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728>卷七. 烏江의 슬픈 노래

  • 입력 2006년 3월 30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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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대의 마음 씀씀이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그대가 후덕한 사람임을 알겠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이 말을 타고 싸움터를 내달았으나 그 어떤 말도 이 말과 맞설 수는 없었으며, 또 이 말은 하루에 천리를 닫고도 지칠 줄 몰랐다. 내 차마 난전(亂戰) 가운데 죽게 할 수 없어 이 말을 그대에게 줄 터이니 데려가 잘 보살피라.”

오강(烏江) 정장(亭長)이 목이 메어 대꾸도 못하고 오추마의 고삐를 받자 패왕은 다시 거기까지 따라온 스물여섯 기를 바라보며 결연히 말했다.

“모두 말에서 내려라. 이제 강동 남아의 용맹과 기백을 보여줄 때가 왔다. 각자 큰 칼이나 긴 창을 버리고 짧은 병기를 뽑아 들라. 나를 따라 적진에 뛰어들어 참된 장부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자.”

이 무슨 기이한 감정의 전환과 교차인가. 절망적일 때는 오히려 분발하여 겨우 스물여덟 기로 그 이백 배에 가까운 한군의 포위를 뚫고 나온 패왕이었다. 그런데 재기의 희망이 눈앞에 펼쳐진 오강 나루에서 갑작스레 자신을 내던져 그 불같은 생애를 서둘러 끝맺으려 하고 있다.

자칫 변덕이나 단기(短氣)로 읽힐 수도 있는 패왕의 그 급격한 감정의 변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 탓이 아닌가 싶다. 그때가 되어서야 오히려 명백해진 이전의 패배를 그 도저한 자부심이 선뜻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격렬하고 폭발적인 성품으로 너무 심하게 소모된 패왕의 몸과 마음에 그 돌연한 체념의 원인을 돌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피로와 긴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패왕 스스로 무너져간 것인지 모른다.

더욱 알 수 없기는 거기까지 패왕을 따라온 스물여섯 기(騎)였다. 그들은 모두가 강동의 자제들이었고, 이제 배에 올라 물만 건너면 부모형제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패왕의 끝 모를 군사적 자부심이 그 사이 그들에게도 감염된 것일까. 아니면 조금 전 패왕이 강동의 자제 8천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것은 아무도 없다고 했을 때 이미 결사의 암시에 걸린 것일까. 말에서 내린 그들은 기창(騎槍)이나 철극(鐵戟)같이 크고 긴 무기를 내던지고 저마다 칼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강 언덕에 매여 있는 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산악처럼 우뚝 서 있는 패왕 주위로 모여들었다.

마침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관영의 추격대가 오강 나루에 이르렀다. 추격대의 선두는 패왕과 그를 따르는 스물여섯을 보자 멈칫하며 말을 세웠다. 그리고 한참을 살피다가 그들도 말에서 내려 두꺼운 사람의 장벽을 이루며 멀찍이서 에워쌌다.

패왕을 중심으로 뭉쳐 있는 심상찮은 기세에 눌렸는지 에워싼 한군들이 함성조차 제대로 못 지르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다시 알 수 없는 공수(攻守)의 뒤바뀜이 일어났다.

“가자!”

패왕이 범이 울부짖듯 소리치며 앞장을 서고 결사의 의지로 상기된 스물여섯 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뛰어들자 한동안은 에워싸고 있던 한군이 오히려 밀렸다. 하지만 5천의 한군에 비해 패왕이 이끈 스물여섯은 단병(短兵)으로 맞싸우기에는 너무 적었다. 곧 화톳불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하나 둘 자취 없이 스러지고 패왕 혼자만 남았다.

글 이문열

연재소설 ‘이문열이 쓰는 초한지-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는 내일자(3월 31일자)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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