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한인들’ 국제양심 일깨웠다

  • 입력 2007년 8월 2일 02시 58분


코멘트
웃음 가득한 수요집회미국 하원이 지난달 30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가운데 1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해 할머니들이 결의안 채택을 축하하는 수요집회를 열었다. 벌써 772번째 집회다. 김재명 기자
웃음 가득한 수요집회
미국 하원이 지난달 30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가운데 1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해 할머니들이 결의안 채택을 축하하는 수요집회를 열었다. 벌써 772번째 집회다. 김재명 기자
‘풀뿌리 로비’미국 의회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풀뿌리 로비’를 펼친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회원들이 5월 중순 워싱턴의 의사당을 찾았다. 노인이 여럿 포함된 이들은 의원과 보좌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일본의 방해를 이겨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풀뿌리 로비’
미국 의회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풀뿌리 로비’를 펼친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회원들이 5월 중순 워싱턴의 의사당을 찾았다. 노인이 여럿 포함된 이들은 의원과 보좌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일본의 방해를 이겨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디스 이즈…어바웃 컴퍼트 위민 이슈(This is…about comfort women issue).”

올 3월부터 지난달까지 미국 워싱턴 의사당 내 의원회관에서 자주 목격된 풍경이다. ‘인권 옹호’라는 글자가 적힌 흰 티셔츠를 입은 60, 70대의 아시아계 노인 서너 명이 의원 사무실의 문을 연다.

“무슨 일로 오셨느냐”는 질문에 노인들은 서툰 영어로 “군위안부 문제”라고 대답하거나 말없이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 전한다. 그리고는 인권문제 담당 보좌관의 명함을 달라고 한 뒤 사무실을 나온다.

노인들이 떠나면 보좌관과 비서들은 낯선 방문객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자료를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이들이 하원에 제출된 결의안 121호(일본군위안부 결의안) 지지 운동을 펼치는 한국계 유권자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틀 정도가 지나면 의원이나 보좌관과의 면담을 신청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이번엔 유창한 영어로 “한국계 유권자 단체”라는 소개와 함께 “며칠 전 우리 단체 회원들이 귀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설명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한다. 노인들이 직접 찾아온 정성을 생각해 의원이나 보좌관은 대부분 약속을 잡아 준다.

7월 30일 미 하원을 통과한 위안부 결의안에는 무려 168명의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서명했다. 개미들이 빵 조각을 물고 오듯 한인 유권자들이 발품을 팔아서 한 명 한 명 설득한 결과다.

대형 로비회사 2곳과 다수의 거물 로비스트를 동원한 일본의 방해를 뚫고 결의안이 통과되기까지는 이 같은 재미 한인들의 풀뿌리 운동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게 이 문제를 지켜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시작부터 함께=한인 활동가들이 결의안을 위해 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인 에번스 의원이 결의안을 내기 위해 공동 발의할 의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은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소장 김동석) 회원들은 한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의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의안은 하원 지도부의 반대로 폐기됐고 평생 소수민족과 약자를 위해 활동해 온 ‘한국인의 친구’ 에번스 의원은 파킨슨병으로 은퇴했다.

그 직후 일본계 3세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 비슷한 결의안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혼다 의원은 시간을 좀 더 두고 추진하겠다는 구상이었다. 한인 활동가들은 혼다 의원을 찾아가 “모멘텀(추진력)을 이어가기 위해 2007년 초에 상정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

▽정성 어린 성금의 물결=혼다 의원은 ‘결의안이 성공하기 위해선 피해 할머니들이 증언하는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구상했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청문회를 열려면 2만4000달러(약 2200만 원)가량이 들 것으로 추산됐다.

이 소식을 들은 독지가들이 소문 없이 지갑을 털어줬다. 그 덕분에 한국인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 외에도 호주에 살고 있는 네덜란드인 피해자 얀 뤼프 오헤르너 할머니를 수소문해서 워싱턴 의사당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그 뒤에도 워싱턴포스트 전면광고 게재 등을 위한 성금 모금이 계속됐다. 김동석 소장의 회고다.

“4월 초 일본계 거물급 정치인인 대니얼 이노우에 상원의원이 결의안 저지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에 다들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뉴욕의 한 이발소에서 손님 머리 감겨주는 일을 하신다는 60대 중반의 노인이 찾아오셨습니다.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먼 거리를 걸어오셨더군요. 200달러가 든 봉투와 손님 300명에게서 받은 지지서명이 들어 있는 노트를 내밀고 조용히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뒷모습을 보며 다들 ‘다시 힘을 내자’고 다짐했죠.”

▽발로 뛴 의회 로비=뉴욕 교민들은 3월 22일부터 지난주까지 10차례나 버스를 전세 내 워싱턴으로 왔다. 대부분 노인인 자원봉사자들은 조를 짜서 의원회관을 돌며 지지를 호소했다.

에번스 전 의원과 오래 우정을 나눈 서옥자 워싱턴정신대대책협의회 회장은 ‘에번스 의원의 친구’임을 강조하며 의원들을 공략했다. “에번스 의원의 이름을 동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의원들이 보이스(음성) 메일에 답신을 해 주니까요.”

교회, 한인마트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서명운동엔 미 전역에서 8만 명이 동참했다. 라면 상자 가득 담긴 지역구민들의 서명록은 의원들에겐 적잖은 압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의회 지도부에 편지와 카드 보내기 운동을 펼친 결과 톰 랜토스 외교위원장 사무실에만도 2000장이 넘는 팩스 편지가 전송됐다.

▽급진적 중국계 단체들로 인한 어려움을 뚫고=일본 측 로비스트들이 집요하게 내세운 주요 논리는 “왜 미국 의회가 동북아 국가 간 갈등에 끼어드느냐.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이어 중국이 난징 대학살 문제를 들고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급진적 성향을 지닌 일부 재미 중국계 단체는 위안부 결의안 문제를 난징 대학살 문제로 확대하려 시도했다. 한국의 일부 시민단체도 “왜 중국 단체들과 연대하지 않느냐”며 한인 활동가들을 비난했다. 일본 언론은 배후에 중국계가 있다는 식의 음모론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위안부 결의안 문제를 한일 간 이슈가 아닌 인권문제로 접근하려는 한인 활동가들은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