘든 것 있으면 얘기해라’고 말해줬어요. 혜진이가 좋아서 했던 거죠.
기자 : 아빠가 권위적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딸 : 의견을 많이 들어줘요. 그때는 배구가 확 와 닿았어요. 그냥 배구가 하고 싶었어요. 아빠도 밀어주셨고. (막상 해보니)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느꼈죠.(웃음)
아빠 : 처음에는 배구를 쉽게 생각했을 거예요. 잘하는 사람들 것만 보고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겠죠. 생각과 달랐을 텐데도 스스로가 잘 컨트롤했네요. 나도 선수 생활 해봐서 알지만, 멀리서 지켜봐주기만 했네요.
● ‘하종화의 딸’, ‘하혜진의 아빠’로 산다는 것
기자 : 배구를 딸에게 가르쳤나요?
아빠 : 아빠니까 몇 마디 충고는 해줄 수 있지만 기술적인 것은 전적으로 지도자 분들이 하는 부분이죠. 아빠는 이렇게, 지도자는 저렇게 하라고 하면 딸이 혼동이 올 수 있으니까 크게 나서지 않았어요.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고 너 스스로 찾아보라고. 지도자의 스타일에 네가 맞춰가는 부분도 필요하다’고 얘기했어요.
기자 : 지도자들도 하종화의 딸을 가르치는 부담이 있었겠죠?
아빠 : 그랬을 수 있죠.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했으면 기분도 안 좋았을 것이고요. 나도 팀을 맡고 있어서 자주 못 갔어요. 혜진이 경기 어쩌다 보면 ‘고생했다, 잘했다 ’고 얘기 해준 그런 기억만 나요.
기자 : 아이들 중 배구는 혜진이만 하나요?
아빠 : 혜진이 하는 거 보고 언니도 한번 해보겠다고 했는데 프로는 포기했어요. 프로까지 갈 실력은 미흡했던 거죠. 대학에 진학해서 서울대 체육교육학과 4학년이에요. 쌍둥이가 있는데 막내딸도 중학교까지 배구를 했어요. 아들은 중2인데 야구를 합니다. 투수 한다고 해서 따라가 봤었는데 시원찮아요.(웃음) 마운드 올라가면 스트라이크보다 몸에 맞는 볼을 더 많이 던지는 것 같아요.(웃음)
기자 : 배구선수 하혜진이 아니라 ‘하종화의 딸’로 바라보는 시선이 힘겨웠겠죠?
딸 : 어렸을 때는 힘들었어요. 시선이 신경 쓰이다보니 실력도 안 나왔어요. 지금은 무뎌져서인지 더 강해진 것 같아요. 괜찮아요. 힘들 때에는 같이 배구했던 언니가 힘이 되어줬어요. 아빠는 쉴 수 있는, 나무 그늘 같은 존재였어요.
기자 : 같이 배구 얘기 할 것도 많았겠네요.
딸 : 솔직히 아빠가 내 경기를 보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학교 때는 아빠가 왔다고 사람들이 얘기해줘서 찾아보면 금방 사라졌어요. 그래서 보시는지도 잘 몰랐어요.
기자 : 아빠는 대학교 때 슈퍼리그를 우승시킨 현역 최고 선수였죠. 반면 혜진 선수는 단계를 밟는 선수에요. 아빠가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느낌은 없었나요?
딸 : 선수는 그런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고 얘기해줬어요.
아빠 : 부담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 다해라. 코트에서 노력한 만큼 실력이 나온다. 꼭 최고가 안 되더라도 열심히 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 가지고 걸어가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빠가 국가대표였다고 딸도 그래야 된다는 생각은 없어요.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과정에서 자기 발전이 되고.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 미안하고 고마운 딸, 간절함 갖고 배구하기를…
기자 : 인터뷰 전에 도로공사 김종민 감독과 우연히 스쳤는데 얼마만인가요?
아빠 : 김 감독님을 김천 숙소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에요. 혜진이가 학생도 아니고 프로 선수인데 감독님을 만나는 자체가 다른 분들, 다른 선수들이 볼 때 좋은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될 수 있으면 내가 경기장에 안 와주는 것이 지도자도 편할 겁니다. 사실 TV로 배구 보는 것이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기자 : 아빠 아닌 지도자 하종화로서 딸 아닌 선수 하혜진을 평가해 주신다면?
아빠 : 기술적으로 수비 리시브 연결 능력이 우선되어야 해요. 배구는 이런 섬세한 부분을 채우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거기서 무너지면 팀 전체가 무너지죠. 혜진이가 점프력과 공격력은 있는데 아직은 그런 테크닉이 부족해요. 다만 가능성은 없지 않으니,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겠죠. 지도자들이 도와주니까 2%만 채워지면 기회가 생길 것이라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기자 : 아빠가 하 감독이어서 좋은 점이 뭘까요?
딸 :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아빠가 배구 안 했다면 물어보거나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었을 거예요. 지금 아빠가 좋아요.(웃음)
기자 : 프로선수가 된 지금도 배구가 재미있나요?
딸 : 현재는 욕심이 생겼어요. 처음에는 재미로 했는데 지금은 (배구 기술을) 빨리 몸에 습득하고 싶은 생각이 강해요.
아빠 : 그런 간절함이 있어야 해요. 욕심이 없으면 노력도 안 하게 되죠. 아빠가 배구 선수라서 제약이 있었겠죠. ‘네 아빠가 누군데 이렇게 행동해야 되겠어,’ 이런 소리 안 들으려고 조심스러웠을 거예요. 아빠는 혜진의 동기유발자이자 부담감이었을 겁니다. 그 속에서도 이렇게 커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항상 예뻐요.(웃음)
기자 : 대견한 것 같네요.
아빠 : 본인이 땀 흘렸으니까 여기까지 왔을 겁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더 성장해서 은퇴할 때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 가졌으면 해요. 이런 자리 덕분에 이야기해줄 수 있어서 좋네요. 기자 : 지도자 아빠를 보며 배구인의 고민도 목격했겠죠?
딸 : ‘아빠도 힘들면 나한테 기대줘’, 그럴 순 없잖아요. 내색 안 하세요. 밖의 일과 집에서의 기분은 구분이 되어 계세요.
아빠 : 밖에 있는 일을 집으로 가져가진 않았어요. 경기 졌다고 집에 가서 사춘기 애처럼 그러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집에 자주 못 들어갔죠. 지도자는 가족과 등지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기자 : 딸한테 미안할 때는 없었나요?
아빠 : 다쳤을 때. 손가락 부러지고 발목 다쳤을 때요. 내가 다쳐본 경험이 있으니 그때의 고통이 내 뇌리를 스쳐요, 소름 돋고 안쓰럽죠. 다른 집 아빠처럼 자주 안아주지 못했으니까 항상 집사람과 딸한테 미안하고 고맙죠.
기자 : 혜진이가 만약 배구선수 남친 데려오면 괜찮나요?
아빠 : 본인이 좋다면 100% OK입니다.
기자 : 혜진 선수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딸 : 지금 목표는 주전이요. 더 큰 목표는 국가대표요. ‘하혜진의 아빠, 하종화’로 불리는 그런 날이 오도록 할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