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오바마처럼 말하기

  • 입력 2007년 5월 31일 19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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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아이들은 공부 잘하는 친구를 보고 ‘백인처럼 논다’고 야유합니다. 잘못된 일 아닌가요?” “랩을 들어 보면 욕설로 가득하며 품격이라곤 없습니다.” “사촌 푸키(Cousin Pookie·게으른 흑인을 일컫는 말)가 투표장에 나가면 정치가 바뀔 텐데요.”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말이 아니다. 미국 차기 대선후보 선두주자 중 한 사람으로 최초의 흑인 미 대통령을 노리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지난달 초 흑인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 냈다. 일부 흑인의 시각에서 보면 막말이나 다름없는 질타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를 향해 말(言)폭탄을 던졌을까. 계산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우선 ‘흑인’ 하면 삶의 의욕도 없이 세상을 향해 분노만 날리는 게으른 사람들을 떠올려 온 백인 부동층 유권자의 표심을 겨냥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사촌 푸키’의 투표를 독려하는 말에 이르면 차라리 속셈이 뻔해 보인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길 테니 흑인들이 똘똘 뭉쳐 자기를 찍어 달라는 거지 뭐….”

반면 그의 말에 묻어나는 ‘진정성’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흑인들은 갖가지 제약에 부닥쳐 왔다. 그러나 제도적 장애는 이미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적 편견에 좌절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가 그 뒤에 숨어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는 꼴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흑인 사회 스스로의 몫이 아닌가….

지난달 29일 광주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선주자 정책토론회 기사를 오버랩해 본다. 건설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진 기업가 출신의 후보는 대운하 건설의 비전을 강조했다. 여성 후보는 ‘대처리즘’을 강조했다. 각각 자신의 출신과 기반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을 미국의 등식에 단순 대입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에게 미 흑인사회와 같은 사회적 분리계층은 없다. 자당(自黨)의 후보로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진 것을 모두 내보이기란 시기상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보가 확정되고 본격적인 ‘판’이 시작되면 보수쪽 후보가 보수의 본류를 향해 날리는 쓴소리를 듣고 싶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쓰디쓰게 반성하는 소리가 나왔으면 한다. 무엇보다 현 정부가 언론대책, 사립학교법, 부동산정책 같은 온갖 정책의 입안과 집행 과정에서 각인시켜 온 ‘보수=기득권층=단물을 주고받는 폐쇄된 이익집단’이라는 이미지 조작을 앞장서 해체하는 말이 듣고 싶다.

후보군조차 뚜렷하지 않은 범여권에 비슷한 주문을 하는 것은 아직 이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2004년 탄핵 사태 후 총선에서 쏟아진 국민의 성원이 차갑게 식은 데 대한 맹렬한 자성의 소리를 듣고 싶다. ‘이 정도면 잘해 왔는데 점수가 짠 게 아니냐’는 식의 수사학으로 국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자기 진영에 말 폭탄을 던진 오바마 후보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달 30일 미 여론조사기관 조그비는 “지금 대선을 실시하면 오바마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라이벌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보다 높은 지지도를 보였을 뿐 아니라 공화당 상대 주자들과의 가상대결에서도 전승(全勝)을 거뒀다. 그의 쓴소리는 전략으로서도 효과적이었던 듯하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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