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국사교과서, 검정-국정 모두 許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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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 국정-검정 갈등은 이미 교육이 아닌 정치 문제
어떤 선택을 하든 분란은 필지
국정과 검정의 공존 방안은 ‘비겁한 미봉’ 아닌 ‘건전한 타협’
일방이 완승 완패하지 않고 다양성 담보할 수 있으며
좋은 교과서 만들기 경쟁도 자극
가보지 않은 길, 주저도 있겠지만 ‘제3의 길’ 선택하는 용기 냈으면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박정희 정권이 검정이던 중고교 국사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한 게 1973년 6월 23일이다. 이틀 후 동아일보는 ‘각계의견’이라며 반대 3명, 찬성 1명의 견해를 실었다. 한 명은 이렇게 반대했다(부분 발췌).

“나는 국사가 획일적으로 되는 것에 반대한다. 다양성을 말살하고 획일성만을 찾으려는 것은 위험하다. 국사학자들 누구나가 약점이 있다고 할 경우 소수 저자만에 의한 교과서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나’는 당시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고, 지금은 국사편찬위원장인 김정배 씨다. 42년이 흘렀는데도 요즘 진보진영의 반대 논리와 놀랄 정도로 닮았다. 더 큰 아이러니는 국정과 검정의 공수가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다양성 말살’ ‘약점 있는 소수 저자’ ‘독단’이라는 비판을 이제는 검정 교과서가 듣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성장 과정,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등에 대한 서술이 좌편향되어 있으니 국정으로 바로잡자는 것이다. 국사의 국유화를 우려하던 진보가 오히려 국사를 사유화한 결과다.

첨예한 사안을 현상변경하려면 명분, 지지, 힘이 있어야 한다. 국정 전환의 명분과 지지는 언론의 논조만 보더라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힘은 있다. 청와대는 국정화를 밀어붙일 태세다. 대통령이 원하고 있고, 소소한 개선보다는 아예 판을 바꿔야 한다는 확신 때문인 듯하다.

이 정권이 꼭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싶다면 검정도 유지하라고 제안한다. 국정과 검정의 공존이다. 검정론자는 국정의 길을 트는 꼼수이자 국가가 나중에 채택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며 반대할 것이다. 국정론자는 정권이 물러 터져서 진보 교과서의 명줄을 붙여줬다며 역시 반대할 것이다. 반대할 이유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그러나 뒤집어 보면 달리 보이는 게 있다. 국정은 나쁜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추정’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막상 만든다면 진보 쪽에 명백하게 흠이 잡힐 교과서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현 정권의 입맛에만 맞는 교과서는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폐기될 게 분명하다.

국정과 검정을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있느냐고? 배부른 소리다. 교과서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검정이 주류고, 국정은 비주류다. 국정의 시장 진입 자체가 특혜다. 보수진영은 ‘보수 쪽 학자 중에는 교과서를 저술할 만한 인물도 없다’는 비아냥거림부터 부끄러워해야 한다.

경쟁 구조도 달라질 게 없다. 국사교과서는 이미 8종이 나와 있고, 현재 진보성향 교과서들이 명백히 갑이다. 을이 하나 늘어나는 걸 반대할 명분이 없다. 국정의 등장은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자극할 수 있다. 검정의 문제가 잦아들면 국정을 없애면 된다.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초중등교육법은 교과용 도서의 사용에 관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고, 대통령령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은 이를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3조)에 위임하고 있다. 규정 3조에 ‘단, 국사교과서는 국정과 검정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한 줄만 삽입하면 된다. 규정도 대통령령이라 정부가 쉽게 고칠 수 있다. 그럴 경우 국정의 사용 목표를 2017년 3월로 잡지 말고, 새 검정 교과서 사용 시점인 2018년 3월로 1년을 늦춰 공정하게 채택 경쟁을 하면 된다.

이 방안이 선뜻 수용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고민을 하는 이유는 사회를 찢어놓는 갈등을 해결하려면 ‘제3의 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권은 칼날 위의 꿀에 혀를 댈지, 아니면 포기할지 양자택일만을 상정하고, 이해당사자는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불복할 준비만 하고 있는 것은 불행이다. 국정 검정 공존 방안은 다양성을 담보하고, 부도덕하지 않으며, 일방의 백기투항도 요구하지 않는다. ‘비겁한 미봉’이 아니라 ‘건전한 타협’이다.

국정제가 아니라면 현행 교과서 채택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한 학교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교과서를 선정했는데도 부당한 비판이나 시위, 압력 등으로 번복하라고 겁박해서는 안 된다. 이는 민주주의와 자유경쟁에 대한 테러다. 선호도와 채택률의 왜곡을 막을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고, 사전교육도 해야 한다.

국정과 검정을 함께 두는 것이 이상한가. 우리 사회에 이보다 더 이상한 일이 어디 한둘인가. 교과서 논쟁은 발행 주체가 아니라 내용이어야 한다. 좋은 교과서로 승부하라는 요구는 이상할 게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용기뿐이다. 도전이 없으면 승리도 없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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