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연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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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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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생 세 원로 작가들의 개인전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에 나온 ‘익명의 땅 91630’(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에 나온 ‘익명의 땅 91630’(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내가 태어났을 때는 나라가 없었다. 성도 이름도 일본어로 바뀌었다. 내 이름을 되찾았을 때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라는 두 동강이 났다. 이념의 거대한 장벽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때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독자적 추상회화를 구축한 원로작가 윤명로 씨(77)의 ‘작가 노트’는 개인의 증언이자 동세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가혹한 상황에서 예술가의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한 만큼 1930년대생 작가들의 창작 열정은 여느 청년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뜨겁다. 그 멈추지 않는 여정을 확인하는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과 김구림 씨(77)의 ‘끝없는 여정’전, 뉴욕에 거주하는 조각가 존 배 씨(76)의 ‘기억의 은신처’전이다. 다른 장르, 다른 경향의 작업이지만 동서의 사상을 아우른 사유의 깊이, 의도적 표현과 우연성을 절묘하게 아우른 묵직한 내공이 공통분모다. ‘개념’을 담으면서도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히 작가 손으로 완성된 작품이 뿜어내는 기운이 남다르다. 칠순 작가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 전시란 점도 매력적이다.

‘도전의 궤적’ 윤명로 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윤명로: 정신의 흔적’전은 그의 화업 반세기를 60여 점으로 되짚으며 한국 현대추상회화의 대표 작가라는 그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보여준다. 재료와 표현에서 창조적 실험에 도전한 그의 궤적이 탄생과 성장, 격정과 분출, 성숙과 관조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담은 공간 안에 펼쳐진다.

‘국전’의 권위에 도전해 덕수궁 담벼락에서 전시를 가진 ‘60년 미술가협회’의 창립 멤버인 그는 10년 주기로 새로운 경향을 선보였다. 서구 추상의 전통과 문인화 정신을 응집한 작업에 대해 작가는 “자연을 가장 큰 모티브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우연성을 주목한 1970년대의 ‘균열’, 몸으로 그리는 재미를 되살린 1980년대의 ‘얼레짓’, 자연의 원시적 힘을 격렬하게 드러낸 1990년대의 ‘익명의 땅’, 2000년대의 관조적 추상 ‘겸재예찬’ 연작까지 시대별 대표작이 드넓은 전시장을 단숨에 제압한다. 물감 대신에 쇳가루를 사용한 ‘겸재예찬’의 경우 “우리 것을 세계화하려면 지역성이 보편성을 띠어야 한다”는 김환기의 말을 떠올리며 도전한 작업으로 중앙홀을 원숙한 추상회화의 깊은 감성으로 채워냈다. 6월 23일까지. 3000원. 02-2188-6000

‘실험의 여정’ 김구림 전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 씨의 1970년대 작업 중‘인물이 있는 실내’(1977년·왼쪽)와 철선을 용접해 여백이 있는 조각을 만드는 존 배 씨의 ‘간단한 논리’(2012년).통인옥션갤러리·갤러리 현대 제공
한국 전위예술의 선구자 김구림 씨의 1970년대 작업 중‘인물이 있는 실내’(1977년·왼쪽)와 철선을 용접해 여백이 있는 조각을 만드는 존 배 씨의 ‘간단한 논리’(2012년).통인옥션갤러리·갤러리 현대 제공
‘이 시대의 영원한 아방가르드’로 알려진 김구림 씨의 ‘끝없는 여정’전은 24일까지 서울 관훈동 통인옥션갤러리와 통인화랑에서 열린다. 지하에선 그를 미술계에 각인시켜 준 1970년대의 ‘정물 시리즈’를, 5층에선 광고 이미지 등을 프린트한 뒤 거침없는 붓질로 지워내 현대의 난맥상을 빗댄 2000년대 ‘음양 시리즈’를 볼 수 있다.

전시는 195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최근 영국 테이트모던의 그룹전까지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파격적 작업을 선보인 그가 견지해온 예술세계의 근원을 엿보게 한다. 그것은 ‘바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물들의 유전을 각인시키는 것’(평론가 김복영)이다.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물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면서 ‘보이는 것 같으면서 보이지 않는, 없으면서 있는 것 같은 어렴풋한 것들’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다. 24일까지. 02-733-4867

‘끈기의 미학’ 존 배 전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신관에선 직선적 형태를 바탕으로 만든 다양한 육면체, 곡선과 반원형을 결합한 독특한 구조물이 어우러져 잔잔한 교향악을 들려준다. 존 배 씨가 7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이다. 열두 살 때 도미한 그는 뉴욕 프랫대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한 뒤 27세의 나이에 모교에 신설된 조각과의 최연소 학과장을 맡았다.

그는 ‘정밀함과 무작위적 혼돈’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기하학적으로 재해석해 왔다. 음악적 선율과 수학적 완벽함이 공존하는 조각이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료 선택부터 용접, 마무리까지 홀로 떠맡은 그는 “결과물보다 직접 작업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적 결정과 선택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견고한 철선으로 만든 작품은 차가운 쇠가 아니라 재즈의 선율과 부드러운 리듬이 출렁이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다가온다. 25일까지. 02-2287-3500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윤명로: 정신의 흔적#김구림#끝없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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