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임기만료 동시에 뒷방으로… 액자에 갇힌 전직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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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문화’ 변화가 필요해

청와대 세종전실에 진열된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박정희, 윤보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화(왼쪽부터)가 보인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과 동시에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초야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임기 중 과오를 짊어지고 뒷방에 물러앉은 모습이 액자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동아일보DB
청와대 세종전실에 진열된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 이명박,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박정희, 윤보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초상화(왼쪽부터)가 보인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과 동시에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초야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임기 중 과오를 짊어지고 뒷방에 물러앉은 모습이 액자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동아일보DB
#1. 2013년 12월 10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FNB스타디움. 인류 역사상 가장 주목받은 장례식이 열렸다. ‘용서와 화해’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추도하기 위해 100여 개국의 전현직 정상이 총집결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조문외교’가 펼쳐진 그곳에 박근혜 대통령은 정홍원 국무총리를 특사로 보냈다. 만약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특사로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연설을 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각국 정상과 친분이 두텁다. 각국 정상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 정 총리보다는 이 전 대통령이 적임자였다는 얘기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당(黨)도, 노선도 다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를 대통령 전용기(에어포스 원)에 태워 함께 남아공으로 왔다.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다.

#2. 2009년 8월 10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국민의 이목은 전직 대통령들에게 쏠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중환자실에 입원한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병문안하기 위해 이 병원을 찾았다. 한국 야당사의 두 거목은 DJ가 서거하기 8일 전에야 ‘역사적 화해’를 했다. 50년 가까이 이어져온 정치적 구원(舊怨)의 매듭을 풀었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공식석상에 서는 모습은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DJ 정부 초기 YS 주변 인사에 대한 사정 바람이 거세게 일자 YS는 DJ를 향해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전현직 대통령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서거한 뒤 이번에는 DJ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YS는 다시 DJ를 향해 “그 입을 닫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전현직 대통령들이 얽히고설켜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품격도 함께 추락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현재까지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적이 없다. 그나마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은 4명뿐이다. 그중 노태우 전 대통령과 YS는 건강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만 초대하는 것도 청와대로선 부담일 것이다. 전 전 대통령과는 미납 추징금 문제로 관계가 편치 않다. 이 전 대통령과는 오랜 기간 여권 내 세력 다툼을 벌여 왔다.

박 대통령뿐 아니라 역대 모든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과 거리를 뒀다. 수많은 과오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역사 속으로 퇴장한 전직 대통령들을 가까이하는 게 정치적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은 퇴임과 동시에 ‘뒷방 신세’다. 문제는 그의 퇴장으로 소중한 국정경험도 함께 묻힌다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 경험은 국가의 자산이다. 하지만 그 자산은 다시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시계는 5년마다 리셋(초기화)된다. 교훈도, 반성도, 발전도 없이….

전직 대통령 롤모델이 없는 한국

2008년 1월 초 정국은 살얼음판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설전을 주고받았다. 노 대통령은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점령군’ 행세를 한다며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같은 달 4일 경제계 신년 인사회 자리에서다. 노 대통령은 “안 그래도 초라한 뒷모습인데, 요새는 (인수위로부터) 소금까지 날아오는 것 같다. 소금을 더 뿌리지 않으면 나도 오늘로 이야기를 그만할 것이고, 앞으로 계속 소금 뿌리면 내가 깨지고 상처 입겠지만 계속 해보자”고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총장)은 노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그러자 이 대통령 당선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가 이런 논평을 내라고 했어! 야, 너 앞으로 마이크 잡지 마!” 이 총장은 “그날이 이 대통령에게 가장 심하게 욕을 먹은 날”이라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전직 대통령을 최대한 예우하라고 거듭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니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상반기 노 전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물 무단 반출 논란이 커지면서 양측은 다시 충돌했다. 노 전 대통령은 누구보다 퇴임 이후 활동에 의욕을 보였다.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며 ‘민주주의 2.0’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는 그를 보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김경수 전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일종의 하방(下放)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처음 시민운동을 할 때의 마음으로 시민의 일상적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듬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전직 대통령상(像)을 만드는 일은 다시 5년 뒤로 미뤄졌다.

이 전 대통령은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 회고록을 발간한다. 금융위기 극복 과정과 남북 정상회담 추진 비화 등을 회고록에 담았다. 이 전 대통령의 참모들은 이명박 정부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위해 현안마다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합동 워크숍도 두 번이나 열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이 발간되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녹색성장과 같은 이명박 정부의 브랜드 정책을 적극 알리고, 자신이 만든 마이스터고(맞춤형 전문 직업교육 고교) 등을 찾아 강연을 할 계획이다. 이동관 총장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는 행보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직 대통령의 롤모델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까지 ‘리셋’만 반복할 건가

이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각국의 초청을 받아 외국에만 아홉 번 다녀왔다. 지난해 10월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쯔엉떤상 베트남 국가주석은 이 전 대통령과 함께 베트남을 찾은 중소기업인 20여 명을 모두 주석궁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술이 몇 잔 돌자 이 전 대통령은 쯔엉떤상 주석의 손목을 잡아끌어 중소기업인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어 달라고 요청했다. 주석은 기꺼이 응했다. 그 사진 한 장은 베트남에서 가장 확실한 신원보증이다. 전직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 성과인 셈이다.

퇴임 이후에도 이 전 대통령을 보좌하고 있는 임재현 전 대통령부속실장은 “전직은 현직에 비해 말이나 행동이 훨씬 자유롭다”며 “외교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현직 대통령을 도와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상을 새롭게 만들려면 현직 대통령이 활동 영역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현직 대통령 중 누군가는 전직 대통령의 국정경험이 의미 없이 사장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안정적 지지층을 확보한 박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힌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이 전 대통령의 녹색성장을 창조경제와 연결했다면 훨씬 구체적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전직 대통령이 갖고 있는 자산을 잘 발굴해 국정운영에 활용하면 그것이 곧 통합이고 소통”이라고 강조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 소장은 “성공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실패학”이라며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왜 실패했는지 연구해야 한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전직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egija@donga.com·이현수 기자   
#임기만료#전직 대통령#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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