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세대 현주소]「독재터널」나오니 「IMF터널」

  • 입력 1998년 4월 19일 21시 16분


《모래시계 세대는 한숨쉰다. 모래알이 한톨 한톨 빠져나가듯 잃어가는 이상과 꿈. 모래 더미가 사라지듯 생활기반마저 무너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80년대 초반에서 중후반사이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 나이는 30대 초반에서 중후반. TV드라마의 제목을 따이른바‘모래시계’세대, 또는 ‘386

세대’(3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중간층. 암울했던 5공시절 거리거리에 ‘독재타도’의 숨가쁜 발소리를 남겼던 주역들. 그러나 이제 IMF시대, 저물녘이면 황량한 빌딩숲 사이 골짜기처럼 파인 골목마다 그들의 한숨이 짙게 깔린다.》

“너는 좋겠다. 잘릴 걱정도 없고….” 며칠전 밤 서울 신촌의 한 돼지갈비집. 오랜만에 소주잔을 나누는 서울 Y고 7회 동창생 4명. K상사 과장인 김모씨(34)가 외무부사무관인 친구에게 잔을 건넨다. 입사후 처음 겪은 대규모 감원. 입사동기중 3명이 떠났다. 외무부 친구를 제외하곤 대부분 비슷한 신세한탄.

“외교관은 정년이 65세까지라며? 아무리 못해도 아프리카 어디 대사 한번 할 거 아냐.” “나도 고시공부나 할 걸.” “대학 땐 고시공부하려면 숨어서 해야 했는데….”

격의없는 친구사이니까 가능한 농담. 하지만 그속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숱한 밤을 새면서도 막상 ‘무엇이 될 것인가’ ‘어떻게 벌어먹을 것인가’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80년대 특유의 분위기에 대한 회한이 섞여 있다.

고교를 차석으로 졸업했다는 전남 여수 출신 정모씨(36·S사 과장). “고교졸업 때 막연한 생각은 고시를 봐서 법조인이나 고위공무원이 돼보겠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막상 대학에 와보니 영 분위기가 그게 아닌 겁니다. 학생운동을 아주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지만 ‘광주학살의 원흉한테 녹을 받아 먹을 수는 없다’는 본능적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고시공부하는 친구들도 숨어서 하듯 소문 안내고 공부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고시에 합격한 친구들은 벌써 서기관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만나보면 장래에 국장, 지방기관장 정도까지는 바라보더군요. 하지만 민간기업에선….”

지난해 한 광고회사가 30대 초반 직장인의 의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장이상의 직위까지 승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회사원은 절반도 안됐다.

S그룹 유모과장(33). “아주 독하게 살지 않으면 40대 후반 이후까지 이 직장에 남아있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만약 대학시절에 상황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진출을 위한 준비를 많이 해서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회한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 18일 오후 철쭉이 흐드러지게 붉은 연세대 교정. 출판사에 다니다 최근 실직했다는 박모씨(35·여)가 그들 세대의 회한 한가지를 추가했다.

“우린 인생의 황금기라는 대학시절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했어요. 1, 2학년 때는 사복경찰이 캠퍼스 곳곳에 상주했고 84년 이후 경찰은 철수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최루탄 연기…. 멋 한번 못내봤지요.”

연세대 81학번인 K사 최모과장(36). “싱그러운 낭만은커녕 2학년 때 시위현장에서 잡힌 지 3일만에 강제입영돼 철원의 모부대에서 매맞으며 시간을 죽였지요.”

좀 다른 얘기지만 ‘386세대’는 재테크 문제에 대해서도 억울한 게 있다. 85학번인 잡지사 직원 오모씨(32). “바로 윗세대까지만 해도 목동신시가지니 신도시건설이니 해서 아파트를 분양받아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겼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사회에 나와 내집마련에 관심을 좀 가져볼까 하니 이미 끝물인 거예요. 윗세대는 아파트 청약으로 집값의 상당부분을 ‘벌어들였지만’ 우리 세대는 오로지 개미처럼 월급을 모아 집값을 충당할 수밖에 없어요.”

83학번인 대우그룹 황모대리(34). “90년에 취직해 청약예금을 들었지요. 이제 ‘우선 청약순위’에 들어갈 즈음이 되니까 분양가 자율화로 휴지조각이 돼버리는군요.”

하지만 모래시계 세대의 이같은 한숨이 젊은시절에 대한 후회는 결코 아닌 것 같다. 민주화, 민중, 역사의 진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S신탁 김상근과장(33). “그래도 대학생활을 회상해보면 자랑스럽습니다. 다만 학창시절엔 ‘전투경찰의 직격탄’에 떨고, 이제는 ‘해고와 고용불안의 직격탄’에 시달려야 하는 시대상황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군요.”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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