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항일의식… 막새기와엔 태극기-십자가 문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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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독립군’ 북간도 한인들의 생활사<중>명동촌의 주거 문화

1919년 3월 13일 용정 천주교 예배당의 정오 종소리를 신호로 북간도의 한인 3만 명은 용정 서전평야에서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해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만세시위의 배경에는 항일민족교육이 있었다. 주도한 분들이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학생, 교원으로 구성된 충렬대원이었던 것이다.

태극기와 무궁화, 십자가 문양이 있는 북간도 한인들의 막새기와.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태극기와 무궁화, 십자가 문양이 있는 북간도 한인들의 막새기와.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무엇보다 일상생활 속에서 체화된 항일민족의식이 큰 힘이었다. 그중의 하나가 명동학교와 명동촌 주택 지붕의 막새기와에 새긴 태극기, 태극, 무궁화, 십자가 문양이다. 이들은 기와 굽는 법을 직접 배워 성교촌과 대룡동의 기와공장에서 직접 기와를 구워냈다.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직접 문양을 깎아 민족의식을 새겨 넣었다. 막새기와를 처음 보는 순간 가슴 떨리던 전율은 그분들의 조국 독립과 애국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막새기와의 문양은 6개 유형으로 나뉘지만 꽃문양과 태극문양이 핵심이다. 태극기형 문양은 중앙에 삼태극을 새기고, 상하좌우로 이감태진( z { x y )의 4괘를 그렸다. 그 위쪽 좌우에는 원안에 든 십자가, 아래쪽 좌우에는 무궁화문을 새겼다. 항일민족의식과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상징한 것이다.

1907년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들어서고 이어 1909년에는 일본영사관이 들어서 일제의 압박이 본격화되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만 들면 훤히 보이는 지붕의 막새기와에 민족의식을 새긴 그 의지와 용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6개 유형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양은 무궁화문이다. 미술사학자들은 도상으로 봐 이왕가의 문장(紋章)이었던 이화문(李花紋·자두꽃 무늬)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역만리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극기와 십자가를 새긴 그분들이 과연 이왕가의 문장을 새겼을까?

일제의 의도에 따라 이화가 나라꽃처럼 행세할 때, 무궁화는 겨레의 꽃으로 겨레의 정신적 회귀처였다. 우표와 화폐, 대례복과 군복에는 이화문, 무궁화문이 국가의 상징문양으로 서로 자리다툼을 거듭하다 1905년 이후 완전히 이화문으로 바뀐다. 1910년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면서 이화문은 이왕가의 문장으로 전락하지만, 무궁화는 여전히 겨레 꽃의 위상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 항일민족의식을 함양하는 민족학교에서, 그 토대였던 명동촌에서 사용된 막새기와의 문양은 무궁화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북간도 한인들의 전형적인 함경도식 주택.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북간도 한인들의 전형적인 함경도식 주택.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 제공
명동촌의 주택은 함경도의 전통 주거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지붕 모양은 중국식의 맞배지붕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우진각이나 팔작지붕의 한국식 지붕 형태이다. 방을 두 줄로 배치하는 양통집 형태, 솥단지가 실내에 있는 정주간은 함경도식 주거 특성 그대로다.

명동촌 한인들은 어릴 때부터 태극기와 무궁화, 십자가가 새겨진 막새기와로 이은 지붕 아래서 잠을 자고, 공부하고, 뛰어놀았다. 일상에서 몸에 밴 항일민족의식이 3·13만세운동을 일으킬 힘이 되었고, 항일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교육과장
#북간도#막새기와#항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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