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민 교수 “김시습 초상화의 원래 모습은 승려… 정치적 의도로 유학자 모습으로 바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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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민 선문대 교수 논문서 주장

‘매월당시사유록’에 수록된 김시습 초상 판화 모각본과 ‘자사진찬’. 공수자세에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고 있어 얼핏 보면 조선시대 유학자의 초상화 같다. 하지만 이 그림의 원본은 승려의 모습이었다. 양승민 교수 제공
‘매월당시사유록’에 수록된 김시습 초상 판화 모각본과 ‘자사진찬’. 공수자세에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고 있어 얼핏 보면 조선시대 유학자의 초상화 같다. 하지만 이 그림의 원본은 승려의 모습이었다. 양승민 교수 제공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단종 폐위 이후 승려가 되어 방랑하면서 시문을 짓고 ‘금오신화’를 남긴 당대의 천재였다. 말년에 충남 부여군 무량사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김시습 초상화들은 모두 승려라기보다는 유학자의 모습에 가깝다. 가장 유명한 무량사 소유의 영정(보물 1497호)은 절에 남아 있는 것이지만 김시습이 유학자의 평상복을 입고 사대부 영정의 특징인 공수(두 손을 맞잡는) 자세를 하고 있으며, 검은 갓과 귀 사이의 머리카락은 위로 쓸어 올려 있다. 또 기행시집 ‘매월당시사유록’에 실린 김시습 초상 판화 모각(模刻·조각을 본떠 새김)본, 그리고 송시열 가문의 후손이 최근 공개한 17세기 문인 김수증의 김시습 초상화 이모(移模·그림을 본떠 그림)본이 모두 유학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김시습 초상화들의 원본은 원래 승려의 모습이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유학자들의 정치적 의도 때문에 김시습 초상화들이 점차 승려에서 유학자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라고 양승민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연구교수가 주장했다.

양 교수는 최근 한 연구모임에서 논문 ‘매월당 김시습 초상의 개모(改模) 과정과 그 의미’를 발표했다. 그는 각종 고문헌 기록과 현전하는 김시습 초상화들을 추적한 결과 “16세기 후반부터 유학자들이 김시습을 절의의 화신으로 만들어, 충의를 숭상하는 유학자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김시습의 초상화마저 승려에서 유학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매월당시사유록’에 전하는 김시습의 ‘자사진찬(自寫眞贊)’을 통해 김시습이 스스로 그린(自寫) 것은 진(眞·대개 승려의 초상화를 일컬음), 즉 승려의 모습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승려 초상의 핵심인 염주를 들고 있는 김시습 초상화는 발견된 적이 없다.

양 교수는 또 17세기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에서 윤증이 송시열 등에게 보낸 편지에 주목했다. “김시습이 무량사에 남긴 화상이 있는데… 그 화상이 흐릿해져 이름난 화사(畵師) 이징을 불러 그 초상을 다시 모사하고 새롭게 꾸몄다. … 초상의 모습이 중의 형상이니….” 파평 윤씨 집안에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궁중화원 이징을 시켜 김시습 초상화를 다시 그리게 한 것이다.

무량사의 김시습 자화상 원본과 이징의 이모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양 교수는 “현전하는 보물 무량사본은 김시습 자화상이 원형 그대로 이모된 것이 아니다. 유학자 모습으로 바뀐 초상화들이 승려 모습의 원본을 밀어낸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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