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8년 통혁당 간첩단 사건

  • 입력 2005년 8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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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정권 시절 국내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 ‘국면전환용’으로 터져 나온 게 간첩단 사건 발표였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발표 주역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중정).

‘남산 지하실’로 상징됐던 중정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남북 분단과 6·25전쟁으로 이 땅에서 설 곳이 마땅치 않았던 좌파는 중정의 표적이었다. 중정은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진보적 지식인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이들은 ‘남산’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이어 1968년 8월 24일 중정이 발표한 통일혁명당(통혁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랬다.

중정은 당시 발표문을 통해 “주모급인 김종태(金鍾泰)는 4차례에 걸쳐 북괴를 왕래하면서 괴수 김일성(金日成)과 면담하고 북괴대남사업총국장인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지령과 미화 7만 달러, 한화 2350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아 통일혁명당을 결성해 혁신 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해 반정부 반미 데모를 전개하는 등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김종태도 공소사실을 시인했고 중정은 통혁당이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남한 간첩조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월간지 ‘청맥’과 ‘학사주점’을 중심으로 통혁당 핵심 인사들과 어울렸던 진보적 지식인들은 중정에 끌려온 뒤 김종태가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진술하는 등 혐의를 부인했다.

검거된 158명 중 73명(23명 불구속)이 검찰에 송치된 이 사건은 규모와 성격에 있어 6·25전쟁 후 최대 조직 사건이었다. 재판 결과 김종태를 비롯한 주모자 5명이 사형선고를 받는 등 검찰에서 기소한 30명 전원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들 중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한 사람이 복역 20년 20일 만에 198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그가 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申榮福) 성공회대 교수.

그는 이 책의 ‘청구회 추억’이란 글에서 통혁당 사건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겪은 최대의 곤욕은 수사 과정과 판결에 일관되고 있는 억지와 견강부회였다. 이러한 사례를 나는 법리해석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 그 자체의 가공할 일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특정한 개인의 불행과 곤욕에 그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성이 복재(伏在)하고 있는 것이다.”

김동철 정치전문기자 eastph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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