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年1만건 재판… 조선은 동방소송지국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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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한국고문서학회 지음/360쪽·1만8000원/역사비평사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대청마루가 곧 법정이었다. 법관인 원님은 마루 위에 앉고 원고와 피고는 마당에 꿇어앉았다. 사진은 1890년대의 재판 모습이지만 조선 전기에 정립된 재판 제도가 대부분 조선 말기까지 유지됐으니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재판 풍경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대청마루가 곧 법정이었다. 법관인 원님은 마루 위에 앉고 원고와 피고는 마당에 꿇어앉았다. 사진은 1890년대의 재판 모습이지만 조선 전기에 정립된 재판 제도가 대부분 조선 말기까지 유지됐으니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재판 풍경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비평사 제공
“사위 장응필은 내 딸이 죽을병을 얻어 고생할 때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딸에게) 죽을 날이 임박해 오자 예천 집에 있던 딸의 재물을 모두 자기 노(奴)의 집으로 옮겼고… (장모인) 내가 몸져 누워 신음할 때도 한번 와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에 이미 허급(許給·달라는 대로 허락하여 줌)한 노비라 하더라도 모두 빼앗아도 되겠지만… 딸의 봉사조(奉祀條·제사를 지내기 위해 떼어 놓은 재산)로 딸의 신노비(新奴婢·혼인할 때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노비) 등을 허급하니….”

1535년 안계종이라는 사람의 부인인 의성 김씨가 남긴 재산 상속 문서다. 죽을병에 걸린 딸의 재물만 탐하고 아픈 장모에겐 문안도 하지 않는 사위에 대한 원망이 담겼다. 그럼에도 딸의 제사를 지내 달라는 명목으로 재산 일부를 상속했다. 조선시대에는 처가와 사위 사이에 상속 분쟁이 잦았다. 딸이 죽은 뒤 소원해진 사위에게 처가가 이미 상속한 재산을 돌려 달라고 하거나 사위가 처가에서 받은 상속이 불합리하다며 소송을 하기도 했다.

분쟁과 소송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드러난다. 조선인들은 수령을 찾아가 재판을 요청하는 문서인 소지(所志)를 제출했다. 소지에는 소송뿐 아니라 각종 민원과 다양한 갈등이 담겨 있다. 한국고문서학회의 학자 12명이 쓴 이 책은 조선시대 소송에 대해 쉽게 설명하고 소지에 나타난 사례를 통해 당시 사회를 살핀다.

책에 따르면 조선 초기 위정자들은 송사(訟事)가 없는 무송(無訟)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소송이 유교 공동체의 평화로운 사회질서를 해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실록에 기록된 소송 건수를 보면 조선은 저자들 말대로 ‘동방소송지국’이라 할 만하다. 연간 소송 건수가 적게는 666건(1400년), 많게는 1만2797건(1414년)에 이르는데 15, 16세기 인구가 600만∼7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나다. 토지, 노비, 채무에 관한 민사소송이 늘자 위정자들은 차츰 무송 대신 소송을 공정하게 처리하기를 추구했다.

조선 후기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거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심청처럼 자신이나 가족을 파는 자매(自賣)가 빈번했다. 자매를 통해 노비나 고공(雇工·양인 신분으로 주인에게 예속되어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었다. 1837년 득열이라는 16세 소녀가 자신을 팔기 위해 관청에 올린 소지에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겼다. “늙은 아버지를 보양할 길이 없어 슬프고 불쌍한 깊은 사정을 사또께 읍소하니 통촉하신 후 몸을 팔아 구활하라는 뜻으로 입지(立旨)를 작성해 주셔서 제 한 몸이 아버지의 아사를 좌시하지 않도록 적선하는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이후 득열은 관청에서 보증서인 입지를 발급받아 자신을 팔았다.

책에는 조선의 소송과 풍속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이 많다. 소송 기간이 길어져 농사를 망치지 않도록 추분 이후에서 춘분 이전까지만 재판을 열었다. 또 피고를 ‘척(隻)’이라고 불렀는데, 남에게 원수지지 말라는 뜻으로 쓰이는 ‘척지지 말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조선의 일상#법정에 서다#소송#풍속#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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