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생이별 64년… 이산가족의 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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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만남, 그치지 않는 눈물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재개된 뒤 지금까지 북녘의 가족과 재회를 한 남쪽 사람은 1만1800명이다. 2010년 8월 이산가족 상봉 뒤 충격으로 치매에 걸린 왕소군 할머니(왼쪽)의 손을 잡은 아들 김기암 씨의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 간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000년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재개된 뒤 지금까지 북녘의 가족과 재회를 한 남쪽 사람은 1만1800명이다. 2010년 8월 이산가족 상봉 뒤 충격으로 치매에 걸린 왕소군 할머니(왼쪽)의 손을 잡은 아들 김기암 씨의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 간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얘, 얘, 이리 오라우. 어서 오라우. 온다. 온다. 아이고, 우리 둘째 저기 온다.”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잠자던 어머니가 갑자기 눈을 뜨며 허공에 외쳤다. 아들 김기암 씨(56)가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니, 도대체 누가 온다 그래요?” “누구긴 누구냐, 내 둘째 동생 저기 있잖니. 아이고, 저기 다섯째도 오는구나. 저기 온다. 온다. 기암아, 빨리 데려와라.” 어머니는 팔을 내밀어 허우적댔다. 김 씨가 울먹이며 말렸다. “어머니, 제발 정신 차리세요. 누구를 데려오라 그래요?” 어머니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치매 1등급. 셋째아들 김 씨밖에 못 알아보는 왕소군 할머니(84)는 64년 전 북녘의 고향일지, 4년 전 금강산의 마지막 이산가족 상봉장일지 모르는 그곳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지난달의 일이다. 김 씨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남북은 14일 고위급 회담에서 4년 만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20∼25일) 개최에 극적으로 최종 합의했다. 》  

▼ “동생 두고 또 나혼자 왔어”… 어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
“이번엔 정말 만날수 있다는구나”

#1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겨울, 아홉 자매 중 맏이였던 왕 할머니는 고향 평양에 부모님과 여덟 여동생을 남겼다. 지주 집안 출신 남편과 함께 스무 살 새댁은 눈보라를 헤치며 38선을 넘었다.

전쟁이 끝나면 금방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분단이라는 날선 칼날에 갈가리 찢겼다. 홀로 가족을 떠났다는 죄의식이 30년을 괴롭혔다. 왕 할머니는 1980년대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 때 TV 방송국을 찾았다. 혹시라도 여동생들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현실은 희망을 저버렸다. 다행히 왕 할머니 외삼촌의 아들을 찾았다. 김 씨는 어머니가 전화기를 부여잡고 울던 그때의 TV 화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재회의 희망은 비로소 현실이 됐다. 가장 최근 이산가족 상봉행사였던 2010년 10월 제18차 행사에서 둘째와 다섯째 여동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다리 수술을 받았지만 치매기 전혀 없이 멀쩡했던 왕 할머니는 소녀처럼 들떠 여동생에게 선물할 점퍼를 골랐다.

금강산으로 향하던 날, 어머니는 김 씨를 불렀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기암아, 나 이제 정말 동생 만나러 간단다. 내가 맏이인데 여덟 형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黨에서 동생 맞다니 그리 아시오”

#2 두 살 터울의 둘째 동생, 여덟 살 터울의 다섯째 동생. 막상 만난 동생들이 자신보다 쭈글쭈글 늙어 보이자 왕 할머니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언니 걱정 말라요. 잘 먹고 잘 살아요.”

“아이고, 얘들아. 나는 그렇게 안 보인다. 어쩌다 이렇게 됐니…. 입은 한복 저고리는 깨끗한데 옷과 몸이 맞질 않아….” 왕 할머니는 동생들한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왕 할머니가 38선을 넘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맏딸이 보고 싶다며 집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왕 할머니를 괴롭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셋째인지 넷째인지 동생이라며 나온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통 기억이 안 났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화를 내시며 하신 말이 이랬습니다.”

