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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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12∼1996)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화자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내리는 눈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도, 사랑하니까 눈이 온다는 이 이상한 말은 읽는 가슴을 울린다. 그리움이 얼마나 깊으면 그걸 알고 하늘에서 눈을 다 내려줄까 하고. 사랑에 빠진 자는 헛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 말들은 늘 감동스럽다. 그리고 시인들은 수천 년간 이걸 대필해 왔다.

가난한 청년과 아름다운 아가씨. 연애시에 흔한 상황이다. 그에 어울리게 둘은 떨어져 있고, 눈 때문에 길도 끊겼다. 뭘 해볼 수가 없다. 사랑은,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태다. 그러니 술잔을 기울이며 상상의 나래나 펴볼 수밖에. 가난한 그는 고작 그녀와 ‘출출이’(뱁새) 우는 먼 ‘마가리’(오막살이)로 가려 한다. 굶어도 우린 행복할 거야…. 상상은 달콤하다. 자유니까.

그러다 이 사람은 어느덧 취한 것 같다. 상상 속의 연인이 벌써 와 있다고 착각하는 걸 보면. 더러운 세상은 버리고 나귀 방울 딸랑이며 산골로 떠나자는 젖은 목소리는 그래서, 그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도 이럴 때가 있지 않은가. 이깟 세상 따위가 다 뭐라고….

사랑을 빙자해서 현실을 떠나려 하지만 끝내 산골로는 못 갈, 이 사람을 우리는 안다. 막힌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이래본 적이 있다. 상상은 순간이나마 사랑의 외로움을 이기게 해주니까. 인간을 살게 해주니까. 날이 밝으면, 그는 다시 살기 위해 세상에 나설 것이다. ‘더러워’도 지금 여기가 우리 자리다. 세상이 정말 더러워지는 건 우리가 세상을 버릴 때이다.

이영광 시인
#백석#나타샤#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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