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재계 선언 말로만 그쳐선 안 된다

  • 입력 2003년 10월 31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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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정치자금 제도를 개선하지 않으면 정치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경련은 SK비자금 사태에 대한 사과의 뜻도 함께 밝혔지만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더 크다는 느낌이다.

물론 불법 정치자금의 1차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많은 기업 총수들이 선거 때가 되면 해외로 몸을 피하는 등 ‘자구수단’을 써 봤지만 갖가지 연줄을 동원한 정치권의 끈질긴 요구를 물리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에 밉보인 기업들이 호된 곤욕을 치르고 심지어 공중분해된 기억이 생생한데, 설령 완곡한 부탁이라도 노골적인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재계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단지 정치권력에 밉보이지 않기 위한 ‘보험금’이라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줄 수 있다. ‘구린 구석’이나 특혜를 얻어낼 생각이 없었다면 회계장부를 조작해 가면서까지 100억원대의 비자금을 만들어 바칠 이유가 없다. 법을 어긴 기업이 SK 하나뿐이라면 재계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만 문제 기업이 더 있다는 단서들이 검찰 수사에서 속속 나오고 있다.

전경련은 “정치자금 논란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투자와 소비를 위축시키고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수사 확대를 반대했으나 설득력이 부족하다. 의혹이 팽배한 상황에서는 적당히 덮는 쪽이 신인도에 더 악영향을 준다. 검찰과 재계가 단기적인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경유착의 질긴 고리를 끊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때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고 대외신인도도 높아진다.

재계가 진정으로 살길은 하나뿐이다. 검찰수사에 적극 협조해 불법 정치자금의 전모가 하루빨리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진실에 대한 고백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반성이 없는 한 국민은 이번 선언 또한 재계가 과거 숱하게 반복했던, 말뿐인 다짐으로 여길 것이다. 불법 정치자금의 전모를 모르고서는 제도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재계 또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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