“이 간나 새끼들이 앞잡이를 붙여 놓은 거야. 둘째에게 귓속말로 ‘못 보던 애인데 누구냐’고 물으니 ‘언니 신경 쓰지 말라요. 여기서 셋째라면 셋째인기요’라고 하는 거야. 아이고, 동생들이 불이익을 받을까 봐 화도 못 내고….” 그 답답함에 상처는 더 깊어졌다.
가족 만난뒤 충격… 치매가 왔다

2009년 9월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한에 사는 여동생 3명과 남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김걸 씨(85)가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2박 3일의 만남이 사실상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은 이산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2009년 9월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한에 사는 여동생 3명과 남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김걸 씨(85)가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2박 3일의 만남이 사실상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은 이산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3 상봉행사를 마치고 서울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어머니는 계속 울었다.

“어머니가 집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7시 반이었습니다. 제가 외출했다 밤 10시에 돌아왔는데 그때까지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계셨어요. 서로 부여잡고 한참을 같이 울었어요.”

그날 이후 왕 할머니는 동생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이렇게 됐다는 자책이 심해졌다. 한 달을 매일같이 울었다. 몇 개월간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한술 뜨다가 “걔들은 뭘 먹고 살까” 하며 밥맛이 없다고 수저를 내려놓기 일쑤였다.

동생들을 찾는 헛소리가 늘더니 말 순서가 틀리기 시작했다. 상봉행사 서너 달 뒤, 치매 4등급 판정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도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2년 뒤인 2012년 치매 2등급으로 악화되더니 지난달에는 급기야 1등급 판정이 나왔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아들 김 씨와 함께 극심한 가난과 싸우고 있다. 거동을 거의 못하고 대부분을 침대에만 누워 지내는 지금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때론 그때 상봉행사에 안 보내드렸으면 하는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자꾸 그때 생각하며 우시니까…. 한번은 꿀꿀이죽을 먹어도 동생들과 같이 먹고 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누구한테서 흠씬 두들겨 맞은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픕니다. 가슴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결국 김 씨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상봉뒤 절반이 스트레스 장애 겪어

#4 2000년 8월 제1차 상봉을 시작으로 2010년 10월 제18차 상봉까지, 분단으로 흩어진 가족을 다시 만난 한국인은 1만1800명이다. 대한적십자사에 명단을 올린 이산가족 등록자가 12만9264명이니 10.9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행운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리운 북녘의 가족과 상봉한 이들은 단 한 번밖에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통스러워한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동아일보는 2009년 대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그해 열린 제17차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가한 남측 이산가족 200명을 전수조사했다. 당시 상봉자 중 절반이 상봉 후유증으로 ‘급성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일보는 20∼25일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앞두고 대한적십자사와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단 한 번의 기회’ 때문에 힘겨워하는 이산가족 상봉자와 그 가족들을 만났다.
“살아있어줘서 고마워요”

#5 왕 할머니가 여동생들을 만나던 2010년 10월, 북한에 막내 여동생을 남겨둔 노인이 한(恨)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2009년 9월 여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지 1년여 만이었다. 고(故) 송재봉 할아버지의 나이 82세 때였다.

“아버지는 1951년 1·4후퇴 때 북녘에 남기고 온 부모님과 여섯 남매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움에 가슴이 답답할 때면 홀로 임진각을 찾으셨어요,” 아들 송성호 씨(55)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평생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괴로워했다.

2009년 마침내 막냇동생과의 재회를 앞둔 아버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했다. 손목시계, 금반지에 화장품까지 동생에게 줄 선물을 한가득 준비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 송 씨가 금강산에서 열린 17차 상봉행사에 동행했다. 상봉 첫날, 수많은 북한 측 참석자 중에 유독 아버지와 닮은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아버지와 고모는 서로를 얼싸안았다. 두 사람은 눈물로 범벅이 됐다.

