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17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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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말을 마친 장량은 갈라 쥐고 있던 마지막 젓가락을 소리 나게 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잠시 입을 다물어 뜸을 들인 뒤에 자르듯 말했다.

“그 계책을 올린 손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대왕께서 참으로 그 계책을 쓰신다면 천하를 얻는 일은 영영 글러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장량의 말을 듣자 한왕도 비로소 훤히 깨달아지는 일이 있는 듯했다. 마침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음식을 뱉어내며 성난 소리로 외쳤다.

“그 더벅머리 유생(儒生) 놈이 하마터면 큰일을 망쳐놓을 뻔했구나!”

그리고는 일껏 만들어 놓은 육국의 왕인(王印)을 모두 녹여버리게 했다. 그런 한왕의 명이 얼마나 엄중했던지 그걸 전해들은 역이기는 무안하여 며칠이나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자치통감’은 그 일을 기록한 끝에 순열(荀悅)의 논의를 실었는데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일찍이 장이와 진여가 진섭(陳涉=진승)을 찾아가 육국을 되일으켜 한편으로 삼으라(復六國自爲樹黨)고 한 것과 역생((력,역)生)이 한왕을 찾아가 달랜 것은, 그 말한 것은 같지만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다르다(說者同而得失異者). 진섭이 일어날 때는 천하가 모두 진나라가 망하기를 바랐으나, 초나라와 한나라가 나뉘어 형세가 정해지지 않은 그때에는 천하가 반드시 항씨(項氏) 망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진섭에게는 육국을 되세우는 것이 말하자면 자기편을 늘리고 진나라의 적을 더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거기다가 진섭은 아직 천하의 땅을 오로지하지 못했으니 제 것이 아닌 것을 남에게 주어(取其非有與於人) 속빈 은혜로 알찬 복을 얻어낸(行虛惠而獲實福) 셈이었다. 그러나 한왕에게 육국을 되세우게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것을 잘라내 적에게 보태주는(割己之有而以資敵) 꼴이요, 헛된 이름을 내세워 실제의 화를 얻는 (設虛名而受實禍)길이었다….’

그 사이에도 형양 성밖은 점점 더 급박하게 돌아갔다. 패왕 항우는 겉보기에는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여기저기에서 마구잡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창으로 보낸 군사들이나 용도(甬道)를 끊는 군사들 모두 패왕의 본진에서 멀리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언제든 돌아와 힘을 집중할 수 있는 거리에서 싸우다가 부름이 있으면 한달음에 달려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쩌면 오창이나 용도 그 자체가 형양의 일부나 다름없이 이어져 있어, 패왕은 처음부터 한왕 유방이 있는 형양으로 대군을 집중해 왔다고 볼 수도 있었다.

형양 성안에 틀어박혀 그런 바깥의 정세를 살피고 있는 한왕의 근심은 나날이 커졌다. 한신을 불러들일 수도 없고, 달리 크게 의지할 만한 원병을 기대할 수도 없어 그런지 다가오는 패왕의 대군이 훨씬 크고 강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근심을 억누르고 있는데 갑자기 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주발 장군이 용도(甬道)를 버리고 형양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종리매와 용저가 번갈아 용도를 끊고 앞뒤에서 들이치는 바람에 군사를 태반이나 잃고 쫓겨 왔다고 합니다. 용도가 모두 허물어졌으니, 이제 오창에서 오는 양도(糧道)는 온전히 끊어져버린 셈입니다.”

한왕이 그 말에 놀라고 있는데 피 칠갑을 한 주발이 비척거리며 들어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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