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로 ‘공천 혁신’… 통합선거법으로 금권-관권 막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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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선거제도 개혁’ 발자취 남긴 YS

1992년 총선 지원 유세



제14대 총선을 앞둔 1992년 3월 21일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왼쪽)가 서울 중랑갑 이순재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당시 총선에서 149석을 차지해 원내 1당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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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총선 지원 유세 제14대 총선을 앞둔 1992년 3월 21일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표(왼쪽)가 서울 중랑갑 이순재 후보 지원유세에 나섰다.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당시 총선에서 149석을 차지해 원내 1당 자리를 지켰다. 동아일보DB
1996년 국회의원 총선거는 신한국당 총재를 겸한 김영삼(YS) 대통령에게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선거였다.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1년도 안 돼 치러졌고, 필생의 라이벌인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 승부를 겨뤄야 했기 때문이다. YS는 승부사답게 ‘필승 카드’를 던졌다.

지역구마다 경쟁력 있는 후보를 발굴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여론조사를 최초로 실시한 것이다. 정치 여론조사는 당시로는 깜짝 놀랄 만한 혁신 카드였다. 부산의 최대 격전지로 5공 핵심인 허삼수 씨가 출전한 부산 중-동에 무명의 의사 출신 정의화 국회의장을 이 방식으로 전격 발탁했다.

1992년 대선 앞두고 DJ-정주영과 회동



1992년 8월 12일 민주당 김대중, 민자당 김영삼, 국민당 정주영 대표(왼쪽부터)가 국회에서 열린 3자 회동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들 3당 대표는 그해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어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동아일보DB
1992년 대선 앞두고 DJ-정주영과 회동 1992년 8월 12일 민주당 김대중, 민자당 김영삼, 국민당 정주영 대표(왼쪽부터)가 국회에서 열린 3자 회동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들 3당 대표는 그해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어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동아일보DB
○ 여론조사 통한 공천혁신

당시 여권의 외곽팀은 정의화 카드를 꺼내기 위해 이 한 곳에 대한 여론조사만 10차례 가까이 실시했다.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빅데이터 가운데 숨겨져 있는 유용한 상관관계를 발견해 투표결과를 예측하는 선진적인 ‘데이터 마이닝’ 기법이 동원된 결과다. 전 선거구 데이터베이스 구축은 당시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해당 지역의 여론조사와 유권자 구성비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서울의 전략 지역에 정치 초년생들을 과감히 발굴해 당시 야권 중진들과 맞대결시키는 대진표를 완성했다. 몇몇 격전지에는 YS가 직접 새벽 일찍 여당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도 자고 있나”며 선거운동을 독려했다고 한다.

총선 결과는 신한국당이 139석으로 1당이 됐고 국민회의는 79석으로 밀렸다. 이 결과로 YS는 집권 4년 차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당시 선거운동 과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승부사 YS였기에 가능했던 결과”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라면 YS는 선거의 신(神)”이라고 했다.

선거 직후 이원종 당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과반에 못 미쳐 죄송합니다”라고 보고하자 YS는 “참 잘 치른 선거야”라며 흡족해했다. 특히 서울에서 27석을 얻어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최초로 여당이 승리하는 기록을 냈다.

○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해야”

6·27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맥없이 조순 후보에게 지자 충격에 빠졌다. YS 캠프는 대면 여론조사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여론조사의 폭을 넓히기 위해 전화 여론조사에 집중했다고 한다. 차남인 현철 씨와 이원종 정무수석비서관,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은 정밀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광범위한 인재 영입에 매진했다.

당시 실무를 담당했던 인사는 “언론사의 연감이나 칼럼 기고 등을 통해 필요한 인재를 추려낸 뒤 특정 지역의 유권자들이 선호할 만한 인재를 여론조사로 확정하는 일은 지난한 작업이었다”고 회고했다.

YS는 평소 선거와 관련해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한대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선 전력투구했다는 것. YS가 과거 야당 총재 시절 선거자금을 남긴 상도동계 후보들을 강하게 질책한 일은 유명하다. 선거자금을 다 쓸 정도로 온몸을 다해 뛰지 않았다고 문제 삼은 것이다.

지역구별 맞춤형 선거 전략을 도입한 것도 YS의 족적 중 하나다.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나선 이명박 후보는 요즘 개념으로는 ‘뉴타운’ 공약에 해당하는 종로의 낙후지역 재개발을 공약해 이종찬이라는 당시 야당의 거물을 꺾을 수 있었다.

○ “돈은 묶고 말은 풀고”


1994년 3월 YS는 최초의 통합선거법인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 방지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금권선거, 타락선거, 폭력선거, 관권선거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책으로 △대통령선거법 △국회의원선거법 △지방자치단체장선거법 △지방의회의원선거법 등 4개의 법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이원종 전 수석은 “누구나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선거 비용의 상당 부분을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도록 하는 선거공영제를 확대해 ‘돈이 적게 드는 선거’를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선거운동에 대한 제한 철폐로 공무원 등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고, 후보자가 전액 부담하던 선전벽보나 선거공보, 소형 인쇄물 작성 비용을 정부가 부담하도록 한 것은 선거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방송사의 출구조사를 허용한 것 또한 우리 선거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하태원 triplets@donga.com·박민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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