“오빠, 건강하게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아버지가 1·4후퇴 때 세상을 떠난 줄 알았다는 고모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아버지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 소식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부쩍 말이 없어졌다. 가족들과 대화하지도, 외출하지도 않았다. 고모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한참 바라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타고난 강골 체질이셨는데 상봉행사 뒤 눈에 띄게 수척해지셨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어요.” 송 씨는 깊은 회한에 잠긴 듯 먼 산을 바라봤다.
“엄마!”… 엉엉 울어버린 63세 아들

#6 송 할아버지가 막냇동생을 만난 2009년. 그해 2월 북한에 납북된 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88세 할머니가 눈을 감았다.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아들을 만난 지 2년이 채 안 된 겨울이었다.

고 이동덕 할머니의 아들 김홍균 씨(2007년 5월 15차 상봉 당시 63세)는 1968년 5월 속초항에서 대성호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납북됐다. 아들의 납북 소식에 실신했던 어머니는 그로부터 꼭 39년 만에 아들과 재회했다. 어릴 적 형과 뒹굴었던 동생 강균 씨(60)도 함께였다. “형님이 나이에 비해 많이 늙어보였습니다. 이가 다 빠지고…. 어머니와 차이가 없을 정도였어요.”

“내가 어머니를 마침내 만나려는 징조였는지 지난겨울에 많이 아팠어요.” 철강회사에서 일한다는 아들, 굳은살이 너무 많이 박여 돌덩어리처럼 변한 아들의 그 말에 어머니는 가슴이 찢어졌다.

상봉 둘째 날 개별상봉. 단체상봉 때 유독 어색해하던 홍균 씨가 어머니와 동생의 숙소 문을 열자마자 달려와 어머니를 힘껏 껴안았다.

“엄마!”

단체상봉 때 북한을 찬양하며 단답형으로 답하던 홍균 씨. 그 홍균 씨가 어머니를 부여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 “너희 수령 지시 잘 들으렴… 어쨌든 살아야 또 만나지” ▼
“상봉 장면, 40년전 꿈과 똑같더라”

#7 집으로 돌아온 뒤 이 할머니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곤 했다. 매일 나가던 경로당에도 잘 안 나갔다.

“내가 지금 너랑 있어야겠다. 제발 어서 오너라….” 전화기 너머로 힘없이 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 강균 씨는 자꾸 자신과 있어야겠다는 어머니 때문에 일하다가 집으로 불려 들어가기 일쑤였다.

상봉 뒤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찾아온 우울증. 그 어두운 그림자가 어머니를 덮쳤다.

상봉 얼마 뒤 강균 씨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머니가 이동덕 할머님 맞으세요?”

“예, 왜 그러시죠?”

“어머님이 경로당을 가시다가 정신이 흐려져 길을 도저히 못 찾겠다고 도움을 청하셨어요.”

강균 씨의 숨이 턱 막혔다.

상봉 뒤 어머니는 40년 전 꾸었다는 꿈을 자꾸만 얘기했다.

“솔밭이야. 홍균이가 한복을 입고 솔밭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거야. 억울한 표정으로. 종아리에 못이 박혀 있었어. 그래서 내가 쑥 빼줬지. 그랬더니 홍균이가 너무나 기뻐하더라. 같이 손잡고 행복했어. 그런데 얘야. 상봉 때 말이다. 홍균이랑 삼일포로 나들이를 가지 않았더냐. 거기 가는 길에 솔밭이 있었다. 내가 꿨던 꿈을 생시로 겪었어. 너무 똑같아. 희한해….”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도 그 얘기를 했다.

“이제 홍균이를 다시 만나기 어렵겠지? 통일이 돼야 하는데, 살아생전엔 다시 못 만나겠다. 홍균이가 타향에서 얼마나 괄시를 받을까 걱정이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형의 소식을 물었다.
“문학소년 형의 모습 간데없고…”

2007년 5월 북한 고성군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에서 1968년 5월 23일 주문진 선적 대성호로 월선 조업을 하다 납북된 아들 김홍균 씨(왼쪽)를 만난 어머니 이동덕 씨(오른쪽)와 동생 김강균 씨(가운데)가 오열하고 있다. 이 씨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9년 세상을 떴다. 동아일보DB
2007년 5월 북한 고성군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에서 1968년 5월 23일 주문진 선적 대성호로 월선 조업을 하다 납북된 아들 김홍균 씨(왼쪽)를 만난 어머니 이동덕 씨(오른쪽)와 동생 김강균 씨(가운데)가 오열하고 있다. 이 씨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9년 세상을 떴다. 동아일보DB
#8 “형님은 원래 뱃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도우려 배를 탄 지 한 달 만에 북으로 끌려갔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형님이, 형님이 없어진 겁니다….”

