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앉은 자체가 큰 의미”… 美-이란 27년만의 대화

  • 입력 2007년 5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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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10시 반(현지 시간)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 ‘그린존(특별 치안유지구역)’ 내 이라크 총리 집무실.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손님 가운데 섰다.

라이언 크로커 이라크 주재 미국대사와 하산 카제미 이란대사가 악수를 했다. 말리키 총리는 두 사람을 회의실로 안내한 뒤 “오늘 미국과 이란 대사의 역사적 만남이 이라크 민주화와 질서 회복에 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고는 처녀 총각의 만남을 주선한 중매쟁이처럼 서둘러 회의실을 떠났다.

1980년 이란 대학생들의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억류 사건으로 국교가 단절된 지 27년 만에 미국과 이란이 공식 회담을 열었다.

주제는 이라크 질서 회복에 국한됐고, 회담 직전까지 양국의 고위 관료들이 가시 돋친 발언을 주고받는 분위기에서 열렸지만 성사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우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태도 변화다. 지난해 12월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주도한 ‘이라크 스터디그룹’이 “이란, 시리아와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건의했을 때 부시 대통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으나 미 행정부는 이달 초 이란과의 대화에 합의했다.

‘미 역사상 가장 낮은 점수를 받는 대통령’으로 남지 않기 위해 이라크 문제 해결에 ‘다걸기(올인)’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으로선 이라크 내 저항세력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영향력이 큰 이란의 협조가 필수임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양측은 ‘지나친 기대와 의미부여’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미국은 이날 “저항세력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공식 요청했다. 이란 역시 “말리키 이라크 총리 정부를 지지한다”면서도 “내정 안정을 위해선 먼저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미국이 이란-이라크 접경지역에서 억류한 5명의 이란인 석방 문제도 거론됐다. 이라크 동부에 거점을 둔 무자헤딘 할크 등 무장저항 세력을 쫓아내 주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날 회담은 상대방의 양보만을 요구하며 평행선을 긋다 주목할 만한 성과 없이 끝났다.

이같이 팽팽한 신경전 속에 겉돈 듯하지만 이번 회담이 20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지구촌 최대 적대관계 중 하나인 미-이란 관계 개선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가시지 않고 있다. 크로커 미 대사는 회담이 끝난 뒤 “이란이 추가 회담을 제안했으며 미국은 이를 수용할지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카제미 이란대사는 향후 회담 일정을 묻는 AP통신 기자의 질문에 “다음 회담은 한 달 안에 이라크에서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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