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나경석…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

  • 입력 2004년 9월 7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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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균 교수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일본의 문화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아버지의 책꽂이에는 문학, 철학, 종교, 정치, 고고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이 꽂혀있었다”고 회고했다. 원대연기자
나영균 교수는 “공학을 전공했지만 일본의 문화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했던 아버지의 책꽂이에는 문학, 철학, 종교, 정치, 고고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의 책이 꽂혀있었다”고 회고했다. 원대연기자
“아버지는 결국 좌절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고 고모도 시대를 너무 앞섰기에 좌초한 여권 운동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일제통치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가한 고뇌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최근 저서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황소자리)을 펴낸 나영균 이화여대 명예교수(75·영어영문학)는 7일 책을 펴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감시 심해 인촌 권유로 연해주로

나 교수의 아버지 나경석(1890∼1959)은 일본 유학을 한 지식인이었지만 일제의 압제를 피해 굴곡 많은 삶을 살아야 했다. 또한 나 교수의 고모 나혜석(1896∼1949)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근대적 여성의 삶을 추구했지만 혼외정사가 밝혀지면서 사회적으로 매장 당해야 했다.

특히 나경석의 삶은 ‘친일 부역’과 ‘좌익 부역’을 놓고 과거사 진상 규명 논의가 무성한 최근의 한국적 현실을 반추하기에 충분하다. 나경석은 191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고등공업학교를 다니면서 당시 유학 중이던 춘원 이광수,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설산 장덕수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그는 조선 독립의 방편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귀국 후 인촌이 세운 중앙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경석은 3·1운동 모의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주에서 활동하던 목사에게 전달했다. 이어 만주에서 총기 10정을 구입해 귀국하다 체포돼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뒤에도 일제의 감시가 계속되자 인촌과 고하의 권유로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연해주로 떠났다. 그는 연해주에서 동아일보에 기사를 쓰면서 이동휘가 이끌던 고려공산당에 가입했다. 그에게 사상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국내로 돌아와 민족주의 진영에서 주도한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했지만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전향자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사상을 버리자니 그의 이상주의적 열정을 잠재울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식민지 현실과 괴리된 채 이론투쟁에만 몰두하는 사회주의 지도노선을 따를 수도 없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정치적 유폐’이자 ‘경제적 모색’으로서 만주 행이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에 점차 환멸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한 것이 조선 민중의 실질적 삶의 개선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만주에서 간척사업과 고무공장 경영에 치중하면서 정치적 활동과는 담을 쌓았지요.”

그의 정치적 유폐는 광복 후까지 이어진다. 절친했던 인촌과 고하 등이 한민당 참여를 권했지만 그는 ‘한때 사회주의자로서 도의가 아니다’라면서 고사했다. 6·25 전쟁 때는 가족을 피난 보내고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전향자라는 이유로 체포돼 총살형 직전에 탈출했다.

○“과거사 기록은 감정 먼저 빼야”

“아버지가 친일 전향을 강요받지 않았던 이유는 역사의 전면에서 스스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춘원 이광수가 친일로 돌았을 때도 이를 안타까워할 뿐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춘원이 겪어야 했을 엄청난 고통을 이해했으니까요.”

나 교수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과거사 규명 문제에 대해 “과거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감정을 빼야 한다”면서 “친일문제도 시대적 맥락을 쏙 빼놓고 그 행위만을 손가락질하는 것이 오히려 역사의 왜곡이다”고 밝혔다.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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