강균 씨는 3남 4녀의 맏이인 형이 참 든든했다. 큰형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시를 좋아하던 문학소년이었다. 펜대에 먹물 찍어 방바닥에 엎드려 시를 쓸 때면 형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밭에서 같이 일하고 개천에서 같이 수영하던 형. 인정 많은 큰형은 가족의 삶을 책임지려고 바다로 나갔다.

“그 순수한 형님의 모습은 간데없고 할아버지가 돼 만나니 감정이 북받쳤지요.” 당시 오열하던 강균 씨의 모습은 사진으로 찍혀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아픈 동생 손도 못잡아주고 작별”

#9 이 할머니와 강균 씨가 홍균 씨를 만난 2007년 5월의 상봉장. 다른 편에선 조상순 할머니(77)가 북한에 두고 왔던 언니와 여동생을 만나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1950년 헤어진 지 57년 만이었다. 조 할머니는 6·25전쟁 발발 직전 고향인 황해도 장단군에서 서울 이모집에 놀러왔다가 전쟁으로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언니 상희 씨(79)와 동생 상옥 씨(75) 얼굴에 파인 주름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부질없는 흔적이 조 할머니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상봉 둘째 날, 동생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먹은 게 잘못돼 쓰러졌다고 했다. 조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가스활명수’를 들고 구급차로 달려갔다. 구급차의 북한 의사가 조 할머니를 가로막았다.

“우리도 이런 거 많으니 줄 필요 없소!”

구급차에 누워 링거 주사를 맞는 창백한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 할머니는 속이 타들어갔다. 상봉 마지막 날, 동생은 떠나는 언니에게 멀리서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헤어진 동생의 소식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 할머니는 듣지 못했다. 구급차에 맥없이 쓰러져 있던 동생이 떠오를 때마다 조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진다.

“아픈 동생의 손도 제대로 못 만져 봤어. 만나고 온 뒤 마음이 더 아파. 약조차 못 먹이고 온 게 마음에 자꾸 걸려. 그거라도 먹이고 왔으면….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나았을까….”
“고향도 가고 성묘도 하게 해줘야”

#10 윤채금 할머니(81)는 이들이 상봉장에서 오열하는 모습을 TV로 보며 함께 울었다. 윤 할머니는 2001년 2월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막냇동생을 만났다.

“상봉 뒤로 상봉행사 때마다 잊지 않고 TV로 챙겨 봤지. 어머니 살아 있고, 아버지 살아 있어 서로 붙들고 눈물 흘리는 거 볼 때마다 나도 어머니 살아생전에 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어요. 그 모습들 보며 같이 눈물 뚝뚝 흘리면 아이(자녀)들이 채널을 돌렸지.”

윤 할머니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함경남도 이원군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피란했다.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은 고향에 남았다. 아버지는 큰딸에게 석 달만 피해 있다가 다시 오자고 했다. 석 달이 50년으로 둔갑했다.

당시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아기. 윤 할머니가 상봉행사에서 만난 막냇동생이다.

“아이고, 네가 우리 아버지 아들이 맞느냐?”

“누님이, 우리 어머니 딸이 맞나요?”

윤 할머니의 아버지가 세상 떠나기 전까지 남쪽 생활 내내 손이 새카매지도록 화랑 담배를 피우며 그리워하던 아들, 내 막냇동생.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헤어질 때 네 살이던 남동생도 죽었다. 상봉장에 나오지 못해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은 홀로 막내를 키우다 시집도 늦게 갔다고 했다. 남쪽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가족들은 집을 빼앗긴 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윤 할머니는 기가 막혔다.

