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두번째 추기경 탄생]과학자 꿈꾸던 청년, 사제의 길로

  • 입력 2006년 2월 23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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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를 꿈꾸던 소년에서 인간 영혼을 구원하는 사제의 길로.’

1931년 서울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정진석 신임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계 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법의 권위자다. ‘교회법 해설’ 등 23권의 저서와 13권의 번역서를 출간할 정도로 학구파 사제로 명성이 높다. 아울러 너그러운 성품과 검소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평소 사제와 신자들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받아 왔다.

중앙고를 졸업한 정 추기경은 1950년 서울대 공대(화학공학과)에 입학해 과학자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6·25전쟁 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끌려가면서 겪었던 ‘삶과 죽음이 갈리는 체험’이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남한강을 건널 때 바로 뒤에서 얼음이 깨져 뒤따라오던 동료들이 몰살한 사건, 앞에 가던 동료가 지뢰를 밟고 숨져 간 아픔….

1960년 성신대(지금의 가톨릭대)에 들어간 그는 1961년 사제품을 받고 서울대교구 중림동 본당 보좌신부로 사제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이탈리아 로마의 우르바노대 대학원에 진학해 교회법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주교품을 받았다.

정 추기경도 광복 직후였던 중학교 2학년 때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신앙적 방황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명동성당에서 하느님과 영혼의 존재 증명을 설파하는 윤형중 신부의 사순절 특강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정 추기경은 이때의 기억을 살려 과학으로 신앙을 논증하는 ‘우주를 알면 하느님이 보인다’(2003년)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정 추기경은 1970년 청주교구장을 맡은 뒤에도 한여름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 지냈으며, 바지 1벌을 18년 동안 입을 정도로 청빈하게 생활했다. 식사 초대를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소외감을 느낄까 봐 일절 초대를 받지 않고 항상 교구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성품이기도 하다. 그는 신자들이 “생활비에 보태 쓰라”며 한푼 두푼 내놓은 돈을 40년 동안 모아 1999년 5억 원을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에 장학기금으로 쾌척하기도 했다.

정 추기경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 이후 민감한 현실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 표명을 삼갔지만 황우석 서울대 교수의 인간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정부의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 비판하는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관된 목소리를 내왔다.

‘평양교구장 서리’도 맡고 있는 정 추기경은 매일 밤 북한에서 어렵게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신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등 평소 북한 교회 재건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이를 위해 황인국 몬시뇰을 평양교구장대리로 임명해 2007년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행사 준비 등 평양교구 재건에 관한 구체적인 준비 활동을 하고 있다.

정 추기경의 고교 동창인 최창락(崔昌洛) 전 동력자원부 장관은 “정 추기경은 재학 시절 반에서 1등을 했으며 빈틈없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며 “청주교구장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무척 검소하게 치러진 장례식에서 모친을 위한 추모사가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참 효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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