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비빔밥 정치’ 좀 해보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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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새정치민주연합 전병헌 의원이 원내대표를 그만두기 얼마 전에 사석에서 고충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당내 강경파 의원들 때문에 지도부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물론 자진해서 한 말은 아니고 초청한 측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다. 사실일까, 자기 합리화 아닐까, 원내대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왜 당내에서 문제 제기를 해 바로잡지 않았을까 하는 의아심도 들었지만 계속 얘기를 듣다 보니 이해가 됐다.

전 의원은 원내대표에서 물러나는 날 작심한 듯 기자회견을 통해 그 얘기들을 다 쏟아놓았다. “원칙만 주장하려면 시민운동을 해야지 정치하면 안 된다” “의회주의를 온건타협주의나 강경주의의 반대로 보는 것은 과거 반독재 투쟁 시절의 낡은 프레임이다” “우리의 주장과 원칙만이 아닌 상대의 주장과 원칙도 고려해야 한다” “서로 다른 민의(民意)가 국회에서 충돌하고 타협하는 게 정치다”….

새정치연합은 타 정당들에 비해 인적 구성도, 이념의 스펙트럼도 다양한 편이다. 수도 없이 합종연횡을 되풀이한 결과다. 그러다 보니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응집력이 강하고 색깔이 분명한 강경파 의원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강경파는 좌파 시민사회단체 같은 외부의 응원군들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어 세력도 막강하다. 당의 중진이나 원로들도 이들 앞에서는 입을 닫는다.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고 괜히 위신만 깎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파 지도부가 무슨 수로 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강경파는 지금도 “진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새누리당은 오히려 반대다. 지도부나 중진들의 힘이 강하고, 초·재선 의원들 중심의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목소리는 약하다. 그러다 보니 지도부의 의중에 따라, 당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민의에 귀를 기울이면서 정부를 견제하는 정당 본연의 역할보다는 대통령의 뜻을 뒷받침하는 여당의 역할에 더 주력했다. 그 결과 여야 정치는 새누리당 지도부와 새정치연합의 강경파, 더 확장한다면 이들 뒤에 있는 청와대와 좌파 시민사회세력 간 대결로 치달아왔다. 정치가 아니라 정쟁(政爭)이다.

나는 5년 전 ‘여야 분단정치’라는 제목으로 여야 원내대표가 남북대화 하듯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든 없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만날 것을 촉구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서로가 각각의 스피커를 통해 주의주장을 쏟아내는 것보다는 자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다 보면 타협점을 찾기가 쉽다. 이제라도 여야의 이완구, 박영선 원내대표가 이달 9일 첫 회동을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 만나기로 한 것은 다행이다. 당장 큰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성급하다. 지속성이 중요하다. 덧붙여 서로 상대를 진심으로 존중해야 한다.

비빔밥의 재료는 가지가지다. 맛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양념을 첨가해 함께 잘 버무리면 색다른 맛의 밥으로 만들어진다. 정치도 같은 이치다. 양념을 넣고 버무리는 과정이 곧 대화와 타협이고,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여야의 원내대표다. 지금의 원내대표는 과거 제왕적 당 총재의 대리인 노릇이나 하던 원내총무가 아니다.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이 뽑고 그들을 대표한다. 2003년 국회 중심의 의정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 도입했던 그 취지를 이제라도 제대로 살려야 한다.

대통령의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은 인사(人事)와 정책이 핵심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야당의 협조 없이 일방적으로 관철하기 어렵다. 그렇게 세상이 변했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소통과 통합에 대한 국민의 기대치도 높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여야 지도부와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치의 분위기를 확 바꿀 수 있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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