“내가 나오지 않고 빨갱이에게 시집갔으면 어머니 동생 다 살리지 않았을까. 죄 지은 마음에 괴로웠어요. 허탈한 마음뿐이었지.”

막내의 태도도 윤 할머니를 실망시켰다.

“옷을 가져갔더니 수령님이 먹여주고 입혀주니 필요 없다는 거예요. 농사짓는다는 손은 시커멓게 터져 있는데.”

섭섭했다. 하지만 윤 할머니는 막내가 그렇게 살아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내야. 너는 네 나라 법이 있고 나는 내 나라 법이 있다. 그래, 지금처럼 수령님 지시 따라 충실히 살아라. 누나 봤다고 마음 흐트러지지 말고. 법 어기면 안 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그렇게 살아야 통일 돼 우리 꼭 다시 만날 수 있지 않겠니….”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다. 동생이 밥 굶을 것 생각하면 떨어진 밥알도 다시 주워 먹었다. 그토록 보고 싶던 어머니. 막내는 어머니 사진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 가져오지 못했다. 죽어서 어머니를 볼 수 있다면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상봉 때 막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마루 벽 액자에 끼워놓고 보기만 하면 울자 자녀들이 사진을 앨범에 넣었다.

“속내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한 번짜리 상봉, 이제 안 돼요. 고향 가게 해줘야 하고 어머니 산소 찾게 해줘야 해요. 그래야 내 눈 감을 수 있지 않겠어요.”
“한번 보고 끝… 잔인하지 않소”

#11 윤 할머니가 막냇동생을 만난 3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4차 행사는 원래 3차 행사와 같은 해인 2001년 9월에 열리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 일방적으로 무산시켰다. 그 일이 한의수 할아버지(83)에게 천추의 한이 됐다.

한 할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 6·25전쟁 때 그는 아버지, 첫째 남동생과 남쪽으로 왔다. 누나와 여동생, 막내 남동생은 고향에 남았다. 옹진군이 북한 영토가 되면서 이들은 영영 만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2001년 9월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한 할아버지는 51년 만에 만나는 형제들 수만큼 순금반지와 시계를 준비했다. 하지만 상봉행사는 무산됐다. 다음 해인 2002년 4월 4차 상봉행사가 열렸지만 한 할아버지는 정성껏 마련한 반지와 시계 모두를 형제들의 손에 끼워줄 수 없었다. 그사이 누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 씨는 다섯 살 어린 여동생만 만날 수 있었다.

“동생을 만난 지 12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검은 손톱을 잊을 수가 없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거야….” 동생은 상봉 때 호텔에서 나온 음식을 “속이 좋지 않다”며 거의 먹지 못했다. 한 할아버지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리다.

“다시 한 번이라도 동생 소식을 듣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어떻게든 편지를 보내보려 했지만 북한 당국이 알고 동생을 해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었지. 상봉 행사 뒤 영영 못 만나게 하는 것,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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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금 할머니는 헌 옷을 모은다. 막냇동생을 만난 뒤로 13년째다. 그렇게 모은, 남이 버린 헌옷이 집 다락을 가득 채웠다.

여전히 헌 옷은 어김없이 다락에 올린다. 언젠가 막내가 활짝 웃으며 옷을 받아들 날을 기다리며.

납북된 형 김홍균 씨를 북한에 둔 강균 씨는 편지 한 통을 7년째 간직하고 있다. 상봉 전날 밤, 강균 씨는 호텔에서 형과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다섯 장의 편지를 밤새 써나갔다. 상봉 둘째 날 숙소에서 가족끼리 만날 때 슬며시 편지를 건넸지만 형은 주변 눈치를 보다 결국 받아 들지 못했다.

그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고이 접는다. 언젠가 큰형의 굳은살 박인 손에 편지 쥐여줄 날을 기다리며.

윤완준 zeitung@donga.com·백연상·권오혁 기자
#이산가족#이산상봉#북한#남북회담#상봉행사#대한적십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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