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다큐처럼 vs 한편의 연극처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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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호 ‘먼지의 날들’전
임승천 ‘네 가지 언어’전

이 시대를 해석하는 풍성한 코드가 담긴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화가 정재호 씨가 1970년대의 답답한 시대 상황을 우주인 헬멧을 쓴 장발족 청년으로 표현했다면(위쪽 사진), 임승천 씨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인간군상으로 희로애락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풍자했다. 갤러리현대·성곡미술관 제공
이 시대를 해석하는 풍성한 코드가 담긴 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화가 정재호 씨가 1970년대의 답답한 시대 상황을 우주인 헬멧을 쓴 장발족 청년으로 표현했다면(위쪽 사진), 임승천 씨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인간군상으로 희로애락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풍자했다. 갤러리현대·성곡미술관 제공
달나라에 착륙한 로켓, 나팔바지를 입은 장발족 청년들, 동물 인형 탈을 쓴 사람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열리는 정재호 씨(43)의 ‘먼지의 날들’전은 각기 다른 그림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지 추리하는 재미를 준다.

1969년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뒤 이듬해 비행사들이 한국에서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우주와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고조됐고 아이들은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그 세대는 1970년대 나팔바지를 입는 장발족 청년으로 성장했다. 경찰이 가위손을 겸한 시대였다. 동물 인형 탈은 1970, 80년대 대표적 어린이 프로그램 ‘모여라 꿈동산’의 상징이다. 어린이날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는 등 아동에 대한 관심과 억압적 교육이 맞물린 시기였다.

1960∼80년대를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시기라고 규정하는 작가. 그때 그 시절의 사물 사람 사건을 기억과 기록으로 되살려 회화적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22일까지. 무료. 02-2287-3591

‘먼지의 날들’전이 담담한 논픽션이라면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임승천 씨(41)의 ‘네 가지 언어’전은 극적인 드라마로 비유할 수 있다. ‘상실’ ‘노시보(Nocebo)’ ‘고리’ ‘순환’ 등 4개의 공간으로 연결된 전시장에는 조형적 설치작품과 허구적 텍스트가 공존한다. 작가는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 구조로 병들어가는 이 시대의 민낯을 보여줬다. 7월 27일까지. 3000원. 02-737-7650

작가들은 이 시대의 삶과 풍경을 직접화법 대신 문학적 상상력과 시각적 창의성으로 풀어냈다. 보는 재미와 사유의 의미를 동시에 선물하는 전시들이다.

○ 정재호 전-그림으로 일깨운 그 시절의 기억

비슷한 크기의 그림을 두 줄로 가득 채운 벽면이 인상적이다. 한지에 아크릴 물감으로 과거의 일상 세간이나 풍경을 흐릿하게 표현한 작업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림 속에서 지금은 앤티크로 대접받을 만한 트랜지스터라디오나 금성사 텔레비전, 오래된 타자기가 조연 아닌 주연으로 단독 등장한다.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와 전차 종점처럼 지금은 사라진 풍경과 마주치기도 한다. 1971년 12월 25일 발생한 대연각 호텔의 화재는 구름처럼 피어나는 연기로 암시하지만 지름 30m, 깊이 15m의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었던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는 구체적 정황을 상세히 보여준다. 주상복합의 원조 격인 도심 상가의 조감도, 옛 주공아파트는 그때와 오늘의 현실이 어떤 관계와 맥락으로 이어지는지 되새기게 한다.

○ 임승천 전-이야기로 드러낸 이 시대의 민낯

신화 같은 이야기에 사운드를 결합한 임 씨의 전시에선 소설적 구성방식과 극적 연출이 눈길을 끈다. 홀로 혹은 여럿이 무리를 이룬 사람들, 몸을 가누기 힘든 거대한 물고기가 곳곳에 배치된 전시장은 암울한 연극의 무대를 떠오르게 한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녀의 꽉 쥔 주먹에선 핏방울이 떨어지고, 몸집이 거인처럼 부푼 남자는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희로애락, 4개의 얼굴을 가진 이들은 다리가 꽁꽁 묶인 채 어디론가 걷고 있다. 박천남 학예실장은 “작가는 픽션을 통해 인간 사회의 기본 조건과 본질적 가치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환기시킨다”며 “짧지만 플롯이 분명하고 탄탄한 단편소설을 보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토막 난 이야기를 조합하고 재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먼지의 날들#네 가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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