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비의 못 전한 뉴스]“아빠는 아직도 널…” 26년 째 딸 찾아다니는 정원식 씨의 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5일 14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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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붐비는 4호선 전동차 안. 승객들 사이로 어색한 듯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나이든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의 왼손에는 전단 수십 장이 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승객들에게 그는 거칠고 주름진 손을 내밀며 전단 한 장을 건넸다. 전단에는 26년 전 실종된 딸 정유리 양(실종 당시 11세)의 인적사항이 담겨있다.

“제 딸을 보신 분이 있다면….”

떨리는 목소리로 전단을 돌리는 사람은 정원식 씨(69)다. 26년 째 실종된 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 정 씨를 만난 건 세계실종아동의 날(25일)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정 씨는 “남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전단을 돌리는 일 뿐”이라고 말했다.

25일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 4월 기준 실종 또는 유괴돼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18세 미만 아동의 수는 118명이다. 이들의 부모들은 정 씨처럼 전단과 현수막 전광판 등에 실종 아동의 인적사항과 발생 당시 상황을 담아 시민들의 제보를 기다린다. 보건복지부 등 정부기관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등 민간단체도 실종 아동 찾기 활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실종 전단’ 배포에는 “뭐라도 직접 하겠다”는 부모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기자는 이날 정 씨와 함께 거리로 나서 전단을 함께 돌렸다. 시민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차가웠다.

“됐어요”, “바빠요”

싸늘한 말이 되돌아왔다. 억지로 받아든 한 시민은 “수십 년 전 잃어버린 애를 어떻게 찾는다고…”라며 혼잣말을 내뱉고 지나갔다.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전단을 돌리는 건 불법이다. 그래도 정 씨가 지하철에 오르는 건 거리에서보다 받아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 씨는 “동네에 현수막을 걸면 다음 날 ‘외관상 보기 안좋다’는 이유로 철거돼있다. 아파트 단지 내 게시판에 전단을 붙이면 그 위에 온갖 배달음식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그나마 지하철 승객들이 낫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정 씨를 보고 “불법 전단을 돌려 불편하다”며 신고하는 승객도 있다. 전동차 안에서 불법으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내 영업에 방해된다”며 정 씨를 내쫓은 일도 있다. 이날도 상황은 비슷했다. 시민들은 실종 전단을 돌리느라 승객 사이로 비집고 이동하는 정 씨를 ‘민폐 승객’으로 바라봤다. “한 번만 봐주세요”라는 정 씨의 호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마트폰을 보거나 고개를 흔들며 아예 받기를 거부하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시민은 받아든 전단을 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또 다른 시민은 색종이 접듯 꼬깃꼬깃 접어 전동차 자리 틈새에 끼워 넣었다.

정 씨 가방엔 실종 전단 2500여 장이 들어있다. 가방 무게도 5kg이 넘는다. 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딸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 탓에 정 씨 다리는 성한 곳이 없다. 이날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서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밀치고 나가는 승객들 탓에 정 씨는 맥없이 넘어졌다. 전단 수십 장이 바닥에 흩어졌다. 승객 1명이 정 씨를 도와 전단을 함께 주웠다.

정 씨의 딸 유리 양은 11살이었던 1991년 8월 5일 동네에서 사촌 동생들과 놀다 홀연히 사라졌다. 당시 함께 놀던 5살 동생이 “아줌마, 아저씨들이 언니를 데려갔다”는 말이 유일한 목격 증언이었다. 유괴 가능성에 집 전화에 감청 장비를 설치하고 경찰이 수색에 나섰지만 헛수고였다. 정 씨가 “아빠가 직접 찾겠다”며 길을 나선 게 벌써 26년째다. 사진과 닮은 어린 여자 아이를 집창촌에서 봤다는 제보에 청량리와 미아리 등 전국 집창촌을 모두 뒤졌지만 딸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실종 아동 118명의 부모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실종 전단 배포, 현수막 게재 등 실종된 자식을 찾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일부 부모는 “사회적 무관심과 냉대에 지쳤다”며 찾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실종 아동을 둔 부모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는 관련 유관기관의 비협조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가족들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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