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이른 아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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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박순원(1964∼ )

나는 아직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데 이른 아침 아내가 배춧국을 끓인다 배추는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와 끓는 물속에서 몸을 데치고 있다 배추는 무슨 죄인가 배추는 술 담배도 안 하고 정직하게 자라났을 뿐인데 배추에 눈망울이 있었다면 아내가 쉽게 배춧국을 끓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래 나도 눈망울을 갖자 슬픈 눈망울 그러면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가 몸이 데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렁그렁 소 같은 눈망울로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나를 어쩔 것인가 아, 하나의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꼭 오늘 아침은 아니지만 우리가 가끔 먹는 동탯국 머리째 눈망울째 고아내는 시뻘건 그 국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이불 속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여기, 아침이 두려운 사내가 있다. 그는 간밤 정신없이 달렸을 것이다. 저녁 먹으며 소주 한잔, 입가심으로 호프집에서 두 잔, 그리고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딘가에서 삼차를 했겠지. 문득 잠 깨어 여기가 어디지? 하다가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시간.

남자들은 저만 아는 족속인 것 같다. 한잔 한잔 또 한잔에 정신이 계란탕처럼 풀려, 오늘 한 일도 내일 할 일도, 밤인지도 새벽인지도 흐릿하게 잊어버리는 몽롱한 시간을 산다. 그를 어떻게 변호할까? 가장으로서, 한 고독한 인간으로서, 눈에 띄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고통을 숨 쉬는 중이라 할까? 가혹한 경쟁과 나날의 생존 위협에 시달리다 회사를 나오면, 어디에도 갈 곳 없는 막막한 상태에 빠져 버리는 거라 말해 볼까?

하지만 아침은 아침, 출근은 출근이다. 부엌에 무서운 분이 계시다. 그녀는 배추를 데치고, 취했던 이는 기억나지 않는 어제를 모면할 궁리를 한다. 그런데 고작 ‘슬픈 눈망울’이라니. 이 가난한 상상은 자못 필사적이지만 아아, 그녀는 얼마 전엔 동탯국을 끓였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상상은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저 혼자 끙끙대고 저 혼자 쾌재를 부르다가는 사정없이 쪼그라드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 하나가 있다. 부엌의 그분은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골이 지끈거리는 아저씨들이여, 우리가 지금 해롱해롱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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