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책의 향기]기다림 끝에 무르익은 글을 읽어보렴

  • 입력 2007년 8월 1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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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강우방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장

To: 일본에서 미술사 공부 중인 딸 소연

이웃나라에서 날씨는 덥고 갓난애 돌보느라 얼마나 고생스러우냐. 그런 와중에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니 자랑스럽기도 하다. 대중과 만나는 것은 어느 정도 학문적 업적을 쌓은 뒤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미술사학이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 속에 담긴 조형언어와 진리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너같이 미술사학을 연구하는 젊은 세대들은 무엇인가 빨리 업적을 과시하고 싶어서 조급하게 저서를 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성실하게 연구하다 보면 이제 책이 나올 때가 되었구나 하는 시기가 있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란 사람이 가진 덕목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이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탄생한 책을 들라면 언뜻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솔 출판사·1996)과 만해의 ‘님의 침묵’을 들 수 있을 게다.

오주석의 글은 쉬우면서도 기품이 있고 결코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오십의 나이 그의 첫 책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책을 열 권 내겠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타계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림의 본질을 탐구한 우리나라 첫 저서이기도 하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림 자체를 자세히 살피면 그 세계 속에는 무궁한 흥미와 진리가 함축돼 있어서 그 즐거움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 책을 내면서 그림을 보는 것에 자신을 얻은 것 같다.

그 책은 다만 열한 점의 작품만을 심도 있게 다룬다. 그 가운데 윤두서의 ‘진단타려도(陳단7驢圖)’라는 작품이 있다. 흰 당나귀를 타고 가던 사람이 떨어지는 광경인데, 그 그림에서 그는 떨어지는 사람의 얼굴이 당황하는 게 아니라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을 갖기 시작했지. 당나라에서 송나라 초까지 살았던 진단이라는 인물은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한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다 송 태조 조광윤이 임금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박장대소하며 너무 좋아하다 그만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 와중에도 ‘천하는 이제 안정되리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 그림은 바로 그 광경을 포착하여 그린 것이었다. 이 그림의 비밀을 오주석이 처음 밝혀낸 쾌거라 할 수 있다.

미술사를 공부하려면 철학이나 종교, 문학 등 교양서적을 읽을 필요가 있지. 그 세 가지를 갖춘 시집이 있다.

최근 수소문 끝에 만해 한용운 전집 다섯 권을 사서 ‘님의 침묵’을 다시 읽고 있다. 모든 국민이 모든 세대에 걸쳐 근기(根機)에 따라 읽히는 쉬운 시라고 여기고 있으나 실은 난해한 시다. 독립투사이며 불교개혁론자인 ‘터프 가이’가 어떻게 그 당시 그처럼 아름다운 한글로 연작시를 썼는지 상상할 수 없다. 감탄스러울 뿐.

이 시들 역시 오랜 기다림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만해 손끝을 통해 쓰여진 느낌이 든다. 사십대 중반 이역만리 미국에서 처음 접한 그 시를 소리 내어 읽다가 나도 모르게 노래가 되어 버리며 나의 마음이 정화되어갔던 경험이 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더위를 이겨내기 바란다.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면 하늘은 반드시 응답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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