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이에게 내 작품이 작은 위안 됐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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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서울서 개인전, ‘쿠사마 야요이’전 갖는 현대미술 거장 구사마 야요이씨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빨강 가발에 빨간 립스틱, 노란색 도트 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담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강렬한 색채가 물결치는 캔버스들과 한 몸을 이룬 듯한 작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작품처럼 다가왔다.
물방울과 그물망 패턴이 집적, 증식하는 회화 조각 설치작품 등을 통해 세계 미술계의 호평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작가, 그는 바로 현대미술 거장인 구사마 야요이 씨(85)였다. 》       
        

물방울무늬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일본 작가 구사마 야요이 씨. 어린 시절부터 환각이 보이는 정신병 증세로 고통받은 작가는 예술 속에서 자기 치유의 길을 찾아냈다. 요즘도 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실에 틀어박혀 치열하게 그림을 그린다. Area Park 제공
물방울무늬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일본 작가 구사마 야요이 씨. 어린 시절부터 환각이 보이는 정신병 증세로 고통받은 작가는 예술 속에서 자기 치유의 길을 찾아냈다. 요즘도 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실에 틀어박혀 치열하게 그림을 그린다. Area Park 제공
18일 오후 3시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 구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한 스튜디오에서 구사마 씨를 만났다. 만화 주인공처럼 커다란 눈에 통통한 볼살을 가진 작가에게선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생기와 활력이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강박증을 앓은 작가는 큰길 건너편 정신병원에서 이곳으로 날마다 출퇴근한다. 1977년 이후 그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생활방식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3층 작업실엔 층층마다 대작들이 빼곡히 들어차 빈 공간이 별로 없다. 작업 중인 대형 캔버스를 올려놓은 사각형 탁자 옆에 무릎을 거의 맞대고 마주 앉았다.

다음 달 4일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하는 개인전을 앞둔 작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제부터 많이 기다렸어요. 설레서 잠도 잘 못 잤습니다. 한국을 워낙 좋아하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유명한 것도 알아요.” 인터뷰와 사진촬영에 까다롭다는 소문과는 달리 그는 대화 내내 외할머니처럼 다정하고 따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7년 미국에 가서 이듬해 뉴욕에 정착했다. 액션 페인팅이 주류였던 60년대, 권위에 도전하는 도발적 퍼포먼스와 독특한 작품들은 앤디 워홀, 도널드 저드 등이 감탄할 정도로 참신함을 인정받았다.

“그 시기 나는 구사마 야요이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팝아트도 미니멀리즘도 아니고 오로지 나 자신의 독창적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

―정신 병력, 아시아 출신, 여성작가라는 3중 장애물에 가난과 언어 문제까지 어떻게 극복했나.

“인류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치고 싶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외의 것은 다 무시하고 작품에 전력을 다했다. 목숨 걸고 하루하루를 나 자신과의 싸움에 바쳤다.”

―물방울의 영감은 어디서 왔나.

“어린 시절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에서 물방울무늬가 보였다. 벽과 천장, 엄마 얼굴에도 물방울이 겹쳐 보였다.”

환각에서 본 형태를 그리기 시작한 작업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일찍부터 자신을 괴롭힌 불운과 불행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담대한 용기로 광기를 눈부신 예술로 꽃피운 것이다.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물방울과 그물망의 무한 증식, 확장, 반복은 작가를 대표하는 작업으로 다양하게 변주됐고 거울과 조명을 만나며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 왔다.

“내 작업의 변화는 언제나 내적 상황에서 온 불가피한 결과”라고 강조하는 작가는 60여 년을 특정한 예술 경향,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미술뿐 아니라 영화 뮤지컬 디자인 패션 문학 등 다방면으로 영역을 넓힌 점도 돋보인다. 자전적 요소를 기반으로 한 작업은 오늘날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 왔고 다음 생에도 예술가로 태어나고 싶다. 사는 동안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하기 위해 영원히 나 자신의 아름다운 세계를 표현하고 인류와 더불어 그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다.”

그 꿈을 향해 가는 작가의 하루 일과는 단순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또 열심히 그린다. 집에 가선 많은 책을 읽는다.”

초기의 그로테스크한 작업은 세월이 흐르면서 밝고 긍정적 에너지가 충만한 작업으로 변화했다. 예술로 자기 마음의 병을 치유했듯이, 자신의 작품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그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내 작품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술가로서 나의 긍지이자 명예라고 생각한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삶을 지키려는 노력, 그리고 예술을 향한 그의 도전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구사마 씨의 좌우명이 그 답을 들려준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 구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나가노 미쓰모토 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와 사물에 물방울무늬가 겹쳐 보이는 정신 질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열 살 무렵부터 자신의 환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작가는 교토시립예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1952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28세 때 미국행을 선택한 그는 반전 메시지를 담은 누드 퍼포먼스, 물방울 패턴 그림, 남근 형태를 모티브로 한 부드러운 천 조각 등을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건강 악화로 1973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국제무대에서 멀어졌다가 1989년 뉴욕 전시를 계기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작가로 참여했고 1998년 로스앤젤레스주립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 등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2011∼2012년 런던 테이트,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휘트니미술관 등을 순회하는 회고전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확고히 다졌다. 같은 해 패션 브랜드 루이뷔통과의 협업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다.

도쿄=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쿠사마 야요이#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물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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