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16년 추사 김정희, 진흥왕 순수비 발견

  • 입력 2005년 7월 21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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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약관인 20세에 이미 백가(百家)의 저작을 통달했다.

13경(經)을 줄줄 외웠고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다. 독특한 서법인 추사체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시문과 그림에도 능했다. 금석학(金石學)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뤘다. 금석학이란 철기, 동기, 석비, 인장 등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는 역사학의 한 분야.

때는 약 200년 전인 순조 16년(1816년) 7월 21일. 30세의 추사는 북한산 비봉에 있다는 수수께끼 비석을 조사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가파른 암벽을 타고 있었다.

당시 비봉에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전설의 비석이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했다. 1750년께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에는 “무학대사가 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백운대로부터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비봉에 이르렀더니 ‘무학은 이곳을 잘못 찾아왔다(무학오심도차ㆍ武學誤尋倒此)’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있어 발길을 돌렸다”고 돼 있다.

그러나 비석의 이끼를 짚어 나가던 추사는 예기치 못한 대발견에 깜짝 놀라고 만다. 비석은 다름 아닌 1200년 전(6세기 중엽으로 추정)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였던 것.

비석의 높이는 154cm, 너비 71cm, 두께 16cm. 비문은 행마다 30자 이상이 새겨진 12행이었으나 윗부분이 심하게 마모돼 있었다. 12번째 행은 아예 판독이 불가능했고 그나마 자획이 분명하지 않은 게 훨씬 많았다.

이에 비문을 탁본해 내려온 추사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네 글자에 주목했다. 이는 바로 삼국사기에 나온 “진흥왕 29년(568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다”라는 대목과 일치하는 것.

추사는 1년여에 걸친 수차례의 탁본 끝에 68개의 글자를 확인해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은 추사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그는 비석 측면에 “이 비는 병자년 7월에 김정희가 와서 읽었다”고 새겨 넣었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과 삼국시대 역사 고증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순수비는 현재 160자 이상이 판독된 상태. 6·25전쟁 때 무수한 총탄 세례를 받았으며, 1962년 국보 제3호로 지정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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