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 사상가’ 르네 지라르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5일 15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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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사상가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다양한 비밀을 아는 여우와 단 하나의 비밀을 파고드는 고슴도치.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가는 대부분 여우에 가까웠지만 르네 지라르(사진) 만큼은 고슴도치였다. 인류가 남긴 이야기 속에 숨은 욕망과 폭력의 상관관계를 깊이 파고들어 전대미문의 이론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20세기가 배출한 가장 독창적 사상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다윈’으로 불렸던 그가 4일(현지시간) 미국 자택에서 지병으로 숨졌다고 스탠퍼드대가 발표했다. 향년 92세.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난 지라르는 파리 고문서학교에서 고문서학을 연구하다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95년 스탠퍼드대에서 은퇴할 때까지 50년 가까이 프랑스어문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문학작품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모방욕망과 희생제의의 메커니즘을 추적해낸 문학이론에서 빛을 발했다. 인간의 욕망이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모방욕망이며 이런 욕망이 결국 인류의 원초적이고 집단적 폭력의 기원이 된다는 이론이다. 이는 처녀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년)부터 ‘폭력과 성스러움’(1972년),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1978년)에 담겨 있다.

지라르의 이론은 욕망의 주체와 대상에만 초점을 맞췄던 기존이론과 달리 삼각구도로 이뤄진다. 욕망하는 나와 욕망의 대상, 그리고 그 욕망을 촉발시키고 부채질하는 ‘욕망의 짝패’로 이뤄진 이 삼각도는 문학과 심리학을 거쳐 신화 역사 종교로 확대되면서 문화인류학 이론으로 격상됐다. 인류가 모방욕망의 확대 재생산으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면 이를 없애기 위해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집단폭력을 가한 뒤 곧바로 엄습하는 집단죄의식을 통해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는 ‘악마의 메커니즘’을 반복해왔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이런 모방욕망과 희생양문화를 거부한 유일한 신화가 예수신화라는 점을 포착하고 가톨릭신자로 개종함으로써 기독교사상가로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1999년), ‘그를 통해 스캔들이 온다’(2001년), ‘인류의 기원’(2004년)에서 이런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평생 미국 학계에 몸담아왔지만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2005년 40명에게만 허용되는 프랑스 아카데미 정회원에 뽑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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