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가을의 幻'…일탈 꿈꾸는 중년여성의 울렁임

  • 입력 2003년 6월 20일 17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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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채원은 “우리는 타인일 때 서로 끌어안을 수 있고 그 감동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이야기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김채원은 “우리는 타인일 때 서로 끌어안을 수 있고 그 감동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라고 이야기한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가을의 幻/김채원 지음/312쪽 9000원 열림원

‘환(幻)’=허깨비 환상 변하다 홀리다 요술….

소설가 김채원(57)이 겨울과 봄, 여름을 지나 가을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겨울의 환’(1989) 이후 14년 만에 4편의 ‘환(幻)’ 연작을 완성한 것. 마지막 편인 ‘가을의 환’은 이 소설집에서 처음으로 발표되는 작품이다.

‘나’, 중년의 여류 소설가 유진희의 공간이 ‘가을의 환’을 가득 채우고 있다.

10여년 전 어느 날, 낯선 젊은 남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그가 어딘가 끌리는, 귀여운 데가 있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 그와 밤새워 전화하기도 한다. 전화선으로만 이어진 이들은 가면 뒤에 숨어 있다.

‘가면이나 탈로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고자 한다. 가면을 쓰고 현실에 순응하지만 또한 가면 안에서 자신만의 해방된 공간을 가지려 한다.’

전화를 들고 소통하는 그 순간, 사회적 외관인 ‘페르소나’는 자취를 감춘다. 상황에 따라 바꿔 쓸 수 있는 여러 개의 가면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드는 것이다. 나는 또 다른 내가 되고, ‘무언가 내 영역 밖으로 나가 보았다는 그런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남자는 한물 간 서울 압구정동을 떠나 홍익대 앞에서 논다. 그가 요술담요라고 부르는 마리화나, 검은 가죽 재킷, 카페, ‘동경의 밤’ 카페는 그의 존재와 동반한다.

“이 세상에 있는 여자들이 다 내 여자같이 친근하고 좋아.…여자들의 진정한 매력을 빨아먹는 것은 남자로서 진정한 기쁨이지. 아름다운 몸매, 눈빛, 진지한 표정, 이런 것을 잡아먹고 빨아먹으며 살아왔어.”

‘나’는 그가 보낸 비디오테이프를 본다. 그가 살고 있는 집, 조카들, 카페에서 부르는 노래, 어느 여자아이와의 섹스…. TV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나’는 멀리 가서 새로운 만남을 꿈꿀 수 있음을 자각한다. 그러나 삶이란 굳건한 질서 속에 뿌리박힌 것. 먼 데로 간다고 해서 ‘나’란 존재가 달라질 수 있을까.

머뭇거리며 삶과 존재의 본질을 숙고하는 ‘나’에게 남자는 늘 “묻고 싶은 게 많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남자는 ‘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패배감에 젖어 있는 한 중년 여자’의 껍질을 벗고, 내면의 울렁임을 따르고 싶은 바로 ‘나’ 말이다.

‘나’는 질문한다. ‘너란 순전히 내가 만들어낸 아이가 아닐까. 나를 억압하는 것들에서 헤어나기 위해 내 무의식 저 밑, 빛도 들어갈 수 없는 해저 영역의 어떤 것이 너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자유에 대한 신기루를 가차 없이 찾아 나선 한 아이를….’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환은 김채원의 어법으로는 삶과 존재의 실체 없음, 불확실성, 비고정성, 무정형성을 의미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김채원의 환의 서사는 삶의 허약성에 대한 슬픈 확인과 존재의 실체에 대한 의문을 통해 지속된다”고 평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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