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색깔 지키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이현두 스포츠부장
이현두 스포츠부장
프로야구 두산의 김승영 사장은 국내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사장 중 유일하게 구단 프런트 출신이다. 1991년 두산의 전신이었던 OB 베어스 직원으로 야구단과 인연을 맺은 그는 단장을 거쳐 4년 전 사장이 됐다. 20년 넘게 두산 야구의 부침을 함께해 온 그는 경기의 승패에 좀처럼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1년여 전 두산이 패한 뒤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도 화가 난 이유는 경기 결과가 아니었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경기는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더라도 지금처럼 져서는 안 된다. 두산의 모습이 아니다.” 선수들이 두산의 팀 색깔인 ‘허슬(hustle·활기차게 움직이다)’ 플레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정정당당한 스포츠정신을 강조하는 아마추어 스포츠와는 달리 프로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이다. 프로야구 감독의 임기를 파리 목숨에 비유하는 것도 성적 지상주의 때문이다. 성적이 좋지 않은 감독은 계약기간을 지키는 것은커녕 시즌 중이라도 옷을 벗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사령탑에 오르는 감독들은 하나같이 목표를 우승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모든 구단의 프런트들도 우승만이 목표였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로야구 해태의 상징이었던 김응용 감독과 선동렬 코치를 영입하는 충격 요법까지 쓴 끝에 삼성은 2002년 마침내 우승 염원을 풀었다.

그러나 아저씨 일색이던 관중석이 20대 여성들로 물갈이되면서부터 구단 프런트들의 목표도 바뀌기 시작했다. 수익을 가져다줄 더 많은 충성 팬을 만드는 것이 우승보다 앞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팬을 늘리는 가장 훌륭한 도구는 우승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난해 두산의 관중 수를 봐도 그렇다. 두산은 지난 시즌 6위에 그치며 3년 만에 가을야구에 초대받지 못했다. 두산 팬들의 실망은 그만큼 컸다. 그러나 두산의 관중은 전년도에 비해 2.1%밖에 줄지 않았다. 잠실야구장을 안방 구장으로 함께 사용하는 LG가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음에도 전년도에 비해 9.5%의 관중이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비결은 김 사장의 말에 숨어 있다. 패배하더라도 팀의 색깔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야구팬들에게 두산은 끈기의 팀으로 받아들여진다. 큰 점수 차로 뒤졌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전을 벌인다. 매년 개막전 프로야구 구단들은 캐치프레이즈를 발표한다. 구단의 목표와 가치관, 지향점 등을 반영한 것으로 대부분의 구단들은 해마다 약간씩의 변화를 준다. 그러나 두산은 변화가 없다. 표현을 조금 다르게 하더라도 키워드는 변하지 않는다. ‘허슬’이다. 그것은 이제 두산을 대표하는 색깔이 됐다. 그리고 그 색깔을 보려고 팬들은 두산의 경기를 찾는다.

팀의 색깔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반대로 우승을 위한 훌륭한 도구도 된다. 우승 청부사로 삼성에 부임한 김응용 감독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려고 했다. 그때 삼성 선수 출신의 류중일 코치는 김 감독에게 수비만큼은 바꾸지 말 것을 부탁했다. 이만수 양준혁 이승엽 등 수많은 강타자들을 배출한 삼성이지만 삼성의 기본 색깔은 그물망 수비다. 류 코치는 그 색깔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김 감독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색깔 위에 새로운 색깔을 덧입혔다. 이후 모두 알다시피 삼성의 최강 시대가 시작됐다.

색깔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팬들의 취향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10개 팀이 모두 똑같은 색깔을 갖는다면 생각만으로도 벌써 지루해진다.

이현두 스포츠부장 ruchi@donga.com
#프로야구#김승영#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