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우리거리」읽기]얄따란 보도블록「천박한 화장」

  • 입력 1999년 3월 8일 19시 43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는 어떤 화장부터 시작을 할까. 다짜고짜 립스틱부터 바르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날의 탄력 있던 피부를 회상하며 먼저 기초화장을 시작할 것이다. 마사지도 하고 화운데이션도 바를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립스틱도 짙게 바르고 눈두덩에 색연필도 가져갈 것이다.

자동차에도 피부가 있다. 복잡한 모양의 기계장치가 속에 들어 있어도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매끈한 철판과 유리라는 피부뿐이다. 이제 유수한 이름의 유럽자동차와 경제성으로 대변되는 국산 자동차를 비교해보자. 유럽 자동차들이 갖는 탄력 있는 긴장감은 그 강판의 두께, 강도에서 나온다. 아무리 유행을 선도하는 모양이어도 피부에 비춰지고 반사되는 영상이 이리저리 일그러져 있을 때 자동차의 품위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차이는 색조화장의 차이가 아니다. 피부의 팽팽함, 기초화장의 차이다.

우리 도시에 있는 건물의 피부를 보자. 그 피부는 돌이 되기도 하고, 금속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유리가 되기도 한다. 건물의 피부는 얇아지기만 해 왔다. 얇은 피부는 경제적이다. 쓸 수 있는 바닥면적도 넓어지고 하중도 줄어든다. 건물의 피부는 더 얇아지기 어려울 만큼 얇아졌다. 그러나 그 피부는 경제성을 얻은 대신 탄력을 잃었다.

금속과 유리는 거리 풍경을 비춰주기도 하는 재료들. 동전 한 닢 두께에 지나지 않는 피부에 비친 풍경은 이리저리 일그러진다. 아무리 울긋불긋한 옷을 차려 입고 짙은 화장을 했어도 어릴 때 입은 깊은 화상을 간직한 것 같다. 건물의 로비에, 지하철역에 붙여 놓은 얇은 철판들은 어디를 얼마나 얻어맞았는지를 굳이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듯 우글쭈글하다. 얼마나 싸구려인지 기어이 실토를 하겠다는 듯 하다. 한국의 도시를 대표한다는 서울특별시, 그 시청의 정문부터 그런 모양이다. 서울시청의 정문에는 발이 닿는 부분에 번쩍이는 황동판을 댔다. 서울시청의 정문이 중국음식 배달통보다 더 일그러져있으니 다른 건물들이 다른들 얼마나 다를까.

피부는 거리에도 있다. 포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이다. 차도에는 아스팔트, 인도에는 보도블럭이라는 피부가 덮인다. 인도에는 가끔 인심을 쓰고 돌이 깔리기도 한다. 인심을 써도 많이 쓰지는 않는다. 가장 얇은 돌이 동원된다.

거리에 화장을 할 때는 기초부터 고려해야 한다. 피하지방도 확인해야 한다. 때에 따라 뼈를 깎아내는 성형수술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거리에서 기초는 거의 언제나 무시되었다. 비가 오고 온도가 오르내림에 따라 다져지지 않은 지반은 움직였다. 밑의 흙이 움직였으니 얇기만 한 돌은 곧 금이 가고 깨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누더기가 되었다. 지진도 없는 나라의 거리가 지진이 쓸고 간 거리 만큼이나 울퉁불퉁하고 황폐해졌다.

복지사회를 이루자는 목소리가 높아가면서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늘어갔다. 거리에 점자블럭도 깔았다. 그러나 거칠기만 한 거리의 피부는 여전히 바퀴에게도 맹인지팡이에게도 도전이고 함정이다. 장애인의 어려움을 체험해보자고 굳이 구하기도 힘든 휠체어를 구하러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카트를 끌고 시장을 한번 다녀오면 된다. 유모차를 밀고 우체국에 한번 다녀오면 된다. 간신히 재운 꼬마를 깨우지 않고 돌아오려면 유모차를 들고 오는 수밖에 없다. 팽팽한 피부가 얼마나 그리운지 그 때 알게 된다.

우리 거리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해 본 적이 있던가. 빨리 공사비를 받고 떠나자는 생각만 머리 속에 우글거리는 이들이 공사를 하겠다고 거리에 나섰다. 보도블록을 깔다보니 곳곳의 장애물에 부딪쳤다. 곳곳에 가로수, 가로등, 맨홀뚜껑이 있었다. 돌을 잘라서 깔아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생각나는 대로 망치를 집었다. 매끈하게 깨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깔았다. 남는 공간은 콘크리트로 대강 메웠다. 상수도공사, 가스공사, 지중선로매설공사가 차례로, 그리고 따로 진행될 텐데 꼼꼼히 마무리함이 의미는 있겠는가.

콘크리트는 반죽이라는 점에서 밀가루와 같은 재료. 배합의 비례에 성패의 묘수가 있다. 시멘트가 많으면 수축이 심하고 물이 많으면 강도가 약하다. 그러나 공사장 아저씨들은 생각나는 대로 반죽을 했다. 경험도 없으면서 계량컵을 쓰지 않는 주방장처럼 시멘트 포대를 뜯고 물을 부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사가 많은 우리 거리 구석구석에는 그런 밀가루 반죽이 채워졌다. 밀가루반죽이 거짓말을 하던가. 공사한지 한 해만에 보도는 깨지고 콘크리트는 갈라졌다. 거리에는 이리저리 벗겨진 상흔이 가득했다. 깨진 조각은 먼지가 되어 공기 중에 떠돌든지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섣부른 주방장은 도시에 가득했고 거리의 어느 구석이나 흉물이 되었다. 그런 주방장이 빚은 밀가루 빵을 먹고 자란 우리 거리의 피부에 윤기가 있을 리 없다.

명동입구의 일은증권 사옥은 도시에 큰 선심을 썼다. 을지로입구 역에서 내린 시민들을 위해 1층을 비워놓았다. 건물의 중간, 10층에는 누구나 들어가서 쉴 수 있는 하늘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자랑스럽게 표지판에 쓰인 대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휴식과 만남의 광장’이다. 보도에는 손바닥만한 잔돌을 깔았으니 깨질 걱정도 없다. 무대에 세워 갈채를 보내줄 만 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작 자신의 피부관리는 소홀했다. 도저히 무대에 세울 수가 없었다. 가장 얇은 유리가 끼워진 외관은 건너편의 도시를 일그러진 모자이크로 비치면서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나마 십자로에 있다고 건물을 비틀어놓아서 화상 입은 얼굴은 더 잘 드러난다. 마음씨가 좋다고 건물이 거리에 나서는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건물도 자신의 외모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매끈한 피부가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다. 이십대 초반의 피부를 갖기 위해서는 건물에 두툼한 재료를 쓰는 투자도 필요하다. 도시의 낯은 두꺼울수록 좋다. 두툼한 재료, 꼼꼼한 마무리가 주는 품위는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아도 오래가는 향기와 같다. 우리 거리의 피부는 지금 사춘기인가 갱년기인가.

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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